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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10일 제2차 인천상륙작전을 아십니까?
⊙ 1951년 2월 10일 한국 해군 수병 70명, 해병대 100명이 인천 만석동 해안에 상륙
⊙ 당초 유엔군의 서울 공격에 앞선 위장상륙작전으로 기획되었으나, 인천 완전 탈환
⊙ 인천항 통한 군수물자 지원 가능해지면서, 3·15 서울재탈환 등 유엔군의 반격작전에 기여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제2차 인천상륙작전의 주역들. 왼쪽부터 노명호 소령, A. E. 스미스 제독, 통역관 최병해 대위, 김종기 소령, 최영섭 소위. |
1951년 4월 3일 강원도 양양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원수와 리지웨이 중장(뒤 왼쪽). |
제2차 인천상륙작전 당시 한국 해군의 기함이었던 백두산함(PC-701함). |
작전에 참가한 병사들 중 70명은 육전 훈련을 받지 않은 함정 근무 수병들이었다. |
특공대는 월미도에서 8문의 적 야포를 노획했다. |
1951년 2월 11일 월미도에서 노획한 적 전차. 맨 오른쪽은 최영섭 소위, 가운데는 기관사 강명혁 중위. |
백두산함의 갑판사관이었던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 |
인천탈환 소식을 접한 제95기동함대 사령관 A. E. 스미스 제독은 참모들과 함께 백두산함을 방문했다. 스미스 제독은 노명호 소령에게 작전 성공을 치하한 후, 한국 해군·해병대가 상륙했던 만석동 해안에 상륙하자고 했다. LCVP(상륙주정·Landing Craft, Vehicle and Personnel)에서 내린 스미스 제독은 마중을 나온 김종기 소령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내가 해야 할 인천탈환 상륙작전을 귀관이 먼저 해 줘서 고맙소. 웰던(Weldone).”
스미스 제독은 참모들에게 “인천항만과 부두를 조속히 복구하라”고 지시했다. 스미스 제독은 LCVP를 타고 월미도 남쪽을 돌면서 우리 병사들이 노획한 적 전차를 수리하는 모습과 야포들을 관찰했다. 스미스 제독을 수행한 미국 해병대원들이 우리 장병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2월 15일 한국 해병대 1개 대대와 미 육군 특수공병여단이 인천에 상륙, 복구작업에 착수했다. 최영섭 예비역 대령의 말이다.
“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전선을 38선까지 올리고 한강 진출의 마지막 관문인 관악산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적의 배후를 흔들 수 있는 교두보 확보가 절실하다고 판단, 미 극동군 해군사령관에게 인천지역에 위장상륙작전을 요청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장사에 문산호와 학도병들을 투입, 위장상륙작전을 벌였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던 셈이죠. 그런데 위장작전을 목적으로 인천에 상륙했던 소규모 부대가 아예 인천시 전체를 탈환해 버렸으니, 스미스 소장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해군은 현재 제2차 인천상륙작전 당시 해군·해병 특공대가 상륙했던 인천시 만석동에 기념비 건립을 추진 중이다. 대한제분이 만석동 공장 인근 녹지 일부를 부지로 제공했다. 제막식은 오는 5월 말이나 6월 초에 가질 예정이다.⊙
[월간조선 2017년 3월호 / 글=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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