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어진 이와 사특한 이의 진퇴는 세도(世道)의 소장(消長)에 관계되는 법이다. 사림(士林)의 화(禍)는 예로부터 있었으나 기묘년(1519, 중종14)보다 참혹했던 적은 없었다. 기묘제현(己卯諸賢)이 전후로 죽거나 찬축(竄逐)된 이가 매우 많았는데 충암 선생이 받은 화가 가장 혹심하여 지금까지도 그 얘기를 듣는 사람은 심장이 놀라고 넋이 달아나며, 사우(師友)를 찾아 오도(吾道)를 담론하는 사람을 보면 문득 입을 가리고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신무문(神武門)에서의 상변(上變)을 듣지 못했는가?” 한다. 이리하여 사림의 기운이 시들고 진작되지 못한 지가 거의 수십 년이니, 간사한 소인배가 국가에 흉독(凶毒)을 끼치는 것은 이러한 지경에 이른다.
인묘(仁廟) 말년에 이르러 어명으로 복관(復官)되었고, 선묘(宣廟) 초년에 증시(贈諡)가 내려졌다. 이에 사람들이 차츰 군자와 소인의 구별을 알게 되고 일국의 사론(士論)이 이에 정해졌다. 그러나 신학후생(新學後生)은 한갓 기묘제현이 본받을 만하다는 것만 알 뿐 그분들의 거가(居家)에서의 행의(行誼)와 조정에서의 언론 등은 처참한 살육의 와중에서 다 기록되지 못하였기에 선비들이 개탄하며 시일이 오래갈수록 더욱 세상에 전해지지 못할까 걱정한다. 선생의 손자 장령(掌令) 김성발(金聲發)이 하루는 불녕(不佞)에게 말하기를, “우리 선조의 우뚝한 사적으로도 묘도에 아직 비석이 없으니, 이는 실로 사문(斯文)의 흠전(欠典)이며 불초손(不肖孫)의 책임입니다. 감히 그대의 글을 받고자 하니, 그대는 생각해 주십시오.” 하였다.
아, 《시경(詩經)》에 이르지 않았던가. “높은 산처럼 우러르고, 큰길처럼 따라간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고. 불녕은 늦게 세상에 태어났기에 늘 직접 모시고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왔던 터이니, 이제 비명(碑銘)을 지어 달라는 부탁에 어찌 감히 문사(文辭)가 서툴러 이러한 일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여 선생을 흠모하는 나의 정성을 거듭 저버릴 수 있겠는가.
삼가 행장을 살펴보건대, 선생은 성(姓)은 김씨(金氏)이고 휘는 정(淨), 자는 원충(元冲)이며, 충암(冲菴)은 호이다.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6대조(代祖) 장유(將有)는 판도판서(版圖判書)이며 처음으로 보은(報恩)에 와서 살았다. 증조 휘 호(滸)는 평택 현감(平澤縣監) 증 도승지(都承旨)이고, 조부 휘 처용(處庸)은 증 병조 참판(兵曹參判)이다. 부친 휘 효정(孝貞)은 호조 정랑(戶曹正郞) 증 이조 판서이며, 모친 김해 허씨(金海許氏)는 판관(判官) 윤공(允恭)의 따님으로, 성화(成化) 병오년(1486, 성종17)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태어날 때부터 특이한 자품을 지녀 남달리 영오(穎悟)하였다. 말을 배우자 곧 문자를 알았고, 10세가 되기 전에 이미 사서(四書)와 《시경(詩經)》을 다 읽었으며,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과정을 정해 열심히 공부하였다. 늘 함께 놀던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처럼 작은 나라에서는 큰일을 할 수 없다.” 하며, 개연히 등동산(登東山)의 뜻을 지녔다.
14세에 별시(別試)의 초시(初試)에 제일명(第一名)으로 합격하였으나 연소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회시(會試)에 나아가지 않으며 “과거(科擧)의 글은 배울 것이 못 된다.” 하고, 성현(聖賢)의 서책에 침잠하여 밤을 낮 삼아 공부하였다.
