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행정.정치.교육 다방면에 두각을 보인 이환의 전 MBC 사장, 대한민국 신화를 쓴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신문사 기자에서 방송국.신문사 사장으로
9년간 최장수 사장 재직
대한민국 미디어 산업발전 역군 선봉자, 문화계 큰별
대한민국 국민방송을 키운 이환의 사장
대학가요제 선풍 일으킨 업적, 영암아리랑으로 남다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 정치부장
내무부 기획관리실장
전라북도 도지사
국회의원
한국언론금고 초대 이사장
한국방송협회 부회장
중앙대신문방송대학원 교수
백제문화연구원 상임고문
학교법인백암학원(백제예술대학) 설립
경향과 MBC 매스컴센터로 변모
MBC 대학가요제 및 강변가요제 개최
명랑운동회, 수사반장, 113수사본부 등 오락/드라마 프로 제작
고인의 유언에 따라 고향 선선에 수목장
방송이 국민의 방송으로 거듭나야 한다. 국민이 만들고 국민이 이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방송의 연속성이 위험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하면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미디어 산업을 선진화 대열에 올려놓으며 국민들의 애환을 달래줬던 MBC(문화방송)가 국민의 사랑 속에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어주며 희망을 안겨주는 국민방송으로 거듭나게 한 우리 국민은 이환의 MBC 전 사장을 기억할 것이다.
대한민국 미디어 산업보국을 위해 헌신한 언론계의 거목 이환의 사장이 지난 11일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18일 전주이씨대동종악원이 전했다. 향년 90세
이 전 사장은 오랜 투병 끝에 자택에서 별세했으며 고인의 유언에 따라 장례는 외부에 알리지 않거나 조문도 받지 않고 가족들만 참석해 선산에 수목장으로 치러졌다. 고인은 살아계실 때도 전혀 가족 이외는 문병을 받지 않아 근황을 알 수가 없었다. 고인은 병환 이후에는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채 병마와 투병하며 지냈었다.
유족으로 부인 전순남씨와 장남 이기훈 백제예술대학교 총장, 차남 이기범 경기대학교 교수, 딸 이은주씨가 있다.
고인이 되신 이환의 사장은 화려한 경력에서 말해주듯이 그는 후회 없는 인생 여정을 보냈다. 기자에서 정치부부장으로 내무부 기획실장으로 전북도지사로 언론사 사장으로 대학원 교수로 백제문화연구원 상임고문으로 또는 대학교 설립자로 국회의원으로 탄탄대로를 걸은 입지적인 인물이다. 숱한 업적과 발자취를 남긴 이환의 사장은 다양한 분야의 계층에서 명암을 꺼냈다.
병마와 오랜 투병생활로 말년을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지는 못했지만 고인이 걸어온 뒤안길은 화려했고 멋졌고 아름다웠고 담대했고 의젓했고 값졌고 훌륭했고 웅장했고 위대했다, '이환의 없었다면 오늘의 MBC는 없었을 것이다' 말이 나올 정도로 고인은 없어서는 안 될 꼭 그 자리 그 일에는 이환의가 있어야 했다.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것은 달과 별이다. 별은 달보다 작게 보이지만 더 반짝인다. 밤하늘 저 편에 크게 반짝이는 별 하나, 그 별은 이환의 사장의 별이었다. 고인이 세상을 떠나 '별이 지다' 이지만 그 별은 영원히 지는 것이 아니다. 잠시 구름에 가리 울뿐이다. 이환의 사장과의 불가피하게 생전에서의 인연은 끝났지만 사후에도 왠지 한동안 그 여운에 젖을 것 같은 가슴에 여운이 남는 인물로서의 기억에 남은 스타이다.
이환의 고인은 전순남 여사와 함께 작은 매점을 경영하면서 생계를 꾸려갔다. 시작은 보잘 것 없고 초라한 가난한 서민에 불과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경행신문 기자 생활을 하며 '나는 기필코 지금의 내 생활과 신세를 탓하지 않고 희망을 갖고 남들처럼 훌륭하게 이뤄내고 모범적인 사람으로 가정으로 가꾸어 가겠다.' 강한 의지를 불태우며 고인은 쉼 없이 꿈을 향해 달렸다. 영암 서호 몽해와 월출산을 생각하며 정기를 받은 만큼 '내 사전에는 실패란 없다' 는 명언을 떠오르며 강인한 자세로 자신을 불태웠다.
고향 서호를 떠나 광주에서 중.고를 다니기 위해 유학했고 또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기 위해 유학하면서 본격적인 삶의 현장이 시작했던 그리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기 위한 온갖 것 시련에 도전하며 극복해야만 했던 고인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졌다. 가난한 자에서 의지할 곳은 가족밖에 없었던 환경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밝은 삶을 열어가기 위해 윤택한 삶과 훌륭한 인물로 입신양명하기 위해 입을 악 다물고 절대 꿈을 저버리지 않고 시련에 도전장을 내밀며 싸웠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들고, 광택이 없는 것을 닦아 빛나게 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치 있게 한 각고의 노력으로 해냈다. 맨주먹으로 싸웠던 고인은 결국 최종 승리자가 됐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창대했다. 고인은 'Though your beginning was small, yet ypur latter end should greatly increase' 이런 성경구절을 실천해 보였다. 고향 서호에서 집을 나올 때 부모님께 '공부를 열심히 해 훌륭한 인물로서 성장하겠습니다' , '반드시 성공해 돌아오겠습니다' 라며 부모님과 약속하고 의지를 다졌던 그는 '입신양명(立身揚名)' 하여 '금의환향(錦衣還鄕)' 했다.
어두움을 밝혀주는 별이 됐던 고인은 아름다운 별처럼 고인도 빛나는 일들이 수다하다. 고인이 일구어온 업적은 그 공은 어떠한 일과도 견줄 수 없는 탁월한 공적(功績)이요 몇 권의 책으로도 공적서(功績書)를 다 써 내지 못할 만큼 그 치적(治績)은 엄청나다. 고인은 한 손에 필을 들면 또 한 손에는 수첩을 들었다. 그리고 말을 했다. 언론의 힘으로 세상을 바르게 열겠노라고 필이 꽂힌 건 문화 혁신이었다. 새로움을 추구하고자하는 국민방송과 국민신문으로 나아가고자 한 생각뿐이었던 그는 정치무대에 문을 두드리며 들어가 또한 필묵(筆墨)의 힘으로 정치사의 족적(足跡)을 남기겠다며 행정이면 행정, 국회면 국회 등에서 필진(筆振)이 아닌 '정진(政振)' 으로 뛰었다. 고인은 또한 교육 발전에도 크게 기여를 했다. 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꿈을 키워줬다. 설립자였던 고인은 대학 강단에 서며 가르치기도 하는 등 필진은 '교진(敎振)' 의 힘도 보여줬다.
이 시대의 진정한 '언론인(言論人), 행정가(行政家), 정치가(政治家), 교육자(敎育者)' 였던 이환의 사장이 걸어온 길은 한편의 '다큐멘터리' 로서 삶의 길과 미래를 열어갈 담대한 인생 여정을 보여준 '너를 만났다 날마다 솟는 샘물' 의 '휴먼드라마' 였다. 이환의 일대기의 '언론의 역사를 쓰다. 행정의 역사를 쓰다. 정치의 역사를 쓰다. 교육의 역사를 쓰다' 이런 수식어가 붙을 만큼 고인의 일대기는 세상을 바꿀 만큼 위대하다. 어떠한 소설로도, 드라마라도, 영화로도, 다큐멘터리에도 담을 수 없는 죽음보다 더 강한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 은 감히 제작으로 끝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남겼다.
언론의 옷을 입고 문화의 옷을 입고 교육의 옷을 입고 행정의 옷을 입고 정치의 옷을 입고 국민들한테 올바르게 이롭게 전해지기를 고인은 인색하지 않았다. 인생문화일대기의 제작자와 기획자와 연출자와 연기자는 이제는 우리 자신들의 몫으로 남기고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고인은 "시청자가 즐겁지 아니하는 프로그램은 한 조각 휴지나 다름이 없느리라" , "정치는 국민한테 나온 것이 진정한 정치요 국민의 의사를 따르지 않고 한 정치는 가십에 불과하다" , "정치는 국민과 함께하는 것이다" , "가장 위대한 정치가는 가장 인간적인 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라고 남겼던 또한 "정상배는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시대를 생각한다" 클라크의 말이나 "우리나라를 위한 훌륭한 정치는 정치제도를 철폐하는 것이다" 월트 휘트먼의 말을 인용했던 또는 "성공이란 열정을 잃지 않고 실패를 거듭할 수 있는 능력이다" 윈스턴 처칠의 말과 "세상에는 일곱 가지 죄가 있다 도덕 없는 경제, 노동 없는 부, 철학 없는 정치, 인격 없는 교육, 인간성 없는 과학, 윤리 없는 쾌락, 헌신 없는 종교이다" 마하트 간디의 말을 다시 떠오르게 하면서 고인은 평소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당신이 사람들을 이끌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그들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배워야만 한다" 라는 명언을 다시 새기도록 가르침은 죽어서도 강조할 것 같다.
이환의 사장은 방송사를 경영하면서 "백성이 가난하지 않도록, 백성이 배부르도록, 백성이 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정치다. 아프면 치료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고, 배우고 싶으면 배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국가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기득권을 위해 움직이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라는 그 의미를 잘 새겨 "정치란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다" 라는 네루의 말을 실천하고자 고인은 방송계에 있을 때 젊은이들이 무얼 원하고 젊은이들의 꿈이 무엇인지를 그는 그 꿈을 이루어주고자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대학가요 같은 프로그램으로 꿈을 실현하는 국민 문화방송으로 거듭나게 했다.
