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은 저녁 6시부터 재미있는 프로를 공설운동장에서 한다고 하면서 테니스 라켓을 집어든다.
양반은 밤운동을, 나는 노래구경을 가야할 판국이다.
엊그제 장사익을 산사음악회에서 본 양반은 장사익 팬이 되어 다른 가수는 안중에도 없나 보다.
그래 오늘도 우리 남해가족과 한바탕 즐겨보는거야. 한통속이 되어 기분전환하는거야.
나홀로 마을에서 나눠준 행운권을 호주머니에 넣은 뒤 물한병 달랑 들고 나선다.
오늘은 남해읍민 체육대회 날,
벌써 낮동안 모든 체육행사가 끝나고
여흥으로 밤무대는 가수들이 대거 참가하여 읍민을 즐겁게 해줄거라고 현철이가 온다고 꼭 봐야 한다는 옆집 아줌마의 귀뜀이다.
들어서니 각설이는 아직도 품바타령을 끝내지 못했고
어김없이 나타나는 장사치들이 대회장에 어지럽다.
평소엔 발도 못디디게 하던 잔디구장도 개방하여 폭신한 잔디의 푸른 향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어 만나는 이 모두 행복해 보인다. 어르신들은 벌써 운동장 중앙을 차지하고 오늘행사후담등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경품추첨을 하고 있었는데 김치냉장고와 동남아 4박5일 여행권만 남았단다.
소음속에서 귀를 쫑긋거려 보았지만 어차피 내 복은 아닌 성 싶다. 수십장의 행운권을 들고서도 하나도 안걸렸다면서 투덜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축들도 제법 눈에 띄어 슬그머니 입가에 웃음이 피어오른다.
근데 나는 달랑 한 장 갖고...확률을 따지면 턱도 없다.
남해읍 봉전마을이 체육행사에 1등을 하였다고 카퍼레이드까지 벌리는 모습이 살갑기만 하다.
서러운 섹스폰의 음조와 흥겨운 리듬을 못이기어 무대위로 뛰어오르는 거나하게 취한 인사도 가끔 출현하여 폭소를 터트리게 하였고 난감한 상황을 유연하게 대처하느라 사회자는 기지로 유머스럽게 제지하는 모습이 차가운 공기속에서도 훈훈하여 따습기만 하다.
예년에는 노래자랑을 하였기에 3개월 전에 오늘을 대비하여 노래신청을 해놓았는데 노래자랑을 안한다니...실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늘은 가수를 초청하여 노래부르는 자리이지 대회가 아니라고 사회자가 누누이 설명하니 너무나 아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음인지 급기야 사회자는 그분을 무대에 세우기도 하였는데 곡조감각이 있는 세련된 아마츄어 가수였다.
문득 에어로빅학원 동지가 거적을 들고 들어온다.
나란히 그 위에 앉아 조금 더 추워오는 한기를 참으며 현철을 기다린다.
진주 란무용학원에서 온 아이들이 미친듯 비틀어 돌아가는 인도춤을 선보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박진석이가 예정에도 없었는데 순천에 왔다가 묶여 왔단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박진석의 "천년을 빌려준다면"을 합창하였다.
박진석은 자신의 씨디를 몇 장 들고 나와서 자신이 노래부를 때 가장 춤을 잘 춘 사람에게 선물로 준다고 유도하니..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금세 무대앞을 채우며 미친 듯 엉덩이를 꼬아제낀다.
광란의 밤은 현철이가 등장하고 그 절정에 달하였다.
열광하는 남해 아주머니들의 극성은 급기야는
"우리집에 재워줄낀께 자고 가이소, 자고가이소!"가 되어버린다.
현철은 우리 할머니들의 프로포즈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고무되어 아미새를 신청한 사회자의 의견을 물리치고
"내마음 별과같이"를 보너스로 더 불러준다.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무대 앞으로 다 뛰어나가니 비교적 앞자리에 앉아있던 우리는 현철이 얼굴도 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대하지 않은 인간춤꾼숲에 가려져 버렸다.
내 곁에 있던 유림동 아줌마는 "앉아라! 안보인다!" 라고 고함을 지르고 악을 썼으나 그 메시지는 곧 소음속에 묻혀 녹아버렸다.
사람들이 현철이 앞으로 몰려간 사이의 공간을 이용하는 틈새꾼도 있었다.
남색 츄리닝을 입고 머리칼이 훌렁 벗겨진 작은 남자가 나와서 미친듯 발레와 유사한 이름모를 춤을 춘다. 이리저리 마음껏 흘러다니며 유연한 몸매를 유감없이 뽐내는 폼이 예사롭지가 않다. 어쨌든 불청객이다. 사람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가락질을 하면서도 현철이 노래를 귀로 들으며 눈은 그 정체불명의 댄서에게 쏠리기도 하였다.
