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등반의 세계
그 참을 수 없는 유혹
코로나 때문에 요즘은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역설적이지만 코로나가 우리들에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창고를 정리하다 우연히 암벽등반을 할 때 사용했던 등산장비들이 눈에 띄었다.
헬멧, 하네스, 빌레이 장갑, 카라비너, 퀵 드로우, 페츨 어센더(등강기), 페츨 하강기, 8자하강기, 캠, 초크 백, 슬링 줄, 암벽화 ,릿지화, 자일 등등. 모두 창고에서 고물처럼 방치돼 있지만 한 때는 내 생명의 절대적 수호자들이었다.
필자는 나이도 있고 하여 2013.9.1 도봉산 인수봉 귀바위 천정등반을 끝으로 암벽등반을 접었다. 위 사진으로 2014년에는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수여하는 '서울포토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암벽등반 장면이나 사진을 보면 내가 그 장소에 함께 있는 듯 가슴이 뛰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직은 뜨거운 피가 여전히 끓고 있는가 보다.
등산을 좋아하다 보니 늦깎이로 산악회 동료들과 함께 바위를 타기 시작했고, 암벽등반을 한지 약 2년 정도 후 아무래도 체계적으로 암벽등반훈련을 받아야 될 것 같아 등산학교 암벽반에 들어가 정식으로 암벽등반교육까지 받으면서 한동안 암벽등반의 세계에 빠져있던 시절이 있었다.
늦은 나이에 암벽등반을 시작해서 실력은 초중급 단계를 벗어나지못했고, 암벽화에 쓰여져 있는 것처럼 '5.10(파이브 텐)' 이상의 고난도 바위타기는 몇번 시도에서 대부분 실패 만 거듭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미흡했던 등반실력에도 불구하고 10여 년의 암벽등반 경험은 어쨋든 내 생애에서 가장 화려하고 꿈같은 시절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암벽등반(La Doradura,Spain), 5.15c(예) - 유튜브 동영상에서 스캔
암벽등반 용어에서 5.10이란 숫자는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가장 어려운 바윗길 등급이다. 암벽화 이름을 '5.10'이라고 붙일 정도로 이 숫자는 암벽등반가들에게는 오르고싶은 최종목표이기도 하다. 현재 지구상에서는 최고난도 등급인 '5.15c 단계'까지 인간의 도전이 실제 이루어지고 있다. 5.14 수준 이상은 '신(神)의 등급'이라고 부를 정도로 어렵다고 한다.
그 10여 년, 결코 길지않은 암벽등반기간 중 나는 남녀 2명의 동료산우를 잃는 등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않은 슬프고 쓰라린 경험도 했다. 암벽등반시 마다 거의 함께 다녔던 두명의 후배 산우. 그들 중 여자산우 한 분은 어느날 관악산에서 혼자 바위를 타다 추락하여 사망했고, 특히 남자 후배산우는 필자와 함께 북한산 암벽등반 도중 바로 내 눈 앞에서 수십미터 절벽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2007년 10월 14일 오전 11시 40분경, 북한산 염초암릉에서 생긴 사고였다. 사고는 결코 실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암벽등반시 가장 위험한 '선등'(루트에 자일을 깔기 위해 제일 먼저 맨몸으로 암벽을 오르는 것)을 하는 등 실력이 우수한 산우였는데도 순간적인 방심과 실수로 추락하여 당시 불과 44세의 젊은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필자는 그때 그 후배산우를 잃은 슬픔에 '아, 염초암릉'이라는 졸시를 쓰기도 했다.
"그대 오르는 길 밝히려나/그날 따라 하늘은 참으로 맑고 푸르렀네/그대는 바람 타고 구름 타고/날개 펄럭이며 춤추듯 떠나갔네//한번 오르면 다시는 내려올 수 없는 정상/그대가 먼저 하늘길 열었네/언제나처럼 선등으로 올라갔네/왜 그렇게 서둘렀는가/혼자 가는 길 외롭지 않던가//인수봉, 선인봉, 오봉, 만장봉, 숨은벽, 만경대, 약수암, 염초봉.../함께 오른 바위봉우리 마다/그대 모습이 보이네/그대가 자일을 타고 있네//먼저 자리잡고 기다려주시게/언젠가는 우리도 올라야 할 마지막 봉우리/우리 모두 그곳에 오르거든/자일 풀고 정상주라도 함께 나누세/그대가 잠든 염초암릉/참으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면서,(졸시 '아, 염초암릉' 전문)"
외국영화중에 '버티칼 리미트(Vertical Limit)'라는 산악영화가 있다.