He is 이환의
고인이 되신 이환의 전 사장은 영암 서호면 몽해리 아천마을 출신으로 광주서중학교 졸업(26회), 광주고등학교 졸업(2회),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를 졸업하고 이후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를 거쳐 정치부장을 역임했다. 1966년에는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기획관리실장으로 공직에 몸을 담았으며 이후 전라북도 도지사를 지낸 뒤 1971년부터 문화방송(MBC) 사장이 되었으며 1974년에는 경향신문과 합병하여 (주)문화방송.경향신문 사장이 되어 두 매체를 맡았다. 중앙대신문방송대학원 교수, 백제문화연구원 상임고문 등을 역임했으며 1990년 학교법인백암학원(백제예술대학)을 설립했다.
고인은 MBC 사장으로 있으면서 임기 9년 동안 경향과 MBC를 매스컴센터로 변모시키고 MBC 대학가요제 및 강변가요제 개최를 비롯해 명랑운동회, 수사반장, 113수사본부 등의 숱한 오락/드라마 프로 제작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현재 오락특화 채널인 MBC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하였다.
그 외에도 1974년부터 한국언론인금고 초대 이사장, 1979년부터 한국방송협회 부회장까지 맡았다.
고인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직후 9주)문화방송.경향신문 사장 및 한국언론금고 이사장, 방송협회 부회장직에서 사실상 경질되었다. 이후 문중단체 청권사 이사장에 전념하며 중앙대 신방과 객원교수, 백제문화연구원 상임고문을 역임한 후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전라남도 영암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평화민주당 류인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9년 학교법인 백암학원을 설립해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후 1992년 백제전문대학을 열었다. 한편 고인은 1991년 민주자유당 영암지구당위원장, 광주시지부장을 역임하며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가 발의한 5.18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에 서명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광주광역시 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정치국민회의 정동채 후보에 밀려 낙선했고 그 해부터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종중으로서 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악원 이사장으로 16년간 재임했다.
2000년 한나라당 부총재에 임명되었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광주광역시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새천년민주당 박광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한나라당 총재권한 대행, 제16대 대통령 선거 이회창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3년 국책자문위원장, 2010년 한나라당 국책자문위원회 고문 등을 역임하고 2017년 백암학원 이사장직을 넘겨주고 정계를 떠났다.
이환의 사장의 일화, 인생의 전환점
이환의 사장은 젊은 나이에 신문기자에서 고위공무원과 언론사 사장이 됐다. 이 사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 때문이었다. 경향신문 정치부장 당시 1964년 9월 8일 충남 유성 만년장호텔에서 6인의 언론계 대표 특별위원장인 이 사장과 박대통령이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언론윤리법' 입법을 앞두고 마지막 언론 기자단 대표와 대화에서 박대통령을 설득했다.
이 사장은 일본 특파원 경험을 살려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각하 정부가 언론을 지원해주면 우리 언론도 정부를 지원할 수 있습니다' 라고 강력히 건의했다. 기자시절 대통령 앞에서 한 발언이 '인생의 전환점' 이 됐다. 이환의 고인이 한 말에 박정희 대통령은 깊은 인상을 받아 눈여겨 둬 경향신문 정치부장이였던 이환의 고인에게 기자에서 행정가로 발을 내 딛게 하게 했다.
언론윤리위원회법 강력 저항
언론윤리법은 1964년 9월 4일 언론인들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항복을 받아냈었다. 5.16 쿠데타 3년 뒤의 서슬 퍼런 정권한테 굴욕감을 안긴 기자들의 강력한 승리였다. 대동문화연구 제75집에 살린 이봉범 동국대 교수의 논문 '1960년대 검열체제와 민간검열기구' 에 따르면 민간 자율심의기구인 각종 윤리위원회는 대부분 5.16후에 발족된다. 1961년 9월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출범을 시작으로 1963년 6월 한국방송윤리원회, 1965년 7월 한국잡지윤리위원회, 1965년 2월 예술문화윤리원회, 1966년 5월 한국주간신문윤리위원회, 1966년 8월 한국아동만화윤리위원회, 1969년 3월 한국도서출판윤리위원회가 순차적으로 설립되었으며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신문.방송.도서출판.문화예술 등 사회문화의 핵심 영역 전반에 윤리위원회 설치가 완비된 가운데 민간 주도의 자율적 규제가 일반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고 기술한 대목이 나온다.
자율규제 형식으로 언론 출판을 통제하겠다는 박정희 정권의 발상은 4.19혁명 직후의 사회현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시민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는 4.19과정에서 과 출판의 자유는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커졌다.
시민혁명은 그런 속에서 부작용도 속출하는 등 비리가 생겨났다. 일부 기자들이 금전적 이익을 목적으로 공갈하거나 협박을 하는 사례가 많았고 교묘하게 이용하고 노리기도 했다. 기자인 척하며 돈을 뜯어내는 유령의 사이비 기자가 많아졌다. 1961년 2월 23일자 경향신문은 이런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며 써 됐다.
흔히 세간에서는 4.19는 언론의 4.19를 가져오지 못했다고 한다. 4.19 이후 속출한 각종 유령 신문기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기존 기자 층에도 공갈과 협박을 일삼는 일이 비일비재함은 주지의 사실로 되어 있다. 경향신문에서는 당시 상황을 기술했다.
이런 유령 기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현상으로 인해 4.19 이후에는 악덕 기자 및 사이비 기자를 배격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돼 있었고 정부나 국민은 이런 현상에 대해 원성이 높았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박정희 정권이 민간 주도의 언론 규제를 활성화시키고 각종 윤리위원회를 만들게 조치를 취했다.
부정부패가 난무하고 타락한 언론을 바로 잡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 중 하나가 1964년 '언론윤리위원회법' 이다. 이 법은 형식상으로는 민간에 의한 자율적 규제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한일협정 추진에 대한 국민적 반발을 무력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 정서나 협상 조건 등을 고려하지 않고 한미일 삼각동맹 결성이라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휩쓸려 한일협정을 졸속으로 추진했었다. 국민들은 이런 일에 대해서 굴욕 외교로 규정하고 저항에 나섰다. 언론탄압이라고 강력히 저항했다. 이런 흐름에 제동을 걸고 여론을 호도할 목적으로 박정희 정권이 고안해낸 게 '언론윤리위원회법' 이다.
언론윤리위원회법은 1964년 8월 5일 법률 제1652호로 제정됐다. 제정되고 당일부터 시행하게 했다. 시행한 언론윤리위원회법은 제1조에서 '신문.방송 등 언론의 자율적 규제를 강화' 하는 게 입법의 목적이라고 선언했다. 이법 조항으로 신문사 발행인과 방송국 사장으로 구성된 언론윤리위원회가 자율적으로 언론을 심의하도록 하겠다는 게 법률의 주목적이었다.
언론윤리위원회가 자율적으로 언론을 심의하겠다고 했지만 이 법에는 신문사 발행인과 방송국 사장을 언론윤리위원회에 강제로 가입시키는 규정이 들어있었다. 자율 규제라는 입법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독선적이고 일방적인 강제성을 띤 것이었으며 제2조에서는 이들이 당연히 위원회에 포함되도록 명확히 한 내용의 '위원회는 신문.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 제4조의 규정에 의하여 공보부에 등록된 정기간행물을 발행인과 방송법에 의한 방송국의 장(사장.국장.차장 등등)을 당연히 회원으로 구성한다' 고 규정하는 등의 못을 박아났다.
언론윤리위원회법 제3조에 따르면 위원회를 구성한 신문 발행인과 방송국 사장들이 추구해야 할 윤리가 있었다. 이 윤리법에 의거해 언론을 심의했으며 그 윤리 속에는 국가안전보장, 인격 존중, 가정생활의 순결, 개인의 명예나 사생활의 비밀 그리고 공중도덕 외에 국가 원수의 명예도 들어있었다.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들어져있는 "눈밖의 행동을 하거나 내 말 안 들면 손을 보겠다. 하라는 대로 하라" 는 식의 공포를 조장한 독소조항의 법안이었다.
법안은 신문사나 방송사가 그런 윤리를 위반할 경우에는 제13조에 따라 권고 또는 경고를 하거나 해명.정정.사과 보도문을 내도록 헸다. 윤리 위반의 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위원회의 결정으로 해당 언론사 발행인이나 사장의 위원회 회원 자격을 정지 또는 제명할 수 있도록 했다. 신문사 발행인과 방송국 사장이 위원회에 자동적으로 들어가도록 해놓고 위원회의 결정으로 이들을 위원회에서 내쫓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위원회에서 쫓겨난 발행이나 사장은 자기 회사에서 지위를 유지하기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발행인.사장은 위원회 회원 자격을 갖고 있어야하는데 그 자격을 박탈당하면 발행인.사장의 지위마저 위태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공포적인 위원회에 발행인과 사장은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언론윤리를 독소조항이고 탄압이지만 정부의 눈치를 봐야할 언론 당사자들은 눈물을 삼키며 화를 참고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했다.
이처럼 언론윤리위원회법은 민간 기구인 언론윤리위원회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대며 신문사나 방송국을 옴짝달싹 못하게 자기들의 입맛대로 할 수 있게 쥐락펴락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명백한 악법이었으며 언론탄압이 하늘을 찌르는 그들의 만행은 독제였다. 그래서 언론인들은 법의 철폐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 정부로부터의 언론의 자유를 찾기 위한 비장의 태세로 강력히 항의하며 언론윤리위원회법을 철회하라며 촉구했다. 경향신문은 1964년 8월 5일자 신문에 비민주적인 언론윤리위원회법에 대하여 마침내 당시 정치부장이였던 '이환의 기자' 를 포함한 언론인 전원이 직접적인 항쟁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비장하게 보도했다.
동아일보 해직 기자들
언론인들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압박에 착수했다. 언론윤리위원회법 철폐 투쟁위원회도 결성하고 전국언론인대회도 열어가며 강력하게 항의를 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 압박의 목을 조여 갔다. 그러자 언론인들은 8월 17일 한국기자협회를 발족시켜며 총칼 대신 펜으로 더 강도 높게 투쟁에 나섰다.
