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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는 시기마다 ‘종교개혁’이나 ‘대각성’ 또는 ‘대부흥’이란 단어로 상징되는가 하면 선교 관련해서 ‘학생자원운동’, ‘교회연합운동’ 등의 표현이 당대 선교 운동을 나타냈다. 각각의 표현은 당대 교회의 신앙과 선교 운동의 핵심을 드러내거나 미래를 향한 비전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시대의 신앙의 중심과 방향을 다시 담아낼 표현은 무엇이 될 것인가? 2010년 전 세계 복음주의 선교 운동을 위한 기도와 고민이 모아졌던 제3차 로잔대회도 그러했다. 그때의 시대적, 신앙적 고민과 기도의 연장선 위에 오늘이 있음을 기억한다면, 그 당시 신앙적 표현과 고백은 오늘의 길을 찾고 내일을 향한 비전을 찾는 데 유익할 것이다.
제4차 로잔대회를 앞두고 2023년 11월 7일, 전 로잔대회 신학위원장으로서 당시 선교 운동을 ‘사랑’이라는 표현을 중심으로 〈케이프타운 서약: 신앙 고백과 행동〉으로 엮어 낸 크리스토퍼 라이트 목사를 마임비전빌리지에서 열린 KGMLF(Korean Global Mission Leaders Forum, 이사장 조나단 봉크 박사) 포럼에서 만나 관련 이야기를 들었다.
제3차 케이프타운 로잔대회에서 신학위원장으로 섬기셨습니다. 당시 〈케이프타운 서약〉을 최종 작성하실 때 ‘사랑’이라는 표현으로 선교 문서를 엮어 가신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이는 제게도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케이프타운 대회가 열리기 몇 년 전인 2007년부터 로잔신학위원회 의장을 맡았습니다. 2009년에는 케이프타운 대회를 앞두고 세계 교회를 위한 복음주의 신앙선언문 작성을 위해 협의회에서 서기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후 기독교 신앙과 신념(faith and belief)을 적은 문서 작성을 직접 감당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요. 그 일이 제게는 큰 부담과 두려움이었지만 받아들였습니다.
이 문서 작업을 위해서 일주일 동안 웨일즈에 있는 존 스토트 목사님 안식처에 머물기 위해 5시간을 운전해 가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라고 말입니다. 당시 복음주의 선교 운동 내에서는 우선적 가치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전도를 우선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 참여 또는 총체적 선교를 우선할 것인가 등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요?” 제게는 단순히 질문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었지요.
그리고 놀랍게도 마치 음성을 듣는 것 같은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0-31)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주 안에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다고 하신 것이지요. 마치 음성처럼 제게 들린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다시금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러면서 저는 단지 감상적이고 감정적인 감각을 중심으로 한 사랑이 아니라, 성경에서 사용되는 사랑의 언어로 기독교의 신앙과 신념(faith and belief)에 대한 진술을 쓰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약속의 관계, 즉 언약적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왜 나는 크리스천인가? 그것은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한다. 성령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한다.’ 이렇게 저는 사랑이라는 주제로 어떻게 기독교 교리를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존 스토트 목사님과의 대화를 통해 확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대부분의 기독교 교리는 머리로 생각하는 방식에 머물러 있어서 이렇게 사랑으로 접근하는 게 무척 신선한 사고방식인 것 같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믿고’(believe), ‘확신’하고(affirm) 또는 ‘거부’(deny)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리적이고 명제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언어는 이 모든 것을 내포합니다. 제가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녀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 아내라는 것을 안다는 의미를 포함하지요. 이렇듯 사랑에는 진리의 요소(truth element)도 있지만 진리에 대한 믿음과 함께 그 이상으로 마음의 헌신과 사랑 안에서 행함도 의미합니다.
〈케이프타운 서약〉의 첫 번째 파트에는 이 사랑에 대한 진술이 담겨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사랑함에 대한 진술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세상,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선교를 사랑하는 진술이 있고 이 각각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단순히 신념 수준에 머물지 않고 사랑함으로 복음에 순종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순종하고 그에 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성경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지요.
