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파병 일지 - (2) 비둘기 부대 (주월한국군사원조단, 건설지원단) 파병
비둘기 부대 (주월한국군사원조단, 건설지원단) 파병
1965. 01. 27 : 주월한국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 본부 창설
1965. 02. 05 : 주월한국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 경기도 현리에서 결단식 거행
1965. 02. 09 : 서울운동장(동대문야구장)에서 파월 장병 환송 국민대회 개최
1965. 02. 13 : 선발대 부산항에서 출발
1965. 02. 25 : 선발대 사이공(Saigon)에 도착
1965. 03. 10 : 본대 인천항에서 출발
1965. 03. 16 : 본대 사이공(Saigon)에 도착한 후 디안(Di An)으로 이동 주둔
1965. 09. 25 : 주월한국군사령부가 창설되면서 그 예하부대가 되어 건설지원단으로 부대명 변경.
월남파견장병 환송 국민대회 (비둘기부대)서울운동장야구장 1965.2.9
비둘기 부대장 조문환 준장을 비롯한 참모들 모습
환송식 후 시가행진하는 모습
비둘기 부대 1진 해군 LST편으로 부산항에서 월남으로 출발하고 있다. 1965.2.13
비둘기부대 1진 월남 상륙 1965.2.25
비둘기 부대 주력 인천항 출발 1965.3.10
USS General W.A.Mann AP-112 (1965.3.10~3.16 비둘기부대 주력진을 인천항에서 사이공까지 수송한 함정)
비둘기 부대 주력 월남에 도착하여 환영을 받고 있는 모습 1965.3.16
정부는 1964년 미국 정부로부터 2차 파병 요청을 받고 주한미군 유지 강화 등 8개항의 전제조건을 내걸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2일 국방부가 공개한 베트남전 관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1965년 1월8일 김성은 당시 국방장관은 하워즈 주한
미군사령관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병력 증파에 따른 대국민 설득 차원에서 미국 정부의 사전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김 전 장관은 "1965년 1월5일 월남공화국으로부터 요청받은 정식 원조단을 증파 하는데 있어서 국회 동의를
얻어야 하고 국민을 이해시켜 찬성을 얻는데 최소한 몇 가지 사항이 사전에 조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추가 파병으로 현재의 방위력을 약화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 절대적인 여론인 만큼 현재 미국이 유지
하고 있는 주한미군의 병력을 계속 유지 강화할 것이라는 확고한 보장을 공포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또 한국군의 전투력이 약화하는 것을 막으려면 총병력을 60만명 선으로 유지하기로 한 한미간 합의사항
을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다는 조건도 내세웠다.
이어 김 전 장관은 "부대 증파에 따라 미국 정부가 증강 부담하게 되는 재정적 부담으로 인해 한국에 대한 MAP
(군사원조계획)이나 경제원조 씨링(한도)이 감축되는 일이 없도록 조치 바란다"고 말했다.
특히 2천여명에 달하는 병력을 해외에 파견.유지하는데 들어가는 한국측 경비부담에 대해서는 미국 정부의
'충분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고 말해 파병에 따른 각종 부대비용을 부담해주도록 간접 요청했다.
김 전 장관은 한미 상호간 합의된 해외근무수당(PER DIEM) 리스트에 누락된 준장과 준위의 PER DIEM은 각각
10달러와 3달러50센트로 책정해 주도록 요구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그는 베트남으로 빠져나가는 한국군의 군사장비를 대체하는 장비를 보충하고 병력 수송용 함정과 항공기 연료
제공, 경비 대대(777명)의 전투 참가 불가 등의 조건도 내걸었다.
이에 대해 하워즈 사령관은 1965년 1월11일 김 전 장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주한미군을 현 수준에서 계속 유지
하기 위한 공식적인 보장은 해드릴 수 없다"고 답변했다.
그는 '한미의정서 부록B'에 한국군의 인가병력 규모가 60만명이라고 명시돼 있다고 강조해 총병력 조정 재검토
불가 입장을 표명했다.
