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령군 가례면
- 가례면 수성마을 가례면 소재지에서 1km남짓한 곳인데
가례「수징이」라면 이름난 고촌으로 알려져 있고 큰 동네다.
나직한 산줄기가 동남북을 에워싸고 있어서 아늑한 분위기다.
동구 밖에 길게 조성된 동숲도 인상적이고
들 가운데 앉아 있는 삼태바구니(삼토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임)도 인상적이다.
지명유래가 정확치는 않은데 원래 수정(樹亭) 또는 수진(樹津)에서 비롯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다만 퇴계선생이 이웃마을 처가댁을 찾아 머물면서 향유들과 어울리다보니
창과 뜻도 썩 좋은 수성(修誠)으로 작명했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 마을은 가락골, 큰동네, 중몰, 새터 등 여러 뜸이지만 모두 가깝게 이어져 있다.
중몰은 가운데 뜸이란 말로 마을을 몰 또는 말, 마실 등으로 널리 쓰이는 토박이말이다.
그리고 가락골을 지나 나직한 산고개가「바태고개」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고개 넘어 동네가 가락골(용덕)이고
옛날 전태리(田太里, 원래 전태리와 어화리로 나누어져 있다가 덕암과 용암으로 개명되었는데
두 마을을 통합하면서 용덕면이 된 것이다)였으므로
이 전태리를 밭태골·· 바태골로 부르게 되니 고개이름도 바태꼬가 된 것이다.
가락골도 재너머 동네이름과 같다는 점에서 별다른 연유는 없을 것 같다.
산이름도 똥매(동메, 동산), 디메(뒷산)로 부르고 있으며
특히 동네 뒤 산자락에
아주 희귀한 모감주나무(보통 모감지나무라 부르고 까만 열매가 염주 만드는데 쓰인다)가 있고
동구 밖에 수백 년 된 모과나무가 유명했는데 충익사경내로 옮겨졌다.
(천연기념물 제83호로 지정돼 있다)
이 동네는 처음부터 박(朴)씨들이 살았기 때문에 그런지
「수징이 박씨들」이란 말이 널리 알려져 있다.
선조 때 해남현감을 지냈고 임란 때 의병을 지휘하면서 큰공을 세운
퇴휴헌 박서휘(朴瑞輝))공이 이곳 사람이다. 고금정이 바로 퇴휴헌이 거처하던 집이다.
지금은 박씨가 26집이고 강씨 8집, 김씨 이씨가 너댓집씩,
그리고 심, 허, 한, 조(趙), 전씨 등은 두어집씩 모두 58가구가 살고 있다.
밭들 가운데 있는 삼태바구는 원래 일곱 개가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농지정리와 도로개설 등 개발사업이 추진되면서 3기가 파괴 또는 매몰되고 4기가 남아서
1997년 12월 31일 경상남도 지정문화재 제191호로 지정되었다.
선사시대의 귀한 유적인 지석(支石:고인돌)이다.
*가례면 괴진마을 역시 갑골(乫谷: 요즘은 甲乙谷)의 한동리다.
우곡(牛谷)마을 바로 아랫동네로 옛지명은「괴진리」다. 마을 앞에 자그만 연못이 있었고
그 옆에 아주 오래된 홰나무(회화나무 또는 괴화나무. 槐木)가 있는 동네다.
한때는 괴정(槐亭)이란 지명도 썼다고 한다.
동네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는 정자나무 밑 축대에는
괴산옹이 썼다는 글이 각자로 새겨져 있는데 바로 괴정(槐亭)이다.
「괴징이」이란 지명이 여기서 확인할수 가 있고
또한 동구 밖 홰나무와 연못이 동네의 문패처럼 돋보이게 되어
괴못(槐淵 또는 槐池)보다는 부르기 쉽고 뜻 좋은 「괴나리」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동네는「골말」「골안」「질가(갈가)>「대밑」「까재골」등
소박다정한 소지명을 쓰고 있다.
까재골은 산골도랑에 가재가 많이 잡히는 곳이라서 그런 지명이 쓰였고
대밑은 대밭아래, 대밭밑이 줄여져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위실로 통하는 잔골목재와 호박재는 식물인 호박이 아니고
돌호박(돌확, 절구통을 말함)처럼 생긴 지형이라서 재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동네 밑으로 길쭉이 흐르는 산줄기도 방아등 (디딜방아)이고
뒷켠이 자굴산 큰줄기라 동남향터에 앉은 마을이다.
동네 앞은 제법 너른 들인데「홍골들」「윗홍골」「건네들」등 옛 지명이 그대로 쓰이고 있다.
길가에 절부(絶婦) 강씨기행비(박상진공의부인)가 서 있는 꽃집이 있다.
