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허 열 웅
내 고향은 차령산맥 능선에 솟아있는 칠갑산 골짜기다. 천수답 논에 쟁기질하던 아버지와 콩밭 매던 어머니가 살던 마을. 육 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나는 위로 누님이 세 분이나 있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초가삼간의 섶 울타리 사립문이 항상 비스듬히 열려 있는 마을 꼭대기 집이었다. 꾸불텅한 늙은 대추나무가 마당가에 서 있고 월하감나무가 뒤꼍에서 지붕에 기대어 해 걸이로 주렁주렁 열렸다. 봄이면 안마당엔 병아리가 종종 거리고 여름엔 멍석 깔고 저녁을 먹을라치면 매캐한 모깃불 연기에 짜낸 눈물이 숟가락에 떨어져 밥의 간을 맞추기도 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정지용 시인의 ‘향수’ 일부)
정지용 시인은 나보다 40여 년 먼저 태어나신 분이다. 시대의 변화가 거의 멈춰있던 시절이라서 함께 살아온 정서를 느끼는 시가 많아 동감하는 편이다. 지난 5월 16일 서울역에서 옥천역 까지 특별 운영하는 향수열차에 탑승했다. <제 28회 지용제>에 초대받고 고은. 유자효, 신달자. 문태준 시인과 이번에 지용문학상을 받는 이근배 시인 등과 한 칸에 타고 보니 축제에 가는 참가자가 4백 명이 넘어 긴 차량이 꼬리를 물었다. 그 동안 발표되지 못했던 시를 발굴해 함께 엮은 새로운 시집을 받아들어 읽기 시작했다. 여러 편의 시에서 고향 냄새가 물씬 풍겨와 정지용의 고향 옥천이 아니라 내 고향 청양으로 가고 있다는 환상에 잠시 젖어 들기도 했다.
정지용은 한 때 ‘금서禁書의 시인’ 이었다. 그는 28년간 꿈길에서조차 우리에게 잊혀져 있었다. 태어난 조국이 힘이 없어 식민지로 억압받다가 남의 도움으로 해방이 되었지만 도움을 준 빌미로 좁은 땅덩이조차 이념의 선을 그어놓고 세력다툼을 했다. 그는 6,25 전쟁 때 강제 납북돼 사망했지만 해방 직후 좌파 문인단체에 잠시 가입한 전력 때문에 월북자로 낙인찍혔다. 그의 시를 읽으면 사상이 불순한 것으로 몰려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1988년 정부의 납, 월북 작가 해금조치 이후에야 시에 곡을 붙인 <향수>는 아무데서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되었고 시집을 마음 놓고 읽을 수 있었다.
정지용은 ‘한국근대 시의 아버지’ 로 꼽혀왔다. 김지하 시인은 그를 가리켜 이성과 감성, 영성靈性을 통합한 예술가라고 말했다. 그가 쓴 <흰 그늘의 미학에서> ‘빛을 품은 어둠, 뭔가 안에서 큰 외침을 가지고 있는 듯 하면서도 자기가 애써 억누르려고 있는 침묵이 바로 흰 그늘’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선구자로 정지용을 꼽았다. 어느 평론가는 ’20세기 한국의 시인 가운데서 우리말의 발굴과 조직과 세련에서 가장 세심하게 공들여서 독자를 황홀하게 한 최초의 시인이라고 평했다.
새벽에 출발한 관계로 일찍 도착하여 처음 들린 곳이 ‘장계관광지’로 대청호수 변에 조성해 놓은 공원이었다. 정지용 시인을 비롯한 많은 시인들의 시가 돌이나 현판 등에 새겨져 있었다. 수천 평이 넘는 넓은 터에 꾸며 놓은 관광지가 도심과 멀리 떨어져 있어 찾는 사람이 없었다. 주변은 썰렁했고 위락시설들은 모두 철거를 해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현대에 이르러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의 생가를 복원해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고 있지만 그 규모를 크고 호화롭게 하여 옛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 많다.
유명한<신곡 神曲>을 쓴 단테나 <전쟁과 평화>의 톨스토이는 그들이 살던 집 그대로 검소하게 보존하여 옛 정취를 느끼게 했다. 20여 년 전에 방문했던 이효석 생가의 낡은 함석집 벽에는 녹슨 농기구들이 걸려 있어 아득한 향수가 풍겨왔다. 그 후 다시 찾았을 때에는 뻔쩍 뻔쩍하는 기와집으로 완전히 변해 있어 실망하고 말았다. 조정래 나 최명희의 궁전 같은 문학관과 비교되는 순천문학관(김승옥, 정채봉)의 초가삼간의 간소한 전시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꾸밈이었다.
고향을 사랑했던 작가들은 자기 고향을 배경으로 많은 글을 썼다. 김유정은 고향 춘천을, 이태준은 철원, 박경리는 통영, 최명희는 남원을 무대로 설정했다. 예이츠는 아일랜드 더블린, ‘오르한 파묵’은 터키의 이스탄불, 헤밍웨이는 쿠바 해변을 배경으로 소설을 발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유명한 방송작가 김수현은 고향 청주를 배경으로 은퇴작을 쓰겠다고 한다. 박범신은 고향 논산에 내려가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부모님 산소가 고향에 있어 일 년에 두 번쯤 찾게 되는데 가기 전부터 가슴이 아파온다. 변변한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난 고향, 옛 친구도 거의 없고 먼 친척이나 동네 사람들의 자손들이 대부분 살고 있어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편이다. 내가 태어나서 청소년 시절까지 청순하고 진리 같은 시간을 보낸 꿈속에서 그리던 고향은 낯가림을 하여 쑥스러운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어떤 때는 두 아들과 함께 가서 살던 동네를 방문하면 아무런 감동도 없이 불편해하는 모습을 볼 때 아스팔트만 보고 자라서 고향이 없는 그들이 안타까워진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고향, 보일 듯 잡힐 듯 언제나 눈앞에 아롱거리는 곳, 고향이란 말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곳이 없는 세대나 도시인들에게는 아늑하고 따뜻한 정서가 부족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하던 일이 잘 안 풀릴 때나 새 출발이 필요한 경우 고향을 찾아가 집안 어른들을 찾아뵙고 성묘라도 하던 시절은 이제 먼 이야기가 된 것 같다.
지난 추석 성묫길에는 내가 태어나서 살던 집이 보고 싶어서 좀 떨어진 언덕에서 바라만 봤다. 형태는 많이 변했으나 옛 모습이 아련히 남아 있었다. 동심으로 돌아가 <박인수, 이동원>이 함께 불렀던 노래 향수를 흥얼거리며 한참을 머물다 왔다. 우리 모두의 진정한 고향은 어디일까? 내가 살던 고향을 떠나야만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으리라, 우리는 영원히 돌아 갈 수 없는 그런 무한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옛 모습 복원이 아니라서 잃어버린 고향 입니다.
서울 중심지 쪽에서 살았던 저는 달력에 그려진 논,밭,초가집이나 닭과 병아리가
마당을 돌아 다니는 풍경은 없었읍니다.
마포에서 전차를 타고 종로5가 어디쯤내려 시장통을 돌아 다니던 기억과,마포 샛강에서 강건너 영등포쪽을 바라보면
30촉 전구(다마 라고 불렀음) 불빛이
아른거리던 기억....논밭은 지금의 신촌을 벗어나야 있었던 것으로 신기해 하던 곳입니다. 아~~돌아갈수 없기에 더 그리운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