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철 前소장의 책을 읽다가 우연히 찾은 글이다. 노후 10계는 종친들이 좌우명으로 삼아도 좋고 고해 같은 인생을 헤쳐나갈 때 지혜의 샘이라 10회에 걸쳐 게재한다.
산수(傘壽)를 넘긴 문중원로가 남긴 10계에는 "경계한다", "부탁한다"는 의미를 넘어 종친들에 대한 따스한 사랑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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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계명 : 매일 죽을 준비를 게을리 마라
⌈"죽음을 준비하는 공부" 저서의 서문⌋
好生惡死’는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한다.”는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도“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 만큼 인생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는“죽음이 두렵다”는 것이다. 죽음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피해갈 어떤 수단도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태어남은 우연이지만 죽음은 필연이기 때문이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도 죽지 않으려했어도 비켜갈 수 없었다. 무소불위의 힘을 지녔지만 죽음만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삶만 중요하지 죽음은 나와 관련이 없는 것처럼 산다. 대개의 경우 사람이 자연사나 고통사고로 죽어도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태도로 무관심하다. 우리 교육은 유치원에서 대학까지'죽음'에 대해서 다루지 않고 있다. 죽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면서 정작 죽음을 한사코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데 아니 시시각각 닥쳐오는데 아무런 준비를 않고 있으면 과연 정상이라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삶과 죽음의 본질을 알고 대비해야 한다.
관건은 두려움과 고통이 없는 삶을 마치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죽음을 낮과 밤처럼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세포 속에는 위험과 죽음의 공포를 피하려는 유전정보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것을 영혼의 몫이다. 영이나 혼이 죽음의 공포를 유발하는 유전정보를 제대로 인지하고 가능한 한 잘 다루어줘야만 고통과 두려움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일 뿐이다.
영미권에선 'death with dignity/mercy-killing'이라며 존엄과 운명의 자비를 강조한다. 독일은 죽어서 (sterbe) 놓여난다(hilfe)라는 뜻의 'sterbehilfe'라 한다. 일본에서 깨끗하게 생을 마친다거나 훌륭한 죽음의 뜻인 '이사기요쿠(潔く)' 라고 한다. 깔끔함을 미덕으로 여긴 말이다. 피하고 싶은 죽음이 사실은 삶의 의무나 고통에서 놓여나는 자비로운 순간이란다. 흔히 '안락사'로 번역하는 영어 'euthanasia'도 '잘 어! 좋아!'라는 뜻의 라틴어 eu와 죽음을 뜻하는 thanasia가 결합된 말이다.
과연 노화와 죽음이 평화롭겠는가. 삶을 마감하는 마지막 희망은 세상과 평화롭게 작별하는 것이다. 융 심리학파의 거장 폰 프란츠 박사가 말년에 파킨슨씨병으로 고생하면서, 노인이 되어 똥오줌도 싸보고 의사에게 매달려보는 경험도 소중하다고 했다. 무력한 자신을 대면해봐야, 똑똑한 머리는 미처 몰랐던 자신의 그림자와 제대로 조우할 수 있다. 질병과 노화와 죽음과 같은 인생의 어두운 면을 오히려 가장 큰 스승의 가르침으로 삼았을 때 온전한 개성화 과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속담에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한다. 어떤 죽음도 이유가 있다. 성경에 “나이가 많다고 지혜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도 아니다(욥기 32, 1~29 엘리후의 충고)” 라고 했다. 두려움과 고통 없이 하직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이상적인 죽음이다. 우리는 늦었지만 그 이상적 죽음을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 그래서 제목을 ‘죽음을 준비하는 공부’라 했다. 이는 평생 의 화두에 대한 나름의 해답이다. 늙어서 내는 자서전은 아이다. '공부’는 태어나 죽기까지 줄곧 해야 할 일이다.
집착이 심하면 엉뚱한 길로 빠질 수도 있다. 졸저도 그럴 가능이 크다. 옛말에 “사슴을 쫓는 자는 산이 보이지 않는다(逐鹿者不見山)”라는 말이 있다.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본다는 뜻일 것이다. 신학자나 철학자들이 다뤄볼 학문의 범주이기 때문이다. 감히 어느 영역을 기웃 거리냐고 비판할 수 있다. 더구나 동서양 종교의 교리와 학설을 한 자리에서 비교한 것도 무모하다 할 수 있다. 조롱을 받을 수 있지만 한 대목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배움이 없으니 굳이 억울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삶을 이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고 놓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권력, 이성, 돈, 관계, 젊음, 건강 같은 것들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신비에 대한 겸손하고도 겸허한 태도가 아닐까. 어째서 죽음이 신비냐. 태어남이 신비라면 죽음 또한 신비임이 분명한 것이다. 인간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어쩌면 최고의 신비일지 모른다.인간은 원래 실체가 없던 존재이기에 신비롭고 사라짐도 마찬가지이다. 생사일여나 천인일여 등은 그래서 나온 말일 것이다.
2014년 5월 20일
원산 위정철 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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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미리 준비하고 대비해야 할 숙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