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7월17일이면 대한민국 헌법이 공표된 지 50년이 된다. 특히 올 12월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권력구조를 그대로 둘 것인지 아니면 근본적 개혁을 시도할 것인지를 놓고 정치권 안팎에서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데 한가지만은 이미 국민적인 합의를 얻고 있다. 즉 「제왕적 대통령」 한사람에게 국운을 맡기는 오늘의 권력구조로서는 만성적 정치적 파탄을 면할 수 없고 국민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지 권력분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어느 정도로 하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자민련의 김종필 후보는 오랫동안 내각제로 하루빨리 고쳐야 한다는 입장이고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는 대통령제를 선호하면서도 「정권교체를 지상과제」로 삼고 그 수단으로 내각제 개헌을 수용하되 개헌의 시기를 제15대 국회 말(2000년 봄)로 잡고 있다. 그런가 하면 권력구조 변경에 관한 한 가장 보수적인 신한국당의 이회창 후보는 개헌을 반대하되 이른바 「책임총리제」 도입을 약속하였다. 그의 주장이 현행 헌법 테두리 안에서 실천될 수 있을지는 분명치 않지만 『총리가 소속 정당에서 마음에 맞는 사람들로 내각을 구성, 책임지고 일하는 제도』이고 『대통령은 위에서 총리를 감독하고 후견하는 방법으로 나라를 이끌어가는 것』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다.
대통령이 언제든지 총리나 각료를 해면할 수 있는 것이 현행 헌법인 만큼 대통령이 후견인으로 물러앉는 그런 대통령책임제가 과연 가능할지는 매우 의심스럽기는 하다. 그런 점에서 이후보의 제안은 좀더 부연되어야겠지만 신한국당이나 이후보 역시 권력분산이라는 국민적 여망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국민의식은 어떤 것인가. 지난 10년간 간헐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내각제 정부형태가 서서히 지지세를 얻고 있는 추세다.
1987년 10월만 하더라도 대통령중심제를 64.6%가 지지해 내각제 23.9%를 압도했다(동아일보 87년 11월5일자). 5년 후인 92년 12월에도 대통령제 선호 34.2%가 내각제 선호 25.1%를 앞서 있었는데(한국선거연구회 조사) 다시 5년 후인 97년 5월에는 내각제 선호 48.3%가 대통령제 선호 34.9%를 크게 상회하고 있다(97년 5월15일 갤럽조사). 여론의 흐름이 크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87년에 개정된 헌법은 대통령직선제였다. 그에 앞선 「군사통치」 26년 동안 국가통치의 「대권」은 대통령에 있었는데, 6월 항쟁의 승리로 대통령을 직접 뽑자는 염원이 구현되기는 했으나 국정의 핵심이 대통령에게 있다는 기본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5·16 군사쿠데타가 있기 전 9개월 동안 내각제가 실시된 적은 있으나 그 공과를 평가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었고, 그 이전 12년간 그러니까 건국 후 이승만 대통령의 재임기간은 줄곧 통치권이 대통령 한사람에게 집중되었었다.
그러나 말이 대통령제이지 우리가 경험한 것은 미국에서 성공한 3권분립 아래 권력이 분립, 상호 견제하는 그런 대통령제가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권력이 대통령 1인에 집중되는 전제군주제에 가까운 제도요 관행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전근대적 제도 아래 정치가 국민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조절하기는 커녕 오히려 갈등과 분열을 조장했고 억압과 저항의 연속이었으며 몇차례의 쿠데타와 정변이 반복되었다. 왜 이런 비극이 반복되었는가. 이유는 분명하다. 균형과 견제를 바탕으로 입법부와 행정부가 대등한 관계에 있는 순수대통령제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제왕적 대통령」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제도 및 관행이 굳어진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어떤 선택이 있는가.
우선 미국식으로 입법부를 행정부와 동등하게 격상시켜 합의정치를 이끌어 내고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아 보이는 대통령단임제를 중임제로 고치는 대안을 생각할 수 있다. 아니면 4·19 후 잠시 선만 보였다가 좌절된 의원내각제를 택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정부형태, 즉 반(半)대통령제(Semipresidentialism)라고 불리기도 하고 이원집정부제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프랑스식 권력구조가 제3의 대안으로 거론될 수 있다.
권력구조 개편은 시대의 흐름이 되었고 국민의 내각제 선호도가 높아졌다는 것은 대단히 주목할 일이다. 그리고 다음 선거에서 야당이 이기는 경우에는 헌법 개정은 현실화 될 것이고 여당이 이겨도 권력분산 논의는 계속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찌감치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심도있게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할 수 있다.
73년 9월11일 아침 칠레 공군의 제트기가 모네다 대통령궁 상공에 나타나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가하였다. 이 공습으로 모네다 궁의 주인공인 살바도 아옌데 대통령이 폭사하였다. 그는 사회주의자였으나 민주주의 틀 안에서의 사회정의를 추구하면서 그를 바탕으로 한 사회개혁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쿠데타는 그의 인민통일전선 정부에 종지부를 찍었을 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체제의 하나를 폭력수단으로 붕괴해 버리고 말았다.
중남미형 대통령제가 주는 교훈
중남미 나라는 19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할 때 미국의 영향을 받아 예외없이 미국의 대통령제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칼 뢰벤스타인이 『미국의 대통령제는 미국 이외의 다른 나라에 수출되는 순간 죽음의 키스를 만난다』라고 지적했듯이 어느 곳에서도 민주주의적 안정과 능률을 누리지 못하였다. 그 가운데 칠레는 예외였다. 중남미 다른 모든 나라에 발생했던 군사쿠데타가 건국 1백40년간 한번도 없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면 아옌데 정권이 군부 개입으로 무너지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던가.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중남미의 모든 나라가 경제적 침체, 빈부격차, 계급간의 갈등, 인종간의 불화 등의 정치적 안정을 저해하는 경제적, 사회·문화적 조건을 안고 있었다. 어떤 제도로써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었고 대통령제를 택하든 내각제를 택하든 제도의 우열이나 적합성 여부에 앞서 문화와 전통과 환경이 민주적인 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한 사회·문화적 후진성을 빠른 속도로 개선하는 데는 당연히 강력한 정부의 리더십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더디고 번거로운 민주주의 절차를 밟고 공정한 선거를 통한 정부를 창조하고 그러는 가운데 국민통합이 이루어지는 제도의 정착이 매우 어렵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이 개발의 명분을 내세워 일종의 「위임통치권」을 행사하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대통령제를 기렐르모 오도넬은 대의민주주의의 개념과 대치되는 위임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위임민주주의」라는 논문에서 오도넬은 이렇게 말한다.
