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원후 4세기까지 시리아어로 예배를 드리던 시리아 교회는 431년 에베소 공의회와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거치면서 세 갈래로 나뉜다.
그 세 갈래란
(1) 칼케돈 신조를 따르는 시리아 교회
(the Chalcedonian Orthodox),
(2) 시리아 동방 정교회
(the Oriental Orthodox),
그리고
(3) 시리아 동방교회(the Church of the East)이다.
1
칼케돈 공의회의 신조를 따르는 시리아 교회는
라틴어로 예배를 드리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신학적인 노선을 같이하는 시리아 교회를 말한다.
시리아 교회의 황제파(Melkite)가 여기에 속한다.
2
시리아 동방 정교회는 이름에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집트 콥트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와
에티오피아 정교회와 같이 예배 때 사용하는 언어는 다르지만 동방 정교회 전통과 견해를 같이하는 시리아 교회이다.
이 교회는 주로 시리아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3
시리아 동방교회는 신학적인 차이도 있었지만, 지리적인 요인과 정치적인 요소가 맞물려 일찌감치 갈라지게 되었다.
동로마제국과 경쟁하고 갈등하던 사산제국의 페르시아 내에 있던 교회는 자신들의 생존 때문에 로마제국 내에 있던
교회들과는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선언을 하게 되었다. 이 전통의 교회는 주로 페르시아에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의 시리아 교회가 세 갈래로 나뉘게 된 데에는 정치적인 요소도 작용했지만, 신학적인 차이 또한 무척 중요했다.
특히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에 대한 생각 곧 기독론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
기독론 논쟁은 먼저 3세기 이래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안디옥에 거점을 두고 활동한 두 학파의
신학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두 학파 모두 그리스어로 신학을 전개하였는데,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요한복음 1장 14절을
기독론의 중요한 전거로 설명하였고, 이와 달리 안디옥 학파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사람과 같이 되셨다’는
빌립보서 2장 6-7절을 기독론의 전거로 설명하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안디옥 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또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반면, 안디옥 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기독론은 ‘위로부터의 기독론’ 혹은 ‘하강 기독론’이라고 부르고,
안디옥 학파의 기독론은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혹은 ‘상승 기독론’이라고 부른다.3
이렇게 기독론의 관점이 서로 다른 이유는 구원에 대한 이해 곧 구원론과 연결되어 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기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는 그리스도를 ‘말씀’(로고스)이라고 불렀으며, 그래서 요한복음 1장을 좋아한다.
이와 달리 안디옥 학파는 빌립보서 2장을 따라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강조하여 구원이란 인간인 우리가 몸을 입으신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일 곧 ‘테오시스’(theosis)에 중점을 두었다.
‘테오시스’는 신화(神化, divinization) 또는 성화(聖化)라는 말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안디옥 학파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고난까지 포함하여 그분을 닮아가는 것을
구원의 과정으로 이해하였고 결국 부활을 통하여 구원이 완성된다고 보았다.
키릴로스와 네스토리우스,
그리고 에베소 공의회(431)
니케아 공의회(325)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 이어 세 번째로 열린 에큐메니컬 공의회는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공의회이다.
바로 여기에서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파문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에는 신학적인 배경이 있다. 당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키릴로스(Cyrilos)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의 발언을 문제 삼은 것이다.
네스토리우스가 설교하기를,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분’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낳은 분’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키릴로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로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대표하는 학자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정서에 따라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은 분’ 곧 ‘테오 토코스’(theo-tokos)라 불렀다.
이와 달리 네스토리우스의 안디옥 학파는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분’이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손자가 되기 때문에 마리아를 ‘그리스도를 낳은 분’
곧 ‘크리스토 토코스’(christo-tokos)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키릴로스가 네스토리우스를 반대한 이유는 단지 신학적인 차이뿐만이 아니었다. 4세기 당시 교회의 네 중심지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콘스탄티노플이었다. 그런데 428년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면서
콘스탄티노플의 위상이 알렉산드리아보다 높아졌다.
이에 불만을 품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키릴로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를 헐뜯기 시작한 것이다.
