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빠진 듯 보고 있다가 드디어 정신 차린 재릿이 “형이 하는 말은 들었는데,” 라고 말했다. “도대체 쉽톤이 어떻게 이것보다 나을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되는군요 .” 슬랩은 결국 자유 등반으로 오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피치는 5.9 내지 5.10 이었다. 부실한 바위를 예상했었으나,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가 갈고 닦아낸 슬랩이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발토로 화강암 크랙이 주로 나팔 형이고, 크랙 안쪽도 대부분 블레이드 (blade) 밖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대원: 마크 시놋, 재릿 오든, 알렉스 로우
1999년 7월 26일. 그레이트 트랑고 타워의 북서벽, 18,450 피트에서 처음으로 벽에 매달려 비박하다 (hanging bivy). 서쪽 지평선이 늙은 농어의 일그러진 턱처럼 보인다: 울퉁불퉁한 부서진 이빨, 예리한 송곳니들과 뭉툭한 어금니들이 180도 반원 속에 늘어서 있다. 트랑고 타워 뒤에서 떠오르는 달이 밑에 있는 벽 주위에 푸른 빛 후광을 (halo) 만들고, 1,200 미터 아래 있는 트랑고 빙하의 수많은 얼음 연못에서 달빛이 반사하고 있다. 벽에 매달려 있는 우리의 작은 보금자리에서 나오는 빛을 제외하고는, 이 벽의 거의 대부분은 어둡고 아무 생명체가 없다.
그러나 그 빛은 매달아 놓은 스토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알렉스의 무릎 위에 있는 컴퓨터의 녹색 스크린에서 비치는 빛이다. 배터리와 모뎀과 다른 장비에 연결된 전기 코드가 이리 저리 뱀처럼 뻗어 있다. 스토브 환기 구멍으로 나와 있는 90 cm 높이의 안테나는 베이스캠프의 커뮤니케이션 텐트 쪽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다. 한번에 한 자씩, 그 스크린 위에서 메시지를 받는다.
“왜-여-기-엔-폴-란-드-발-레-리-나-가-없-지?”
이것은 베이스캠프에서 우리에게 보내는 가장 최근의 진한 농담으로서, 우리가 보낼 당일 데이터 송신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다. 오늘 우리는 허공에 매달린 스테이틱 (static) 라인 위로 180 미터의 주마링과 홀링을 했고, 그리고 나서 심한 오버행을 이루고 있는 바위 위로 두 차례의 어려운 인공 선등을 했다. 300 미터 하강 후, 포탈리지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피곤하여 부츠를 벗기 조차 힘들었다. 재릿과 알렉스는 벌써 컴퓨터를 일제히 키고 열심히 컴퓨터를 치고 있었다. 우리는 저녁 식사 준비와 수분 섭취뿐 아니라, 그 날의 활동을 기록하는 이메일도 써야 했고 디지털 이미지를 다운로드 해야 했다. 모든 일을 끝내려면 자정이 지나야 될 것이다. 알렉스의 ‘얼람’이 무자비하게 잠을 깨운다. 재릿과 내가 '모닝 콜' 만으로는 잘 일어나지 않음을 알렉스는 잘 알고 있다.
두 해 전, 여기서 가까이 있는 쉽톤 스파이어 시도 중, 재릿 오든과 내가 그레이트 트랑고의 북서벽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 높이가 거의 1800 미터이어서, 우리가 이제까지 본 대 암벽 중 가장 컸다.