「위임민주주의는 하나의 기본전제 위에 자리하고 있다. 즉 대통령 선거에서 다수를 얻은 자는 그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나라를 통치하며, 그리고 그가 당선되어 통치하는 기간에 최대한도의 권력을 행사한다」 그가 말하는 위임민주주의의 주요 특색은 무엇인가. 대통령들은 그들 스스로를 모든 정당의 「상위」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국회나 사법부와 같은 헌법기관을 「귀찮게 구는」 존재로 보고, 그들에 책임을 지는 것을 불필요한 걸림돌로 간주하며, 대통령과 보좌역들이 정치의 알파와 오메가로 생각하고, 대통령은 자신을 대부분의 정치기구와 거리를 두고 자신만이 「자기 스스로」의 정책에 책임을 진다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고 일정한 임기가 있기 때문에 재임기간 대통령 개인이 국가통치권을 위임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데 있다. 선출되는 순간 「제왕적 대통령」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오도넬 교수의 「위임민주주의」는 중남미에서 성행하는 대통령제 정부의 공통점을 지적한 것이다. 명목상 3권이 분립되어 있으나 대통령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그에 대한 입법부의 견제기능이 제구실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선거의 부정, 반대파 탄압, 언론의 자유의 제약, 법치주의의 유린 등의 수법이 동원된다. 그러나 만일 입법부를 대통령을 반대하는 세력이 지배하는 경우, 정부기능의 교착 내지 마비상태를 맞게 되고 헌정의 위기를 몰고 온다.
앞에 적은 칠레의 경우 비극의 발단은 70년 대통령선거였고, 불행의 씨는 대통령 단임제였다. 64년 대통령선거에 중도우파인 기독교민주당의 에드워드 프레이 후보가 55.7%의 지지표로 좌파연합의 아옌데(38.6%)를 압도적으로 이겼다. 69년에 있은 국회선거에서도 기민당이 이끄는 우파연합은 49.8%를 득표했고, 좌파연합은 43.9%로 역시 우파의 승리였다.
프레이는 보기 드문 인기있는 대통령이었으므로 단임제 제한이 없었던들 70년의 대통령선거에 나서 가볍게 이겼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칠레 민주주의는 그런대로 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임제에 묶인 그를 대신해서 나선 라도미로 토믹은 27.8%를 얻는데 그쳤고 그 대신 세번째 출마한 대통령 3수생 아옌데가 36.2%로 당선되었다. 여기서 간과해서 안될 사실은 우파인 국민당의 조르게 알렉산드리 후보가 34.9%를 얻은 것이다. 불과 1.3%의 표차로 정권을 놓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토믹과 알렉산드리가 연합했더라면 우파연합이 60% 이상의 득표로 대승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만일 과반수 득표당선제였다면 역시 우파가 이겼을 것이다. 아옌데는 사회당과 공산당이 연합한 단일후보였다. 73년에 있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기독교민주당과 국민당은 각각 28.5%와 21.1%를 얻었고 다른 군소우파들과 합치면 우파연합은 54.2%의 과반수 다수를 얻었는데, 아옌데가 이끄는 좌파연합인 인민통일전선은 43.9%에 그쳤다. 소수파 대통령 등장에 국회는 「여소야대」의 세력분포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들을 두고 중남미 전문가인 스코트 메인와링은 이렇게 말했다.
『아옌데의 반대자들은 아옌데 정권이 6년임기(1970∼76)를 마칠 때까지 칠레가 권위주의적 공산주의 국가가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이 군사쿠데타를 불러들인 것이다. 아옌데는 73년 국회선거에서 다수의석의 지지를 상실했다. 만일 내각제 헌법제도가 있었더라면 그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 70년 대통령선거 당시 내각제였다면 정권은 우파연합이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제 하에서 쿠데타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인기없는 소수파 정권을 축출할 길이 없었다. 여러 경우에 무능하고 인기없는 대통령을 추방하는 길은 쿠데타밖에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결론이다』 우리는 48년 건국 이래 극히 짧은 기간(60년 9월∼61년 5월)을 제외하고는 대통령 정부형태의 정치였고 역대 대통령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제왕적 대통령으로 군림하였다.
명실상부하게 3권이 분립하고 국민의 기본권이 보장되고 입법부가 행정부와 대등한 관계에서 대통령의 권력남용을 방지하는, 그런 미국식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다음 몇가지 점에서 중남미형 대통령제와 흡사하였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나라 「제왕적 대통령」제의 성찰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역대 대통령은 오도넬이 말하는 「위임민주주의」 같은 것을 믿고 실천하였으며 그 결과 그들의 말로(末路)는 예외없이 비극적이었다. 권력을 동원하여 입법부와 언론의 기능을 위축시켜 독선·독주·독재의 길을 걷다가 추방되어 망명길에서 쓸쓸하게 삶을 마쳤거나 직속부하에게 사살되었거나 상상할 수 없는 권력남용과 부정부패로 형무소에 가야 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이른바 「문민정부」에 들어와서도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은 바뀌지 않았고 대통령 아들 김현철 국정농단, 한보비리, 그리고 96년 말의 날치기 사건 등으로 모혈을 팠고 대통령하야론을 자초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직선제 대통령이 그의 권력남용을 합리화시키는 「위임민주주의」는 대통령의 대중인기를 전제하는 것이므로 지속적인 인기영합주의 추구로 나타난다. 아르헨티나의 페론 운동은 근로자의 인기에 영합하다가 경제파탄을 자초한 고전적 사례다. 80년대에 세계적 이목을 끌었던 아르헨티나의 라울 알폰신 대통령의 경우, 취임 첫해인 84년 5월에는 82%의 높은 지지율이었으나 87년에 54%로 떨어졌고 임기만료 6개월 전인 89년 4월엔 36%로 떨어져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하야하고 말았다.
