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여행팀과 같이 영월지방의 답사길에 올랐다. 영월의 법흥사, 요선정, 장릉, 청령포, 선돌을 돌아보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다시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고 장릉의 보리밥집에서 점심을 먹도록 계획되어 있어 장흥보리밥을 먹어볼 요량으로 길을 떠났다. 8시 종합운동장역을 출발하여 첫 번째 답사지인 법흥사에는 11시경에 도착하였다. 버스기사가 올라가는 길이 험하여 차로는 갈 수 없다고 하여 차에서 내려 걸어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기사의 말과는 달리 법흥사 입구까지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있었다. 웬만한 절치고 차가 못 올라가는 곳이 없는데 괜히 기사가 심술을 부리는 것 같아 불쾌하였다. 법흥사로 접어드는 초입도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 있어 입구까지 포장되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올라가다 보니 예상대로 절 바로 앞까지 포장이 되어있었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걸어가는 것이 좋지만 이미 많은 시간을 길에서 버린 후라 조금이라도 시간을 절약하여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하여진다. 오르는 길의 초입에 새로이 만들겠다는 일주문의 사진이 크게 걸렸다. 사진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여 보니 크기가 신륵사의 일주문과 비교하여도 결코 뒤지지 않을 거대한 일주문 같아 보인다. 일주문의 양쪽 기둥아래에는 지혜와 자비를 상징하는 코끼리와 사자를 조각하여 놓는 것으로 계획되었는데 그 모습이 사뭇 괴기하다고 느낄 정도이다. 누구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사이 이루어지는 불사의 추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법흥사(法興寺)는 한때 흥령사(興寧寺)로 불리기도 하였던 절로서 우리 나라의 5대 적멸보궁이 있는 절이다. 자장율사가 643년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불사리를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영축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과 이 곳에 절을 창건하면서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이름을 흥령사라고 하였다. 그 뒤 헌강왕 때(875-886) 징효 절중이 중창하면서 구산선문 중 사자산문(獅子山門)의 중심도량으로 삼았다. 당시 헌강왕은 이 절을 중사성에 예속시켜 보살핌을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891년(진성여왕 5년) 병화로 소실되었고 944년(고려 혜종 1년)에 중건되었다. 그 뒤 다시 소실되어 천 년 가까이 작은 절로 명맥만 이어왔다. 1902년 비구니 대원각이 중건하고 절 이름을 법흥사로 바꾸었다. 1912년 다시 소실된 뒤 1930년 다시 중건하였다. 1931년 산사태로 옛 절터의 일부와 석탑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법흥사 만큼 많은 재난을 당한 절도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인연이 남아있었는지 이렇게 법등이 꺼지지 않은 것 만해도 다행인가 싶다. 법흥사 앞에 서니 넓은 주차장과 새로 단장한 건물들과 조경이 눈에 들어온다. 6년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어서 낯설기만 하다. 언제 이곳을 찾아 왔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것이 변화되어 예전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 극락전 옆에 있는 징효대사부도와 징효대사탑비를 찾아보았다. 징효대사부도(지방유형문화재 제 72호)와 탑비(보물 제612호) 그리고 극락전 주변도 넓게 정비되어 아늑한 맛이 없다. 그저 좋은 유물을 본다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할 것 같다. 징효대사탑비는 실측을 하려는지 주변에 가대를 세워 사진을 찍기에는 좋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아름다움이 어디 갈 것 인다.