여기에 박정희 정권은 그럴수록 더 대응의 강도를 높여갔다. 언론사 발행인이나 사장들을 직접 겨냥해 투쟁을 철회하라고 온갖 것 협박으로 압박을 가했다. 박정희 정권의 무서운 압박을 받고도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언론들이었다. 특히 경향신문, 대구매일과 함께 동아일보.조선일보가 그랬다. 네 신문사는 박정희 정권에 절대 굴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네 곳의 신문사를 길들일 목적으로 8월 31일 국무회의를 소집해 네 언론사에 대한 보복 조치를 강구했다. 이날 의결된 보복 조치는 '정부는 64년 8월 31일을 기하여 합법적 절차에 의해 제정.공포된 언론윤리위회법을 준수하지 않고 법 시행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는 기관이나 개인에 대해서는 정부가 부여하는 일체의 특혜나 협조를 배제한다' 고 명시해났다. 또 이날 각의는 '이 밖에도 중앙의 각 부처 중 특수한 몇 부처를 제외하고는 동아.경향, 조선.매일(대구) 등 4개지의 구독을 취소하기로 하고 지방의 각급 행정관서에 대해서는 내무부장관이 조치하도록 하는 동시에 전국 27만 공무원의 가정에서도 구독을 가능한 한 중단하도록 조처한다' 라고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 내용은 발표에서 뺐다.
저항하는 언론사에 대해 정부 차원의 특혜나 협조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보복 조치였으며 중앙 관청들의 신문 구독을 끊고 공무원들의 구독 취소를 권유하는 이런 보복 조치는 한마디로 유치했다. 이런 유치한 보복 조치에 언론들은 가만히 있을 수 있었다. 너무 유치하게 행동하자 저항의 강도는 더욱 더 세졌다. 저항에 여당과 종교계는 물론이고 재야 지도자인 함석헌, 정준하 등도 저항운동에 가세했다. 각계각층의 300여 명이 자유언론수호연맹을 결성해 나섰으며 또 국제언론인협회(IPI) 알렌 허낼리우스 회장도 박정희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다.
이런 국내외의 강력한 저항에 박정의 대통령은 심적 부담을 느꼈다. 고뇌에 찬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에 말한 이환의 경향신문 정치부장의 말도 떠오르며 결국 9월 4일의 대통령 특별담화로 이어졌다. 담화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법을 철폐할 뜻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보복 조치를 철회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담화에서 "나는 오늘 정부가 취한 몇 가지 지나친 조치를 즉각 시정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라고 국민들 앞에 밝혔다.
담화문에서는 철회한다고 항복 선언이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그 직후부터는 자신의 체면을 살리면서 후퇴할 수 방법을 궁리하는 등의 강구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법률 시행을 유보' 하는 것이었다. 이환희 경향신문 정치부장의 말을 듣고 5일 뒤에 박정희 대통령은 언론윤리위원회법 시행령을 제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언론윤리위회법 유보를 유도한 이환의 정치부장은 그때 '각하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정부가 언론을 지원해주면 우리 언론도 정부를 지원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당당한 이환의 칼보다 펜이 빛났다
이환의 기자는 그 무서운 군사정권에서 탄생한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힘 앞에서 당돌하게 느껴질 정도로 당당하게 박정희 대통에게 건의를 했다. 이환의 기자는 그 발언으로 이후 닥쳐올 자신의 신상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할 말은 했다. 일개의 빈약하기 짝이 없는 펜이란 무기로 강력한 총칼이란 무기를 들고 있는 정권에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대들었다. 결과는 승패를 가리기보다는 박정희 대통령은 이환의 기자를 보고 속으로 "이것 봐라 " 하며 "이 부장 당신 참 당찬 면이 있구먼" 목소리 높인 채 이환의 정치부장을 좀 불쾌한 듯이 뚜렷이 쳐다봤다. 박정희 대통령은 언론윤리위원회법으로 방송국과 신문사 사장을 비롯해 기자들이 강력하게 정권에 악법이요 탄압이라고 본 채 항의하며 맞서고 있는 것에 고뇌를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고민은 깊었고 해결책을 찾아야했다.
언론의 정부에 대한 비판, 비리타파, 사이비 기자 척결 등의 언론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언론을 바로잡고 길들여 오로지 자기 편으로 만들어 말을 잘 듣도록 하려했지만 꼼수를 부렸던 박정희 대통령은 저항의 물결이 갈수록 거세지자 결국은 특별담화문을 통해 언론윤리위원회법을 폐지하지 않는 대신 유보 쪽으로 하여 들끓고 나온 언론과 민심을 진정시켰다. 군사정권이었지만 언론은 '펜' 의 힘으로 대항하며 절대 항복하지 않고 맞서 칼을 든 군사정권은 펜에 밀려 한 발 뒤로 물러선 채 언론과의 협상작전으로 나서게 된다. 박정희 대통은 얼마 전 경향신문 이환의 정치부장의 말을 다시 한 번 떠오르는 채 되씹어 보고 고심하면서 무릅을 치며 "그래 맞아 옳지 옳아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느껴 관계자를 불러 특별담화문을 발표하겠으니 준비하라고 긴급 지시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담화문에서 '유보' 한다고 발표하며 한 발 물러섰다. 경향신문 이환의 정치부장이 언론윤리위원회법 유보하도록 만드는데 결정타가 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거센 물결을 진정시키는데 방법을 알려준 이환의 정치부장을 인터뷰 때는 정권에 맞선 것 같아 당돌하게 보기도 했지만 용기를 갖고 할 말은 하겠다며 정권에 당당히 나선 이환의 기자를 참된 기자로 보고 박정희 대통령은 인상이 강하게 남은 언론에 있던 이환의 정치부장을 정부에서 일하도록 그를 발탁한다. 경향신문 이환의 정치부장은 일본 특파원시절에 보고 느꼈던 것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조언해줬던 게 이환의의 인생길이 이후부터 크게 달라지게 됐다. 이환의 기자를 내무부 기획관리실장으로 박탈되면서 전라북도지사와 문화방송과 경향신문 사장이 되고 하는 등 그의 인생은 180도로 달라지게 된다.
언론윤리위원회법 강제 조항에 대해 강력 투쟁에 앞장선 이환의 기자는 이런 계기로 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이 됐고 인생 전환점을 맞게 됐다.
경향신문 이환의 정치부장의 말 한마디가 상당한 충격을 줬는지 5.16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이 무소불위 권력으로 언론을 길들이기 위해 손아귀에 넣기 위함으로 '언론윤리위원회법' 을 만들고자 했던 강력히 저항에 나선 언론과 기자들을 때려잡고자 했던 것에서 마음을 바꾸는 일은 역사에 남을 만한 기록적인 일화가 됐다. 어떠한 저항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절대 흔들리지 않았던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더 강하게 나온 절대 굴하지 않은 통하지 않았던 박정희 대통령이 한 언론사 기자의 말 한마디에 한 발 물러서는 담화문을 통해 유보하는 쪽으로 발표를 하게 만든 일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듯한 흥미로운 대목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민국 근대화를 일으킨 인물로 추앙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권력을 오래 유지하기 위한 별별의 수단을 강구했다. 경제발전을 이루어야했고 경제전문가들이 말(조언)을 해준대로 그는 건의사항을 들어주면서 전권을 행사해 이행해야했다. 하지만 반대하는 자에게는 한마디로 군화발로 짓밟듯이 사정없이 단오하게 그들에게 민족과 겨례를 위해 짓밟아야 하는 의지가 너무 확고했고 강력한 통치무기란 총과 칼로 위협했다. 서슬 퍼런 공포정치라 할까 5공 시절에는 권력의 눈치를 봐야했기에 국민은 권세나 기세에 기죽인 듯이 따라야 만이 했다. 정권에 반항과 거역하거나 잘 못 보이면 언제 어디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 혹독한 고통을 치러야하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하는 일들은 다 애국하는 일이요 국민 미래의 삶을 밝게 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객관적으로 볼 때 권력의 의지가 어마어마하게 강한 사람이었다. 강한 집념과 의지이라 할까 그런 카리스마가 강한 무소불위로 독선주의자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자기 뜻대로 하려했던 사람이다. 세상 무서울 게 없어 보인 그런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경향신문 이환의 정치부장' 이었다.
최연소 도지사 부임
박대통령의 깊은 신뢰와 사랑으로 1968년 우리나라 최연소 37세의 나이로 '전북도지사' 에 부임했다. 박대통령은 이환의 기자의 건의를 동감하고 이를 받아들여 '언론윤리법' 입법 시행을 보류시켜 당시 38일 간의 언론파동을 끝냈다. 이환의 사장은 이 일을 계기로 박정희 대통령의 눈에 띄어 바로 '내무부 기획관리실장' 에 발탁되었다. 그는 내무부 기획관리실장에서 도지사와 언론사 사장, 국회의원으로 인생의 여정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이환의 발언 시끌부글, 홍역
민자당 광주서구 개편대회가 있던 1992년 9월 26일은 정치 초년생 이환의 의원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 됐다. 이환의 의원은 김영삼 총재 등이 참석한 이날 대회에서 한 발언이 큰 화를 불러들었다. 이환의 의원은 위원장 선출된 뒤 인사말을 건네면서 "때밀이 구두닦이들의 불쌍하고 코 묻은 돈이 동교동으로 들어가 엊그제까지 빈둥대며 놀던 사람이 고급자가용을 타고 다니며 소수 야당 귀족주의에 빠져 있다" 며 김대중 민주당대표 측근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참석했던 당원들도 이환의 의원의 뜻밖의 깜짝 발언에 놀라워할 정도로 위험수위를 넘는 발언으로 보고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환의 의원은 또 "관청 기밀문서를 빼내 폭로하는 사람이 민주투사가 되고 데모하다 저희들이 휘두른 각목에 맞아 죽은 송장이 광주에 오면 열사가 되는 현실이 되었다" 고 재야운동권과 학생 등을 겨냥해 공격하기도 했다. 이 발언으로 큰 화근이 되었다.