페루의 안란 가르샤 대통령의 경우는 더 인상적이다. 85년 9월 취임 때 그는 90%의 지지율이었으나 86년 9월에는 70%, 87년 10월엔 44%, 88년 10월에는 16% 그리고 그만두는 89년 1월에는 9%로 떨어졌다. 김영삼 대통령의 경우에도 당선 당시 42%의 소수파 대통령이었으나 인기영합적인 「개혁」 바람을 일으켜 취임 초기 지지율은 68.8%였고 6개월 뒤에는 83.6%로 치솟았다. 그는 남의 의표를 찌르는 대담한 개혁정책을 잇따라 단행, 공직자 재산공개, 금융 및 토지의 실명제, 군의 탈정치화, 그리고 12·12 쿠데타와 5·18 내란의 단죄 등 역사적인 결단을 내렸음에 불구하고 96년 3월 초 그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는 36.2%로 떨어졌고 97년 5월에는 8.6%로 폭락하였다. 96년 4월 총선거에서도 과반수의석에서 11석이 모자라는 결과를 초래했고 그의 신한국당에 대한 지지표는 34.5%밖에 얻지 못하였다. 분열된 야 3당의 득표를 합하면 지지표는 52.7%가 넘는다.
우리나라 정치는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의 공정선거가 실시될 때마다 「여소야대」 현상이 나타났다. 48년 5월10일의 제헌선거는 여야를 가리기 어려운 선거였으나 첫 국무총리 임명이 국회에서 부결될 정도로 대립관계였고 50년 5월 30일 총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은 극소수였다. 6·25 전쟁으로 국회가 제기능을 다할 여건이 아니었으나 52년 여름 국회에서 있을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 재선이 불가능한 전망이었다. 52년 4월 야당의원 1백27인은 내각제 헌법개정안을 제기하였는데 당시 의원수가 1백89명이었으므로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에서 한사람이 많은 다수가 반 이승만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여소야대」의 극치였다.
당시 이승만은 대통령제 직선제 개헌안을 그해 1월에 제출했으나 찬성표가 불과 18표밖에 안되어 폐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야당연합이 내각제 개헌안을 제기하자 다시 대통령 직선제안을 제출한 다음 헌병과 경찰을 동원하여 물리적 힘으로 야당세력을 굴복시켜 국면을 전환하였다. 18년간의 박정희, 그리고 8년간 전두환의 통치기간에 선거는 있었으나 자유선거는 아니었다.
87년의 6월 항쟁으로 72년의 「유신쿠데타」로 빼앗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 그해 12월의 대통령선거에서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김영삼·김대중 두 지도자는 도합 55%의 지지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36%를 얻은 노태우에 「군정연장」을 허락하였다. 만약 내각책임제였다면 정권은 민주화 세력에 평화적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노태우의 민정당은 88년 총선거에서 총 2백99석 가운데 1백25석을 얻는데 그쳐 「여소야대」 정국이 전개되었다. 36%의 소수파 대통령에 34%의 지지밖에 없고 의석수가 42%밖에 안되는 소수파 여당이었다. 국민 다수의사에 반하는 정부가 나라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소야대」에 겁먹은 노태우 정부는 결국 선거에서 표출된 국민 의사를 배반한 3당합당으로 원내 4분의 3이 넘는 민자당을 만들고 내각제개헌으로 일본 자민당식 장기집권을 구상하였다. 김대중씨의 강한 반발에 김영삼씨가 동조함으로써 내각제개헌 계획은 무산되고 92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정권이 태어났다. 그러나 득표율은 42%에 불과하였고 야당인 민주당 김대중의 34%와 국민당 정주영의 16%, 그리고 무소속의 박찬종의 8%까지 합하면 김영삼정권의 지지기반은 결코 튼튼한 것이라고 볼 수 없었다.
3당 합당으로 4분의 3 의석을 가졌던 노태우의 민자당은 92년 3월 총선거에서 38% 득표에 불과하였고 의석은 과반수에서 1석이 모자라는 패배였으나 무소속을 흡수, 안정세력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96년 4월11일 총선거는 분명히 여당의 패배였다. 득표율은 35%였고 의석수는 1백39석이었다. 과반수에서 11석 부족이었다. 그러나 자민련과 무소속의 영입으로 원내 1백54석을 확보, 96년 말에는 노동법 등 개정안을 파렴치한 날치기로 감행하였다.
우리 헌정사는 대통령이 국회를 지배하면 1인통치로 독주하는 반면, 「여소야대」가 되면 부도덕한 수단으로 이를 극복하든가 아니면 정치의 위기·공백을 맞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중남미의 경우 대부분의 나라가 대통령 1인독재화를 막기 위해 단임제로 임기를 고정시킴으로써 사실상 대통령 무책임제를 만들었다. 대통령중임제 하에 대통령이 능력을 발휘하면 「재선」이라는 상을 받고 잘못하면 「낙선」이라는 벌을 받을 수 있는데, 5년 단임제라는 짧은 기간에 인기영합의 성급한 정책을 밀고나가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우리 헌법 역시 이승만·박정희 두 대통령의 장기집권 이후 5공 7년단임제, 그리고 87년 개헌시 5년단임제로 국한시켰다. 이렇듯 국정책임자의 임기의 경직성은 아무리 무능하고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교체할 방법이 없고 아무리 일을 잘해도 다시 모실 도리가 없다.
