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과 6월의 수선화 언덕, 뉴욕식물원. (이하 사진: 필자 제공)
겨우내 적막했던 식물원이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한다. 방문자 센터에 늘어선 줄은 점점 길어지고, 주차장은 금세 만차가 된다. 아이들이 둘 셋 딸린 가족들도, 단출한 커플들도 시절의 진경을 놓칠세라 분주하다. 혼자 식물원을 찾은 진지한 사진가들도 여럿이다. 사람들은 어느새 광활한 들판을 화사하게 수놓은 백만 송이 꽃 속으로 사라진다. 뉴욕식물원 수선화 언덕(Daffodil Hills)의 봄날 풍경이다.
수선화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구근식물들은 이른 봄에 꽃을 피운다. 햇빛을 두고 다른 식물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무성해진 나뭇잎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기 전에 꽃을 피우고 씨앗을 내고 거기다 내년에 꽃을 피울 양분까지 비축해야 한다. 하루하루가 아쉽다. 그래서 냉기가 채 가시지 않은 흙을 뚫고 불쑥불쑥 꽃이 올라온다. 꽃이 지고 잎이 마르면 이듬해 봄까지 길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뉴욕식물원 수선화 언덕에 펼쳐진 장관도 한 달을 넘기지 못한다. 꽃이 만발하던 수선화 언덕은 평범한 풀밭으로 변한다. 보통 이 시기에 풀을 깎기 시작한다. 식물원 부지 관리는 ‘매니큐어 케어’라고 표현할 정도로 꼼꼼하다. 원칙대로라면, 5월 말의 수선화 언덕은 이미 삭발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풀이 무릎 높이만큼 자라도록 기계를 대지 않는다.
내가 이 정원에서 희열을 느끼는 것은 이때부터다. 백만 송이 수선화가 너울대던 언덕은 잘 여문 풀씨로 덮인 황금 들판으로 바뀐다. 사람들로 분주하던 언덕은 이제 새들의 낙원이다. ‘사르르…’ 바람결에 춤추는 이삭들의 속삭임 속에서 새소리가 넘쳐난다. 철 지난 수선화 언덕을 가로지르는 방문객들에게 새들의 군무는 낯설지만 경이롭다. 새들이 둥지를 틀고 다음 세대를 기르는 동안, 또 풀이 자력으로 씨를 흩어 더 짙고 푸른 초장을 만드는 동안, 인간은 몸이 근질근질한 기계를 거두고 잠시 멈춤에 들어간다. 새들이 떠날 준비를 마치고, 풀씨가 다 날리면 그제야 코끼리만 한 예초기가 초장을 밀고 다닌다. 듬성듬성 바위가 솟아 기계가 닿지 못하는 구간은 정원사들 몫이다. 행여 뱀1) 가족을 칠까, 새 둥지를 밟을까 노심초사한다. 뉴욕 도심 한가운데 방주 같은 이 언덕에서는, 이렇게 사람과 자연이 공존을 훈련한다. ‘백만 송이 수선화’라는 의기양양한 팻말 대신, ‘새들이 사랑한 초원’이라고 써 붙이면 더 좋을 법한, 사람도 동물도 환대를 경험하는 6월의 이 언덕을 나는 사랑한다.
내가 이 정원에서 희열을 느끼는 것은 이때부터다. 백만 송이 수선화가 너울대던 언덕은 잘 여문 풀씨로 덮인 황금 들판으로 바뀐다. 사람들로 분주하던 언덕은 이제 새들의 낙원이다. ‘사르르…’ 바람결에 춤추는 이삭들의 속삭임 속에서 새소리가 넘쳐난다.