15세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집상(執喪)을 모두 예제(禮制)에 따랐으며, 모부인(母夫人)을 지성으로 효양(孝養)하였다.
1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22세에는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곧바로 정언(正言)에 제수되고 옥당(玉堂)의 수찬(修撰)으로 선임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리고 병조 좌랑(兵曹佐郞)ㆍ정랑(正郞), 부교리(副校理), 헌납(獻納)을 역임하고 모부인 봉양을 위해 충청 도사(忠淸都事)에 제수되었다.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에 들어와 교리(校理)에 제수되었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천거되었다. 또 자청하여 외직으로 나가 순창 군수(淳昌郡守)가 되었다.
을해년(1515, 중종10)에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빈천(賓天)하자 선생과 담양 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이 상소하여 신씨(愼氏)를 복위하여 무고하게 폐위(廢位)된 원한을 풀어 주고 첩(妾)으로 처(妻)를 삼았다는 기롱을 끊을 것을 청하는 한편, 말하기를, “박원종(朴元宗) 등은 군부(君父)를 협박하여 국모(國母)를 방축(放逐)했으니, 만세(萬世)의 죄인입니다. 이제 그들이 비록 죽었으나 그 죄를 밝히고 바로잡아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분의(分義)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면 인륜의 근본과 정시(正始)의 도가 맑고 밝아져 마치 천지를 덮었던 캄캄한 어둠이 다시 걷히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였다. 소장이 올라가자 대관(臺官)이 사론(邪論)이라 하여 국문(鞫問)할 것을 힘써 주청(奏請)하였다. 이에 사태가 예측할 수 없는 위태한 상황에 이르렀으나 대신(大臣)의 구원에 힘입어 보은(報恩)의 사림역(舍琳驛)에 도배(徒配)되는 데 그쳤다.
이때부터 조정 의론이 대립하다가 병자년(1516, 중종11)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선생의 말을 옳다고 인정하여 서로 상소하여 선생을 방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드디어 사면을 받고 집에 돌아와서는 즉시 영동(嶺東)으로 가서 명승지를 유람하고 이어 속리산(俗離山)의 절에 들어가서 삼동(三冬) 동안 독서하며 사환(仕宦)에는 뜻이 없었다. 조정에서 선생을 소환할 것을 계청(啓請)하여 병자년에 서용(敍用)되어 사예(司藝)에 제수되었다.
정축년(1517)에 응교(應敎), 전한(典翰)에 발탁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가을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고 부제학(副提學)에 제수되자 진정소(陳情疏)를 올려 해면(解免)해 줄 것을 청한 것이 너더댓 차례에 이르렀다.
당시 정암(靜菴) 조 선생(趙先生)이 선생과 도의(道義)의 벗을 맺은 사이로 성상의 총애와 권우(眷遇)를 가장 많이 받고 있었는데 서찰을 보내어 출사(出仕)를 몹시 권면하였으며, 성상도 소명(召命)을 연이어 보내왔다. 이에 선생이 부득이 소명에 나아가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고, 전임(轉任)하여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으며, 오래지 않아 승질(陞秩)하고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 동지경연사(吏曹參判兼弘文館提學同知經筵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곧 대사헌(大司憲), 행 부제학(行副提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제수되었다.
기묘년(1519, 중종14)에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귀근(歸覲)하고 상소하여 종신토록 모부인을 봉양할 수 있게 해직(解職)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성상이 윤허하지 않고 특명을 내려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 판서에 제수하고 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하게 하였다. 선생이 혈성(血誠)을 다해 사양하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 예궐(詣闕)하여 소장을 올렸으나 성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공아(公衙)에 가서 나날이 그와 같이 사직 상소를 올린 것이 거의 몇 달이었으나 성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양관(兩館)의 제학을 겸임한 것에 이르러서는 세상에 드문 일이라 사람들은 더욱 영광으로 여겼다. 공은 남다른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뜻을 같이하는 제현(諸賢)들과 충성을 다해 건백(建白)하여 폐단을 고치고 교화를 일으켰다.