김영삼 대통령은 2월25일과 5월30일 두번에 걸쳐 「참담하고 처절한」 사과담화를 발표했으나 책임지지는 않았고 국정의 표류가 계속되었다. 지금까지 우리의 대통령제가 미국형이 아니라 중남미형 대통령제로 정치 위기와 파탄의 연속이었음을 살폈는데, 그밖에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제에 전혀 불필요한 국무총리 등 이질적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행정상 혼란만 가져왔다. 대통령에 대한 약간의 견제조치이지만, 국무총리가 내각의 수반이 아니라 대통령을 보좌하는 수석국무위원에 불과하고 대통령은 언제든지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을 해임할 수 있으므로 대통령의 독단·독주를 견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헌법은 「여소야대」가 되는 경우 야당국회가 원한다면 국정을 완전히 마비시키고 대통령을 무력화시킬 권한이 부여되어 있다. 재적과반수 찬성으로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을 해임 건의할 수 있고 국무총리·국무위원 또는 정부위원을 국회에 출석 답변을 요구할 수 있다. 국회는 또한 대통령·국무총리·국무위원·행정각부의장을 탄핵소추할 수 있는데 대통령의 경우만 3분의 2 이상 찬성을 요하며 총리·장관의 경우에는 재적과반수로 가능하다.
국무위원의 임명에 대한 총리의 제청권 역시 대통령제하의 헌법에서 별 뜻이 없고 실제로는 대통령 멋대로 임면하고 있다. 다만 국무총리 임명에는 헌법상 국회의 사전동의를 얻어야 하므로 「여소야대」 국회에서 반드시 대통령의 판단에 따르는 사람이 임명될 수 없고 적어도 야대국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만일 야당측이 야당 출신을 국무총리로 강력히 요구할 때, 그것은 직선대통령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헌정위기에 빠지고 만다. 대통령의 수석보좌관을 야당이 지명하려 한다면 말이 안되는 일이다. 프랑스식 코하비타숑(연정)을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프랑스제도를 잘 모르고 하는 주장이다.
프랑스는 총리가 엄연히 정부 수반이고 총리가 조각을 하고 정부를 지휘하고 문관 무관을 선임한다. 총리가 수반인 프랑스정부는 국민의회의 신임하에 존재할 수 있으며 한편 대통령에게는 총리나 각료를 해임할 권한이 없다. 아마도 가장 치명적인 요소는 대통령이 여당을 통해서 입법부를 장악함으로써 대통령제의 본질을 파괴하여 정부에 대한 견제기능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대통령과 의회가 상호견제하는 미국과 크게 대조적이다.
우리 국회의 경우 여당이 독자적인 정책을 가지고 그것을 토대로 여야가 토론하고 조절하고 합의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과 그 보좌역이 정한 정책을 옹호하고 통과시키는 중남미형이다.
한국에서 경험한 대통령제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지금까지 미국 이외에 대통령제 채택이 성공한 일이 없다」는 클라우스 폰 바이메의 지적이 한국에도 해당되어 「민주주의적인 안정과 능률성」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둘째, 「권력은 썩게 마련이고 절대권력은 절대로 썩는다」는 액튼 경의 경구가 그대로 들어맞았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역대 대통령은 예외없이 권력남용과 부정부패로 그들의 말로는 중남미 독재자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김영삼 대통령 역시 불행한 말기를 맞고 있다.
셋째, 대통령에 집중된 막대한 권력 때문에 전국을 단일선거구로 하는 대통령선거는 자연히 지역갈등을 조성하여 유권자들은 후보의 인물·정책·경험 등을 보고 투표하기보다는 출신지역과 학교를 보고 투표함으로써 불화·반목·갈등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증폭시켰으며 평화적 정권교체의 길을 가로막는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권력구조가 어떤 형태로든지 개편되어야겠다는 국민 여론이 일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 권력구조 개편에 어떤 대안을 고려할 수 있는가. 당연히 제기되는 제1대안으로 「진짜」 미국식 대통령제를 도입함으로써 권력의 집중화를 막고 부정부패를 제거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방안을 말할 수 있다.
우선 대통령제의 정의를 요약하면 국가의 수장(대통령)은 국민투표로 선출되고, 그는 임기 중 불신임 등 의회로부터 독립적이며, 그는 정부수반으로 그가 임면하는 각료로 구성되는 정부를 지휘하고 집행한다는 것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각각 독립하고 행정부의 일은 정부의 수반인 대통령 개인의 책임하에 다스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산 및 법률제정은 입법부가 맡아 행정·입법 두 부가 상호견제함으로써 대통령의 독선·독주·독재를 저지할 수 있다. 어느 쪽도 우월성이나 지배권이 없는 대등한 관계에서 권력을 분립 공유하는 것이 특색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의도한 것은 견제와 균형에 입각한 권력남용의 배제에 있었지 강력하거나 능률적인 정부의 출현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식 순수대통령제는 미국 이외 국가에서 성공한 적 없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권력이 분립된 정부(A gorvernment of 「separated powers」)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 대신 권력을 나누어 행사하는 분리된 기구들의 정부(A government of separa ted institutions 「sharing powers」)를 창조하였다.
따라서 미국 대통령제의 성패는 대통령 개인의 리더십, 구체적으로 말하면 의회를 설득하고 국민을 설득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국회의원 개개인을 설득하고 국회의원들의 제시하는 「지역이익」을 적절히 배분하고 외교안보 문제에 지지여론을 동원하여 입법부의 동의를 얻어야 능력있는 대통령이 된다. 다행히 미국의 정당은 선거용 성격이 강하여 의회안에서 중앙통제가 약하고 자율적으로 투표하는 정당이다. 따라서 「여소야대」의 경우에도 대통령의 지도력에 따라서는 행정·입법부간의 「교착상태」를 이겨낼 수 있는 반면 「여대야소」의 경우도 대통령이 국회를 지배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듣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대통령제만이 강력하고 능률적인 정부를 가질 수 있다」는 가정은 근거가 없다. 오직 개인적인 탁월한 설득력으로 국민합의를 이끌어내는 정치적 수완이 있는 대통령만이 여론의 뒷받침 속에 국회의 동의를 얻어 강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 「대통령의 힘이란 곧 설득하는 힘」을 뜻한다. 따라서 능률면에서는 낭비적이고, 때로는 「교착상태가 오히려 정상적」이라는 것을 감안하여야겠다.
