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백색-고양이/임 봄-
나는 고양이, 담쟁이 넝쿨 수북한 담장 위에서 휘휘 휘파람을 불어요. 세상은 정지되고 나는 로
프 없이 번지점프를 해요. 말귀를 못 알아듣는 개미들이 서로 꽁무니를 물어뜯고 일렬로 늘어선
슬픔이 느리게 행진할 때도 당신의 구두는 명랑한 스타카토로 달리는군요. 별들은 탄력 있게 울
고 망고쥬스에서는 바다냄새가 나요. 나는 식탁 밑으로 숨고 숫자 속으로 가라앉고 당신의 편두
통 안으로 기어들어요, 감쪽같이. 수학 공식이 깃든 풍경 속에서도 배꼽이 단단해지는 비밀을 알
면서 다시는 고향에 갈 수 없었지요. 고독을 들키려고 내장을 다 드러낼 필요는 없어요. 나는 길
게 히히 웃고 야옹 하고 짧게 울었지요. 태양의 흑점에서 날개를 접은 나비가 다시 날지 못한다
해도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나는요, 말아 올린 꼬리에서 뿌리가 내려 넝쿨로 스미고, 스미
고, 스며요, 점점 빠르게. 어쩌면 날개가 돋을지도 모르지요. 아, 전에 이미 말했던가요
<2>-백색의 기원-레퀴엠/임 봄-
(칸타빌레-노래하듯이)
투명한 유리에 새겨진 음화(陰畵),
검은 동공으로는 만질 수 없어요
빨강인지 파랑인지
하양인지 까망인지
사막에 살던 분홍 물고긴지
북극에 살던 노랑 코끼린지
(세뇨)
(두르체멘테-달콤하고 황홀하게)
엄마! 내가 사람을 죽였어요*
(알레그로 논 트로포-빠르게, 그러나 너무 지나치지 않게)
아궁이에서 갓 꺼낸 수수깡으로
무채색 그림을 그린 적이 있나요
촛농으로 만든 식탁에 앉아
트라이앵글 협주를 들은 적이 있나요
뜨거운 눈을 머리에 이고 달려오는
뿔 달린 구름을 본적이 있나요
(피아니시모-매우 여리게)
그땐 한번도 모자를 벗지 않던 노인이
모자를 벗을 거예요(피네-끝)
(포코 아 포코 아다지오-조금씩 침착하고 느리게)
아주 오래된 전설 속의 파랑이예요
파랑이라 생각하는 분홍이예요
분홍이라 생각하는 까망이예요
한 번도 까망인 적 없는
비밀스런 하양이예요(달세뇨-세뇨로 돌아가서)
(카텐짜-자유로운 무반주)
(스모르짠도-서서히 음을 여리게)
밤새 검은 묘지를 떠돌아다니는
빨강 도깨비 불, (페르마타-음을 최대한 늘여서)
프랙탈로 빚은
빛의 음화(陰花)예요
<3>-백색-스마일마스크증후군/임 봄-
읽다 덮어둔 페이지는 마법의 시간
자주 사라지고 이따금 나타나는 외발자전거
고양이를 높이 들고 주문을 외우지
야금야금 뜯어먹다 구름을 만들고 싶어
목을 졸라 경쾌한 노래를 듣고 싶어
제발 나를 위해 한 번만 죽어주지 않을래
외발자전거를 탄 고양이는
매일 높은 안장위에 올라 불타는 링을 통과하죠
경계만 지나가면 지도에 없는 곳이 나올거예요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곳
아무도 울지 않는 곳
불길을 통과할 때마다 뾰족한 귀가 타고
입술에서는 날개 부딪는 소리가 들려요
발톱이 부러지고 긴 꼬리에 불이 붙어요
불꽃이 꺼지면 감쪽같이 사라지는 마술
둥근 바퀴는 돌고, 돌고, 돌고
당신은 처음부터 외발자전거
뾰족 귀도 긴 꼬리도 없는
외발자전거
<<임 봄 시인 약력>>
*1970년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
*고려대학교에서 문학석사 졸업.
*2009년 계간 《애지》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2013년 계간 《시와 사상》 평론부문 당선.
*시집 『백색어사전』(22세기 시인선, 2015).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작가회의 회원.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 박사과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