“만일 이것에 대해 알기만 했었다면,” 이라고 내가 재릿에게 신음하듯 말했고, 재릿도 이 암탑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다음 두 달간 우리는 스파이어 벽 위의 여러 비박지에서 이 트랑고 서벽을 관찰하며 지냈고, 쉽톤 신 루트를 끝낼 쯤에는 다시 오기로 다짐하게 되었다. 1988 년 여름에 오려고 했으나, 우리 둘 다, 배핀 아일란드에서의 대 암벽 다큐멘터리에 참여하자는 초청을 다 받게 되어, 그 계획이 연기되었다. 그 시즌 중 우리는 그렉 차일드와 알렉스 로우와 함께 죽여주는 신 루트를 등반했고, 타고 나올 배를 기다리는 (ride out) 동안, 다음 가야 할 곳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내가 얼른 내 텐트로 뛰어가서 그 북서 벽 사진을 갖고 왔다. 그렉도 네임리스와 쉽톤의 신 루트를 등반하면서 그것을 보긴 했으나, 대 암벽에서의 노예 같은 생활에 꽤 넌더리가 난 것 같았다. 한편 알렉스는 그야말로 침을 흘렸다. “난 언제나 트랑고에 있는 것들을 올라보고 싶었어” 라고 그가 재릿과 내게 말했다. “난 이걸 꼭 하고 싶으니까, 세 번째 사람이 필요하면 알려주게.” 한달 안에 알렉스가 (만40세) 공식적으로 사인을 했다. 그는 이미 K2의 노스 릿지와 가셔브룸 IV를 시도한 적이 있어서, 이번이 그의 세 번째 카라코룸 원정이다. 재릿에게는 세 번째다. 쉽톤 이외에도, 재릿은 (만27세) 1995년에 네임리스 타워에서 신 루트를 한 바 있다. 트랑고 빙하를 에워싸고 있는 주요 암탑들을 신 루트로 오르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큰 스폰서를 구할 필요에 대해 우리 모두 의견을 같이 했다. 쉽톤 원정할 때는 우리 주머니 돈을 털어 마련했는데, 모두 10,000 달러가 들었다. 쉽톤은 6000 미터 미만이어서, 입산 허가나 연락 장교 없이 등반했다. 그레이트 트랑고 타워는 (6284 미터) 그 보다 훨씬 많은 경비가 들기 마련이다. 재릿과 내가 쉽톤을 등반한 후, 나도 결혼해서 애가 있었기 때문에, 은행 예금을 바닥내고 차를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는 방법을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몇 주 후, 쿼카(Quokka)라는 인터넷 회사의 샌프란시스코 본사에서의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대학 시절의 나의 등반 파트너인 죤이 그가 꿈꾸던 일, 즉, Quokka의 어드벤쳐 네트워크을 위해 웹사이트를 개설하는 일을 맡았다. 죤도 카라코람의 중국 쪽에 자신의 원정대를 조직하고 있었고, 취재할만한 다른 원정들을 적극적으로 찾고 있었다. 나는 죤과 그의 사장 브라이언에게 내 계획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며, 머리를 짜내어, 그들을 잘 꼬실 수 있는 온갖 말을 했다: “그레이트 트랑고는 위로 1마일이나 곧장 솟아있고; 정상 고도가 6000 미터 이상이며; 아무도 전에 해본 적이 없고; 한 달 이상 그 위에 있을 수 있으며; 세계에서 제일 큰 암벽이 될 것입니다“
“음,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요,” 라고 브라이언이 말했다. “바로 우리가 찾는 원정 같이 들리는군요.” 마침 같은 시기에 우연히 다른 회사에서도 우리의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였다. 노스 페이스가 그 원정의 필름을 만들겠다는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갑자기, 우리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을 정도의 취재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약 4,500 Kg의 짐을 포터로 운반하며 6월 22일 베이스 캠프에 도착했다. 155명의 발티 족 사람들이 긴 행렬을 이루어 - 쉽톤에서 쓴 포터의 8 배 되는 인원임 - 펠리칸 사의 방수 케이스 (Pelican cases), 배럴 형 통, 홀백 등을 날랐다. 우리들 세 명의 클라이머 이외에도, 우리 팀에는 마이크 그래버와 그의 조수 지머 서릿이라는 촬영기사, 그리고 Quokka의 현장 프로듀서 그렉 토마스, 위성 기술자 대런 브리톤 등이 있었다. 끝으로 연락 장교인 캡틴 우마이르 아메드가 포함된다.