이로 인해 백운동지구당사무실에는 항의전화가 빗발쳤고 고 박종철군의 아버지 박정기씨 등 9명은 사무실로 찾아와 농성을 벌이는 등 이환의 의원에게 사과하라고 항의했다. 민주당 역시 이를 즉각 반발, 비난하고 나섰다. 이환의 의원은 "자신의 발언이 이처럼 큰 반항을 일으키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고 해명했다. 하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으며 이환의 의원은 사태가 커지자 당황한 표정이었다. 지나친 발언에 해명과 사과로 수습하랴 진땀이 났고 단단히 홍역을 치렀다.
이환의 의원은 "13대 대선과 총선, 기초, 광역의회의원선거, 14대 총선 등 다섯차례의 선거에서 특정 정당이 이 지역을 휩쓸어 당원들이 사기가 극도로 저하돼 있습니다" . "그들에게 무엇인가 한마디 해야겠다는 감정이 앞서 그 같은 말을 하고 말았어요" , "결과적으로 민주 영령들의 명예가 훼손되고 유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 깊이 사과하고 있습니다" 라고 고개를 숙였다.
이환의 의원은 박종철군의 아버지에게는 자신이 박군 사망당시 분향했음을 소개하고 프로정치인이 아니어서 실수했다고 사과했다.
이환의 정치 입문 및 방송사 사장 진출
이환의 의원의 정치입문은 5공말로 올라간다. 당시 김윤환 청와대비서실장으로부터 제의를 받고 호남출신 인사영입 케이스로 민정당에 입당했다. 13대 때 고향 영암에서 출마 30여 %의 표를 얻는 등 선전했으나 황색바람에 밀려 낙선했다. 14대 전국구의원에 당선돼 처음으로 금배지를 단 그는 이영일 전 의원의 탈당으로 지역구를 넘겨받아 국회에 입성했다.
이환의 고인은 신문기자로 출발, 언론사 사장까지 오른 언론인 출신이지만 그의 경력 가운데 특이한 대목이 있다.
경향신문 정치부장 재직 중이던 66년 5월 내무부 기획관리실장으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우연한 사연이 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대선을 1년가량 앞둔 시점에서 김성곤씨와 엄민영 내무부장관을 불러 '야당지 정치부장급 2명을 골라 선거관련 자리에 앉히도록 하라' 고 지시했다.
이환의 고인은 당초 회사 법률고문으로 있던 정구영 전 공화당의장을 통해 당 대변인 자리를 제의받았으나 이를 고사했다. 이환의 고인은 며칠 후 평소 친분이 있던 엄 장관으로부터 내무부에 들어와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고 1주일 여 고민끝에 수락했다고 술회했다. 대선 후 이환의 고인은 전북지사로 발탁됐다. 그러나 그의 관료생활은 승승장구하지 못하고 5년 만에 끝났다.
이환의 고인은 "막상 정치판에 뛰어들고 보니 정치부 기자시절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 얼굴이 좀더 두꺼워져야겠더라" 고 일화를 남긴 새내기 정치인이다.
또한 "차령산맥 이남이 특정정당의 소공화국 형태로 전락해서는 곤란합니다. 그같은 정서가 계속된다면 사람이 클 수 없어요. 다리.도로 등의 개설은 한 두 해 미룰 수 있지만 인맥이 끊어진다면 그 공백은 20~30년이나 갑니다" 라는 말도 남겼다.
71년 4월 도지사에서 물러난 그는 박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로 올라갔다. 지난번 대선 때 전북지역에서 박 후보의 표가 많이 나오지 않아 질책을 받으리라 각오하고 긴장한 채 청와대를 찾았으나 그런 우려와는 다른 뜻밖의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잘 날이 없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날이갈수록 시끄러워지고 있는 5.16장학재단의 내분과 재정난에 허덕이는 문화방송 경영 수습을 위해 MBC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생각지 않는 권유에 이환의 전 지사는 두 말없이 "내 알겠습니다. 각하" 굳은 자세로 일어서며 박 대통령의 제안에 어께가 무거워졌다. 이환의 전 지사는 두 손을 불끈 쥐며 "그래 나에게 주어진 행운이요 나라와 국민에 대한 충성심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한번 해보자" 며 언론계를 떠났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심정으로 대통령의 부탁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 계기로 이환의 고인은 MBC사장을 맡게 됐으며 경향신문 기자에서 MBC사장으로 언론계에 복구한 그는 사장재임 9년 3개월이라는 최장수 기록을 남기면서 대한민국 미디어 산업을 크게 도약시킨 신화적인 인물로 남게 됐다.
MBC 연혁 및 인연
MBC는 1960년 부산에서 AM방송으로 시작하다가 1961년 2월 김지태가 서울에서 문화방송주식회사를 설립, 같은 해 12월 라디오방송 개국하여 정규방송을 시작하였다.
1963년 4월부터 1965년 2월 사이에 제1차 지방망 확장사업으로 대구.광주.대전.전주에 지방송국을 개설하여 서울.부산을 포함한 6대 도시의 방송망을 구축하였다. 창사 이래 8년간 쓰던 서울 인사동의 임대사옥에서 1969년 8월 서울 정동의 신축사옥으로 이전하면서 텔레비전방송(채널 11, 2kw)을 개국, 2년 뒤 1971년 9월 FM방송(91, 9MHz)을 개국하였다.
1968년부터 1971년 사이 제2차 전국방송망확장사업을 전개, 도청소재지 및 중소도시 지방방송사 13개사와 새롭게 제휴관계를 맺어 네트워크를 21개 지방사(텔레비전 7개사, 라디오 20개사)로 늘렸다.
1974년 7월 주식회사 경향신문을 인수하고 같은 해 11월 문화방송과 경향신문 및 문화방송광고의 3개사를 통합하여 주식회사 '문화방송.경향신문' 의 통합 법인체를 발족 시켰다. 경향신문은 정수장악회가 대주주인 문화방송(MBC)에 통합됐다. 1977년 2월 사단법인 정경연구소를 인수하여 월간 '정경문화' 를 발간하였다. 1980년 12월 언론통폐합에 따라 전국 21개 가맹사를 계열화하고 신아일보사를 흡수, 통합하였다.
MBC는 전국 주요 도시에 본사 자본과는 상관없이 설립된 독립법인을 제휴사라는 명목으로 계열화 해나가 국영 KBS보다 훨씬 빠르게 전국 네트워크를 완료했다. MBC방송망의 확장은 대통령 선거와 총선거가 1971년에 있었으므로 정치적 의미가 컸다.
MBC는 경영상 어려움을 겪던 경향신문을 인수 합병하였다. 이환의 당시 MBC 사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본인을 불러 적자에 시달리던 경향신문을 MBC가 인수하도록 명령했다. 이후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언론통폐합을 단행하면서 경향신문과 분리되었다.
MBC는 1978년부터 방송의 국제화를 추구하면서 '서울국제가요제' 를 열었다. 1978년 7월 1일 토요일 밤 세종문화회관에서 '제1회 서울국제가요제' 가 막을 올렸다. 10개국 정상급 가수 21명이 참가한 이 개막의 진행은 MBC 아나운서인 임택근이 맡았다.
전두환 정권의 신군부는 MBC와 경향신문 책임자를 교체했다. 최석채 회장은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5.16재단은 최 회장과 이환의 사장의 사표를 수리했다.
이환의 사장 상훈.저서 및 선거결과
MBC사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이환의 고인은 ◆상훈으로 황조근정훈장, 대통령표창 2회, 이태리공화국 문화훈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시류에 따라 남긴 칼럼, 매스컴 경영론, 방송교육론, 뉴미디어(총론), 21세기 TV, 반신욕건강론(번역, 편저)을 저술했다. ◆역대선거 결과에는 제13대 총선(1988.04.26) 전남 영암군 선거구 민주정의당 13.517표(30.51%) 2위(낙선), 제14대 총선(1992.03.24) 전국구 민주자유당 7.923.718표(38.5%) 전국구26번(당선), 제15대 총선(1996.04.11) 광주서구 11.428표(11.7%) 2위(낙선), 제3회 지방선거(2002.06.13) 9대(민선3기) 한나라당 43.695표(11.00%) 3위(낙선)를 한 전적이 있다.
영암아리랑 작사, 달도 뜨고 영암도 떴다
영암아리랑은 백암(白岩) 이환의 고인이 MBC 사장으로 있을 때 김일태 영암군산악회장(전 영암군수) 등 산악회원들이 이 사장을 찾아와 영암을 전국에 알릴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 방송해달라는 주문에 의해 고인이 나고 자란 '서호면 몽해리 아천마을이 있는 서호강 몽해들을 배경' 으로 하여 가사에 넣는 등의 월출산 풍경과 함께 초안을 잡아 노래가사를 써 곡을 붙여 그의 아호를 따 '백암 작사' 이렇게 하여 하춘화 가수에게 부르게 했다.
가수 등용문 대학가요제 선풍, 젊은 꿈 실현 분출구 마련
고인은 문화방송 사장으로 있으면서 가수의 등용문이었던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 를 신설해 대학생을 위한 가요제, 명랑한 대학 풍토조성과 건전한 음악생활 향유, 건전가요 발굴 따위의 목적으로 수많은 가수들을 배출하였다. 취약한 미디어 체계, 변화적인 시대상황 등으로 인해 예술에 대한 민중적 갈망은 컸고 MBC 대학가요제는 공영방송 주도의 프로그램으로 압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가요제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MBC를 MBC답게 만든 것은 대학가요제였다. 모두가 숨죽이던 군사정부 시절, MBC가 기획한 대학가요제는 신선한 충격과 도발 그 자체였을 정도로 고인은 젊은 학생들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기회의 문을 열어줬다. 그러면서 MBC는 시대를 앞서가는 방송사라는 환상을 젊은 세대들에게 심어줬다. 어떤 면에서 대학가요제에 채무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젊은 대학생들은 MBC가 우리에게 빚진 방송사라고 생각할 만큼 대학가요제를 통해 가수의 길을 걷게 된 분들, 자신에게 먹여 살리고 키워준 고마운 프로였으며 역사성 자체인 프로그램으로 성장시켰다.