키릴로스는 429년 부활절 설교에서 네스토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갈등은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세 용어, ‘본성’(usia)과 ‘실체’(hypostasis)와 ‘위격’(persona)의 이해가 서로
다른 점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위격’은 그리스도의 겉모습을 말하며 ‘실체’는 그리스도의 내적인 실재를 말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에서 ‘실체’의 이해가 특히 달랐다. 키릴로스는 ‘실체’라는 용어를 ‘위격’이라는 용어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키릴로스는 ‘두 개의 다른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기 위해 실제적인 결합체로 함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네스토리우스에게 ‘실체’라는 용어는 위격 이전의 실제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것을 두 본성의 혼합이라고 보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게 혼합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이 출생, 고난, 죽음을 경험한다는 뜻이 되어 잘못된 주장이라고 말하였다.
결국 키릴로스는 431년 6월 22일 자기를 지지하는 주교들만 모아놓고 회의를 시작했다.
더구나 안디옥 총대주교회의의 주교들과 황제 및 교황 사절단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회의에 늦게 참석하였다.
키릴로스가 이 회의를 이끌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네스토리우스는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결국 키릴로스는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파문을 선언했다.
이에 늦게 도착한 안디옥의 주교 요한은 함께한 40명의 주교들과 함께 에베소 공의회를 불법이라 선언하고
키릴로스를 이단으로 출교시켰다.
이렇게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자 당시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Ⅱ)는 키릴로스와 네스토리우스를
각각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의 자리에서 동시에 몰아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사람의 대처 방식은 달랐다. 키릴로스는 자리를 되찾고자 황제 주변의 고위 관료들에게 뇌물을 썼다.
14개의 오리엔탈 양탄자와 8개의 침대, 6개의 테이블보, 4개의 걸개 양탄자, 4개의 상아 벤치와 6개의 가죽 벤치와
6마리의 공작을 뇌물로 써서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지금 가치로 약 3백만달러 정도의 빚을 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달리 네스토리우스는 황제의 명령을 받아들여 435년 안디옥 가까이에 있는 수도원으로,
그 다음에는 아라비아의 페트라(Petra)로, 그리고 이집트의 사막으로 유배를 떠났다.
결국 451년에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이러한 글을 남겼다.
내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고 있는 나를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풀어주시기를 간구한다. 내게는 친구이며, 부양자이며 집인 너 사막아, 기뻐하라. 당신, 유랑자와 함께 계신 나의 어머니께서, 내가 죽은 뒤에도 내 몸을, 하나님의 뜻이라면, 부활의 그날까지 지키시리라. 아멘.
상황이 이렇게 되자 주로 페르시아에 퍼져 있던 시리아 교회는 에베소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바로 시리아 동방 전통의 동방 교회이다.
그리고 이 교회는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s)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그러나 사실 네스토리우스는 시리아 동방 교회를 세운 적도 없으며 시리아 동방 교회의 교인도 아니었고
시리아어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시리아 동방 교회를 ‘네스토리우스파’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더구나 시리아 동방 교회는 자신들을 ‘네스토리우스파’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안디옥 학파의 대표적인 신학자 세 사람을 들자면 타르수스의 디오도루스(Diodorus of Tarsus)와
몹스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Theodoros of Mopsuestia, 352-428), 그리고 네스토리우스(Nestorius)이다.
네스토리우스는 몹스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에게 성서와 신학을 배웠다.
그리고 테오도로스는 디오도루스의 제자이다. 특히 테오도로스는 안디옥 학파의 기독론을 확립한 인물이다.
사실 시리아 교회의 동방 전통을 대표하는 시리아 동방 교회는 네스토리우스를 따른 것이 아니라
몹스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의 성서 해석과 신학을 지지하고 따르는 교회이다.
특히 시리아 교회가 시작된 우르하이(에데사)에 ‘페르시아인 학교’라고 부르는 신학교가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디오도루스와 테오도로스의 그리스어 저작을 시리아어로 번역하여 교과서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사실 테오도로스와 그의 스승 디오도루스는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는 당장 이단으로 정죄되지 않았다.
한 세기가 지난 533년, 그들은 다섯 번째 공의회에서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압력이라는 정치적인 이유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칼케돈 공의회(451)의 선언과
시리아 교회의 반응
451년 10월 8일에 칼케돈에서 열린 제5차 공의회에서 채택한 선언문 가운데 그리스도에 대한 선언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는 두 본성을 가지신 분으로 그 본성들은 혼합되지 않고, 변하지 않고, 분리되지도, 분할되지도 않는다.