예컨대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여 사전(祀典)을 바로잡을 것, 《향약(鄕約)》을 간행하여 백성에게 이륜(彝倫)을 가르칠 것, 《소학(小學)》을 강명(講明)하여 어린이 교육을 돈독하게 할 것, 현량과(賢良科)를 창설하여 어진 인재를 거두어들일 것, 정국 공신(靖國功臣) 중 공로가 없이 끼어든 사람들의 작록을 추삭(追削)하여 요행으로 벼슬하는 문을 막을 것 등을 청한 것은 모두 당시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훈척(勳戚)들이 이를 갈며 분노했던 일이다.
사람들이 시기하고 분노하여 참소가 날로 쌓여 가자 홍경주(洪景舟)가 남곤(南袞), 심정(沈貞)과 더불어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먼저 역모를 꾸민다는 불측한 말로 상(上)의 마음을 두렵게 한 뒤 청하기를, ‘조정에 역당(逆黨)의 무리가 많으니 신무문(神武門)을 열어 놓으면 몰래 들어가서 고변(告變)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밀지(密旨)를 받았다고 칭탁하고 은밀히 척독(尺牘)을 보내 위협하여 대신들을 불러 밤중에 대옥(大獄)을 일으키니, 선생과 대사헌 조광조(趙光祖) 등 18명이 일시에 체포 수감되었다. 공초(供招)를 마치고 죄안이 이루어지자 모두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이 상의 옷소매를 잡고 눈물로 간(諫)하고 태학생(太學生) 300여 명이 대궐에 엎드려 호곡(號哭)하자 비로소 감사(減死)를 윤허하였다. 논죄하여 선생은 금산(錦山)에 장배(杖配)되었다. 금산은 보은과 100여 리 떨어진 곳인데 선생의 모부인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에 선생은 금산 수령에게 사정을 고하고 달려가서 모부인을 뵙고 작별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금오랑(金吾郞)이 선생을 진도(珍島)로 압송해 가려고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금오랑과 함께 배소(配所)로 돌아갔다. 그런데 권신(權臣) 중에 선생에게 원한을 품고 보복하려는 자가 죄인으로서 도망쳤다고 논죄하여 선생을 나국(拿鞫)하여 옥중에서 심문하였다. 선생이 옷자락을 찢어 세 차례나 상소를 올리니 원통한 사정이 환히 드러났다. 이에 곤장 100대를 맞고 제주(濟州)에 안치되었다. 그 이듬해에 논자들이 또 일어나 더욱 혹심하게 논죄하자 마침내 자진(自盡)하라는 명이 내렸다. 선생은 명을 듣고 안색이 변하지 않은 채 술을 가져오라 하여 호쾌히 마신 뒤 형제들에게 서찰을 써서 노모를 잘 봉양하라 하고 〈절명시(絶命詩)〉를 지어 자신의 뜻을 보이니, 춘추가 36세였다. 그 이듬해 신사년(1521, 중종16)에 청주(淸州) 고해산(苦海山) 아래, 예전에 잡아두었던 터에 반장(返葬)하였다.
부인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진사(進士) 여익(汝翼)의 따님이며, 아들이 없어 형 참봉(參奉) 광(光)의 차남 철보(哲葆)를 후사로 삼았다.