대학생들의 존경한 인물로서의 우상과 선망의 대상이 됐던 추앙을 받았던 고인은 목마른 젊은이들에게 갈증을 해소해주는 샘물이 되어주었다. 젊은 패기를 분출하도록 분출구를 마련해줬다. 1세대를 벗어나지 못한 대한민국 미디어 산업을 제3세대로 이르게 할 만큼 혁신적인 발상으로 도약시키는 등의 국민 속으로 다가서는 공감 프로그램을 편성해 젊은이에게는 꿈을 문화계에는 미래를 나라에게는 선진화를 가져다주는 일에 선도자로서의 충실한 고인이었다.
고인의 큰 족적인 MBC의 상징성이 되게 했던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는 사라졌지만 고인의 영혼에 의해 지금도 그때 그 학생들한테 기억되고 있다. 젊음, 낭만, 음악, 축제의 행사로 일대 돌풍을 일으키게 했던 문화계의 선봉자였다.
미디어문화 산업 역꾼으로서의 큰 족적을 남길 정도로 일대 혁신을 하여 대한민국 방송문화가 국민들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었던 고인은 미디어문화 황태자로서의 역할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정계에 발을 디디며 대한민국 정치사에도 족적을 남겼다. 고인은 14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으나 연거푸 고배를 마셔 고인이 꿈꾸던 정치 선진화에는 큰 기여를 못하고 말았지만 정치가 국민을 위한 진정한 국회로서의 정의롭게 가는데 나름대로의 열정을 보였다. 고인은 MBC를 문화방송답게 MBC를 최고의 미디어매체로 만들어 낸 방송계의 신화적인 인물이였으며 고향 영암을 빛낸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남은 위인이었다.
고인은 또한 고향 영암을 알리기 위한 고향을 대표할 곡을 만들어 영암을 세상에 크게 알리는데 큰 역할을 띠었다. 영암 학산에 아버지의 태와 혼을 담고 있는 영암의 딸 하춘화 가수에게 불후의 명곡인 '영암아리랑(백암 작사, 고봉산 작곡)' 을 부르게 하여 고인이 테어 난 고향 영암이 세상 사람들한테 깊이 각인 되게 했을 정도로 고향 사랑에 각별했다. 어릴 적에 고향을 떠났던 고인은 다시 사후에도 고향을 잊지 않겠다며 고인이 노래가사로 담았던 서호 몽해 서호강과 들이 바라보이는 부모가 묻힌 선영의 선산에 수목장으로 영면했다.
영암아리랑은 영암 사람들의 '애향가(愛鄕歌)' 이다. 영암아리랑은 타령조 중에 가장 으뜸의 '흥타령조(興打令調)' 다. 영암을 상징하는 환경을 잘 담아냈으며 영암인의 삶의 애환의 정서를 잘 표현낸 '신민요풍(新民謠風)' 의 노래이다.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이런 아리랑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풍(風)의 아리랑으로 구성했다.
영암아리랑은 작사는 백암(이환의)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노래 가사의 처음 아이디어(초안)는 하춘화 아버지인 2019년 7월 8일 오전 101세 일기로 작고한 '하종오' 옹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향 사랑이 깊은 하종오 옹은 영암을 어떻게 하면 전국에 알릴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 '노래의 필요성 제안과 가사 등의 노래가사 아이디어' 를 본인이 냈다고 말을 했다.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 부산, 서울 등지에서 생활한 하종오 옹은 딸 하춘화가 일찍부터 유명가수가 되자 딸을 통해 고향을 널리 알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작사가, 작곡가, 레코드사를 찾고 고르는데 힘썼다고 했다. 영암의 노래를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영암연가' 란 제목으로 글을 써 메모지를 당시 이환의 고향 후배가 문화방송(MBC) 사장으로 있어 담당PD에게 건넸다. 게다가 영암군수를 역임(1944~2014년)했던 김일태 군수 등이 뜻을 같이해 영암을 대표하는 노래를 만들기에 다 같이 앞장섰다.
영암아리랑 이환의 사장에게 부탁 작사해 완성
1970년 들어 영암노래 가사와 곡(曲)을 공모했다. 수십 명이 노랫말을 보내고 곡을 만들어 응모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러던 중 1971년 '영암산악회' 회원들이 영암출신인 이환의(1931년~2021년) 문화방송(MBC) 사장을 만나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 노래 이야기가 나왔다. 산악회 부회장으로 있었던 김일태 전 군수를 비롯해 회원들은 영암 알리기에 고향 선배인 이환의 사장께서 힘써줄 것을 부탁했다. 이환의 사장은 "영암을 알리는 데 노래가 가장 좋겠다" 며 후배들이 요청을 받아들어 가사를 썼다. 또한 영암을 대표하는 노래가 있었으면 하고 우리 딸한테 부르게 했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하춘화 아버지인 하종오 옹도 '영암연가' 란 제목으로 나름대로의 가사를 써 방송국 담당PD에게 전달하는 등의 이환의 사장과 하종오 옹 두 군데서 나서 작업하게 된다. 이런 일로 후에 영암아리랑을 두고 내가 작사를 했다며 서로 주장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해 하종오 옹은 서울 강서 한서고등학교에서 개최한 낭주중학교 총동문회 한마음체육대회에 참석, 김재천 이사장실에서 김대호 기자가 영암아리랑에 대해 여쭈자 영암아리랑은 내가 영암연가라는 제목으로 방송국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향 영암군에 하춘화 가수에 대한 노래비(碑)가 여기저기에 세워진 것을 두고 "노래비마다 각기 다르게 세워진 것에 대해 잘 못한 일" 이라고 지적을 하면서 "노래비를 세운 분들의 취향이나 생각에 따라서 디자인을 하였거나 노래비에 영암아리랑 탄생에 대해 기록해났는데 잘 못되게 기술한 면이 없지나 않다" 고 하면서 "하춘화 가수와는 어떠한 이야기도 없이 일부 팬 등의 개인들이 세울 걸로 판단된다" 며 "정체성이 의심스럽고 기찬랜드에 세워진 노래비 이외는 정식적으로 공인을 받지 않은 진정한 노래비가 아니다" 라고 강조했다. 하춘화 노래비는 현재 영암군에 각기 다른 곳에 세 개 정도가 세워져 있는 걸로 파악되고 있다.
하종오 옹은 영암아리랑에 대해 "원래는 내가 영암의 노래가 있었으면 생각했고 '영암연가' 란 제목으로 초시의 글을 써 이환의 사장한테 가사를 건넸다" 고 밝혔다. 하종오 옹은 "영암의 노래를 우리 딸에게 부르게 하여 영암을 세상에 크게 알리고 싶었다" 고 상황을 들려줬다. 하종오 옹은 "이환의 사장에게 부탁하게 된 것은 방송국 사장으로 종사하고 있기에 또한 영암 분이기에 또한 우리 딸에게 신경을 많이 써 달라는 의미에서 잘 좀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다" 고 했다. 하종오 옹은 "깨알 같은 글씨를 쓴 작은 메모지를 이환의 사장에게 준 것" 이라면서 "영암연가가 '영암아리랑' 으로 제목이 바뀌어 나온 것" 이라고 설명했다. 영암연가의 가사를 쓴 것은 하종오 옹이지만 영암아리랑을 쓰고 최종 완성한 사람은 고인이 되신 '이환의' 사장이다.
영암연가는 방송국 PD에 영암아리랑과는 무관
하종오 옹이 이환의 사장에게 건넸다는 쪽지는 사실은 방송국 PD에게 전한 걸로 확인됐다. 이환의 사장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영암연가로 글을 써 전달한 내용은 영암아리랑과는 거의 다른 내용의 글로 보고 있다. 단지 하종오 옹도 고향 영암에 관한 대표곡을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노래를 부르게 했으면 좋겠다는 심정을 갖고 있었다. 영암산악회 회원들의 마음이 그러했듯이 하종오 옹도 그런 생각을 가졌다. 이환의 사장 또한 그런 분들의 생각과 같은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컸고 고향 사랑과 아끼는 차원에서 마치 본인이 방송국 사장으로 있기도 해 그 작업에 본격적으로 앞장서 나섰다.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 오늘의 대한민국 최고의 신민요풍 '영암아리랑' 이 탄생됐고 국민가수 하춘화가 부르게 하여 영암아리랑은 최고의 걸작, 불후의 명곡으로 남게 됐으며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은 채 영암하면 영암아리랑 이런 인식을 낳게 했다. 그렇다 영암이 아닌 분들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월출산이 있는 영암입니다" 하면 잘 모르는 분들이 있곤 한다. 다시 "하춘화 가수가 부른 영암아리랑 들어봤어요" 하면 "아 알아요" 한다. 영암의 어떤 것보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곳이 바로 '영암아리랑' 이다. 이환의 사장이 혼을 불어 만들어낸 영암아리랑은 영암의 이미지다.
영암아리랑 작사 백암, 작곡 고봉산, 노래 하춘화
여러 아이디어를 참고해서 완성을 한 이환의 사장은 하종오 옹이 썼다는 가사는 전혀 보지는 못했지만 영암연가가 아닌 영암아리랑으로 제목과 가사를 만들어 본인의 아호인 백암으로 하여 백암 작사, 고봉산 작곡, 하춘화 노래 이렇게 탄생된 '영암아리랑' 이 됐고 이 노래는 영암을 대표하는 영암의 환경과 삶과 애환을 잘 담아낸 곡으로써 '애향가(愛鄕歌)' 로 알려지게 됐으며 전국 어느 아리랑보다 가장 흥(興)을 돋우는 노래로 사랑을 받고 있다.