행정·입법 양부로 분리된 권력구조이기 때문에 어느 한 당이 행정·입법양부를 지배하는 것은 행정부의 능률면에서 바람직스럽다. 그러나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된 53년부터 92년까지 국회에서 「여대야소」는 12년간에 불과하였고 「여소야대」가 26년간이었다. 93년부터 2년 동안 클린턴 정부는 의회의 다수의석을 얻었으나 93년 11월 다시 「여소야대」로 바뀌었다.
그래도 미국제도가 큰 탈없이 지속된 것은 헌법상 권력구조 때문이 아니고 그러한 권력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가지 요소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데올로기의 원칙이 없고, 느슨하고 결집력이 약한 정당, 지방 중심의 정치가 그것이다. 이 세가지에 기초하여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의 선거구에 대한 적절한 이권배정 전술 등을 펼친다. 『사실인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구조적으로는 약한 국가다』라고 비교헌법의 권위자 지오바니 살토리는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미국식 대통령제가 우리나라에서 가능할까. 나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그러려면 특히 국회가 우선 대통령의 지배를 벗어나 대통령의 절대권력에 브레이크를 걸고 입법, 예산 성립에 독립성을 가져 정부를 감시·견제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 또 미국처럼 인사청문회를 두어 주요인사에 국회의 철저한 검증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 반대로 우리에게는 대통령제가 오히려 마찰과 대립으로 행정마비를 초래할 수 있는 너무 위험한 제도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나라에 있어서 순수대통령제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정부를 만들어낼 수 없다. 전국을 단일선거구로 하는 선거는 감당할 수 없는 선거비용이 들고 지역간 경쟁이 되어 영호남 지역감정 등 민족통합 대신 분열에 크게 기여했다.
그래도 미국식 대통령제를 택한다면 어떤 방법이 강구돼야 할까. 첫째, 입법부를 강화하여 명실상부한 정책토론장으로 만들고 미국식으로 의원의 원내활동의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하고 둘째, 국무총리제는 폐지하고 유명무실한 국무위원에 대한 불신임건의권 등을 없애고 셋째, 당연히 부통령제를 두어 후계자 양성에 기여할 뿐 아니라 정부통령의 지역안배로 지역간의 알력을 완화하고 넷째, 대통령 임기는 중임제로 하여 공과를 묻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우리나라에서 건국 이래 간헐적으로 거론된 것이 곧 의원내각제 또는 내각책임제 정부형태이다.
의원내각제는 국민이 선출한 의회가 주권을 행사한다는 전제 위에 성립하기 때문에 국민이 직선하는 대통령과 상호대립 내지 견제의 관계에 있지 않다. 정부는 의회에서 선출되고 그 대신 의회를 통해 국민에 책임을 지는 까닭에 행정·입법부간 대립도 있을 수 없다. 여당이 곧 정부이기 때문에 원내에서 여야가 프로그램을 놓고 토론을 벌이고 자유롭게 경쟁함으로써 진정한 정당정치가 발전하고 다음 선거에서 국민이 심판관이 되어 정권을 연장시키거나 교체할 수 있다.
대통령제에 비해 능률적이고 탄력성 있고 타협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결집력이 강한 정당제도가 발전되어야 한다는 필요조건이 있다. 그래서 어느 한당이 과반수의석을 차지해 임기동안 집권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군소정당의 난립으로 안정세력이 구축되기 어렵다든가 군소정파의 이합집산으로 정권이 자주 바뀐다면 안정과 효율성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각제 반대론자들은 내각수명이 9개월밖에 안되었던 프랑스 제3·4공화정과 전후 50회 이상 정권이 교체된 이탈리아의 경우를 지적한다.
독일식 의원내각제도 고려해 볼 만하다
그러나 현대판 내각제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내각제 원조인 영국의 경우, 19세기에는 의회가 내각을 만들기도 하고 최고내각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 3·4공화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의회가 우위를 차지하는 「의회정부」(The assembly government)였고 내각은 「의회의 소위원회」성격을 띠고 있었다. 총리는 「동등한 각료들 가운데 수석」(The first among equals)의 역할이었고 따라서 약한 정부였다.
그러나 1백년간의 정치발전은 총리와 각료관계를 완전히 상하관계로 만들었다. 총리는 각료와 기타 모든 정치직을 독단적으로 임면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휘두르고 총선거에 임해서는 총리(여당 당수)의 개인의 이미지가 국민적 지도자로 인지되어 영국의 총선거는 단순히 지역구 의원을 뽑는 행위라기보다는 누구를 총리로 앉히느냐의 선택으로 발전하였다.
영국 총리가 행사하는 권한은 각료 임면, 정부고위직 임면, 재판관과 국교의 사제 임명권 등 막강하다. 정책결정에 있어서도 원칙상 내각공동책임제로 각료회의서 토론하고 총리가 결론을 내리는 것이 통례이지만 위기상황에서 총리의 개인적 결단이 먼저 내려지고 각료가 이를 받아들이고 끝으로 의회가 이를 승인하는 관행이다.
전후 애틀리 총리는 원폭제조 결정을, 이덴 총리는 수에즈 출병을 독단적으로 내렸고 포클랜드 전쟁 때 대처 총리는 내각을 무시하고 전쟁을 직접 지휘하였다. 영국총리는 이제 「동등한 각료들 가운데 수석」이 아니라 동등하지 않은 각료 위의 수석(The first above the unequals)이 되었다.
이미 70년대부터 영국은 「의원내각제」도 아니고 「내각책임제」도 아닌 「총리정부제」(The premiership government)로 불리고 심지어 「총리독재제」(The priministerial dictatorship)를 우려하는 소리도 나올 정도다. 현실적으로 『영국의 총리가 미국의 대통령보다 훨씬 능률적으로 다스리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왜 총리가 정부와 의회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가. 지오바니 살토리는 세가지 조건을 지적한다. 상대다수제 선거법, 양당제도, 강한 당의 규율 등이다. 소선거구제에서는 양당제를 만들고 양대당은 마치 두 팀의 플레이어들이 경기하는 것처럼 의회에서 경쟁하는 것이 영국식 내각제다.