바야흐로 이중 무대가 형성된 것이다.
사회자는 어른들의 흥겨움에 질세라 5살짜리 꼬마 소녀가 무대앞에서 일초도 쉬지 않고 춤을 추는 것이 하 귀여워 데리고 올라와 군수영감의 지갑을 빌려 과자값을 주기도 한다.
코메디로 나선 남씨는 화려한 경력답게 사람들을 웃기는 데는 능구렁이다.
옛날엔 일을 저질러놓고 남자가 미안하다 하면 "책임지라"고 하는게 여자들의 일반적 행태인데 요즘은 "괜찮아유, 누가먹어도 먹을건데요 뭐," 한단다.
군데군데 아주머니 할머니까지도 정신없이 제목도 없는 자신의 춤에 도취되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요리조리 돌려제끼니 점잖은 사람들은 눈돌릴 곳이 많아져버린 셈이다.
동안의 삶의 피로를 오늘밤 축제로 잊으려는 듯 한풀이에 나선 군속처럼 몸과 몸을 부딪치며 홀린듯이 휘돌아가는 팔놀림과 다리떨림이 이미 범속을 넘어서 보여 프로가 따로 없는 듯 하다.
광기어린 남해인의 열기가 이어지는 어느 순간, 사회자는
잠시 부나비처럼 혼을 빼고 요동하는 좌중을 진정을 시킨 뒤, 동쪽하늘을 가리키며 주목할 것을 주문했다.
50여발의 멋진 폭죽이, 푸른 잔디와 붉은 우레탄이 멋스럽게 조화를 이룬 공설운동장에서 남해인의 갈채속에서 밤하늘을 아름답게 아름답게 수놓았다.
남해인들은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보며 탄성을 지르고 박수치고 또 환호하고 박수치고 비명까지 지르면서 하늘로하늘로 퍼져 드디어 블랙홀로 빠져드는 환상의 신기루를 좇아 하나가 되었다.
우리 민족은 가무를 즐기는 민족이다.
그래서 망치소리만 들어도 발목이 장단을 맞추고 바람소리만 들어도 어깨춤을 춘다.
비록 가슴을 치받는 어기찬 한에 숨이 막혀와도 한바탕 춤사위로 다시 고통을 잊으며 내일을 기약해 온 민족....그래서 상황만 되면 충분히 표현의 욕구를 유감없이 드러낼 줄 아는 민족,
그 중에서도 오늘밤같은 여유로 카타르시스할 줄 아는 멋쟁이 우리 남해가족이 너무 좋다.
첫댓글 그 아주머니들 중에 우리 집사람도...... 원체 끼가 많은 사람이라 현철이 하고 악수를 했다고 자는 사람을 깨워 난리를 치니........
하이고! 현철이는 너무 행복에 지쳐 보입디다. 호시탐탐 숨죽이고 있던 연인을이 한꺼번에 출현하여 참았던 그리움을 일시에 토해내니 그 정상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참절처절하였습니다요!.^^
참으로 표현력이 대단 하십니다.구경 하지도 못하였어도 읽는중에 어젯밤 일들이 저절로 머리를 스치게 하네요^^
과찬이십니다. 생각나는 대로 갈긴 것이라 채 퇴고되지 못한 풋글입니다요. 이해바랍니다.
내장산 가기로 한 분들 빠진사유를 알고보니 여기에 간다고들... 그 열정의 시간들이 눈에뵈는듯 하네요... 신바람민족인 우리민족중에도 특히 우리 남해인들의 끼는 최고인듯합니다... 어찌나 잘들 모이고 잘들 노는지 ㅋㅋㅋ 어릴적 외할머니께서 분명히 우는분위기인데도 창으로 길게 노래를 하심서 한탄하시던 모습이 갑자기 생각나네요... 슬픔을 참 듣기좋게 승화시켰던 좋은기억입니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그 속에서 우리 남해 사람들이 좀 끼가 많기는 한가봐. 남 노는 거 못보고 남 일하는 거 못보고 그래서 다들 잘살고 잘먹고 잘자는가봐^^ 이게 잘사는거지 별거가 그장?
할머니랑 아빠 저녁식사는 제게 맡기시고 울엄마 여기에 푹~빠져 계셨군요^^
아글쎄 현철이 연인이 얼마나 많은지 그날 밤에 알았어요.
ㅎㅎㅎ^*^ 강경선 쌤~! 좋은 글 솜씨 덕분에 실감이 절로 납니다. 멀리 앉아서도 그 축제날 밤이 훤~이 보이는듯 하네요. ^*^ 좋은 나날들 속에 늘 건강하시죠? ^^
백단향, 정체를 밝히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