동네 바로 뒤에 넉덤이라 부르는 큰 바위너덜과 굴이 있는데
전란 때는 노약자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연못은 없어졌고
옛날의 홰나무는 죽었고 아들나무가 높다랗게 서 있다.
가재골 묏등이 수원 백씨 선대묘라는 바 처음 정착한 성씨고
그 다음 진양 강씨가 들어 왔다고 하며 지금은 강씨 20세대, 김씨, 이씨,
조씨(趙氏), 박씨, 전씨가 서너집씩이고 주씨, 장씨, 백씨가 한두집씩 모두 54세대가 살고 있다.
* 가례면 개승마을 가례면 갑골(갑을 乫谷, 加乙谷)의 중간지점에 있는 마을인데
법정동리명은 개승리(介承里)이다.
개승이란 지명도 유래 있는 고유지명은 아니고 행정구역 정비시기에 작명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갈골의 중간지점이고 아래위 큰 마을사이에 끼어있는 지역이라
그랬다는 풀이만 들을 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개승리에는 옛 지명으로는「가른편」「사불당」「중산골」과
한길가 양편에 몇 집이 있는「질가땀」등이 있다.
옛날에는「가른편」을 병정동(丙丁洞)이란 지명을 썼다는데
이는 맨 안골마을이 갑을(甲乙)이라
바깥쪽을 병정(丙丁)으로 아주 편하게 갑을병정으로 작명한 것 같다.
그리고 일부 문헌에는 세변촌(細邊村)으로 썼다는 기록이 있는데
한자로 적은 것을 앞 글자는 훈(뜻)을 따고 뒷글자는 음(독음)을 따서 부르자니
「가는변」이었는데 쉽고 편하게 또 된소리가 되어서
「가른편」「가는편」으로 불렀던게 아닐까 생각한다.
또 다른 얘기로는 아득한 옛날 동네라고 부를 수 없이
산자락에 세민(細民)들 몇 집이 터전을 잡고 살았던
변토(邊土)였고 변방(邊方)이었기 때문에 그런 소지명을 썼다는 것이다.
「사불당」은 옛날에 암자가 있어서 그런 지명을 쓰게 되었다고 하는 데
지금은 절은 없고 자굴산 중턱에 있는 백련암으로 가자면
이 동네를 거쳐가야했던 옛길이 있었다.
기독교 교회는 사불당지역이고
사랑의 집(복지원)과 경남 사회진흥연수원이 가른편 쪽에 있고
1936년 6월 1일 개교한 갑을초등학교는 아직 그대로지만 학생수가 날로 줄고 있다고 한다.
한길가에 열부창원정병효처벽진이씨행적비(烈婦昌原丁秉孝妻碧珍李氏行蹟碑)가 서 있다.
건너 산자락에 자리잡은「중산골」은 두가지 유래가 있다.
옛날 월명들에 있던 큰 절의 스님이 열반하게 되면
이 동네 뒤쪽 산골짜기에서 다비식을 치루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큰절은 건너편에 있고 요사채(중이 거쳐하는 집)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중이 살았던 곳이라서 중산골로 불러 왔다는 것이다.
이 마을 바로 앞에는
대단한 규모의 서암저수지가 있고 휴일이면 태공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월명들 위 산자락에는 경상남도 문화제 제1905호로 지정된 보리사(菩提寺)절터가 있는데
축대와 석탑 그리고 부도 3기가 있었던 곳이다.
석탑과 부도는 도난당했고 그저 절터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의 축대만 남아 있을 뿐이다.
동네를 지나 험한 산고개 길로 십여리 올라가면 아담한 백련암(白蓮庵)이 있고
의상대사 또는 원효대사가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수도를 했다는
원효단, 기우단이 있다고 한다.
절옆으로 돌아가면 묘하게 생긴 바위벽과 석탑이 있는데
아무래도 거기에 또 다른 건조물이 있었던 것 같지만 확인할 수 없었다.
또 절 어귀에는 장군바구라고 부르는 큰 바위 두 개 위에
또 다른 큰 바위를 얹어 놓았고 약간의 조각 흔적이 보이며 글이 새겨져 있다.
상월당(裳月堂) 혜환대사조성(惠歡大師造成)이다.
무엇을 조성했다는 건지 확인 할 수 없었다.
가른편 동네에는 밀양 손씨가 먼저 들어왔다고 하며
지금은 김씨가 22세대, 박씨 14세대, 주씨 7세대, 노씨, 정씨, 하씨가 너댓집씩이고
조씨(趙氏), 정씨 등 서너집씩 3뜸을 다해야 80세대이고
중산골에 13가구 가른편에 28가구 사불당과 길가동네가 39가구인 셈인데
이 지역은 교육연수원과 수련원(경남학생수련원) 등이
들어서면서 동네 면모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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