총리가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것은 재상민주주의(Kanzler demo kratie)로 불리는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다. 독일총리는 의회에서 정부수반으로 선임되고 예하 각료를 임면한다. 독일 헌법은 총리가 정부의 기본정강을 정하고 여기에 책임을 지는 「재상원칙」이 있고 두번째로 각부 장관들은 정강의 범위 안에서 독자적으로 소관업무를 관할 지휘하는 「관할원칙」을 규정하고 세번째로 각료들간의 의견차이 해소로 「합의제의 원칙」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총리가 정한 기본 정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재상원칙」이 우선적이다.
여기서도 「동등한 각료들 가운데 수석」이라는 내각제의 고전적인 관행은 폐기되었고 「동등치 않은 각료들 가운데 수석」(The first among unequals)이라고 보아야 한다. 영국과 다른 것은 각료들이 총리의 부하가 아니라 협력자라는 관계이므로 총리의 각별한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독일은 선거제도가 상대다수제가 아니고 비례대표제(PR)제다.
PR제는 사표가 없고 득표와 의석수가 비례하므로 국민의 의사가 정확히 의석수에 반영되지만, 그 대신 소수당 난립의 경향이 있고 안정세력 구축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정권의 안정과 능률을 기하여 반민주 반체제 정당을 불법화하는 한편 득표율 5% 이하의 정당은 의석을 배당받지 못하게 함으로써 좌와 우의 극렬소수파의 정계진출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건설적 불신임제도를 채택하여 후임총리를 선출하지 않는 한 정부 불신임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독일식 「재상민주주의」는 성공했다. 49년 발족한 독일연방공화국은 기독교민주동맹(우파) 자유민주당(중도우파) 및 사회민주당(좌파)의 3당체제로 82년 단 1회의 정부 불신임안이 통과되었을 뿐,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생산적인 안정된 정부가 되었다.
초대 수상 콘라드 아데나워의 기민당이 이끄는 기민·자민 연립정부는 장장 14년간 재임하여 전후복구와 민주질서의 확립을 성취하였고 지금의 헬무트 콜 수상도 15년째 재임하면서 어려웠던 독일 통일의 대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우리나라에서 내각제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으므로 남북대치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반대론이 강하지만, 그것은 영국이나 독일의 경우를 외면한 채 「의회가 정권의 생사를 좌우」하던 구시대적 사례를 두고 하는 말이다.
4·19 이후 일대 혼란속에 태어난 장면 정부가 단명에 그친 것은 제도 때문이라기 보다는 경제·사회적 악조건과 독재에서 해방된 자유방종 심리의 폭발에 기인한다. 대통령제였다고 해도 당시 혼란상황을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다시 강력한 대통령 독재체제로 돌아갔다면 모르되,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국식 순수대통령제로는 수습이 불가능했다고 보아야 한다.
요컨대 대통령 독재가 아닌 순수 대통령제보다는 내각제가 제도로서는 보다 안전하고 능률적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체제를 갖춘 다른 나라에서의 검증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예컨대, 아이랜드 리파르트는 전후 80년까지 민주주의체제를 붕괴나 중단없이 유지해온 21개국 가운데, 17개국은 순수내각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였고, 두 나라는 혼합형, 한 나라가 반대통령 나라였다. 순수대통령제의 나라는 미국 한 나라였다. 모두 성숙한 민주주의 나라들이다.
알프레드 스테판과 신디 스카치는 대통령제와 내각제 어느 쪽이 보다 더 정치안정에 기여했는가를 심층 분석하였는데 그들이 발견한 것은 「순수내각제가 순수대통령제보다 민주주의를 공고하게 만드는데 훨씬 더 긍정적 제도라는 것」이고, 「새롭게 시작하는 민주주의 국가들이 민주적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내각제를 채택하게 되면 자유가 확대될 것」이며, 「자유의 정도의 증대는 경제적 구조와 사회적 구조를 개편하는 것을 촉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흥미있는 자료들이 몇가지가 있다.
우선 79년부터 89년 사이에 민주주의체제가 공고하게 지속된 나라는 43개국이었는데, 그 가운데 혼합형인 스위스와 핀란드를 제외하면 내각제가 34개였고 2개국은 반대통령제이며 5개국만이 순수대통령제였다는 점이다.
또, 제2차대전 이후 79년까지 세계적으로 93개국이 독립하였다. 80년부터 89년 사이에 그 가운데 15개국만이 지속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다. 좀더 부연하자면 독립 당시 내각제를 택한 나라가 41개국, 대통령제가 36개국, 반대통령제가 3개국 그리고 13개국은 군주제로 출발하였는데 대단히 주목을 끄는 것은 내각제를 택하지 않았던 도합 52개국 가운데 80∼89년 기간에 지속적으로 민주주의였던 나라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각제를 택한 41개국 가운데 15개국이 민주주의 체제를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각제의 성패는 곧 정당의 결집력에 달려 있다. 총리는 정당을 통해 내각과 국회를 다스릴 수 있어야 강하고 능률적인 정부가 될 수 있는데, 우리로서는 이 점이 심도있게 검토되어야 한다. 정당의 결집력 뿐만이 아니다. 다른 정당들과의 공조능력을 갖추어 다당제의 경우 연립정권을 구성 유지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 점, 한국에서 내각제 구현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정책중심이라기보다는 특정인물 중심의 붕당적 성격이 짙은 우리의 경우 내각제가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 대한 반론도 그럴싸하다. 대통령제는 서구적인 정책정당 발전을 저해하고 또한 강력한 정책정당제는 대통령제 운용에 오히려 유해하다는 것이 반론의 핵심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대통령제 아래에서는 의회에서 활발한 정책토론을 벌이고 그것이 정부에 반영되고 국민이 거기에 따라 정당을 선택하는 여지가 전무하였다는 점도 지적된다. 바로 이 점에서 내각제는 정당의 발전을 촉진하는데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순수대통령제냐, 아니면 순수내각제냐. 이 두가지에 더 붙여 제 3의 대안은 프랑스식 혼합형을 고려할 수 있다. 이원집정부제로 널리 알려져 있고 반대통령제로도 불리는 제도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적극적으로 연구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제도다.
