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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문학ㆍ예술 스크랩 법정스님과 김영한 할머니.... 사랑
pulsi 추천 0 조회 59 10.05.09 19:11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법정스님이 입적하시고난뒤 많은사람들이 길상사란 사찰이 관심거리가 되고

아울러 무소유란 단어가 세간의 화두로 떠오르고있다.

그럼 길상사란 어떤절인가싶어 이곳저곳 뒤져 ?아보고 정리해본다...-카페지기-

 

길상사의 유래

 

박정희 전 대통령시절 서울의 유명한 3대 요정이라면 삼청각 청운각 대운각을 손꼽을수 있다

당시막강한 권력의 정치인들이 자주?던 최고급 요정으로

숱한 여인들의 애환이, 당시 절대권력자들과 한때를 풍미했던 곳이기도한 대원각요정....

이곳의 안주인 김영한이라는 여주인이 있었다.

 

1997년 이곳안주인 김영한 여사는 당시 불교계에 연을맺고있던 법정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뜻을 밝힌다

7천여평의 대지에 40여동의 건물로이루어진 요정 대원각 ,당시시세로도 1000억이넘는

어마어마한 재산, 그러나 무소유를 말씀하시며 받지않으려는 법정스님,

결국,법정스님은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로 등록하여 길상사라는 절로 다시 태어난다.

 

 이날 법정스님은 김영한 할머니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지어주고

108염주 한벌을 길상화 공덕주에게 걸어준다.

그리고 길상화의 이름을 따서이절의 이름을 길상사(吉祥寺)라 정하게 되었다 한다.

그후 길상화는 길상사 경내를 산책하면서

"나죽으면 화장해 길상사 경내에 뿌려주시오" 유언을하고

이튿날인 11월14일 108염주를 목에건채 파란만장한 83세의 일기를 마친다.

그해 49재를 지내고 그의 유언대로 길상사 경내에 스님들이 그의 재를 뿌려주었다.

길상사는 천주교와도 연(緣)이 깊은데 개원법회때는 역시 고인이되신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기도 했으며

2000년엔 천주교신자인 최종태씨가 성모마리아상과 흡사한 형태의 관세음 보살상을 조각해 봉헌하여

경내에 안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지금도 길상사 경내에 수녀님들과

천주교 신자모습을 종종 볼수 있다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않았지만 이런 연유에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는 사찰이가도 한다네요. 

성모마링아상과 닮은 관세음 보살상

 

김영한 할머니, 길상화와 시인 백석(白石)의 소설같은 휴먼 러브스토리.

 

서울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집이 몰락하자 가남한 탓에

16살의 어린 나이에 몸이약한 신랑에게 팔려갔다.

우물가에서 빨래를하는사이에 남편은 그만 우물에 빠져 죽는다.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에 끝내,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그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위해스스로 한성 기생 진향(眞香)으로 다시 태어난다

가무와 궁중무를배워 서울의 권번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젊은시절 김영한과, 18세 기생 진향(眞香)

 

잡지에 수필을 발표할정도로 시와 글, 글씨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기생이었다

스물세살때 흥사단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 유학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스승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함흥 감옥을 ?아가지만 면회를 거정 당한다.

그리하여 신지식 여성에서 다시 기생의 길을 택한그녀, 함흥기생이 되면

지역유지의 도움으로 스승의 모습을 볼수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시인 白石.

 

김영한보다 네살더 많았던 시인 백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함흥 영생여고 영어 교사로 있다가

우연히 만난 기생 김영한과의 첫만남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다짐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때까지 이별은 없을것"이라고

하지만 백석의 집안에서 아들이 기생에게 빠져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다른여자와 결혼을 시키게된다.

그러나 결혼식날밤  집을 빠져나온 백석은 영한에게 달려와 만주로 달아나자고 설득하지만

그에게 걸림돌이될것같은 마음에 영한은 끝내거절하자  1939년에 혼자 만주로 떠난다.

이것이 이들두사람사이의 영원한 이별이 된것이다.

 백석은 만주를 유랑한뒤 해방이 되어 다시 함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영한은 다시 서울로 돌아간뒤여서 만날수없었고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이후 평생 백석을 그리워한 김영한은 1996년 2억원을들여  "백석 문화상"을 제정하고

같은해에 대원각을 시주하게 된다.

침묵의 집 맞은편에 무소유를 몸소 실천한 김영한 할머니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길상화 공덕비

 

金英韓 여사의 일화 

 

 어느날 백석은 진향(김영한 기생이름)이 사들고 온 시집을 뒤적이다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서는  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는 장안에서 서역지방으로 오랑케를 물리치러나간 낭군을 기다리는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시이다.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백의 춘하추동 오언율시 중에서 가을편이

'장안달 밝은반에'로 소개된적있다

이백외에도 중국의 여러 시인들이 자야가를 썼다.

백석이 하늘이 맺어준 여인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붙여준것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던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김영한은' 내사랑 백석' 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미도 당신은 두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것은 아닐까.'

 

백석이 당시로서 최고의 직장인 고보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이런일도 있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교사로 서울에 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어 졌고

이에 백석은 미련없이 자야의 옆에있기위해 사표를 던지지만

운명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

자야가 죽기전 젊은 기자가 김영한 여사에게 물었다.

 

*.천억대 재산을 내놓고 후회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사람생각을 언제 많이 하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천억을 내놨으니 만복을 받으셔야지요.

"그게 무슨소용있어.."

 

*.다시태어난다면... 한국에서?

나..,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文學할거야."

 

*.그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천억이 그사람 詩 한줄만도 못해"

"다시태어난다면 나도 시를 쓸거야"

 

-- 평생 사랑한사람을 못잊어 다시 그사람의 뒤를 따르겠다는 여사의 일념이

 당시 여인상을 대변하는것 같다--

 

 

상사화

 

잎이지고나면 꽃이 핀다는 상사화,

두사람의 사랑이 잎과 꽃이 영원히 만날수없는 상사花 같은 사랑이었을까?

 

80평생을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인생을 살다가신분,

1999년 12월어느날, KIST(한국과기대)에 김영한여사의 유언장한통이 전달되었다.

한국 과학기술 영재 양성에 써달라는 유언과 함께 100억원이 넘는 여사소유의 부동산을 기부하고는

무소유의 고귀함을 몸소 실천하고 가신분... 기생 眞香. 金英韓 女史.....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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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0.05.11 22:14

    첫댓글 감사해요, 백석의 시를 보면 정말 가슴이 설레이는 총각같고 어딘가로 내정신이 빠져나가는 듯 멍한 기분, 그리고 애절한 시골집에 내가 누워있는 기분이 드는 시인이죠? 저는 그리 느낍니다.

  • 10.05.11 21:51

    풀씨님, 뒷북을 치셨구랴! 라복님이 예전에 올린 적 있는데, 아무튼 다시 보게 되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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