하워즈 사령관은 "유류 제공은 가능하지만 (베트남으로 빠져 나가는) 한국군의 장비를 대체할 장비 보충이 한국
에서 이뤄질 수 있다는 즉각적인 전망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1964년 12월18일 당시 윈드롭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방문해 베트남전쟁 상황과 미국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고 한국군의 증파를 요청했으며 이틀 뒤 박 대통령은 국방장관에게 이를 연구할 것을
지시했다.
비둘기부대 주둔지 모습 (디안) 1965
이에 따라 국방부는 1965년 1월 26일 2차 파병 국회동의를 거쳐 1월 27일 경기도 현리에 위치한 제6사단
사령부에서 ‘주월(駐越)한국군군사원조단'본부를 창설하고, 2월 5일 결단식을 거행하였으며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부대‘로 명명했다.
단장에는 조문환 준장을 임명하였으며 육군과 해병, 공병으로 구성된 공병대대,자체방어를 위한 경비대대,
수송중대,그리고 해군 LST 수송 분대 200명 등으로 편성된 혼합부대로 편성하고 앞서 파병된 이동외과병원
과 태권도 교관단을 통합 지휘하게 하였다.
2월 9일 2차 파병부대인 '주월한국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을 환송하는 "파월장병 환송국민대회‘를 대통령과
3부요인 및 완전무장한 1.894명의 장병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하였다.
'주월한국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 이천여명중 1진은 2월19일 부산항에서 출발 2월25일 사이공에 도착하였
으며 조문환 단장을 비롯한 지휘부 및 본대는 3월10일 인천항을 통해 월남으로 출발 3월16일 사이공에 도착
하여 환영식에 참석하고 디안으로 이동 주둔하였으며 1965년9월25일 주월한국군사령부가 창설되면서 그 예하
부대가 되어 '건설지원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베트남전쟁 당시 남베트남 수도였던 사이공은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동시에 파병된 연합군의 민사심리전 경쟁
터였다. 건설지원단이 주둔했던 디안 지역은 남베트남군 제3군단 관할 지역으 로 캄보디아 국경으로부터 빈호
아와 디안을 거쳐 사이공 남단에 이르는 호치민 루트로 연결되는 베트콩의 핵심 루트인 ‘D지역’ 이었다. 이곳
을 중심으로 미군, 태국군, 오스트레일리아군 등이 10개 성(省)을 대상으로 연합 심리전을 전개했는데 비둘기
부대의 민사심리전이 으뜸이었다.
비둘기부대는 1965년 파병 당시에는 한국군 군사원조단으로서, 육군 제127공병대대, 제101경비대대, 해병
제1독립 공병중대 등으로 편성했으며,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부대’로 명명하고 파병과 동시 제1이동외과
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통합 지휘했다. 이후 전투부대의 파병과 함께 주월 한국군 사령부가 창설되자, 건설
지원단으로 개편하여 ‘일면 작전, 일면 건설’로 남베트남 전 지역에서 댐과 도로, 병원과 학교 등 건설 지원을
통해 남베트남 정부의 평정 사업 달성에 기여했다. 한국군의 건설사업은 민사작전과 연계하여 전투의 승리로
이끌어가는 첩경이었으며, 지역 사회 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베트남인들에게 각종기술을 습득시켜 자립 능력을 부여하고 생산적인 인력을 개발하여 베트남의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1968년 비둘기 부대의 영내에 설치된 ‘비둘기 기술학교’는 베트남 정부의
정식인가를 받아 발전기및 엔진 전문교육을 실시했으며, 양재학원은 재봉자수 교육과정을 운용했다.그 외에도
비둘기부대는 농토개간을 비롯하여 수리시설 개선과 함께 농기구등을 기증하여 농산물의 증산에 기여를 했다.
비둘기부대 결단식(1965.2.5), 환송식 및 시가행진(1965.2.9) 동영상
비둘기부대 주력진 인천항 출발~ 사이공항 도착 모습1965.3.10~3.16 (미수송선 AP-112함 모습도 보인다)
주월한국군사원조단 부대기 모습 (1965.2.9 환송식 사열시 모습)
비둘기부대 부대기와 부대마크
첫댓글 연대는 대충 기억 납니다.
중학교때 부두에 환송식에도 나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