드디어 목표를 바로 앞에 두고 앉아 있으니, 왜 이제까지 아무도 그것을 시도하지 않은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크기가 거의 엘 캡 만한 이 벽의 하반부는 전혀 크랙이 없는 슬랩이었고, 부스러지는 바위였으며, 위험하게 보였다. 등반성 있는 부분은 위에 있었다. 그 슬랩과 규모가 비슷한 상단 헤드월은 수직과 오버행 각을 이루고 있었으며, 몇 개의 거대한 루프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등반하고자 하는 곳이다.
거의 도착 즉시 우리는 로프 고정 작업을 시작했고, 홀링이 불가능 하다는 사실도 즉시 깨달았다. 슬랩은 여기 저기 부서져 있었고 완경사였다. 등에다 큰 짐을 지고 주마링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얼마 동안 지낼 수 있을 정도의 크기를 가진, 비교적 안전한 렛지를 수천 피트 위에서 찾아냈다. 그 렛지에서 보내는 첫날 밤, 자주색과 오렌지 색 노을이 트랑고 빙하를 에워싼 봉우리들을 밝게 비추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핫 초코렛과 스카치 위스키를 조금씩 마셨다. 왼쪽으로는 the Cat's Ears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연필처럼 뾰족한 Mystery Phallus 사이로 드러난 십톤 스파이어의 윗부분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우리 바로 건너편으로는, 세로 토레 같은 버섯 얼음이 있는 울리 비아호가 (Uli Biaho) 자주 빛 알펜글로우 속에서 밝게 빛났다.
이제 우리는 날마다 웹사이트 일기를 쓰는 리듬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물론 한두 번씩은 고쳐 써야 했지만 말이다. 서로에 대해 언급한 몇 번의 처음 기록은 “야, 임마, 너....” 라고 서로 소리 지르며 포탈렛지 안에서 정말로 벌떡 일어나게 만들곤 했다. 우리의 생각과 동작 하나하나를 온 세상이 보도록 기록한다는 것이 우리를 지치게 만듦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웹사이트 서핑을 하지 말자는 규칙을 정했다.
긴 피치 20 개를 한 후, 드디어 헤드월 밑에 도달했다. 근 1,020 미터의 로프를 고정했는데, 종전에 내가 벽에서 써본 것 보다는 두 배나 되는 길이다. 이제 우리는 홀백 10 개분의 장비와 물품을, 다음 라운드의 로프 고정 작업을 위한 일터가 될 테일러스 렛지까지 (talus ledge 부서진 바위가 쌓여 있는 작은 테라스) 옮겨야만 했다. 마이크와 지미가 주마링 작업을 도와주겠다고 자원했다 - 눈물날 지경으로 너무나도 고마운 제의였다. 우리 다섯 명은 새벽 4시부터 전에 없이 힘들게 발을 질질 끌며 출발했다. 알렉스는 우리 모두를 한 바퀴 이상 앞서며 네 번 왕복한 반면, 재릿과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될 때까지 간신히 세 번 왕복했다. 그 날 나는 굳게 결심했다. 다시는 이런 고통스런 일을 하지 않으리라고.
우리가 로프를 고정하고 있는데, 러시아 원정대가 도착했고, 마지막 휴식을 취하기 위해 베이스캠프로 하산하면서, 그들을 얼른 만나고 싶었다. 전에 어느 등산 장비 쇼에서 그 팀의 대원 한 명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그의 팀은 the Grand Voyage 근처의 동쪽 페이스 상의 한 루트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했다. 그들이 여기에 있는 걸 보니, 아마 북서면 페이스에 관해 내가 너무 어렵다고 과장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내려온 첫 날 밤 그들과 함께 파티를 열었다. 그들의 코냑과 우리의 위스키를 마시기 위해 우리의 2 미터짜리 돔 텐트 (dome) 안으로 그들을 초대했다. 그들에게 루트 상태와 우리 루트에서 우리가 알아낸 것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의 등반 라인이 어디로 가는지에 관해 그들에게 물어보았으나, 그들은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말해준 것은 세계 10대 거벽의 신 루트를 오르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기 나라 안의 악수 마운틴 그리고 바기라티, 창가방, 그리고 트롤 월의 루트들을 오른 바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미 헤드월 아래까지 고정로프를 깔아 놓았으니, 아마 그들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 듯 했다. 그런데 우리의 판단이 틀렸다.