그 본성들 사이에 있는 차이가 연합 때문에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 본성의 특징을 그대로 보전해 한 위격,
한 실체 안에서 하나가 됐다. 그분은 두 위격으로 분할되거나 분리되지 않는 분이시다.
위의 칼케돈 선언을 읽어보면 마지막 부분만 빼고 대부분 네스토리우스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이 공의회에서는 네스토리우스에게 유죄를 선언했다. 반면 위의 선언은 키릴로스의 생각과 다르지만
이 회의에서 그는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그런데 칼케돈 신조를 따르던 칼케돈파는 자신들을 반대하던 반(反) 칼케돈 진영을 ‘에우티케스파’나
‘단성론자들’(Monophysites)이라고 비난했다.
에우티케스(Eutyches, 378-454)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수도원장으로, 그리스도가 하나의 본성만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단성론자였다.
반 칼케돈 진영은 주로 동방 정교회 전통의 교회들이었다. 하지만 반 칼케돈 진영을 ‘단성론자’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단지 그들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더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이 입장을 ‘단성론’(mono-physitism)이라 부르지 말고
‘일성론’(mia-physitism 또는 heno-physitism)이라 부르자는 제안도 있다.
이 이름은 칼케돈 신조를 따르는 칼케돈파의 신학을 지칭하는 ‘양성론’(dyo-physitism)에 대립한다.
그렇다면 위의 칼케돈 신조를 시리아 교회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사실 위의 선언 가운데에서 ‘두 본성으로… 한 실체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표현이 모순이었다.
‘본성’이라는 용어와 ‘실체’라는 용어의 이해가 431년의 에베소 공의회 때와 마찬가지로 서로 달랐다.
‘본성’으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퓌시스’(physis)이고 시리아어로는 ‘키요노’(kyono)이다.
그리고 ‘실체’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휘포스타시스’(hypostasis)이고 시리아어로는 ‘크노모’(qnomo)이다.
특히 시리아 정교회(Syrian Orthodox)의 입장에서 보면 ‘본성’(키요노)은 그리스어 ‘휘포스타시스’ 곧 ‘실체’와
무척 가까운 개념이었기에, 두 ‘본성’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었다는 말로 들렸다.
한편 시리아 동방 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위의 선언 가운데 ‘두 본성으로’라는 말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본성’(키요노)은 그리스어 ‘우시아’(usia) 곧 ‘본질’과 무척 가까운 개념이었다. 따라서 시리아 동방 교회는
‘두 본성으로’라는 표현을 성육하신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모두 내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신학적 논쟁은 특히 6세기 이후 시리아 교회 내에서 눈에 띈다.
기독론 논쟁이 일어나기 전 시리아 교회의 최고 신학자로 추앙받는 에프렘(Ephrem Syrus, 303-373)의 저작도
6세기 이후에 시리아 교회 내에서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 고쳐서 전승되었다.
에프렘이 쓴 『성탄 찬가』(6.10)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칭송받으시는 분은 드러내셨다.
장엄에서 비롯된 당신의 본성(‘키요네’)을.
비천한 자도 또한 드러내셨다.
인성에서 비롯된 그의 본성(‘키요네’)을.
그저 놀라울 뿐.
신성 그리고 또한 인성을 이렇게 우리에게 알리시니–.
그런데 『휀키토』(Fenqitho)라고 부르는 시리아 교회 서방 전통의 예배서에는 이 부분에서 ‘그의 본성’(키요네)을
‘그의 몸’(‘파그레’)으로 바꾸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시리아 교회 서방 전통은 인성을 ‘본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거북스러웠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서에서 용어를 이렇게 바꾼 것이다.
또한 이 예배서에는 『성탄 찬가』(5.20)의 다음 부분이 빠져 있다.
가브리엘이 들어오던 날
내가 가난하기에 앞서 그는 곧바로 나를
자유로운 여인과 노예로 만들었다.
그래요, 나는 주님의 신성의 노예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인성의 어머니입니다.
에프렘은 이 노래에서 마리아를 ‘신성의 노예’와 ‘인성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가운데에서 ‘인성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그리스도를 낳은 분’(‘크리스토-토코스’)이라고 불렀던 것과 닮았다.