〈케이프타운 서약〉의 첫 번째 파트에서 제가 가장 바랐던 바는 언약적 사랑의 언어를 사용해 두 가지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를 통해 첫 번째는 신앙과 삶의 일치를 표현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를 통해 복음서나 신약만이 아니라 구약을 포함한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인간의 죄와 불순종,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 이스라엘의 중요성, 이스라엘의 성경 등 케이프타운 서약의 첫 파트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구약성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믿음의 순종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단순한 믿음 또는 신앙이 아니라, 교리적 기초에 바탕을 둔 믿음의 순종인 것입니다.
저도 〈케이프타운 서약〉을 처음 읽었을 때 ‘사랑’이라는 표현으로 이 모든 선교 문서를 엮는 것에 대해 신선한 놀라움이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는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처음이 아닙니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던 것이고, 마음속에 즉시 떠오른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말입니다. 이러한 언약적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이는 또한 복음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란 생각이 들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케이프타운 서약〉을 문서화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서약의 초안을 작성하는 데만 일주일이 넘게 걸렸고 매일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 모든 일이 이뤄지길 원하신다면, 말씀을 주셔야 한다고 계속해서 간구했습니다. 그렇게 초안이 준비돼 제시됐고, 이후 케이프타운 대회가 끝난 뒤 성명서가 완성됐습니다. 물론 두 번째 파트를 완성하는 데 몇 달 더 걸렸지만, 일단 이 모든 것이 마무리되자 제 어깨에서 책임감이 싹 사라지는 듯한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오직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한 너무 거대한 일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마무리된 이후에 저는 마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 같았습니다. “괜찮아. 이제 모두 끝났다. 걱정할 필요가 없단다”라고 말입니다. 이후 저는 로잔신학위원회에서 물러났습니다. 제 할 일을 다했기에 이제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로잔운동에 달려 있습니다.
제3차 로잔대회를 통해 선교가 총체적 시각을 구축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1974년 첫 번째 로잔대회에서 빌리 그레이엄의 원래 비전에는 몇 가지 목표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교제하고, 서로에 대해서 알아야 할 다양한 분야의 선교 활동을 소개하고 함께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당신이 그 일을 하고 있군요. 우리는 이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함께 이러한 부분에서 협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이러한 부분을 개선해 보면 좋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사람과 아이디어, 자원을 공유해 낭비를 막고 일이 중복되지 않게 할 수 있었습니다.
실은 케이프타운 대회 이전에도 이러한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2004년 파타야에서 열린 로잔대회에도 이미 31개의 다양한 관심 단체가 참여했습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선교 참여가 이미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지요. 또 다른 말로, 로잔운동은 처음부터 총체론적인, 즉 하나님의 사명, 하나님이 교회에 맡기신 사명에 대한 성경적 이해의 폭을 하나로 묶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는 복음의 선포, 복음의 실증, 그리고 세상에서의 사회적 참여가 모두 포함된 것입니다. 2차 마닐라 선언문은 전도와 사회적 활동의 통합과 일치에 대해서 아주 분명히 명시합니다.
그리고 〈케이프타운 서약〉에서는 피조물에 대한 책임이라는 세 번째 요소가 추가됐습니다. 즉 케이프타운에 이르면 세 가지(개인 전도, 사회 책임, 창조 세계 돌봄)를 하나로 모아서 하나의 서클을 완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창조물의 연합이기에, 이 세 가지 모두는 하나님의 사명의 일부입니다.
에베소서 1:9-10에는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개인과 사회 그리고 피조물은 〈케이프타운 서약〉 내에서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로잔 정신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로잔 선교 신학을 총체적 성경, 총체적 생명, 총체적 창조 세계의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여전히 논쟁적인 부분도 있는 듯합니다. 특히 전도와 사회 참여의 우선성 등에 대한 것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선교는 사람의 인체와 같아서 몸의 부분이 따로 분리될 수 없듯이 선교도 이 모든 것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 안에서 반드시 함께 이뤄져야 합니다. 서로 다른 점을 구별할 줄도 알고, 또 부분적으로 전문적이어야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중심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그 복음에 순종하는 삶에서 구체적이고 다양하게 구현돼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선교의 다양성은 이 복음을 중심으로 통합돼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개인적으로 믿는 선교의 모델입니다.