징효대사탑비는 징효대사가 돌아가신 후 바로 세워진 것이 아니다. 징효대사(826-900)는 탑비문에 의하면 징효대사의 법명은 절중(折中)이고 7세에 출가하여 844년 장곡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금강산에 있던 철감선사 도윤에게서 법을 받았다. 그 후 자인(慈忍)에게 찾아가 16년간 법을 탐구한 후 882년(헌강왕 8년) 잠시 곡산사 주지가 되었다가 석운(釋雲)의 청으로 사자산으로 옮겨와 주석하였다. 이 때 그를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법을 듣고자 하여 운집하였다고 한다. 이 후 나라가 혼란하여지자 자리를 옮겨 다니다가 900년(효공왕 4년) 75세로 입적하였다. 징효대사의 탑비는 징효대사가 돌아가신 후 한참 뒤인 944년에 세워졌다. 글은 최언위(崔彦 )가 지었고 글씨는 최윤(崔潤)이 썼다. 탑비에 의하면 그는 도윤에게서 잠시 공부하였고 후에 쌍봉사로 가서 도윤의 탑을 참례하려고 하였지만 탑비의 기록상으로 오랜 동안 밑에서 공부하였던 분은 자인선사이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과연 그가 도윤의 법을 이었다고 하는 것이 맞는지는 더 연구하여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어쩌면 그는 당나라로 가서 구법을 하지 않은 한계를 도윤을 스승으로 모심으로서 극복하려한 것은 아닐까. 범부가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대선사에 대한 모욕일지 모른다. 그러나 탑비의 기록으로 볼 때는 누구라도 이러한 의문이 들 것 이다.
징효대사의 비를 다시 보니 귀부와 이수의 돌이 그리 치밀하거나 강도가 강한 돌 같지는 않다. 이미 비바람에 씻겨 문양이 많이 약화된 것이 보인다. 하루 바삐 보호시설이 필요할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징효대사비를 좋아한다. 다른 탑비와 비교하여 그리 큰 편은 아니고 강한 힘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시각적으로 편안함을 주는 탑비이다. 귀부의 머리가 몸체에 바짝 붙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길게 뻗어 나온 것도 아닌 적당한 길이로 나와 있어 편안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용두도 곡선이 많고 표현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거북머리와 같은 느낌이 많이 남아 있어 친근감이 간다. 탑비의 귀부를 보는 즐거움 중에 하나가 꼬리의 형상이다. 우리 나라에 있는 귀부의 꼬리 모양이 같은 것이 없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중국의 문화에 대하여는 잘 모르기 때문에 무어라 말할 수 없지만 중국문화재를 잘 아시는 분의 말씀에 의하면 중국 거북의 꼬리는 다양하지 않다고 한다. 꼬리의 형상을 보면 굵기, 형태, 길이 등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떤 것은 비대하다 못해 비정상으로 보이는 것이 있는가 하면 몸체는 매우 튼실한데 꼬리는 그에 비하여 빈약하게 보이는 것도 있다. 나는 이러한 것을 볼 때 꼬리가 바로 그 장인의 성격이 아닌가 생각한다. 성격에 따라 굵기도 하고 튼실하기도 하고 편안함도 보이고 강한 의지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느껴진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 귀부를 만든 장인은 편안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변화를 추구하는 성격이 아닌가 느껴진다. 징효대사의 이수를 보면 용 네 마리가 보주를 다투는 형상으로 되어 있다. 전면의 전액에는 징효대사탑비라고 쓰여있다고 하나 현재로는 거의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풍화되었다. 뒤의 전액부분에는 글은 없고 전액부분을 9칸으로 나누어 연꽃으로 보이는 문양을 중심으로 띠문으로 장식하였다.