두 정원 이야기
스위스에 본사를 둔 고급가구 회사 비트라(Vitra)가 독일에 새로 생산단지를 건설했다. 그 안에 들어선 건축물의 면면은 화려하다. 콘퍼런스 빌딩은 안도 다다오의 작품이며, 자체 소방서 건물은 자하 하디드가 설계했다. 프랭크 게리는 가구디자인 전시관을, 알바루 시자는 생산동을 맡았다. 세계 유명 건축가들의 경연장 같다. 정원도 들어섰다. 이런 곳에 꾸며진 정원이라면 건축물의 위용에 주눅 들지 않는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뜻밖에도 초원을 연상시키는 자연스러운 공간이 빚어졌다. 이 정원은 자연주의 정원의 대가로 알려진 피트 아우돌프가 설계했고, 아우돌프 가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2)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경연구가 고정희 박사는 이곳을 취재한 〈디 차이트〉(Die Zeit)지 기사를 인용해 이 정원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우돌프의 정원은 다른 건축물들과는 사뭇 다르다. 다른 건축물들은 스스로를 뽐내고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아우돌프의 정원은 이들을 다 연결하고 수용한다. 자만심에 가득한 자하 하디드의 건축이나, 조용한 듯 단단하게 막혀 있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도 아우돌프의 정원에 다 담긴다.3)
뉴욕 맨해튼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도시정원 하이라인(The High Line)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수십 년간 버려졌던 고가철도가 아름다운 정원으로 바뀐 후 지금은 뉴욕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2009년 첫 구역이 개방된 이래, 하이라인을 따라 주변 건물의 신축과 리모델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쪽에는 허드슨강이, 맞은편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진 도심 속 공간을 누군들 탐내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일대도 세계 유명 건축가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하이라인을 따라 걷다 보면 자하 하디드나 프랭크 게리와 같은 현대 건축가들 손을 거친 건축물은 물론, 18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맨해튼의 빌딩들이 높이와 디자인을 뽐내며 자신을 드러내는 동안, 이 정원은 그것들을 품어내며 새로운 도시 풍경을 연출한다. 제각각의 건물들이 이 정원과 연결되면서 오히려 조화로운 모습을 보인다. 이곳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생활인과 여행자가 어우러진다. 산업 시대의 잔재와 토종 생태계의 생츄어리가 공간을 공유한다. 이렇듯 하이라인은, 앞서 소개한 비트라 캠퍼스의 아우돌프 가든처럼 자연을 닮은 정원이 얼마나 강력하게 포용과 조화의 힘을 발휘하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이곳에서 다양한 인종들이, 서로 다른 생활양식들이, 그리고 새와 벌과 나비들이 환대를 경험하는 느낌을 즐긴다.
이곳의 북쪽 끝에 다다랐을 때 아직 개발되지 않은 철도 기지 터 속으로 묘한 여운을 남기면서 정원이 사라지는 느낌이 좋았다. 최근 이 철도 기지가 고급 주상복합 단지로 개발되었다. 고즈넉했던 정원이 충분한 완충지대 없이 삭막한 콘크리트 구역으로 갑자기 바뀌는 느낌이 불만스러웠다. 콘크리트 광장의 중심에는 조각이라 불리기엔 너무 거대하고, 건축물로 보기엔 주변 건물에 비해 너무 왜소한 구조물이 서있다. 뉴욕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던 베슬(Vessel)이다. 처음에 이 구조물은 계단을 타고 15층 높이까지 올라가 주변 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개방되었다. 그러나 문명은 이 구조물을 다르게 해석하고 이용했다. 개관 이후 현재까지 네 차례 자살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사고 이후 전면 폐쇄되었다가 최근 1층만 개방하는 것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환대의 정원 끝자리에 위풍당당하게 선 이 구조물은 어쩌다 그 반대 의미를 시사하게 되었을까.
뉴욕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던 베슬(vessel). 그러나 문명은 이 구조물을 다르게 해석하고 이용했다.
사람들과 자연이 어울리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하이라인과, 고통스러웠던 삶을 포기하는 데 사용된 이 구조물이 만들어내는 극단적인 대조가 이 광장을 더욱 불편하게 만든다. 허드슨강을 향해 노아의 방주처럼 서있는 베슬은 슬프게도 폐쇄성과 배타성의 상징으로 내게 각인되었다. 맨해튼의 고급 주상복합 단지 한가운데서 위용을 자랑하는 이 구조물은 여전히 관광객들로 넘쳐나지만, 나그네가 쉴 곳도 나비가 앉을 곳도 마땅찮은 그곳은 슬프게도 환대의 정신에서 멀어진 도시의 대형교회들을 연상케 한다.