제3차 로잔대회 이후 선교지나 교회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요?
먼저 기억해야 할 점은 로잔운동은 어떤 하나의 조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잔운동은 선교 단체가 아닙니다. 여러 면에서 로잔운동은 촉매제 역할을 합니다. 즉 기독교 선교의 다양한 표현을 촉진하고 장려합니다. 심지어 전 로잔 총재인 더그 버드셀은 이렇게 말했지요. ‘“로잔의 열매는 다른 사람의 나무에서 피어난다.” 앞서 설명했듯이 〈케이프타운 서약〉의 첫 번째 파트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담았고, 두 번째 파트는 6가지 행동 요청으로 선교에 대한 다양한 분야와 표현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중에서 특별히 주목하는 부분은 창조 세계 돌봄에 대한 것입니다. 로잔에서도 창조 세계 돌봄 네트워크가 생겨났지요.
더불어 디아스포라 사역도 활발해졌습니다. 이미 수십 년간 이어온 주요한 선교 사역이지만 로잔대회를 통해 다양한 부서에서 이를 장려하고 촉진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무척 희망적입니다. 로잔대회의 요점은 이 모든 일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촉매제 역할을 통해 함께 일하는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활성화하는 일을 합니다.
제4차 로잔대회를 앞두고 우리가 좀 더 고민하고 다뤄야 할 현실적인 이슈는 무엇이 있을까요?
〈케이프타운 서약〉에서 수록했지만 강조되지 못한 부분은 성경적 진리와 일터에 대한 부분의 보완입니다. 여전히 세속적 이분법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강하게 작동하고 있지요. 선교는 소수에게만 해당되고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나 자신이 속한 일터와 삶의 세계를 선교와 관련해서 품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무나도 비성경적이고 또한 동시에 사람을 무력화하는 일입니다. 창조 세계와 일터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신학을 상실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선언문 한 부분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평범한 크리스천이 그들의 직장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부르신 곳으로 여겨야 한다는 내용을 전체적으로 다뤘습니다. 이러한 점이 아직까지 많은 교회에 강조되거나 전달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에게 여전히 이분법적 생각이 만연해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명은 교회 전체를 향한 것이며, 교회 전체는 모든 교인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삶 전체를 포함합니다. 제자를 삼는 일은 삶 전체를 통해 그리스도인과 제자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것이 아직 충분히 강조되지 못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14년 동안 눈에 띄게 현실화된 이슈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 하나가 기후 변화와 기후 비상 사태, 또는 기후 혼란에 대한 이슈입니다. 되돌릴 수 없을 지경에 이르고 있고 많은 이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제4차 로잔대회에서도 이 문제들을 다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시편 24편이 선언하듯 이 지구는, 그 주인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말하면서 그분의 소유가 쓰레기로 변하고, 오염되고, 망가지고, 낭비돼 그 누구도 살 수 없는 땅이 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또 2014년 이후로 이민자 이슈가 대두됐습니다. 이는 기후 변화와도 관련이 있으며 전쟁이나 지역적으로 고착화된 마약과 폭력 살인 등으로 인한 안전 문제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대규모 이주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디아스포라 현상입니다. 하나님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이주민 이슈와 더 나아가 디아스포라의 현실을 돌아보시고 그 가운데 일하고 계십니다. 이렇듯 제4차 로잔대회가 이주민과 디아스포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갑작스럽게 도래한 인공지능에 대한 이슈입니다. 그 활용성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인을 비롯한 과학자, 정치인, 사회학자조차도 인공지능의 영향력에 대해 큰 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닮은 사람이 선한 일도 악한 일도 하는 것처럼 저는 인공지능도 이러한 양면성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에 대한 신학적 고찰이 필요합니다.
현재 로잔대회와 관련해서 개인적으로 어떤 일에 집중하고 있으십니까?