옆에 있는 징효대사부도의 건립연대를 징효대사비와 같은 연대로 보는 분도 있다. 그러나 나의 견해는 이보다 빠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징효대사비문에 의하면 '사리를 모시고 동림으로 돌아가서 천우 삼년에 높이 석탑을 세우고 그 금골을 안치하였다(得到桐林 以天祐三年 高起石墳 安其金骨)'고 기록되어있다.(참고 :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여기서 천우 삼년은 907년(효공왕 11년)에 해당되므로 이 때에 징효대사부도가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부도를 만든 솜씨가 징효대사탑비를 만든 솜씨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당시 한참 세상이 어지러울 때라 공들여 만들 수가 없어 현재와 같은 부도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탑비는 당시에 만들기에는 무리가 있어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정하고 싶다. 징효대사부도를 자세히 보면 기단부에 있는 안상이나 복련과 앙련의 문양은 신라시대의 것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시대를 900년대 초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징효대사의 부도를 보면서 한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었다. 나는 그 동안 회암사에 있는 지공과 나옹선사의 부도의 몸돌 형식이 어느 때부터 저러한 모습을 보였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모든 부도를 다 본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사진 자료를 보면서도 헛보는 경우가 많아 언제일까 하는 답을 해결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오늘 이 부도를 보면서 최소한 900년 초까지는 그 기원이 올라갈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징효대사의 탑신을 보면 정확한 팔각형에서 변형된 약간 구형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미 신라시대 말에서부터 이러한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역시 많이 반복하여 보아야한다는 사실을 또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징효대사비를 뒤로하고 우리들은 적멸보궁으로 향하였다. 적멸보궁까지는 얼마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예전의 모습과 비교를 하면서 오르는 것이 예전과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요사이 나의 몸이 많이 나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을 오르다 보면 자신의 몸 상태가 정확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것 때문에 산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오르는 중간쯤에 요사채가 있고 옆에 샘물이 있다. 샘물의 맛을 보니 깨끗한 맛이 일품이다. 꼭 마시고 가야할 물이다.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은 예전과 달리 사람들로 붐비었다. 예전에 방문하였을 때는 한적하여 조용히 참배하는 맛이 남달랐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절 앞까지 대형버스가 들어올 수 있게 되어서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호젓한 분위기는 이제 이 법흥사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산길을 올라 적멸보궁에 올라 보니 예전보다는 많이 정리된 것 같다. 전에 왔을 때는 날씨가 흐려 분위기가 가라앉았는데 오늘은 맑고 쾌청하여 모든 것이 상쾌하다. 적멸보궁의 건물은 새로 지은 건물로서 청기와를 얹었다.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라 불상은 모시지 않았다. 건물의 뒤쪽에는 자장율사가 수행하였다는 굴(지방유형문화재 제 109호 : 法興寺石墳)이 있고 그 옆에 지방유형문화재 제 73호로 지정된 법흥사부도가 있다. 문화재청자료에 의하면 석분은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고승의 경첩을 간직하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는 굴 입구가 매우 축소되어 확인할 수 없지만 내부는 꽤 넓다고 한다. 법흥사부도는 조성양식으로 볼 때 아래에 있는 징효대사 부도보다 뒤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연꽃이나 안상을 볼 때 아직 신라시대의 분위기가 남아있으나 지붕의 처마선이 강하게 반전을 보이고 있는 점이 시대를 내려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부도의 몸돌에는 앞뒤에 문비 문양이 조각되어있고 다른 부분에는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다. 신장상의 모습은 고부조라고 느낄 정도로 많이 돌출되어 있지만 조각의 솜씨가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앞 문비장식 양면에는 인왕상이 조각된 것으로 보이고 뒤의 두면은 볼 수 없지만 좌, 우의 조각으로 보아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부도와 굴이 있는 언덕에 석조기단을 새로 쌓아 놓았다. 팔상도를 표현한 기단이나 역시 그리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늘 다니면서 느끼지만 요사이의 모든 조형물의 아름다움이 예전보다 못하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결국 이러한 것도 생각의 차이이다. 현재를 사는 사람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돈'이다. '돈'이라는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게된다. 조금 더 정성을 들여 아름다운 것을 만들려는 생각보다는 경제적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여 버린다. '조금 더'라는 단어가 아쉬운 시대이다.