영암아리랑은 하종오 옹의 아이템을 빌었다기 보다는 이환의 사장의 아이디어에서 주로 나온 작품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하춘화 아버지인 하종오 옹은 딸 하춘화를 더 훌륭하게 성장시킬 겸 고향을 대표하는 노래를 딸에게 부르게 하고자 '영암연가' 란 노래가사를 써 당시 문화방송 사장으로 있던 이환의 사장을 찾아가 곡을 건넸다고 했지만 사실은 이환의 사장은 받을 적이 없고 담당 PD가 받았을 뿐이다. 백암 이환의 사장은 고봉산 작곡와 의논 끝에 나온 불후의 명곡이 탄생됐다. 영암아리랑의 후렴구가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시구절인 '닻 들어라 닻 들어라, 이어라 이어라' 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영암아리랑의 가사를 보면 서호 몽해들 등 영암의 환경은 이환의 사장이 항상 가슴 속에 간직한 것들을 노래가사에 담아낸 것이다.
하종오 옹이 가사를 PD에게 전달했다는 노래가사는 영암연가를 이환의 사장이 보질 못해 아쉬움은 남는다. 아마 하종오 옹도 영암아리랑 노래가사처럼 월출산 천황봉과 보름달의 이미지를 가사에 담고자 했지 않았을까 판단된다. 항간에서는 하종오 옹이 영암연가로 가사를 지어 줬는데 이환의 사장이 영암아리랑으로 노래 제목을 바꿔 자기가 하는 양 했다는 소문에 대해 유족들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혀를 찼다. 전순남 여사는 "영암아리랑은 이환의 사장이 작사를 한 것은 분명하다" 고 강조했다. 전순남 여사는 "소문처럼 이환의 사장이 남이 지은 것을 본인이 한 걸로 한적은 절대 그런 사실이 없다" 면서 "잘 못된 소문이 나온 것은 유감이고 전혀 그런 사실이 없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해주고 싶고 와전된 말을 바로 잡고자 한다" 고 했다.
흥이 난채 만든 영암아리랑
들어도 또 듣고픈, 불러도 또 불러 보고 픈, 흥에 겨워 어께 춤을 추고 싶은 노래 '영암아리랑' , 고인 이환의 사장은 이 노래를 작사할 때 흥이 난 채로 지었다고 한다. 나의 고향 영암의 아리랑은 어느 고장의 아리랑 노래보다 색다르게 아리랑이라고 하면 옛날 노래 풍이라고 여기는데 영암아리랑 만큼은 젊은 세대들도 어느 누구도 좋아하고 사랑하고 흥에 겨워 어께 춤을 출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 봐야하겠다며 고봉산 작곡가와 여러번 의논하고 검토해 곡이 나온 걸 들어보고 좀 아쉬운 부분이 있으면 더 다듬거나 세로이 해 여러 작업 끝에서 탄생된 노래, 영암아리랑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나온 아리랑 중에는 '진도아리랑' 을 가장 흥겨운 노래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진도아리랑은 영암아리랑하고는 전혀 리듬이 다른 곡조다. 진도아리랑을 국악인이 부른 노래라면 영암아리랑은 트로트 가수가 부른 노래란 점이 확연히 다르며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가 부른 노래요 고향의 딸이 부른 노래라는 점이 비교할 수 없다. 국악인의 노래 대중적이 못하고 시대에 맞지 않게 생각한다. 시대는 옛 노래라고 취급하며 흥겹지 아니하는 노래로 여긴다. 특히 록 음악을 좋아하는 젊은 세대들에겐 더 더욱 그렇게 느끼게 하고 있다.
영암아리랑은 어쩐가 국악 풍 같으면서도 들어보면 신민요풍의 흥이 나고 어께 춤을 벗어나 온 몸이 흔들거리고 너도 나도 흥타령에 빠지게 하는 노래 영암아리랑인 것을, 대중적인 가요 카덴차의 4분의 4박자 리듬인 영암아리랑, 이런 노래 풍을 알고 작사하고 작곡하고 노래를 부른 그 분들이 참참 멋지다. 고인 이환의 MBC 전 사장은 흥~흥~흥~이 뭔지를 우리보다 알고 있었던,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분이었다. 낭주골 처녀 노래 가사를 지은 이환의 사장의 부인이신 전순남 여사 또한 음악적 소질을 가진 시성(詩性)이 있었으며 이미자 가수를 더 돋보이게 했다.
카덴차, 그 의미는 구태어 말하지 않아도 꺾어 보련다 길게. 누구랑 하춘화 가수랑 그리고 모두와 함께 말이다 이환의 MBC 전 사장은 말하며 어께를 덩실덩실 했다.
영암아리랑은 카덴차 신민요풍의 타령조
노래는 1972년 하춘화가 취입했다. 17살이었던 그는 아버지의 아이디어로 태어난 영암아리랑을 불러 히트했다. 자구레코드사에서 만든 음반은 대박을 터뜨렸다. 뛰어난 창법, 그때만 해도 독특했던 '카덴차(Cadenza.악장이 끝날 무렵 등장하는 독주악기의 기교적인 부분)' 작곡 기법이 쓰여 눈길을 끌었다. 영암아리랑은 신민요풍으로 '4분의 4박자' 타령리듬이다. 4분의 4박자 타령조(打令調)로 구성된 노래 시작 전에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영암 고을에 둥근 달이 뜬다' 대목을 길게 늘어뜨려 빼며 누르는 과감한 시도를 해 다른 가요들과 차별화를 꾀했다. 하춘화는 영암아리랑의 대히트로 그해 MBC 가수왕이 됐다. 이 노래는 그의 취임곡 중 '물새 한 마리, 연포아가씨' 와 함께 '베스트3' 로 꼽힌다.
영암아리랑이 나옴으로 인하여 그동안 아리랑의 타령조를 완전히 상식과 틀을 깨는 일로 혁신적인 아리랑으로 가요계에 충격을 던져줬다. 타령리듬을 새롭게 한 노래라고 전문가들은 큰 기대를 모았다. 가요사를 새롭게 쓸 만큼 새로운 노래 풍의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암아리랑을 부른 하춘화 가수는 작고한 아버지의 뜻을 잘 새기면서 영원한 국민들의 가슴에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하춘화 가수는 '공연횟 수가 6000회를 기록해 기네스북' 에 오르기도 했다.
영암아리랑 노래비는 2010년 7월 1일 오후 2시 30분경 영암 영암읍 회문리 '기찬랜드' 에서 제막식을 가졌다.
낭주골 처녀, 사랑 이야기
이환의 사장과 연관된 일화에는 영암아리랑 외에 '낭주골 처녀' 가 있다. 당시 21세인 전순남 여사는 23세의 대학생인 이 사장과 겨울방학 때 결혼하기까지 사연이 '낭주골 처녀가' 된 것이다. 서호면 몽해리 아천 총각과 군서면 월곡리 월산 처녀의 순수한 영암 사람들만의 사랑 이야기가 결국 유명한 가요로 꽃피우게 되었다. 초수동 아래 군서면 월곡리 월산마을에 살았던 전씨는 고교시절 같은 동네에 친구를 만나러 자주 왕래했던 서호면 몽해리 아천 출신 이환의 사장과 눈을 마주치게 됐고 나중에 사랑을 싹틔우게 됐는데 이 스토리를 가사로 써낸 게 낭주골 처녀가 탄생된 계기가 됐다. 이환의와 전순남의 '러브스토리이자 연가(戀歌)' 인 '낭주골 처녀' 다.
고향 월산마을 위쪽에 있던 초수동 범바위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새기고 당시 서울대에 재학 중인 연인 이환의 사장의 금의환향을 바라는 애절한 마음을 '낭주골 처녀' 에 담아낸 것이다. 낭주골 처녀는 이환의 사장 부인인 전순남 여사가 작사했으며 1970년대는 삼호읍 용당리 선착장에서 나룻배를 타고 목포에 건너가 기차를 타고 서울을 갔다. 낭주골 처녀는 서울에 유학 간 총각을 애타게 기다리는 영암 처녀의 마음을 표현한 당시 시대 상황이 잘 묘사된 노래다. 낭주골 처녀는 가수 이미자가 33살 때 취임한 노래로 대한민국 최고 대중가요의 거목인 작곡가 박춘석씨가 곡을 붙이고 최고 인기가수 이미자가 노래를 불렀다.
백암 이환의 사장 옆에서 늘 변함없이 내조하면서 남편이 훌륭한 인생길을 걷게 했던 영원한 반려자요 동반자로서의 맨토(Mento.조언자.助言者)였던 전순남 여사, 차돌바위 같은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던 '낭주골 처녀' 가사를 쓴 전순남 여사는 고 전정식 전 영암군수의 누이이다.
차돌 같은 인생, 백암
이환의 사장의 아호(雅號)가 '백암(白岩)' 이다. 백암은 '하얀 바위' 라는 뜻이다. 차돌바위(석영)를 말한다. 차돌바위는 '단단하게, 순수하게, 깨끗하게, 티 없이 맑게, 변함없이, 가치 있게, 소중하게'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석영인 차돌바위는 영혼을 성장시키고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정신을 맑게 해주는 '에너지 균형' 을 유지한다. 생명을 부여하고 정화하는 힘의 '물의 상징' 이다. 잠재력을 이끌어내고 활성화를 시켜주는 몸과 마음을 '치유' 를 해준다. 하얀 차돌바위는 '영원함' 이다. 즉 백암은 그의 부인인 전순남 여사와의 사랑이 차돌(석영)바위처럼 단단하게 맑게 변함없이 이루어가자는 뜻에서 또는 인생 살아가는데 있어서 굴하지 않는 강인성과 믿음을 주는 신뢰성과 그리고 변함없는 지속성을 보여주겠다는 마음에서 귀중한 보석을 간직하듯이 아호로 하여 마음 속으로 새기면서 차돌바위 같은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이환의 사장 본인의 의지가 담긴 상징성이다. 차돌바위 같은 인생의 흰 '백(白)' 자와 바위 '암(岩)' 자를 서 아호를 '백암(白岩)' 이라고 지었다.