며칠 후 우리는 우리의 하이 포인트로 (high point) 되돌아 왔다. 헤드월 시작 지점에는 거의 홀드가 없었고, 120 미터 높이에서 스키 트랙 (ski-track) 모양의 크랙 시스템이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는 오른쪽 라인을 목표로 삼았고, 그곳에 이르기 위해 맥 빠질 정도로 홀드가 없는 바위 피치 세 개를 등반했다. 그러나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왜냐 하면 그 다음 나타난 구간은 엘캡의 Dawn Hall 상단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점점 크기가 커지는 세 개의 루프를 (roof) 통해 세로로 길게 갈라진 좌향 코너가 하나의 등반 선을 만들고 있었고, 450 미터 위에 25 피트짜리 루프가 그 정점에 있었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과 화씨 80 도 정도의 기온을 보였던 날씨가 7월 18일엔 바뀌었다 (turned south 미상, 확인요). 처음에 우리는 그 헤드월 상단이 심한 오버행이어서 날씨가 나빠도 계속해서 피치에 로프 고정 작업을 할 수 있으리라고 간단히 생각했다. 내가 배핀 아일랜드 등반할 때도 항상 그렇게 할 수 있었고, 쉽톤의 높은 곳에서 폭풍이 불고 있었던 8일 동안 내내 재릿과 내가 등반한 적이 있었다.
폭풍이 몰려온 날, 우리 모두가 새로운 하이 포인트에 있었다. 알렉스는 A4 코너에서 피톤을 박으며 올라오고 있었고, 재릿과 나는 빌레이 지점을 정리하고 있었다. 갑자기 발토로 입구에 그 실체를 드러낸 검은 구름의 벽을 완전하게 볼 수 있었다. 몇 분 만에, 벽이 그 구름으로 완전히 가려졌다. 목을 길게 빼고 보아도, 크고 부드러운 눈송이들이 소용돌이치는 그 강한 눈보라 속에서 간신히 알렉스의 형체를 식별할 수 있었다. 이 때까지는 아직 별로 젖은 것이 없었고 모든 모습이 평화로웠다.
10분 지나니, 그 부드러운 눈송이가 바람에 휘날리는 엄청난 양의 진눈개비로 바뀌었다. 나는 빕을 (bibs) 입지 않고 있었으므로, 몇 분 만에 완전히 다리가 물에 젖어 얼어가고 있었다. 이 난리 북새통 속에 알렉스가 저 위 어디에선가 선등을 하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빌레이는 재릿이 보고 있었고, 위에서부터 아래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기 때문에 그고정된 줄을 따라 내가 아래로 내려갔다. 로프는 완전히 얼음에 싸여 있었고, 내 ATC 튜브형 하강기가 그 얼음을 깎아내면서 무릎 위에 축축한 얼음 찌꺼기가 쌓였다. 우리의 루트에 긴 트래버스 구간이 있었으므로, 모든 로프 밑에서 V 자 형으로 하강해야 했고, 그 다음에 다시 다음 앵커까지 주마링으로 올라가야 했다. 주마가 로프를 물지 못하여, 로프 외피 속으로 칼날이 베고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며, 극히 조금씩 로프 겉의 얼음을 칼로 긁어내야만 했다.