법흥사의 답사를 마치고 다음 답사지인 요선정으로 향하였다. 요선정으로 가는 중간에 잠시 차를 멈추고 1859년(철종10년)에 설치한 금표(禁標)를 보았다. 금표는 조선시대 목재의 남벌을 막기 위하여 국가가 지정한 수목보호구역을 표시한 표석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는 관에서 필요한 목재의 수급을 위하여 일정구역을 지정하여 금표를 설치하고 관리하도록 하였다. 벌은 꽤 엄하고 관리까지 연대의 책임을 물어 관리의 효율을 높였다. 새겨진 글은 금표라는 표식의 수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금표를 보고 요선정(邀僊亭: 문화재자료 제 41호)으로 향하였다. 요선정은 주천강(酒泉江)과 법흥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개인적으로는 요선정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전국제일이라 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요선정에서의 선(僊)은 신선 선(仙)자와 같은 글이다. 요(邀)는 맞이할 요로서 신선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주변 경관을 보면 이름 그대로 신선이 내려와 놀 만한 곳으로서 정말 이름을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요사이 집에 붙여진 이름에서 이러한 아취(雅趣)가 있는 이름을 보기 힘이 든다. 요사이 지어진 대부분의 집들이 이름을 집주인과 관계된 내용을 주로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과거의 선조들이 한층 더 여유가 있는 생을 살았음을 이러한 집의 이름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 주변의 경관을 바라보다 보면 강 이름에 왜 술 주(酒)자가 들어갔는지 이해가 간다. 이러한 경관을 보고 술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풍류를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요선정은 정조와 영조의 어필현판을 보관하기 위하여 만든 정자라고 한다. 지금 정자를 만든 시기는 1900년 대 초라고 한다. 정자 안의 현판을 보면 정조가 지었다는 현판이 있다. 요선정 옆에는 큰 바위에 새겨져있는 좌불이 있고 앞에는 쓰러진 것을 다시 세운 석탑이 있다.
요선정 옆에 있는 무릉리마애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 74호)은 마치 반야용선(般若龍船)앞에서 피안(彼岸)으로 중생을 이끌어 가는 부처의 모습이다. 야외에 만들어진 불상을 볼 때 이곳에 불상을 조성한 사람들의 정성을 느낄 수 있다. 가끔은 얼마나 정성이 깊으면 불상을 조성할 자리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경외심에 싸이는 경우도 있다. 팔공산 관봉의 여래불 앞에서 그러한 느낌을 느꼈고, 남산의 신선암 마애불 앞에서 그러한 느낌을 느꼈다. 이러한 곳 말고도 여러 곳에서 그러한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곳에 조성된 불상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느낌은 마치 그곳에서 솟아 나온 것과 같은 자연스러움이다. 이러한 장소에 서있는 불상을 볼 때마다 깊은 신심이 없이는 도저히 이러한 장소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꿈에서 점지하여 주셔서 찾았다'는 등의 설화는 깊은 바램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다. 무심코 지나친 곳이 새로이 마음속에서 찾아진 것이다. 이곳도 그러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조각의 솜씨는 뛰어나지는 않지만 자연스러움을 가득 담고 있다. 좋은 솜씨를 보려고 한다면 이 곳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연스러우면서도 천연스러운 모습을 찾고 싶으면 놓칠 수 없는 곳이다. 또한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주변의 경관 또한 절경이어서 답사의 맛을 더하여 주는 곳이다. 좌불의 수인은 정확히 어떠한 것이라 힘들 정도로 많은 변형이 있다. 이렇게 수인의 원칙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 고려시대 이후라고 한다. 수많은 불상이 조성되면서 정확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법사나 장인들이 불상을 조성하면서 생긴 현상이리라. 앞에 있는 석탑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탑의 기단에 위 부분을 다시 만들어 올린 것이다. 점판암으로 후대에 올린 석탑조차 도괴 된 것을 최근에 다시 맞춘 것이다. 점판암의 탑신에는 범어가 새겨져 있다. 석탑의 기단을 볼 때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최초의 석탑과 불상은 같이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요선정 아래 주천강의 계곡으로 향하였다. 내려가 본 강물은 예전의 강물이 아니었다. 많이 오염되어 바위에 이끼가 많이 꼈다. 물이 깨끗하면 이끼가 끼지 않는다. 예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의 물은 이렇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깨끗함을 한껏 자랑하고 있었던 계곡이 오염되어 이제는 발 담그기조차 힘들어지고 있다. 이제는 이렇게 심산유곡까지 오염의 재난을 피해갈 수 없었다. 하기야 요선정 앞 길가에까지 러브호텔이 진출하였는데 그 이상 무슨 이야기가 필요할까. 이제 우리의 눈이 편안하게 쉴 곳조차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이곳에서 절실히 느끼게 된다.