히말라야 K2 등반을 주제로 한 영화인데 암벽등반전문가들인 아버지, 아들, 그리고 딸이 함께 깎아지른 암벽을 오른다. 딸이 제일 위, 중간에 아들, 그리고 아버지가 차례로 자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위 다른 팀에서 갑자기 두명이 떨어지면서 이로 인해 세사람도 함께 추락한다. 제일 위 딸이 암벽틈에 박아 놓은 프렌드(Friends; 캠이라고도 하며, 바위틈에 끼워넣고 자일 등과 연결하여 암벽에서 몸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장비)로 중간에 추락은 멈췄지만 세사람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어려워 프렌드가 빠질 것 같은 위기에 처한다. 아래는 까마득한 절벽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명령한다. 즉시 내 바로 위에서 자일을 자르라고, 자일이 끊어지는 순간 아버지는 추락하여 즉사한다는 걸 아는 아들은 망설인다. 아버지는 재차 소리친다. 지금 자르지 않으면 셋이 모두 죽는다고, 네 동생까지 죽일 셈이냐고...,아들은 결국 자일을 끊게 되고 아버지는 죽고 남매는 살아남는다. 참으로 숙연한 장면이다.
암벽등반가들은 왜 그토록 위험한 도전을 하는 것일까?
운동을 위해서? 아니다. 건강관리를 위해서라면 굳이 암벽을 탈 이유가 없다. 워킹산행이면 충분하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불가능이란 단어를 없애기 위해 도전하고 또 도전한다. 인간은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자연을 정복해 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취의 기쁨을 즐긴다.
그러나 진정한 산악인들은 '정복'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우리가 결코 자연을 정복할 수는 없다고 본다. 자연이 그져 우리를 받아들였을 뿐이라고 여긴다. 자연은 그렇게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암벽등반을 하다 보면 주위사람들로부터 자주 비슷한 질문을 받는다.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하느냐고, 이 경우 난 한마디로 대답한다. 그건 마약과도 같은 유혹이라고..,
암벽을 오르다 보면 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생각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비장함으로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그리고 그 긴장속에서 뭔지 모를 희열이 용솟음친다. 도전에 대한 자기만족인지도 모른다.
정상에 오르면 그 희열은 극에 달한다.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과 자연의 장엄함에 도취된다.
암벽등반을 위해 집을 나서는 날 마다 난 현관문에서 신발장을 다시 보곤 하는 버릇이 있었다. 오늘 무사히 산행을 마치고 이 현관을 다시 들어올 수 있을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내에게까지도 숨겨왔던 나 혼자 만의 엄숙한 기도였다. 그러면서도 그 다음 주말 또 다시 헬멧, 하네스 등을 배낭에 챙기곤 했었다. 마약 같은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암벽을 오를 때는 온 정신을 바위타기에만 집중하여 무릎과 다리 정강이가 바위에 부딪쳐 피가 철철 흐르는 줄을 모를 때도 있었다. 내 다리는 자작나무 껍질처럼 아직도 그때 그 상처들이 선연하게 남아 있다.
역으로, '자작나무'를 내 다리에 비유하여 시 한 편으로 표현해본 적도 있다. "다리가 상처투성이다/돌뿌리에 채어 넘어지기도 하고/절벽 기어오를 땐/살이 찢겨져 피가 흐르는 줄도 몰랐던,//문신처럼 굳어진 흔적들/상처없는 삶이 있던가//하얀 다리 걷어붙이고/당당하게 줄기를 세운다/높은 곳 더 높은 곳을 향해//거침없이 나부끼는 저/깃발, 깃발들"(졸시 '자작나무' 전문)
암벽등반을 하게 되면 워킹산행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자연의 숨겨진 비경이 눈앞에 펼쳐지기도 한다. 조물주가 빚은 위대한 예술품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스스로 깨닫게 된다.
서울근교의 경우만 봐도 북한산(삼각산) 인수봉, 만경대, 백운대, 원효염초암릉, 약수암릉, 숨은 벽, 설교벽, 노적봉 등과, 도봉산 자운봉, 선인봉, 오봉, 만장봉, 우이암 등의 깎아지른 암벽에는 바위를 타는 산악인들이 개미처럼 붙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제 겨울철이 가까워지면서 암벽등반가들에게도 한 해 마감을 해야 할 때가 오고 있다. 눈이오면 바위를 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한 겨울에는 빙벽등반을 즐긴다.
그들에게는 다른 잡념이 있을 수 없다. 오직 눈앞의 장엄한 벽을 스파이더맨처럼 타고 올라야 한다는 엄숙한 다짐만 있을 뿐이다. 그건 종교와도 같은 믿음이요 기도이다. 적어도 암벽을 오르는 순간만은 마음속이 하얀 백지처럼 깨끗해지고 순수해진다.(글.사진/임윤식)
*위 사진은 <La Doradura,Spain, 5.15c(예) >를 제외하고는 모두 필자가 암벽등반을 하면서 직접 찍은 사진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