갈아입을 옷을 갖고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이 물에 흠뻑 젖었고, 내 가죽 부츠 조차 완전히 물에 흠뻑 젖어서 밖에다 둘 수밖에 없었다. 젖고 춥고 비참한 꼴로, 우리는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 또 한 차례의 즐거움을 앞두고 (with another treat ahead). 오늘밤 고국의 라디오 방송국들과 세 번의 인터뷰를 했다. Yaesu 무선기에는 베이스캠프의 위성 전화를 통해 임시로 전화 접속을 할 수 있어서, 트랑고의 벽에서 직접 전화를 보내고 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제일 처음 한 전화는 모닝 토크 쇼에서 두 명의 코미디언과 한 전화이었다. 두 코미디언이 서로 상대방을 골탕 먹이고 게스트를 바보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쓰는 쇼였다 .샌디에고 방송국에서 나온 사람이 묻는 질문은 ”파키스탄에서 7시에서 11시까지 일하는 사람은 누구죠?“ 라든가 ”자네는 심손 만화를 너무 많이 봐.“ ”트랑고 암벽에서는 용변을 어떻게 보죠?“ ”얼마나 멋진 그림이 나오길 바래죠?“ 라는 질문을 했다.
납작 엎드려 있는 우리의 작은 비박지 위에 폭풍이 무슨 질병처럼 (like a sickness) 머물러 있었고, 그 후 며칠간 아무 것도 못했다. 아무도 후퇴하자는 말을 먼저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나 다 그런 마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혹독한 가르침을 베풀고 있는 날씨는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그 루트가 훨씬 힘들다는 것이 드러났다. 갖고 있는 캠은 충분했다. 왜냐 하면 거의 설치하지 않았으니까. 형편이 안 좋아 보이기 시작한 것은 피톤과 리벳이었다. 원래 갖고 온 35 개의 블레이드 중, 10 개만 남았고, 나머지는 픽스(fixed) 시켰고, 떨어트리고, 망가졌다. 리벳 100 개 갖고 온 것도 조금 밖에 안 남았다. 해머 중 두 개는 손잡이에 금이 갔고, 파워 드릴 배터리 중의 하나는 완전히 죽어 버렸다. 베이스 캠프에 무선을 보낼 때, 그렉에게 “후퇴하면 어떻게 되지?” 하고 물었다. 어떻게 결정하든 회사 측에서는 우리의 결정을 지지할 것이라고 그가 답했으나, 정말로 환영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우리가 실패하면 ‘쿼카’ 사의 모든 사람과 ‘쿼카’ 웹사이트를 계속 보고 있는 수십만 명에게 큰 실망을 주게 되리라는 점은 자명했다. 비참하기 때문에 후퇴한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었다. 아직 우리에겐 시간과 음식과 연료가 있었고 아픈 사람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더 머물러 보기로 했다.
폭풍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는 물에 젖은 침낭들 속에 누워있는데, 러시아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한 시간 후, 우리의 비비 렛지 위로 두 명의 ‘동무’가 올라왔다. 그들에게 뜨거운 차를 대접했고 그들의 빠른 진행에 관해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시작은 2주일 먼저 했으나, 그들은 알파인 스타일 등반을 하여 그 슬랩 전체를 약 1주일 내에 끝냈다. 아직 우리가 꽤 앞서 있기는 했으나, 그들이 위로 고정 로프를 근 300 미터나 깔아 놓아, 이 친구들이 실제로 우리 보다 앞서 가려고 할 가능성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그 러시아인들을 좋아하나, 그들이 전혀 망설임 없이 미국 원정대에게 한방 먹일 수도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엉성하고 낡은 장비를 보니, 이 친구들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장인 알렉산더는 목수가 쓰는 공구 백을 메고 있었고, 주머니에는 티타니움 피톤이 들어 있었다. 아무 것도 클립해 놓지 않았다. “추락하면 어떻게 해? 전부 잃어버리지 않아? ”하고 내가 물었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하기를 “추락하면 안 되지.”