선묘(宣廟) 초년에 퇴계(退溪) 선생이 연중(筵中)에 들어갔다가 상의 물음에 아뢰기를, “중묘(中廟)께서 장차 삼대(三代)의 치세를 일으키고자 하시니, 조광조, 김정, 기준(奇遵) 등이 협심하여 그 뜻을 보필하고 이에 사방이 풍동(風動)하였습니다. 그런데 배척당한 사람이 터무니없는 죄를 날조하여 사류(士類)를 일망타진하였으니, 이는 모두 남곤, 심정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남곤ㆍ심정 등의 작위를 추탈(追奪)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병자년(1576, 선조9)에는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고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내렸으니, 박문다견(博文多見)을 ‘문(文)’이라 하고 거경행간(居敬行簡)을 ‘간(簡)’이라 한 것이다.
선생은 천품이 매우 높고 식견이 초매(超邁)하여 안화(安和)하면서도 장중하고 돈대(敦大)하면서도 광휘하였다. 효우(孝友)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라 지행(至行)이 순수하고 학업이 정심(精深)하며 문로(門路)가 매우 발랐다. 《소학》을 독신(篤信)하고 《근사록(近思錄)》을 존상(尊尙)하여 입언(立言)과 행실을 언제나 고훈(古訓)에 따랐다. 평상시에는 늘 단좌(端坐)하여 집안이 쓸쓸하고 잡된 손님이 전혀 없었다. 오직 몇 사람의 어진 벗들과 깊은 이치를 토론하고 주정(主靜) 공부에 전심(專心)할 뿐 집안의 일은 묻지 않았다. 추직(騶直 상전을 따라다니는 하인)을 집안에 들여놓지 않았고 녹봉을 친척 중 가난한 사람에게 먼저 나누어 주었으며, 영진(榮進)을 좋아하지 않고 늘 급류에서 용퇴할 뜻을 품었다.
평소에 천석(泉石)을 좋아하여 매양 경치가 좋은 곳을 만나면 오래도록 배회하며 돌아갈 줄 모르고 소연(蕭然)히 속진을 벗어나는 의상(意想)이 있었다.
의로운 일에는 급급하게 달려가고 악(惡)을 보면 더러운 것을 보듯 미워했으며, 서책에 있어서는 읽지 않은 것이 없고 한번 보면 평생 동안 잊지 않았다. 문(文)은 서한(西漢)을 본받고 시는 성당(盛唐)을 배웠는데, 웅건하고 준일(俊逸)하여 전혀 진부(陳腐)한 말을 도습(蹈襲)하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재세(在世)한 기간이 몹시 짧고 또 유실한 시문이 많다.
당시 《근사록》을 새로 간행하여 선비들이 제현(諸賢)에게 서발(序跋)을 부탁하자 정암(靜菴)이 굳이 선생에게 양보하였으니, 그 추중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퇴계가 어떤 사람에게 보낸 답서에서, “충암의 학문은 사람들보다 한 등급 더 높다. 이러한 식견을 가지고서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였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이 참으로 정론(定論)이다. 세상의 논자들은 혹 말하기를, “기묘제현은 짊어진 짐이 너무 무겁고 시행에 점차(漸次)가 없어 시의(時宜)에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하니, 아아, 어찌 그렇겠는가.
중묘(中廟)가 크게 혼란했던 시대 뒤에 나라를 바로 세워 개혁에 비상한 관심을 두고 오습(汚習)을 한바탕 혁신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어진 인재를 선발하고 겸허한 자세로 건의를 받아들였으니, 이는 참으로 천재일시(千載一時)였던 것이다.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지우(知遇)을 입지 못하면 그만이겠지만 지우를 입었다면 의당 자신의 학문을 다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어찌 그럭저럭 고식적인 태도로 지난 자취를 따라 구차하게 일하고 말아서야 되겠는가. 외부에서 뜻하지 않게 오는 화복(禍福)은 시운(時運)과 성쇠(盛衰)에 달린 것으로 천지(天地) 조화에서 유감스러운 점이니, 선생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천운(天運)은 늘 순환하고 시비는 백년이 못 가서 밝혀지는 법이라 열성(列聖)의 숭장(崇奬)과 유림의 흥성이 오늘에까지 이르러 선비 된 사람이면 누구나 선(善)은 해야 하고 악(惡)은 해서는 안 되며 선을 한 사람은 죽더라도 영광스럽고 불선(不善)한 사람은 살더라도 죽은 것과 같다는 이치를 알아 한 가닥 정론(正論)이 끝내 민멸(泯滅)되지 않은 것은 그 누구의 힘이겠는가. 이에 명(銘)을 붙이노라.