프랑스식 혼합형제도에서 대통령은 民選입헌군주
프랑스식 혼합제도는 쉽게 말해 국민이 직선한 대통령과 국회의 신임하에 존재하는 국무총리가 권력을 공유하는 제도다. 58년 프랑스 제5공화정이 채택한 이래 지금까지 민주주의체제의 안정과 능률에 성공적인 모범을 보이고 있다. 프랑스의 헌법학 권위자 모리스 두베르저는 80년에 이 제도를 반대통령제 또는 준대통령제라고 명명하면서 이 제도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뽑는다. 대통령은 상당한 권력을 보유한다. 의회의 신임에 의존하는 총리와 내각이 행정기능을 집행한다」
이 제도에서 국가의 원수인 대통령은 국민이 직선하되 대통령제와는 달리 행정부를 통솔하는 행정수반은 아니고 총리가 내각을 지배하는 내각제 헌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이 상징적인 나라의 어른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으로서 독자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내각 및 내각을 뒷받침하는 국회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마디로 민선 입헌군주에 비할 수 있다.
헌법 어느 구석에서도 대통령이 정부의 「수반」이라고 명시되어있지는 않다. 그러나 대통령은 총리를 선임하고, 각료회의를 주재하며, 공권력 조직 등 중요사항을 국회를 거치지 않고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 또 국민의회(하원)을 해산시킬 수 있고, 군의 수장이기도 하다. 특히 『공화국의 제도, 국가의 독립, 영토의 일체성, 국제적인 협약의 집행이 중대하고 긴급하게 위협을 받을 때, 그리고 헌법상 공권력의 정상력 운영이 저해될 때』엔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대통령이 개입할 수 있는 「유보영역」(Reserve Domain)도 설정하여 외교·국방 분야에 개입할 수도 있다. 그밖의 사회·경제 등 일반적 책임은 총리에 전담하여 역할을 분담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헌법상 대통령이 군의 최고 사령관이고 헌법 제52조에 따라 「조약을 교섭하고 비준한다」고 되어 있다.
헌법상 역할의 모호성은 내정·외교면에 대통령과 총리가 각각 따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을 통해 긴밀히 협조하는 것으로 인식돼 협조적으로 행동하게 해 주고 있다.
두베르제에 따르면 『대통령의 주요권한은 비규칙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정상적인 대권이라기보다는 빈번히 행사할 수 없는 예외적인 권한으로 어떤 결정을 방지하거나 국회해산·국민투표 등 국민에게 결정을 제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헌법상, 「제왕적」 대통령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제5공화정 헌법 창시자 샤르르 드골은 「제왕적」으로 정부를 이끌었다. 헌법상 대통령은 총리를 자의로 임명하지만 총리가 사표를 제출해야 「직무를 종료」시킬 수 있고 각료의 임면 또한 총리의 제청이 필요하지만 실제운영에 있어 드골과 그뒤를 이은 폼피두·지스카르 데스탱 등은 총리의 임면권을 행사하였다. 대통령이 영도하는 우파가 국민의회를 지배하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좌파 프랑소아 미테랑의 대통령 재직 14년간 국민의회를 우파가 지배한 「여소야대」기간(86년부터 2년간과 92년부터 3년간)에는 정부는 야당 총리가 지도하는 우파내각이었다.
97년 봄 시락 대통령하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뜻밖에도 좌파가 압승, 조세핀 사회당 내각이 출발하여 권력의 중심은 우에서 좌로 옮겨갔다. 이른바 코하비타숑 정부다.
두베르제는 프랑스 권력구조를 내각제와 대통령제의 「합성」이 아니라 국민의회를 어느 쪽이 지배하느냐에 따라 대통령편과 의회편이 「교대」(Alternation)하는 제도로 규정한다.
이에 반해 살토리는 정부를 이끄는 대통령과 총리의 두 수뇌가 있는데 그들은 동등한 쌍두주자가 아니고 국민의회의 다수파가 변동됨에 따라 정부를 이끄는 선두주자가 「변동」(Oscillation)하는 제도라고 말한다. 정부를 이끄는 수반에 주역과 조역의 위상이 바뀌는 것이지 어느 한쪽이 독점권력을 「교대」로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코하비타숑 시기에 대통령은 정부에 대한 견제역할을 맡고 특히 외교·국방 분야에는 두 수뇌가 합의결정하고, 대통령이 의회를 지배할 때에는 정부를 완전히 지배하지만 항시 의회의 지지를 잃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총리에 내정을 맡기는 관례가 성립했다.
프랑스는 대통령과 국회의원선거에 과반수 당선제를 택함으로써 양당제까지는 아니지만 제3, 제4공화정 시절의 군소정당간의 이합집산을 막고 좌우 두 블럭으로 경쟁하는 관행을 만들었다. 또한 국회의 권한을 대폭 약화시킨 것도 5공화정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반대통령제로 불리는 프랑스 모델을 수용한 나라로는 포르투갈과 스리랑카가 있다. 대통령을 직선하고 대통령에 상당한 유보적 권한이 있는 오스트리아·아이슬랜드·아일랜드 등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으나 헌법상 그렇다는 것이지 오스트리아·아이슬랜드·아일랜드 등은 거의 내각제로 운용되고 있다. 특히 포르투갈은 76년에 프랑스형을 채택하였으나 82년 개헌으로 대통령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었다.
남북대치상황 등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프랑스가 성공시킨 총리형 대통령제는 긍정적으로 고려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우선 권력이 한사람에 집중되는 데서 오는 정치의 긴장·갈등·불화를 막아 책임정치가 실현되고, 그렇다고 대통령이 단순한 형식적인 국가의 수장이 아니라 보편적 장기적 국가이익을 배려하고 특히 외교·국방에 신경을 쓰는 한편 총리가 내각을 통솔하여 구체적이고 단기적인 정책을 수립, 집행하는 역할분담은 바람직스럽다. 다만 대통령이 국회를 지배하고 있을 때 이야기지만 말이다. 특히 우리로서는 통일까지 가는 어려운 과정에 있다. 또 통일을 이룬 뒤 장기간 통일국가로서 주변 열강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그런 점 등을 고려할 때 프랑스의 권력구조는 우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많은 학자, 전문가들은 정치 제도보다 운영의 묘를 중요시한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성장과정에서 문화와 전통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권위주의 과거를 가진 수많은 신생국가들이 민주주의의 기치를 들었지만 내각제이든 대통령제이든 순조롭게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하면서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나라가 몇이나 되느냐고 묻는다.