우리의 진행 속도가 느린 이유의 일부는 별도로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웹 사이트를 위한 자료 작성 업무 말고도, 마이크와 지미와 함께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필름 설명 자료를 준비해야 했다. 이 두 사람이 벽을 마음대로 오르내릴 수 있도록 일련의 고정 라인이 (the string of fixed lines) 필요했다. 가장 멋진 사진이 나오는 몇 개의 피치에서 선등하는 장면을 다시 찍느라고 이틀을 보내기도 했다. 폭풍이 끝났다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구름이 크게 뚫리기 전까지, 물에 흠씬 젖은 그 렛지에서 총 11일을 보내야 했다. 우리는 위를 향해 출발했고, 마지막 장비까지 홀링했고, 깔끔하고 완벽한 건축적인 구조를 가진 ‘코너 시스템’ (corner system) 밑에 포털렛지를 설치했다. 다른 대 암벽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이 정도의 코너 지형에는 캠을 박을만한 크랙이 어느 정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우리가 갖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것이 잘못이었다. 그 코너 지대의 크랙은 50 미터 간격으로 가끔 TCU 나 스토퍼를 박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벌어져 있긴 했으나, 그 크랙의 대부분에서 우리는 위로 끝없이 이어지는 비크와 블레이드와 카퍼헤드를 쳐다보게 되었다 (beaks, blades, and heads).
세 피치 오른 후, 루트 전체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피치가 나타났다. 그 헤드월 상에서 가장 심한 오버행이고 와일드한 구간의 위를 25 피트짜리 루프가 덮고 있었다. 그 헤드월 상의 모든 피치가 그렇듯이, 이 피치도 결국 굉장히 힘든 곳임이 드러났다. 여하튼 재릿이 피톤을 때려박고, 가끔은 카퍼헤드를 박았다. 그가 루프에 이르렀을 때 그가 틀림없이 드릴로 구멍을 뚫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 바위 턱까지 곧장 뻗어 있는 그 나이프 블레이드 크랙에 피톤을 박기 시작했다. 그 피치에서 확보물을 회수하면서, 나는 재릿이 박은 피톤을 가로 질러 인공 등반을 해야 했는데 (aid across), 그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노출 그리고 그 턱을 패딩하기 위해 재릿이 쓴 그 모든 테이프 밑에 얼마나 예리한 모서리가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속이 뒤틀렸다. 그 턱을 지나니, 그를 위한 승리의 외침이 저절로 나왔다 - 이제까지 내가 본 것 중, 가장 자부심을 가질 만한 선등의 하나에 속했다.
언젠가는 알렉스가 '얼람'을 무시할 때가 오리라는 내 꿈이 현실로 나타난 것은 우리가 행잉 비비 (hanging biby) 속에 있었던 7월 28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좋아할 수 없었다. 왜냐 하면 왜 그가 매일 아침 하던 그 일을 못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슬리핑 백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보니 알렉스가 배를 붙잡고 옆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속이 안 좋아” 라고 중얼거리더니 그가 문 밖에서 토한다. 오물이 입으로 들어와 감염 되었나 해서 우리 모두가 걱정했다. 우리의 비박지 아래의 마지막으로 지났던 앵커에 한 개의 홀백이 남겨져 있었는데, 일주일 동안 날지 못했던 매들이 (mud falcons) 버린 오물이 잔뜩 튀었다. 어제 이 백을 캠프로 끌어 올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왜냐 하면 그 안에 우리 물의 3분지1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날 알렉스가 끝까지 좁은 테라스에 서 참고 견디도록 남겨두고 재릿과 내가 떠났다. 로프를 주마링하여 피치 두 개에 고정 로프를 깔았고, 오후 7시까지는 그 좁은 테라스로 돌아오지 않았다. 캠프 위 360 미터 길이의 로프 대부분은 허공에 드리워져 있다. 우리 줄 위로 210 미터를 더 올라가면 정상 릿지인 듯이 보였으나, 결국 우리는 길게 세로로 쩍 갈라진 크랙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우리의 다음 활동은 그 고정 라인 꼭대기에서 비비 장비를 갖고 알파인 스타일로 가는 것이었다. 정상에 관한 결정을 하기 앞서 알렉스의 상태가 아침에 어떨지 알아보기로 했다. 아침까지 그가 완전히 회복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이르기 위해 우리가 겪은 모든 일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를 빼놓고 갈래야 갈 수가 없다.