요선정 답사를 마치고 식사를 위하여 장릉 옆에 있는 보리밥집으로 향하였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가 없는 곳이다. 서울에 있는 영월보리밥이니 쌈밥이니 하는 곳의 기원이 이 장릉보리밥집에서 출발하고 있다. 장릉보리밥집의 맛을 한마디로 말하면 '거친맛'이다. 한자로 말하면 조야(粗野)한 맛이다. 조미(調味)하지 않은 원래의 맛이다. 세련됨을 기대하고 이곳을 찾으면 실망할 것이다. 이제는 음식이 많이 발달하여 맛이 세련되어 이런 조야한 맛을 보기가 쉽지 않다. 얼마 전 여주 목아박물관 내에 있는 '걸구쟁이집'에서 먹은 음식의 맛이 이와 비슷하다. 지금의 음식에 입이 길들어진 사람들은 이러한 맛에 익숙해지려면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번 이 맛을 알고 나면 다른 맛에 쉽게 이끌리지 않게 된다. 즉 원초적인 맛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잘 발효된 된장과 간장 맛에 이끌리어 찾는 이가 줄을 잇고 있다. 오늘도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후인데도 손님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점심시간이었다면 웬만큼 참을성 없는 사람은 포기하여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이 음식점 위로 올라가면 보덕사라는 절이 있다 보덕사 내의 절집들은 근세에 지은 것이어서 그리 볼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오늘의 답사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이 절의 암자인 금몽암(禁夢庵: 문화재자료 제 25호)은 꼭 돌아 볼만한 곳이다. 이전에는 노릉암(魯陵庵)이라고 불리우다가 1770년(영조 46년) 왕명으로 금몽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금몽암으로 불리게 된 것은 단종이 관풍헌에서 지내다 이곳에 들렀다가 지난 날 궁중에 있을 때 꿈속에서 본 곳이라고 하여 금몽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암자이다. 실제로 가보면 절의 암자라기보다는 대갓집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이러한 모습으로 암자가 지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특이한 구조로서 한옥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찾아본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식사를 한 후 장릉으로 향하였다. 장릉의 입구가 많이 변하였다. 예전에 없던 유물전시관과 화장실이 만들어져 있었다. 입구도 새로이 만들어서 생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 다시 무신경한 의도를 보게 되었다. 나중에 영월군에 문의하여보니 현재의 전시관은 문화재청 전문위원의 의견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라고 한다. 영월군의 원안은 아마도 건물을 낮게 깔아서 넓은 부지를 차지하지만 건물의 형식은 전통 한옥의 형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화재자문회의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전문가의 식견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이 한스럽다. 입구에서 바로 보이도록 잡은 위치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된다. 단종과 관련된 전시관이라고 하여 많은 사람에게 보일 요량으로 위치를 정한 것 같은데 능 너머 안쪽에 위치하거나 또는 능 영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도 괜찮을 것이었다. 예산과 사람들의 관람 편의를 위하여 결정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경관을 망쳐가면서 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앞선다. 모든 여건을 고려하여 건물이 이곳에 들어설 필요가 있다고 결정하였다면 전시내용을 줄여서라도 그 규모를 축소하였어야 할 것이었다. 또한 건물의 외관도 신경을 써서 하였더라면 최소한 이렇게까지 흉물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건물이 들어서게 된 것을 분석하여 보면 결국 사회가 이러한 수준에 밖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다.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가 이러한 흉물스러운 환경을 만든 것에 일조를 하였다는 점에 건축을 전공하고 건축설계를 업으로 하는 나로서도 미안할 뿐이다.