평생 차돌 같은 사랑을 하자. 평생 변함없는 인간이 되자. 평생 굴하지 않는 의지를 보여주자는 의미에서 아호를 백암이라고 했다. 전순남 여사와 인연을 오래오래 단단하게 순수하게 반짝반짝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아호를 '백암(白岩)' 으로 한 것이다. "여보 난 저 바위 같은 인생을 살고 싶소" , "바위는 언제 봐도 항상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고 보여줄 때마다 아름다움과 근엄함을 자랑하고 있고 또 정기를 품어 내고 있어 난 저런 바위를 닮고 싶소" 하는 일화를 남겼다.
또한 백암은 하얀 돌이란 뜻으로 산 위의 큰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거칠고 모난 다듬어지지 않은 돌(원석)이 산 아래로 굴러 강으로 가고 강을 지나 바다로 굴러가면서 거친 돌이 매끈한 돌이 된다는 의미을 담고 있다. 단단한 사랑이 순수한 사랑이 차돌바위처럼 또는 인생이 때론 거친 삶을 살아도 차돌바위처럼 그 실체를 잃어버리지 않는 '단단한 인생. 순수한 인생, 변함없는 인생, 말고 깨끗한 인생, 정직한 인생, 굴하지 않는 인생, 변하지 않는 인생, 가치있는 인생' 을 살고자하는 이환의 사장의 집념이 담긴 인생관(人生觀)을 보여 주고자한 차돌바위의 백암이다. 거칠어도 구르다 보면 둥글게 되듯이 아무데다 놓여있어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 흰돌(차돌바위) 같은 자신이 됐으면 하여 백암이라고 한 것이다.
아호 백암, 정기서린 월출산 간직
고인이 되신 이환의 사장은, 백암은 고향의 명산인 정기서린 아름다운 월출산을 품에 간직하고자 아호를 그렇게 썼을지도 모른다. 마치 부인이 월출산 아래의 마을이고 하여 여러 의미를 담아 백암이란 뜻이 담긴 것을 아호로 했다. 오로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차돌의, 차돌에 의한, 차돌을 위한' 존재감을 과시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
백암 이환의 사장은 언론가에서 행정가로 정치가로 성장한 입지적인 인물이다. 그의 아호에 어울리게 어떠한 고난과 위협이 닦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변함없는 의지로 매진했다. 자신을 약하게 만들려고 하면 그럴수록 더 단단해졌고 빛남을 보여줬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빛나는 차돌바위가 됐다. 그는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섰고 인생 역경(逆境)과 시련(試鍊)을 반드시 극복했다. 단단한 인생 백암, '고난과 위협에도 이환의 뜻은 성취된다' 이환의 사장의 좌우명이었다.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왔던 이환의 사장은 전순남 여사를 비롯해 생사고락을 함께 분들의 곁을 뒤로한 채 그의 육신은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지만 아마 월출산의 차돌바위(백암)처럼 환생(還生)한 듯이 그 자리에 그의 영혼은 변함없이 남아있을 것이다.
아호 백암(白巖), 박은식 선생과 닮은 꼴
이환의 사장이 아호를 백암이라고 한 것은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의 영향을 받았다.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정치인, 역사학자, 양명학자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2대 대통령이었던 박은식 선생의 정신을 닮고 싶었다. 박은식 선생은 주필로 역임했던 '대한매일신보' 와 '황성신문' 을 비롯하여 다수의 신문과 '서우, 서북학회월보' 등의 잡지에 나라를 위해 논설을 쓰고 애국계몽 사상가로서 영향을 끼쳤다. 저술과 언론을 통해서 민중 계몽활동을 펼치며 국권회복운동을 앞장섰거나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의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내면서 후학양성과 교육개혁에 관한 글을 집필을 하는 등의 이런 면에서 이환의 사장은 백암 박은식 선생을 본인하고 철학(哲學)과 사상(思想)과 설법(說法) 그리고 인생관(人生觀)과 국가관(國家觀)이 같은 동질성을 가진 인물로 봤다. 이환의 사장은 박은식 선생이 본인하고 상당히 닮은 점이 많다고 여겨 박은식 선생의 아호인 백암(白巖)을 본인의 아호도 백암으로 했다.
백암 박은식 선생이 백 번 꺽이지 않고 열 번 밝혀도 일어나면 최후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백 번 꺽어도 회절(回折)하지 않고 열 번 밟혀도 반드시 일어나 현상에 비관하지 않고 험한 길에 걸음을 멈추지 않아서 최후의 결과는 반드시 승첩(勝捷)을 올릴 것이다' 라는 박은식 선생의 어록을 깊이 새겼다.
아호 백암, 구림 백운동 흰덕바위에서
한편 백암은 고향 영암 군서면 서구림리 백암마을 앞들 가운데에 흰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백암(白岩) 또는 벡의암(白衣岩)' 이 있어 '흰덕바위' 라는 마을로 불리우기도 하다가 한자 표기로 '백암동(白岩洞). 이라고 했다. 흰바위가 있는 백암마을은 옛 서호강(지금의 학파농장)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서호 몽해리 아천포가 보인다. 아천마을에서는 저 멀리쯤 들판에 하얀 바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연유에서 이환의 사장의 아호를 짓는데 이 또한 참작하지 않았는가 본다.
일종의 ID나 닉네임(별명 또는 애칭)인 아호는 당사자인 이성이나 인생관을 나타내는 정신적이며 관념적인 호, 추상성을 갖고 있다. 이환의 사장의 아호는 산, 강, 봉우리 등의 산과 재, 언덕, 암석 등에서 따왔다. 이상과 신념이나 좌우명을 백암으로 삼은 것이다. 바위를 아호로 쓴 것은 바위의 불변함의 '지조나 의리' 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엄동설한에도 굴하지 않고 고고하게 피어난 설중매처럼, 변함없이 청초하고 아름다움을 잃지않는 그윽한 난초처럼, 어떠한 환경에서도 향기를 풍겨낸 고결한 국화처럼, 추운 겨울에도 늘 푸르름을 보여준 곧고 바른 절개의 대나무처럼 매난국죽(梅蘭菊竹)의 사군자(四君子)답게 고결한 군자(君子)다움을 보여줬던 백암 이환의 고인이었다. 특히 고인은 【국화야 너는 어찌 삼월동풍(三月東風) 다 보내고/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너 홀로 피었는다/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해동가요(海東歌謠)에 나오는 이정보의 평시조에 그 뜻을 담은 듯하다. 이환의 사장은 신념을 꿋꿋하게 지켜가는 선비의 절개(節槪)를 서리가 내리는 추운 계절에도 피는 '국화(菊花)' 에 비유할 만한 인물이었다.
백암, 그 의미 또한 백년을 가도 변하지 않는 꿋꿋이 서는 굳은 절개로 고결하고 맑은 기품과 충실과 미덕, 청초한 아름다움과 순수한 사랑과 고결한 마음, 진실과 성실, 지조와 절개를 항상 보여준 이 시대의 참된 선비다운 '선비(士)' 였다. 이환의 사장은 언론인으로 충실했지만 행정가, 정치가로서의 충직한 선비였다. 특히 방송계에서는 미디어 산업의 선봉자, 젊은이들의 꿈을 실현해주는 '진로코칭(Career Coaching.가야할 길을 발견, 기획, 창조, 창의, 판단, 안내, 조정, 점검, 조언, 실행, 선택, 독립해 주는 일)' 으로 문제 해결자(解決者) 또는 실행자(實行者)로서의 목표를 이루게 한 성공의 '이미지 메이킹' 이었다. 신선하고 차별화된 이미지의 프로그램을 편성해 기회를 주는 등의 선도적인 혁신을 보여줘 신화적인 인물로서의 그를 우상으로 여길만한 '큰 별(거성)' 로 우러러봤다. 또한 학문에 정진하도록 대학교를 설립해 배움의 기회를 주게 하거나 교단에 서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배우고자 한 학도들에게 존경받는 '참 스승' 이었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지식인 교육자' 이환의였다.
우리의 가슴에 남은 또 하나의 사람, 이환의 고인은 생전에서도 그렇고 사후에서도 그리움으로 남은 인물이다. 그리움, 사무치는 마음은 오직할까 싶다. 그가 이 세상에 없으니 눈물의 이별곡을 부르고 싶지 않지만 불러야하는 아픔, 쓰라린 아픔이라도 부르고 싶은 그 이름이다. 이환의
떠날 때는 말없이
고인은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났다. 나의 죽음은 아무 사람에게도 알리지 말라 한 듯이 오로지 가족에게만 유족들을 통해 세상에 알렸다. 떠날 때는 말없이 이런 노래 제목과 가사처럼 말이다. '거자무언(去者無言)' , 떠나는 자는 말이 없고 갈 때는 말없이 가는 '가시무언(去時無言)' 인양 고인은 본인을 사모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마치 전순남 여사가 남편이 이환의 전 사장의 떠난 것을 달래주려고 한 것 같은 '떠날 때는 말없이' 가수 현미씨의 노래가 떠오르게 한다.
"내가 당신곁에 있을 때는 나의 대한 말들을 했지만 내가 당신곁을 떠나고자 할 때는 그저 말없이 가고자합니다. 그 사랑 잊지 않겠습니다" 하며 영원한 이별을 고한 이환의 고인은 그가 남긴 시와 노래는 없지만 고인을 존경했던 분들은 고인에게 드리는 시와 노래를 짓고 부르지 않을까 한다. 고인은 세상이 아닌 이젠 가슴 속에 남고 기억되기를 바랐다. 2021년 1월 11일 '이별을 고하다' 이환의
이환의 고인을 생각하게 하는 원로시인 이형기 시인의 '낙화' 가 떠오른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 시는 이름답게 사라져가는 소멸의 미학(美學)을 특유 어법으로 표현한 시이다. 사라짐에 대한 존재론적 미학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득도(得道)하지 않기 위해 구원(救援)을 갈구하는 변하고 소멸하는 것을 수용하고 처절히 절망한 연후에야 비로소 인간에게 본질적인 자유가 주어지기에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祝福),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을 마지막 메시지로 남기고 떠난 이형기 시인의 '낙화(落花)' 가 생각나게 한다. 피어도 아름다웠던 꽃, 저도 아름답게 진 동백꽃처럼
또한 최영조 화백의 시, '내 그리움은 정처가 없다' 의 시집에 나온 '돌아가는 길' 이 의미를 더 느끼게 한다.