그 동안, 나는 모뎀과 안테나를 연결하고, 30 장의 사진을 다운로드 했다. 위층에서는 재릿이 서퍼들이 (surfers) 우리에게 보내는 안부와 질문을 전하는 최근 이-메일들을 읽어주었다. NPR이 며칠 전의 등반에 관한 기사를 게재했기 때문에, 많은 이메일이 쏟아졌다. 재릿이 그 일부를 잃어준다: “거기는 지표면 보다 중력이 작은가요?” 라고 버클리에서 ‘크리스‘라는 사람이 물어본다. “상당히 높이 올라가면 허공 속으로 유영합니까?”
나는 이제까지 얼람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내가 제일 먼저 알아듣는 것은 알렉스의 목소리인데, 이젠 그의 목소리가 완전히 정상이다: “자, 이제 나서볼까?” 나의 포탈렛지 아래층의 문밖으로, 남쪽에서 다가오는 낮게 드리운 두꺼운 구름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한 시간 후 우리는 비박 장비와 배낭에 넣은 약간의 음식과 연료를 갖고 주마링으로 로프를 올라가고 있다. 알렉스가 첫 블록을 (block) 맡았는데, 매우 쇠약한 상태인데도 이윽고 빠르게 선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재릿과 내가 그를 우리의 “비밀 무기”라고 부른다. 우리는 볼트 박는 장비를 남겨두고 그저 캠 몇 개와 핀과 스토퍼 만을 갖고 간다. 나는 정상 릿지가 꽤 넓으리라고 예상했으나, 실은 나이프에지다. 그 후면의 경치는 내 숨을 멎게 한다: 마셔브룸, 가셔브룸, 브로드 피크가 보이고, K2 만 구름에 가려져 있다. 이들 봉우리에 이르는 발토로 빙하는 거대한 크레바스와 웅장한 얼음 호수로 점철되어 있다. 크레바스와 얼음 호수는 특이한 고유색을 띠고 있다: 청초록, 암녹색, 연녹색, 밤색, 회색, 심지어 붉은 색까지 있다.
오후 3시 경, 미답봉인 그 서쪽 정상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긴 칼날 능선 구간을 지나야 한다. 내가 선등을 인계 받아, 인공으로 작은 벽을 넘은 다음, 눈 덮인 쉬운 5급 지형 위로 기어 올라간다. 바로 건너편에는 네임리스 타워 정상이 보인다. 정상에 너무 집착하지 않고 그저 즐겁게 등반하려고 해본다. 왜냐 하면 오늘이 이 산에서 보낸 가장 멋진 날이 될 것이니까.
정상 바로 밑에서, 45 미터 높이의 트랑고 서봉이 능선 위로 그 뾰족하고 날씬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있다. 알렉스가 출발하여, 쟝다름 (gendarmes, 정상 근처의 바위) 구간을 누비고 올라간다. 두 개의 바위 탑 사이를 스테밍 자세로 올라간 후, 건너편으로 넘어가서 손바닥을 쓰며 어레이트 (칸테) 위로 오르기 시작한다. 갑자기, 알렉스가 그 능선 뒤로 15 미터나 떨어진다. 그를 확보해주는 것이라곤 능선 위의 등뼈처럼 튀어나온 바위에 걸쳐진 로프뿐이다. 재릿과 내가 정적 속으로 그의 이름을 외친다. 몇 분 후 그가 다시 나타나, “난 괜찮아”라고 말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다시 그 피치를 맹렬히 오르기 시작한다. 반시간 후 우리 모두가 그 꼭대기 위에 섰다.