현재 로잔대회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모든 정보를 접하고 있습니다. 제 전문 분야는 성경입니다. 이제는 선교적 성경 읽기를 통해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통해 교회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이 땅에서 살아가는지, 왜 존재하고 있는지 등의 이슈를 다룹니다.
저는 더불어 선교의 성경적 신학과 선교적 해석학과 성경에 관련된 이슈들을 생각하고 지속적으로 개선하며 글을 쓰고 강의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즉 하나님의 선교와 하나님의 사람들의 선교의 맥락 속에서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저는 2006년에 《하나님의 선교》를 출간했는데 케이프타운 대회와 동시에 출간된 책이 《하나님의 백성의 선교》입니다. 최근에는 18년 만에 증보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15년 동안 ‘성경신학의 선교’라는 주제에 관해 많은 글을 썼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위대한 성경적 이야기가 교회로서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고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러한 도전을 받아들이고, 이에 비춰 성경을 해석합니다. 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전문적으로 논평할 수 있는 사림이 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또한 〈케이프타운 서약〉이 언급한 창조 세계 돌봄에 대한 성경신학적 관점을 알리는 데도 힘쓰고 있습니다. 최근 전 세계적 환경 위기의 심각한 상황 가운데 방한 기간 동안 KGMLF에서 “소망의 복음: 환경 재해와 인적 재난에 대한 선교적 대응”이라는 주제로 진행하는 포럼에 참여했고, 예레미야서 1, 7장과 이사야서 24-25장을 본문으로 최근 세계 환경 재난의 경고를 무시하는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심판 말씀을 전했습니다.
제4차 로잔대회를 앞두고 한국 교회에 조언의 말씀을 부탁합니다.
한국 교회는 이미 매우 훌륭합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강력한 선교 운동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한국 선교사들을 만날 수 있게 됐지요. 감사한 일입니다. 제가 소망하는 바는 한국 교회 안에 있는 다양성이 화합과 친교의 장으로 모이기를 바랍니다. 로잔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우정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로잔대회는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 간의 우정으로 시작됐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진리의 복음이라는 구심점을 통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이 항상 있었고, 복음의 선포와 실천이라는 모든 영역에서 로잔운동은 가능한 모든 곳에서 교회 간 화합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특별히 저는 한국 교회가 로잔운동이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세상의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길 바랍니다. 제가 바라는 바는 한국의 모든 교회가 섬기는 자가 돼 좋은 식탁을 차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가 돼 서로를 대접해 주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 교회를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로잔운동은 모든 힘과 능력이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더 큰 협력과 화합을 위한 정신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4차 로잔대회가 개최되기까지 남은 기간 이것이 우리의 기도이기를 바랍니다.
서울에서 열리는 제4차 로잔대회가 주는 선교적 의미는 크다고 봅니다. 서구 중심적 선교를 지나 이제는 아시아 교회의 선교적 역할에 대한 역량과 기대가 과거에 비해서 높아졌다고 보입니다.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아시아 교회를 위한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아프리카 교회와 함께 아시아 교회가 세계 기독교의 미래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구 문명이 매우 심각한 쇠퇴기를 맞이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상숭배와 오만함으로 붕괴되고 있습니다. 서구 기독교 교회는 종종 문화 그리고 우상숭배와 깊이 혼합돼 있습니다. 서양의 교회가 죽어 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유럽이나 북아메리카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멋진 일은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몇 세기 안에 교회의 미래는 서구적이기보다는 훨씬 더 아시아적이고 아프리카적이 될 것이라 예상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그래! 항상 그래 왔어!”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제국이 흥망성쇠할 때 백성을 이리저리로 이동시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아시아가 그 중심이 돼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하기에 아시아 교회에 부탁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여전히 글로벌한 그리스도의 몸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대체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기독교 선교는 다음 사람에게 바통을 넘기고 넘어져 버리는 릴레이 경주도 아닙다. 세계 선교는 팀 스포츠이고 우리는 항상 함께 일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이 선교에 참여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서구 기독교인은 여전히 그곳에 있고 여전히 선교 활동을 하고 있고, 선교에 참여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가장 많이 일하시는 곳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로잔운동이나 세계 복음주의 연합 등은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아시아 교회가 이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백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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