사적 196호로 지정된 장릉은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듯이 단종의 능이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이곳에 내려와 청령포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홍수로 관풍헌으로 자리를 옮겨 기거하였다. 그후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모의가 발각되어 이를 기화로 단종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가지고 왔으나 차마 말을 못하자 복득(福得)이라는 자가 활시위로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한다. 이때가 1457년 10월 24일이었다. 시신을 동강에 버렸는데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수습하는 자가 없었으나 영월 호장(寧越 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수습하여 동을지산 기슭에 암매장하여 놓은 것이다. 후에 중종 11년(1516년) 왕명으로 노산군의 묘를 찾으라고 하였으나 엄홍도의 후손이 사라진 후라서 묘를 찾지 못하였으나 신임 군수 박충원(朴忠元)의 현몽과 엄주, 신귀손, 염속, 양인 지무작, 관노 이말산의 증언에 의하여 묘를 찾아 봉분을 갖추게 되었다.(중종 11년 12월 15일) 그후 1580년 선조 13년 묘역을 수축하고 상석과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으며 1681년(숙종 7년) 노산대군으로 추봉했고, 1698년(숙종 24년)에 추복(追復)하여 묘호를 단종(端宗)이라 하고 능호를 장릉(莊陵)이라고 한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다른 왕릉과는 다른 점이 많다. 우선 단종을 위하여 충절을 보인 신하들을 위한 건물이 있다는 것이다. 배식단사(配食壇祠)가 있는데 이것은 1791년(정조 15년) 왕명으로 설치한 것으로서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여러 신하들 위한 것이다. 두 번째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홍도 정려각(旌閭閣)등이 있다. 즉 단종의 복위에 관련하여 죽임을 당한 공신들과 단종의 시신수습과 복권에 공이 있는 자들의 정려를 이곳에 같이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자각도 묘소가 모셔진 이후 만들어져 무덤과 직각방향으로 위치하고있으며 또한 무인석도 없다. 무인석과 난간석이 없는 것은 후대에 추봉된 정릉(貞陵:태조 계후 신덕왕후)과 경릉(敬陵:덕종 세조의 왕세자로 후대에 추존)의 예를 쫓아 설치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양식은 왕명으로 가장 간단하며 작은 후릉(厚陵:2대 정종)의 양식을 따랐다. 따라서 장릉의 석물은 숙종과 영조 연간에 만들어진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능석물의 선구를 이루며, 명릉(明陵:19대 숙종) 이래 만들어진 사각지붕형의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인다.(참고서적: 왕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른 능의 주변 경관도 좋지만 이곳 장릉의 경관은 무척 수려하다. 능에 대하여 많이 연구하여 보지 않아 자신있게 말할 수 없지만 내가 돌아본 능 중에서는 역시 태조 대왕의 능이 제일 좋은 경관을 보이고 있고 다음이 이 장릉이라고 할 수 있다.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경관이 주변의 송림과 어우러져 장쾌함을 보여준다. 비명에 가신 분에게 돌아가서라도 좋은 경관을 바라보라는 배려가 아닐까.