도가 장차 행해질 때에는 / 道之將行
하늘이 훌륭한 인재를 내어 / 天篤降才
반드시 그 근본을 배양하는 법 / 必厚其培
도가 장차 무너질 때에는 / 道之將廢
혹 방해하고 혹 저지하니 / 或泥或止
그 누가 이것을 주관하는가 / 孰主張是
우리 공이 태어난 것은 / 我公之生
실로 국운이 창성하던 시기라 / 實際昌期
그 도가 실로 공에게 있었지 / 文在於玆
행실은 진실로 천부적인 것 / 行固天得
학문은 양성을 위주하였고 / 學主養性
마음은 거경에 전일했어라 / 心專居敬
임천에 은거하다 일어나자 / 起自林泉
조정 사대부들 용동했으니 / 聳動簪紳
상서로운 봉황이요 기린이었지 / 瑞鳳祥麟
상소하여 인륜을 돈독하게 하니 / 抗疏惇倫
그 의리 바르고 치우치지 않아 / 義正無偏
조정의 기강이 숙연해졌어라 / 朝綱肅然
맑은 명성과 높은 인망이 / 淸名儁望
굽혀졌다가 더욱 펴지니 / 屈而益舒
젊은 나이에 판서가 됐어라 / 妙年尙書
이에 성상의 신임이 두텁고 / 聖君注倚
어진 벗들이 곁에서 보익하니 / 賢友輔翼
마치 수레바퀴를 밀어주는 듯 / 若車推轂
밝은 임금 어진 신하 서로 만나 / 明良相遇
그 계합이 풍운의 제회였으니 / 契合風雲
밤낮으로 국가 경륜 토론하였지 / 夙夜經綸
조정에서 정색을 하고 서서 / 正色法筵
반드시 요순의 도리 얘기하니 / 必稱堯舜
말하면 성상이 반드시 믿었어라 / 有言則信
이에 예악 문물을 다시 일으켜 / 庶幾禮樂
장차 큰일을 이루려 했는데 / 將大有爲
그만 시기하는 자가 미워하였지 / 忌者惎之
계략을 꾸며서 몰래 음해하고 / 潛吹蜮弩
또 혹독한 형벌로 위협하였으니 / 脅以三木
저 소인들의 참소는 망극했어라 / 彼讒罔極
빛나던 해가 구름에 가리고 / 赫日晝曀
된서리가 한여름에 내렸으니 / 繁霜夏隕
긴긴 밤 어둠에 혼란이 이어졌지 / 長夜泯泯
재능은 어이 그리 많이 주었으며 / 畀之何豐
쓰는 것은 어이 그리 인색했으며 / 用之何嗇
빼앗아 간 건 어이 그리 빨랐던고 / 奪之何速
공이 지은 〈절명시〉를 보면 / 絶命之辭
온통 혈성으로 가득하니 / 一團誠血
만고에 읽는 사람 오열하리라 / 萬古嗚咽
그렇지만 이 바른 기운은 / 惟玆正氣
해와 별처럼 높고 밝은 법 / 日揭星明
공은 늠름히 아직도 외려 살았어라 / 凜凜猶生
저 산은 푸르고 푸른데 / 有山蒼蒼
무덤이 우뚝 솟아 있으니 / 有丘睪如
공이 은거하던 그 유허일세 / 考槃之墟
이에 비석을 세우매 / 樹之貞珉
공의 향기는 어제와 같으니 / 芳徽如昨
지나는 사람은 반드시 공경하도다 / 過者必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