생각하다
생각하다 또 하루가 간다
생사는 나이테와 같은 것 지구를 만든다
떠날 때는 말없이 돛배를 타는가
가을비가 내리기 전
연꽃은 만발하여 여름을 만들고
동백은 코스모스를 피우기 위해 봄에 피는가를
겨울을 보고 있노라면 날은 저물고
시간이 흘러 바람에 꽃잎은 떨어지고
바람새는 휘파람을 분다
언젠가는 기억이 나겠지만
비애에 낙엽이 지고
시간의 바다에서 이별인 것을 알아
가을 끝에 창가에서 떨어져 뒹구는
낙엽을 바라본다
또한 누구나 인생무상의 허무함을 느끼듯이 이환의 전 사장도 생전에는 모든 게 다 내 것 인양 내 세상인양 생각했지만 생애와 삶의 마감을 앞두고 걸어온 길이 만면이 교차하고 웃다가 울다가 그만 눈을 감았다. 원 없이 해봤던 일들, 아쉬움이 남는 일들 성공이란 빛남도 컸고 실패란 어두움도 짙었고 희망이 큰 만큼 절망함도 있었던 삶, 인생의 뒤안길은 후회가 없었다며 모든 것을 훌훌 털고 떠나버린 이 세상에 멋진 신사, 그는 선비의 길을 걷고자 갈구했던 '구도자(求道者)' 였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랬다 하며
또한 최영조 화백의 '그리움의 자리' 시처럼 이환의 고인에 대한 그가 떠나고 없는 허무함, 그리움의 자리가 될 것 같다.
늘 그대가 있었네
외롭고 슬프고 예쁠 때
들국화 향기 품으며
때론 부평초 같은 마음에 꿈을 꾸며
강물 흐르는 둑에서 피리를 불었다
귀뚜라미 귀뜰귀뜰 노래 부르는 밤에
짙은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었네
해질 무렵 봄날의 개나리꽃을 그리며
비오는 날 노을이 안 보여도
사랑을 그리며 솔바람 맞으며
하늘 길 같이 넓은 길을 너에게 가는 길을 알았다
눈꽃이 아름답게 필 때도
세월을 딛고 백일홍을 심으며
보고 싶다는 그림자를 그리며 사노라면
아름다운 꽃은 봄에 피어나는 것을
가을 갈대숲을 걸으며
새들이 노래하는
건널목을 넘어 그리움의 자리를 찾아 갔다
또한 최영조 화백의 '그대가 있었네' 시에 우리 곁을 떠난 이환의 MBC 전 사장은 '너를 향해 나는 간다 어디 있니' 시구절에 슬픔이 밀려온 듯하다. 가슴 그 깊은 곳에서
진한 사랑에 동백꽃이 피면 냉이꽃도 피며
볕은 미끄러져 늪에 빠지지 않더라도
복사꽃은 핀다
물결이 출렁이는 등대는
외롭게 너를 생각하면서
안개꽃을 피우며 당신한테 간다
꿈꾸다 깨어난 날
밤과 낮은 음과 양인 것을
안개가 산마루에 맴돌면
너를 향해 나는 간다 어디 있니
사랑은 꿈길에 맴돌 때도 있는데
구름 여행을 하며 바위에 앉아
기러기 날으는 그곳 하늘엔
흰구름이 아름다운 뜰을 만들어 그속에 그대 있었네
해바라기 피는 가을에
그대와 해변을 거닐고 싶다
한편의 시처럼 영원히 떠난 이환의 전 사장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고인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인양 항상 따라다닐 것 같은 사무침이 밀려온다. 모든 사람들에게도
이환의 고인에 대한 '진혼곡(鎭魂曲)' 연주가 흐르고 있다.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합창곡의 진혼곡이 독창(獨唱)과 중창(重唱)으로 포함한 오케스트라나 파이프 오르간으로 반주되고 있다. 모차르트가 만든 죽은 자의 편안(便安)을 기리는 노래로서 진혼곡인 '레퀴엠(Requiem)' 은 '미사(Missa Prodefunctis)' 또는 '미사곡' 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연주되고 있다. 이환의 고인의 넋을 달래주려고 악장이 쉬지 않고 연주되고 있다. 이환의 고인이 살아 생전에 우리 국민들의 안녕(安寧)과 번영(繁榮)을 위해 기도문을 읊어주었듯이 사후에서도 오로지 국가와 국민의 평화(平和)와 영광(榮光)을 위해 기도의 손을 하리라 본다. 우리는 그를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두고두고 연주할 것이다.
진혼곡은 죽음의 뒤에는 '이별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만남' 이 자리하고 있다.
고인이 되신 이환의 전 사장이 고향 영암을 알리기 위한 불후의 명곡인 '영암아리랑' 그리고 그의 부인인 전순남 여사가 작사를 한 '낭주골 처녀' 이 두 노래가 또한 진혼곡인양 영원한 우리 가슴에 파고 들며 울릴 것 같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영암 고을에 둥근달이 뜬다/달이 뜬다 달이 뜬다 둥근 둥근 달이 뜬다/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뜬다' 영암아리랑과 '월출산 신령님께 소원 빌었네/천황봉 바라보며 사랑을 했네/꿈 이뤄 돌아오마 떠난 그 님을/오늘도 기다리는 낭주골 처녀' 낭주골 처녀의 노래가사가 영원히 잊혀 지지 않고 우리들의 가슴에 남아 언제나 입가에서 맴돌게 한다.
고인 이환의, 그의 부인이 지은 곡인 낭주골 처녀 노래의 '때가 되면 오시겠지 금의환향하시겠지' 가사처럼 이환의 고인은 '금의환향(錦衣還鄕)' 했다. 사후에서도
달보는 아리랑 임보는 아리랑, 보름달은 너 나의 얼굴
백암 이환의, 고향 서호 몽해 아천에서의 어린 시절은 영산강 줄기인 서호강의 학파농장 몽해들이 가슴을 키워줬다. 저 멀리 보이는 월출산이 그를 원대한 꿈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시켰다.
이 세상에 없는 이환의 고인은 생전에 몽해들이 보이는 마을에서 희망을 갖고 춤을 추었다. 그가 지은 '영암아리랑' 노래가사처럼 곡에 따라 그랬을까 그는 본인이 지은 노래 가사에 고봉산 작곡가를 통해 카덴차의 흥타령조로 곡을 붙이게 하여 영암의 딸 하춘화 가수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다. 고향 서호에서 춤추었듯이 그는 영암아리랑에 맞춰 서울에서도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영암 고을에 달이 뜬다' 그 달은 알고 보니 고인 이환의 자신이었음을, 둥근달이 뜬다의 노래가사처럼 정말 영암 고을의 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떴다. 그런 단다 임보는 아리랑이라고 그는 그러면서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서와 데헤야' 흥을 돋우며 '달 보는 아리랑 님보는 아리랑' 했다. 임보는 아리랑은, 그 임은 영암 고을사람들이요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다. 특히 전순남 여사의 얼굴이 아니었을까한다. 평생 사랑하며 살아온 반려자로서의 진정한 내조자였기에 말이다. 이환의 고인은 저 세상에서도 보겠단다. 월출산 천황봉에 떠 있는 보름달을 그리고 춤을 추겠단다. 너와 내가 다 함께 덩실덩실
서호 몽해들을 보고 자라며 꿈꾸었던 이환의 고인은 '풍년이 온다 풍년이 온다' 하며 기분 좋은 듯 그는 '지화자자 좋구나 서호강 몽햇들에 풍년이 온다' 며 '아리랑 동동 스리랑 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서와 데헤야' 어께를 들썩거리며 '달 보는 아리랑 님보는 아리랑' 했다. 그가 나고 자란 고향 서호 몽해들에 풍년이 들기를 바란 이환의 전 사장의 마음, 사후에서도 그 바람은 변함없을 것 같다. 풍년이 온다 그 가사에 가슴 뭉쿨, '기쁘지 아니한가' 이런 기분난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리고 왠지 숙연해 진다.
이환의 고인은 불러도 불러 봐도 대답이 없다. 그는 이제는 그가 아끼고 사랑했던 고향과 부모형제와 가족 그리고 고향사람들과 우리 국민들을 뒤로 한 채 저 세상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이환의 고인은 부른다 저 세상에서도 우리를 잊지 않고 고향을 생각하며 어께 춤하며 '흥타령 부네 흥타령 부네/목화짐 지고 흥겹게 부네/용칠도령 목화짐은 장가 밑천이라네'아리랑 동동 스리랑 동동/에헤애 데헤야 어서와 데야/달보는 아리랑 님보는 아리랑' 하며 그는 어디에 있던 어디서에서나 언제든지 그가 지었던 사랑하며 불렀던 노래, '영암아리랑' 을 부르고 또 불러준다. 우리는 그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다.
이환의 고인은 평생 반려자인 전순남 여사와의 러브스토리 주제가인 '낭주골 처녀' 노래 또한 부르리라 본다.
이환의, 전순남 그 분들이 이 세상에 없다한들 그들이 지은 사연곡은 영원히 우리 가슴에 남고 그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백암 작사 영암아리랑, 전순남 작사 낭주골 처녀'
이환의 고인은 영암 월출산을 아끼고 자랑했다. 월출산에는 세계에서 유일한 큰바위얼굴(구정봉 얼굴 길이 101m)이 있다. 큰바위얼굴은 이환의 고인이 아닌가한다. 고인은 이 시대의 '큰바위얼굴' 이었다.
김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