그래서 시리아 교회 서방 전통의 예배서에는 에프렘의 『성탄 찬가』의 많은 부분이 인용되어 있지만 위의 부분은 빠져 있다.
칼케돈 공의회와 그 이후
칼케돈 신조는 일성론(一性論)과 양성론(兩性論) 두 입장 모두를 포괄하는 신조였다.
하지만 양편에서 봐도 모두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가져와 신학적인 갈등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이집트와 시리아, 그리고 소아시아를 포함한 동로마제국에서 정치적 불안정이 가속화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황제 제노(Zeno, 474-491)는 482년 ‘헤노티콘 신앙선언서’(Henoticon)라고 부르는 화합 칙령을
반포하기에 이른다.
이 칙령은 일성론자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민 정치적 선언이었다. 그리고 489년에는 앞서 언급한 우르하이의
‘페르시아인 학교’를 강제로 폐쇄하게 된다. 그 결과 양성론 입장에 서 있던 안디옥 학파의 신학은 시리아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동방과 서방이 신학적 교류를 할 수 있는 통로 또한 막히게 되었다. 그리고 시리아와 소아시아에서는 일성론의 입장에 서 있던
주교들이 많은 교구를 차지하였고,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구도 황제파와 일성론파로 각각 갈라지게 되었다.
유스티누스 1세(Justinus Ⅰ, 518-527)가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자 상황은 또 바뀌었다.
519년 그는 동과 서로 나뉘어 있는 로마제국을 하나로 만들고자 교황의 도움으로 제노 황제의 ‘헤노티콘 신앙선언서’를
폐기하고 칼케돈 신조를 다시 채택한다.
그 결과 일성론파는 밀려난다.
이어서 황제가 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Ⅰ)도 이 정책을 이어받아 일성론파는 계속해서 핍박을 받았다.
결국 그들은 사산제국 아래에 있던 페르시아로 대부분 이주하게 된다.
이렇게 칼케돈 공의회 이후로 시리아 교회를 포함하여 교회는 세 조각으로 분열되었다.
첫째는 칼케돈 신조를 받아들인 로마,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의 제국 교회들과 안디옥의 시리아 교인들,
둘째는 칼케돈 신조에 반대하는 콥트 교회와 시리아 정교회, 그리고
셋째는 이미 에베소 공의회 때부터 입장을 달리한 시리아 교회 동방 전통의 시리아 동방교회이다.
5세기, 이렇게 초기 시리아 교회가 분열된 데에는 정치적인 요소와 신학적인 차이가 함께 작용하였다.
20세기 화해의 물결
이렇게 1,500년 이상 서로 신학적 차이를 보이던 시리아 교회 안에는 2000년대 말에 들어서 화해의 흐름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먼저, 여러 전통의 시리아 교회가 유럽과 북미 등에 이민으로 흩어지면서 다른 전통의 여러 교회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960년에 시리아 정교회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전통의 시리아 교회가 신학적인 교류를 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다름을 인정하며 공통점을 찾아내는
흐름이 생기게 되었다.
1965년의 비공식적인 회의뿐만 아니라 1985년, 1989년, 1990년, 1993년, 2005년에 열린 공식적인 회의를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었다. 특히 1990년과 1993년의 회의는 각자 다른 기독론을 서로가 인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런 면에서 13세기 시리아 정교회의 신학자 바르 에브로요(Bar Ebroyo 또는 Bar Hebraeus)의 말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나는 이 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는데,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논쟁은 실제적인 본질의 문제라기보다는 용어와 개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모두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그 본질이 혼합되거나 섞이거나 혼란스럽지 않은,
온전한 하나님과 온전한 인간으로 고백한다. 이 두 개념을 한쪽에서는 ‘본질’이라고 부르고,
다른 쪽에서는 ‘위격’이라고 부르고, 또 다른 쪽에서는 ‘실체’라고 부른다.
그래서 나는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비록 기독론적인 입장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증오심을 나는 거둬들인다.
그리고 신앙고백 문제로 그 누구와도 논쟁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이환진 |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로 구약을 가르치고 있다. 아시아교회의 토착화에 관심을 기울여
한중일(韓中日) 성서와 시리아 교회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