정원에서 길을 잃다
미국으로 건너와 주택을 구입해서 살기 시작하면서 홈 가드너의 꿈에 부풀었다. 대단히 생태적이고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겠다는 의욕이 넘쳤다. 하지만 첫 3년 동안은 뒷마당 가장자리를 뒤덮은 노박덩굴, 괴불나무 등의 침입종을 제거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그 뒤에는 훨씬 길고 처절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잔디를 관리하는 반생태적 관행과 이를 강요하는 사회적 압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잎이 짧고 지면에 낮게 퍼지는 우리나라 잔디와는 달리, 미국 잔디는 유라시아나 아메리카 대륙의 초원에 살던 키 큰 풀을 개량한 것들이다. 특히 켄터키 블루그래스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도 유통되는 잔디 품종은 질감이 부드럽고 양탄자처럼 촘촘하게 덮어주기 때문에 북미와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어왔다. 하지만 이 잔디가 제구실하도록 관리하는 일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잔디를 초록 콘크리트라 부른다. 색깔만 초록이지, 생태계에 거의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생태적이다. 원예상에서 통상적으로 추천하는 잔디 관리 프로그램에는 일 년에 적어도 네 차례 제초제와 살충제를 살포하게 되어있다. 고온 건조한 기후를 견디기 못해 엄청난 물을 소비한다. 미국에서 잔디를 깎기 위해 해마다 소비되는 휘발유의 양은 약 45억 리터로, 한 해 수입하는 석유의 양과 맞먹는다. 상업 시설은 물론 일반 주택도 잔디 관리를 전문회사에 맡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는 회사의 매출은 2021년 기준 약 15억 달러로, 한화 1조 9천억 원에 달한다. 이 회사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트루그린(True Green)이다.
화학물질과 화석연료를 퍼붓다시피 하는 관리 방식도 문제지만, 이 관행의 가장 큰 폐해는 벌과 나비가 쉴 곳이 없게 된다는 데 있다. 꿀벌이 멸종한다는 기사에 공감과 우려를 표시하는 사람들도 잔디밭에 피어난 민들레 한 송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잔디밭에 핀 민들레에 병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런 공간에는 토끼풀도, 토끼도, 다람쥐도, 사슴도 불청객이다. 결국 미국 주택의 잔디밭은 아무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공간이다. 배타적이고 페쇄적이다. 이 문제는 어쩌면 최초의 인류가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비롯되었다고 할 만큼 의식과 관행의 근원이 깊다. 공존의 길을 잃은 느낌이다.
내가 자연주의 정원에 매료된 것은 이 길을 되찾을 수 있겠다는 기대 때문이다. 이 기대를 교회 용어로 표현하면 구원을 향한 어떤 소망이다. 우주적 구원이 갈릴리 시골 마을에서 시작되었듯이, 피조물의 해방에 관한 암시는 잔디를 걷어내고 벌과 나비를 맞아들이는 조그만 정원 한쪽에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연주의를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정원은 소유와 과시의 수단에서 환대의 마당으로 의미가 바뀌고 있다. 민들레, 벌과 나비, 온갖 풀벌레와 같은 생태 난민들이 발붙일 곳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정원이 다시 야생의 환경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명의 하부구조에 속했던 정원이 문명의 가장자리로, 자연과 문명의 경계로 옮겨가는 셈이다. 경계는 갈등으로 가득한 곳이다. 정원도 그렇다. 뉴욕식물원 수선화 언덕이나 맨해튼 하이라인은 전문가들이 관리하고 있다. 그들이 관리하는 것은 식물 자체에 그치지 않는다. 정원사에게 주어진 역할은 문명과 자연의 손상된 관계에 관한 것이다. 관계의 손상은 긴장과 갈등을 낳는다. 그러므로 정원은 자연과 문명이 빚는 갈등의 완충지대이고, 정원사는 그 경계에서 화해를 중재하는 제사장과 같다. 광야의 성막처럼 초대교회도 그랬다. 교회는 존재 자체가 갈등이었다. 사실 성경의 기록은 긴장과 갈등의 연속이다. 긴장과 갈등 속에서 구원의 본질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성경 기자들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정원은 자연과 문명이 빚는 갈등의 완충지대이고, 정원사는 그 경계에서 화해를 중재하는 제사장과 같다. 필자가 학교 과제로 제출한 ‘서식 환경에 따른 식재 계획 사례’.