아시아의 유교문화권이나 회교문화권에서 서구 민주주의는 맞지 않는 것으로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오히려 혼란만 조장하므로 올바른 그러나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만 빠른 경제적 발전을 추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일리있는 주장들이지만 연소득 1만달러를 넘어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려는 오늘의 한국에서 그러한 생각은 시대착오적이고 위험하다. 언제까지나 경제는 1류인데 정치만은 3류, 4류로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치의 민주화 곧 선진화를 심각하게 연구하여야 할 단계에 와 있다. 여기에는 어떤 정부형태가 민주주의체제를 정착시키는데 보다 효과적이냐가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 전제에서 해방 50년간의 정치가 대통령제의 이름아래 사실은 대통령 한사람에 권력이 집중된 제도·관행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어느 집단이나 기업이나 국가나 할 것 없이 권력이 어느 한 개인에 집중되었을 때 궁극적으로는 불행과 재난을 자초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권력집중 제도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
우리 정치사에서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역대 대통령은 나라를 만들고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나름대로 공헌이 있었지만 그들이 저지른 권력의 남용 또는 부패로 말미암아 그들의 말로가 어찌되었는가. 그들은 어느 의미에서는 권력집중이라는 제도의 희생자들이다. 결국 우리는 조만간에 중남미형 「위임민주주의」에 종지부를 찍고 보다 안정되고 보다 효율적인 권력구조로 개편되어야겠고 여기에 대한 토론과 연구가 활성화되어야 할 단계에 와 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순수한 미국형 대통령제로 발전시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명실상부한 권력의 분립으로 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감독·견제기능을 강화시키는 한편 대통령 임기도 중임제로 하고 정부통령제를 두어 위험수위에 있는 지역갈등에 지역간 대립 대신 협력체제를 모색할 수 있다. 그러나 「승리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대통령제의 특성에 비추어 바로 이 대통령제가 만든 지역할거주의를 손쉽게 극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다같이 국민의 선거를 통해 정통성을 부여받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대립·마찰이 구조적으로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두 「정통성」간의 충돌이 「여소야대」 상황에서 야기될 경우 정부의 기능은 거의 마비상태에 빠질 것이다. 우리 현실이 그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미국식 순수대통령제가 별로 매력적이 아니라는 것은 다른 후발국가들에서도 증명되었다. 여기에 대한 대안은 의원내각제다.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진국이 채택한 제도이고 19세기식 「의회우위」를 포기한 영국, 독일의 내각제는 미국대통령보다 강하고 능률적인 총리정부를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도 늘 국회의 신임 위에 존재하는 만큼 권력남용·부패의 가능성을 극소화시킬 수 있다.
내각제는 구조적으로 「여소야대」의 교착상태가 있을 수 없고, 대통령제의 제로썸 게임과는 달리 협력지향 내지 협조 유도적이라는 점에서 보다 민주주의적이다.
그러나 대통령제와는 달리 내각제는 결속력 있는 정당을 전제로 한다. 왜곡된 한국식 대통령제는 「지역당」 할거현상을 파생시켜 내각제 운용에 큰 걸림돌이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경험으로보아 군소정당 난립의 성향은 없다. 다분히 대통령제가 낳은 긍정적 효과이겠지만 대체로 양당제 또는 2.5당제의 흐름이었다는 것은 내각제 채택의 경우 정당정치가 반드시 어둡지는 않다는 전망을 보여준다.
독일의 경우, 바이마르 공화국은 극좌에서 극우까지 10여개의 군소정당이 난립하여 1년에 한번씩 정부가 갈리고 경제적인 붕괴와 사회적 혼란속에 나치스 독재를 불러들였지만 전후 서독은 제도적 장치로 아마도 가장 건실한 내각제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우리로서 「재상민주주의」는 보고 배우고 가능하면 채택할 대안이다.
권력구조개편의 세번째 대안은 프랑스식 반대통령제를 꼽을 수 있는데 이 제도에 대한 개념이 모호하고 헌법조문과 그동안 실제 관행화된 실천헌법 사이에 변화가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입헌군주하의 내각제와 흡사한 것인데, 프랑스 대통령은 영국 여왕처럼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 군주가 아니고 통치에도 때로는 적극적으로 때로는 소극적으로 간여한다. 참고로 프랑스 5공화정 헌법의 기초자 미세르 드보레(드골 대통령시 첫 총리)의 말을 소개하고자 한다.
『집행부의 안정과 권위를 위하여 나는 공화주의 군주(A republican monarch)의 개념을 택하였는데 후에 좋은 반응을 받았다. 두번째로 필요했던 것은 진정한 내각제였다. 즉 정부의 행동을 지시하고 의회의 과업을 지시하는데, 의회의 일은 조직되고 의회의 의사가 너무 강해서는 안되게 하는 내각이 필요했다. 그리고 끝으로 결속력이 최대한 보장되는 다수파의 출현을 보장하면서도 내각과 의회 사이에 공공연한 협력을 허용하는 선거제도를 채택하여 보다 강한 정부 안정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프랑스식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내각제정부이면서도 국민통합의 상징이자 실권자인 대통령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독일식 재상민주주의에 매력을 느낀다. 민주주의적 안정과 능률을 살리고 그것이 평화스러운 통일을 이룩하는데 기여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각제는 약하고 위험하다」는 강력한 반대논리에 비추어 프랑스식 총리·대통령제의 수용이 우리 현실에 보다 맞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동시에 갖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국민정서에 적합한지도 모르겠다. 특히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겠다」는 다수 국민의 염원을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모든 체제, 어떤 제도이든 그 성패는 정치지도자들의 통치능력, 투철한 애국심, 국민의 신뢰 위에 최소한의 국민적 합의를 끌어내는 능력에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정치지도자를 식별해서 선임하는 책임은 국민에게 있다. 국민의 지적 수준과 도덕적인 자질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