장릉의 답사를 마치고 청령포(淸 浦:기념물 제 5호)로 향하였다. 청령포는 단종의 유배지이다. 단종의 유배지라는 역사적 배경이 아니더라도 주변의 경관이 좋아 예전부터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청령포의 경관은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을 보여준다. 청령포를 유배지라는 관점에서 보면 죄인을 관리하기에 더 없이 좋은 장소임에는 틀림없다. 물이 돌아드는 곳이어서 삼면은 물로 둘러싸여 있고 물이 없는 곳은 험준한 산과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선비의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서는 빠져나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곳이다. 이보다 좋은 자연감옥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령포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예전에 단종이 기거하였던 곳을 복원하여 놓았다. 영월군청에 문의하여 보니 자문을 거쳐 복원하였다고 한다. 집은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지만 아무래도 담은 눈에 거슬린다. 삼화토로 발라놓은 담에는 담을 보호하기 위하여 기와나 초가가 얹혀져 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아무런 조치 없이 처리하였다. 일반적으로 사춤이 없는 돌담은 위에 빗물로부터 담을 보호할 기와 등을 얹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춤한 돌담은 당연히 빗물로부터 담을 보호할 시설을 하여야 할 것이다. 기본이 잘못된 것을 그대로 시행한 관청의 무관심함을 어찌 할 것 인가. 또한 마무리도 너무 각을 잡아 놓아 마치 요사이의 담을 보는 것 같다. 자연스러움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청령포 숲 속에는 금표비가 있다. 영조가 단종의 유배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하여 금표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안내문에는 단종의 행동을 제한할 필요에 의하여 만들었다는 견해가 있음을 표기하였다. 그러나 금표비 옆에는 숭정(崇禎)99년이라는 표기가 있다. 이 표기에 의하여 이 것이 영조연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안내문에 표기된 단종의 행동을 제한할 필요에 만들었다는 표기는 잘못이다. 단종이 이미 죽은 뒤에 만든 금표비가 어찌 단종의 행동영역을 제한하기 위하여 만들었겠는가. 단종이 올라가 신세를 한탄하였다는 노산대를 올라 주변을 보니 경관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강 건너 울긋불긋한 음식점만 없었다면 더욱 좋았을 경치가 이렇게 허무하게 망가져 가고 있다. 다음 번 이곳을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이 생길까 다시 생각하여 보지만 그런 마음이 생길 것 같지는 않다. 오늘로 청령포는 마지막이라는 생각뿐이다.
마지막으로 '선돌'이라는 곳에 들렸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장대함을 느낄 수 있는 그리 흔치 않은 곳이다. 지금의 도로상태로는 위에서 밖에 볼 수 없지만 1900년 대 초까지만 하여도 영월로 들어오는 길은 이 선돌의 아래로 나있었다고 한다. 사실 선돌을 보는 맛은 이렇게 위에서 보는 맛이 아닐 것이다. 아래서 보는 선돌은 위에서 보는 선돌과는 전혀 다른 맛을 보여줄 것이다. 아마도 아래서 보는 선돌은 더 장대하고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왜소한가를 극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돌아오면서 영월에서 단종이 없었다면 '영월은 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을까'를 생각하여보았다. 단종의 장릉이 이곳에 없었다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였을 것이고 그 만큼 천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영월이 좋아 이곳을 자주 찾던 나의 친구를 영월 답사 다음날 만났다. 영월에 다녀왔다고 하였더니 친구가 말하기를 '이제는 영월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맑고 깨끗한 동강을 이제는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었다며 예전의 영월이 그립다고 하였다. 그간 동강의 보전의 문제가 사람 입에 오르내리며 관심의 대상이 되자 오히려 동강이 예전보다 못하여졌다고 한다. '댐의 건설 저지'는 성공하였지만 '동강을 보호하는 것'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모습을 나도 이곳에서 직접 느꼈다. 요선정 앞의 주천도 예전의 주천의 물이 아니고, 청령포 앞의 물도 예전의 맑은 물이 아니다.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것이 보전하는 첩경임을 너무 많이 보아왔다. 이곳 영월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지자체가 돈을 버는 것을 그 목표로 하는 이상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도록 하는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그러한 생각들이 모든 것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게 한다. 사람을 끄는 매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깊게 생각하지 않고 편리함과 먹거리의 나열이 개발의 제일 원칙이라는 단순한 사고로 모든 것을 뒤엎고 있다. 이 청령포의 경관은 청령포를 바라다보는 것뿐만 아니라 청령포에서 바라다보는 경관 역시 매우 중요한 보전의 요소임을 이 곳 사람들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주변의 모든 것을 보전하려는 생각이 우선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 '문화환경보전' 또는 '자연환경보전'이라는 문구는 구두선(口頭禪)이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