정원에서 길을 찾다
환대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계기가 있었다. 출석 교회에서 진행했던 ‘선교학교’였다. 《미션 익스포저》(예수전도단)를 주 교재로 썼는데, 5주 차 마지막 단원에서 환대의 정신에 대해 배웠다. 이 주제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시기적절했다. 마침 교회는 설립 50주년을 맞이했다. 이민 교회로서는 꽤 긴 역사 동안, 한국인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교회로서 스스로를 지키는 데 집중한 나머지 지역에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자성이 일어났다. 더욱이 코로나로 해외 선교가 막히면서 교회가 속한 지역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는데, 훈련 참가자들 사이로 이미 우리 곁에 와있는 나그네들을 품어야 한다는 교감이 형성되었다. 이후 교회 선교부에서는 그동안 진행했던 지역 협력 사역을 ‘지역선교팀’을 통해 새롭게 정비했고, ‘선교조사팀’을 신설해서 지역 상황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기도 했다. 우리 지역에 국제 난민이 예상외로 많다는 사실과 난민 구호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기관들도 여러 곳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환대의 가치가 교회의 선교적 관점에 큰 전환을 일으켰다.
그러나 성경 속 의미를 탐구할수록, 환대는 성도에게 기대하는 의식이나 생활양식 또는 선교의 전략적 관점 등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기에는 의미가 넓고 깊다는 것을 깨닫는다. 환대는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건국이념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 가난하고 소외되었으며 위기에 처한, 이미 상처가 깊고 그래서 더 손상되기 쉬운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보호하고, 배려하라는 명령은 단지 윤리적인 덕목 중 하나라기보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 원리로 보였다. 나아가 환대는 타자에 대한, 타자를 위한 그 무엇인가 싶었는데, 이 구절이 마음에 걸렸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출 22:21) 성경이 시사하는 환대의 원리는 타자성이 아니라 동질성을 토대로 한다는 의미로 이 구절을 해석하고 싶다. 환대는 나와 타인 사이에 공유된 정체성,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라는 전제 속에서 발현되는 사랑의 기술이다.
환대의 의미는 자연 속에서 더 선명해진다. 건강한 생태계에서는 수많은 구성원이 생태계에 의존하면서 그만큼 거기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하나 됨을 추구한다. 자연주의 정원이 생명을 품는 방식도 자연을 모방한다. 자연주의 정원가들의 관심사는 얼마나 아름다운 식물을, 얼마나 많이 심을 수 있을까에 있지 않다. 그들의 고뇌는 정원이 속한 환경에 얼마나 적합한 식물을 찾아내느냐에 있다. 우리가 종 다양성이라고 할 때 다양함이란, 생물종이 많다는 뜻을 넘어 생물들 간 유기적 연결이 얼마나 완전한가, 즉 하나 됨의 완전성을 뜻한다. 이 완전성을 생태학에선 ‘균형’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지만, 나는 ‘통합’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처럼 취약한 균형이 아니라 먹이사슬의 밑바닥부터 최상단까지 생태계 모든 구성원이 철저하게 서로를 의존하는 강력한 연대가 건강한 생태계가 보이는 통합이다. 하나 됨의 완전성은 성경에 충분히 계시된 바와 같이 신적인 성품이고, 건강한 자연은 이 속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래서 자연주의 정원은 정원이 자리 잡을 곳의 풍토를 중요시하고, 크든 작든 정원을 통해 구현될 생태계를 고려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정원이 생태적 가치가 뛰어날 뿐 아니라, 정원의 기능에 충실할뿐더러, 결국 가장 아름답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정원을 드나들 때마다 환대의 의미를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교회를 돌아본다. 지난 50년 동안 교회는 이 지역의 토양에 뿌리를 내렸을까, 미국으로 가져온 한국이라는 화분 속에서 자랐을까. 화분을 깨고 나와 우리가 선 땅에 뿌리를 내리자는 결의가 선교학교 참가자들 사이에 있었으니 이제 한국 교민과 유학생뿐 아니라 우리 곁의 난민들에게, 지역의 독거노인들에게, 과부와 소외 아동들에게, 가까운 이웃들에게 손을 내밀 차례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한 것을 줄 수 있습니다’라는 말 대신에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곧 우리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갈등을 피하지 않는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 용기가 지역에서 꽃을 피우기를 기대한다.
■ 주
1) 이 구역에 서식하는 뱀은 미국에서 Garter Snake라고 부르는 종류이다. 독이 없고 온순하며 정원수를 갉아 피해를 주는 설치류를 잡아먹어서 Garden Snake로 불리기도 한다.
2) 이 정원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비트라 홈페이지(www.vitra.com)에서 볼 수 있다.
3) 고정희 〈식물적용학〉 강좌, 시즌 2 인물평전 8회 차 Piet Outdolf 편.
첫댓글 새들이 사랑한 초원~넘 좋으네요^^
사람도 동물도 환대를 경험하는~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곧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