그 꼭대기는 진짜 정상이 아님이 드러났다. 물 흐르는 검은 색 슬랩이 다시 4.5 내지 6 미터 정도 위로 뻗어 있다. 이제는 어두워졌고 그 조금 남은 마지막 부분에는 확보물을 설치할 수도 없고 힘들어 보인다 - 알렉스 조차 거기를 선등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 그 릿지를 다시 돌아가 우리의 비박 장비가 있는 곳까지 가야 했다. 6,000 미터 고도의 그 릿지에서 오픈 비비를 (open bivy) 한 후, 우리의 행잉 캠프까지 (hanging camp) 그 헤드월을 따라 하강하기 시작한다. 아침 내내 격렬한 강풍이 계속되었으나, 오후 1시 경 바람이 잦아드는 것 같았다. 갑자기 기압계의 눈금이 조금 올라가서, 비박 장비를 해체하고 헤드월 밑을 향해 계속 내려갔다. 그런데 이것이 큰 실수였음이 드러났다. 모든 짐을 여덟 개의 커다란 홀백으로 꾸리고, 우리의 캠프 아래로 두 차례의 하강을 했을 때, 폭풍이 원래의 힘을 갖고 되돌아와, 이번 원정 기간 중 가장 심한 폭우를 쏟아 붓는다. 난장판이 벌어지기 시작할 때, 안개를 통해 러시아 사람들의 핑크색 포탈리지가 흐릿하게나마 보인다. 그들의 진행 속도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으나, 그들은 아직도 600 미터 정도의 어려운 등반을 해야 한다. 누군가 외친다: “정상에 도착했습니까?” “예스”라고 재릿이 큰 소리로 답한다.
한참 아무 말 없다가, “축하합니다!” 라는 말이 들린다. 그 소식이 얼마나 그들의 사기를 저하시켰을는지 상상할 수 있다. 안된 일이지만, 그들이 정상에 이르기 전에 우리는 베이스캠프를 떠나야만 하겠지. 이십 분 후, 우리 로프 끝의 매듭에 매달려 있는데, 내 머리 위로 폭포수가 쏟아져서 올려다 볼 수조차 없다. 하얗게 거품을 내는 물이 5 cm 두께로 벽 전체를 뒤덮는다. 파워 드릴도 움직이지 않고, 나 자신도 너무 지쳐서, 우리 자신과 홀백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3/8 인치 구멍을 핸드 드릴로 뚫지 못한다.
내가 옆으로 6 미터를 스윙한 다음 , 벌어진 바위를 잡고, 몰려오는 어둠 속에서 캐머럿 네 개를 박는다. 몇 번 하강 하고 나니, 바지 가랑이를 따라 물이 시냇물처럼 흘러나온다 (thick rivulets). 쏟아지는 물소리가 너무 많아지니 나중에는 나도 소변보고 싶어진다. 창백한 손은 전혀 감각이 없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이 헤드램프 빛다발 속으로 솟구치자, 아무 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그 따스한 물살 속으로 손을 밀어 넣는다. 거의 즉시 감각이 되돌아오기 시작하고, 저린 손이 풀리는 고통과 함께 내 손이 오그라들자, 테크 팁에 (Tech Tips) 이 이야기를 꼭 써야하겠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거벽 등반을 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뭔가 틀림없이 나는 잘못되어 있는 것 같다. 이제 겨우 몇 주 지났는데, 벌써 트랑고와 비슷한 모험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꿈에라도 미디어 쪽 일을 (media stuff)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진 않으나, 이런 원정을 위해서는 약간의 절충이 필요함도 깨달았다. 그러나 다음번에는, 필름이나 웹 사이트 둘 중 하나만 하지 둘 다 할 생각은 없다. 이런 식의 프로덕션은, 내가 늘 왔던 식의 등반 보다는 재미가 덜 하다는 사실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활동에 대해 아무도 관심 갖는 사람도 없고, 그저 세상을 뒤로 한 채, 단지 친구 두 사람과 같이 할 때 같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 등반에 몰입하는 삶의 약점 중의 하나는 남들은 항상 그런 등반으로부터 거의 얻는 바가 없다는 점이었다. 웹을 통해 내 삶의 가장 의미 있는 경험의 일부를 남과 공유할 수 있고 또한 즉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방식을 드디어 이번에 찾은 셈이다. 그리고 벽 등반 기간 중 날마다 통화할 수 있다는 점이 내 집사람과 내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나는 아직 언급조차 하지도 않았다. 이런 계약을 앞으로 할지 안할지는 모르나, 또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거벽 경험을 통해 배운 바에 의하면 안 된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라는 것이다 (never say never).
등반개요
날자: 1999년 6월 - 9월
장소: 파키스탄 카라코룸 트랑고 빙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