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극장가 비수기로 알려졌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가령 2022년 11월 23일 개봉한 ‘올빼미’의 경우 333만 명 가까이 극장을 찾았다. 손익분기점이 210만 명으로 알려졌으니 상당히 흥행성공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지난 11월 22일 개봉한 ‘서울의 봄’이 9일 만에 295만 넘는 관객을 동원하는 등 ‘올빼미’처럼 비수기란 전통을 깨는 중이기도 하다.
‘서울의 봄’ 이야긴 나중에 하기로 하고, 문제는 비수기가 11월뿐만이 아니란 점이다. 얼마 전 쓴 ‘어쩌나 한국영화’(전북연합신문, 2023.10.26.)에서 말한 그대로다. ‘韓영화 어쩌다 이 지경됐나’(OSEN, 2023.11.8.) 같은 기사 제목이 연달아 나올 만큼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영화다. “현재 한국영화는 ‘단군 이래 최대 위기’, ‘팬데믹보다 더 최악’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앞의 OSEN)는 정도다.
전체적으로 극장을 찾는 관객 수가 대폭 줄었는데도 그와 반대로 일본 애니메이션은 가히 ‘열광’이라 해도 좋을 진풍경이 두드러진 바 있다. 한국영화들이 100만 관객을 넘기는 게 힘에 부친 반면 여러 편의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가뿐하고 거뜬하게 수백 만 명을 극장으로 불러들인 것이 신기할 정도다.
요컨대 상반기 ‘더 퍼스트: 슬램덩크’ㆍ‘스즈메의 문단속’에 이어 10월 25일 개봉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까지 연이어 흥행에 성공했다. 재즈 밴드 결성 과정을 그린 일본산 음악 애니메이션 ‘블루 자이언트’도 10월 18일 개봉 이후 애호가들의 입소문에 힘입어 11월 13일 기준 10만 관객을 동원하며 선전중이라는 보도다.
오죽했으면 “‘한국 극장가를 점령한 일본 애니메이션’이란 말이 과언이 아니다”(스포츠서울, 2023.11.13.)라는 평가까지 나왔을까! 2023년 1월 4일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관객 수는 476만 명이다. 역대 국내 개봉 일본 애니메이션 흥행 순위 1위인 ‘너의 이름은’(2016)의 386만 명보다 90만 명 더 많은 관객 수로 기록을 갈아치웠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주간 ‘소년 점프’에 연재되며 누적 발행부수 1억 2,000만 부를 돌파한 레전드 만화작품 ‘슬램덩크’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이번 영화엔 원작에 없는 북산고 포인트 가드 송태섭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추가됐다. 또한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각본과 감독에 참여해 화제가 됐다.
보도를 종합해보면 국내에서도 원작이 신드롬급 인기를 누렸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개봉에 대한 국내 관객들의 관심이 쏠렸을 법하다. 그래서 그런지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개봉 이후 좌판율 1위를 기록하며 입소문 열풍을 일으켰다. ‘슬친자’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N차 관람 열풍이 일어나면서 흥행 신호탄을 쐈다.
3050 남성팬으로 출발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20대 여성팬까지 흡수하며 올 상반기 극장가와 출판가의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는 기사도 있다.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원작 만화책이 불티나게 팔린 건 물론 일러스트 화보집ㆍ열쇠고리ㆍ퍼즐ㆍ달력 등 만드는 굿즈마다 족족 매진 행렬을 이어갔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열풍은 무엇보다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연이은 흥행의 시초가 됐다.
지난 3월 8일 개봉한 ‘스즈메의 문단속’은 한 술 더 뜬다. ‘슬램덩크’가 쓴 일본 애니메이션 흥행 기록을 2달 만에 갈아치워서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관객 수는 557만 명이다. ‘너의 이름은’ㆍ‘날씨의 아이’ㆍ‘초속5센티미터’를 연출하며 국내에서도 충성도 높은 팬층을 보유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저력이 빛을 발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10월 25일 개봉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11월 30일 현재 196만 남짓한 관객이 들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ㆍ‘스즈메의 문단속’에 비하면 별것 아니지만, 한국영화와 비교해보면 흥행세가 분명해진다. 가령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날 개봉한 ‘용감한 시민’이 고작 26만 명에 그치고 만 걸 예로 들 수 있다.
재미만 있으면 국적을 가리지 않는 영화관람이라지만, 특히 “일본 제국주의 침략기, 출정하는 군인들에 경의를 표하는 대목이나 타국의 침략에 반성 없는 태도, 죄의식 없이 부유하게 사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아내를 잃은 뒤 처제와 결혼하는 대목 등은 국내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평가”(앞의 스포츠서울)를 받는 영화에 몰린 그런 관객은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흥행은 팬덤과 SNS 개인화 서비스를 기반으로 한다. 충성도 높은 팬들이 N차 관람을 이어간 게 개인화 서비스에서 알고리즘 분석을 통해 인기 애니메이션과 연관된 음악이나 작품을 자연스럽게 소개받게 된다. 그러면서 더더욱 다양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소개받게 된다”(앞의 스포츠서울)고 분석하지만, 수긍 여부를 떠나 씁쓰름할 뿐이다.
원칙적으로 어떤 영화를 보든 그건 개인의 자유지만, 국민의식을 파고드는 근원의 문화라면 다르다. 할리우드 직배외화로 한국영화가 초토화됐던 예전처럼 ‘문화적 국수주의’를 내세우고 싶진 않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에 생각보다 많은 한국인이 열광하는 건 나로선 유감이다. 일본은 전쟁범죄를 한사코 인정하지 않고, 핵 오염수마저 바다에 방류해대는 그런 나라 아닌가?
첫댓글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날씨가 추우니 건강 유념하시고 평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