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를 찾아가지 전에 성지에 대한 상식을 가지고 찾아가는 것도 공부의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익산 중앙총부의 건물 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시면 하기로 클릭하여 연결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구조실 가는 길](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won.or.kr%2Fwoni%2Fholyground%2Fpage%2Fimages%2Fik_gujosil.jpg)
중앙총부는 익산역에서 대전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4km떨어진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다. 사이에 도로를 하나 두고 교립 원광대학교와 함께 50만평의 부지에 세워진 원불교 중앙총부는 전법성지이며 대종사가 친히 건설 후 이곳에서 18년간 교화를 펴다가 열반에 든 곳이다.
총부구내는 사적 유물 관리위원회에서 보존지역으로 지정한 대종사 당시 이루어진 지역과 개교반백년 기념사업을 하면서 확장한 두 지역으로 총 10만평의 대지위에 각종 기념물과 건물들이 건립되어 있다.
원기 9년 (1924) 3월에 대종사는 부안 변산에서 교법을 완정한신 후 교화를 펴실 기지로 정읍 내장사를 계획하고 한 때 머물면서 여러 가지 상황을 보았으나 이 계획이 와해되자 다시 전주 완산동 전음광선생 집에서 몇몇 제자들을 만났는데 그곳에서 서중안, 송만경, 이청춘, 이청풍, 문정규, 박원석, 전음광이 발기인이 되어 불법연구회 창립준비를 논의하였다. 모임에서 회관건립 장소로는 이리로 결정하고 대종사는 제자들과 함께 이리 부근을 답사한 후 박원석의 주선으로 이리역에서 4km 떨어진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에 총부 건설 기지로 정하였다.
마침내 원기 9년(1924) 4월 29일 이리 보광사에서 창립 총회를 개최함으로써 본격적인 총부건설이 시작되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원불교 중앙총부가 속해 있는 익산시는 백제면 소력지현(所力只縣)이라 했고, 신라때는 옥야현(沃野縣)이라 개칭했다. 그후 통일신라 때에는 금마군(金馬郡), 고려 때에는 익주군(益州郡)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익산군 남일면과 병합하여 익산군으로 되었다. 1931년 11월에 이리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45년 8.15 조국 광복과 더불어 행정구역 확장과 지방자치법 시행에 따라 이리시로 승격되었다가 1996년 다시 익산시로 명명되었다.
중앙총부가 속해있는 북일면은 1973년 7월 1일 이리시 확장에 따라 이리시(현 익산시)에 편입되었다.
처음 원불교 총부가 있던 장소는 익산군에 속해있는 잿배기 [도치(盜峙)]재라는 곳이다. 인가라곤 찾아 볼 수 없는 곳으로 칙칙하게 들어찬 솔 숲 사이로 황등호수가 있었는데 이 호수를 상시연(上矢淵) 또는 요교지(腰橋地)라 했다. 1922년 대아리 저수지가 준공되면서 황등호수는 1923년 없어졌으며 현재 원광대학교가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이 호수 건너편으로 사방이 좀 트인 곳에 거치른 잡초가 무성한 황토땅이 있었는데 여기가 바로 현 신룡동 344-2번지에 해당하는 지금의 총부자리이다. 이 지대를 이름하여 신룡벌이라 했다. 이것에 서중안 선생이 3,945평의 대지를 구입 희사 하므로써 본격적인 총부기지 건설이 착수되었으며 이와 함께 각처에서 모인 제자들의 건축희사금으로 원기 9년 9월 공사를 시작 11월 경에 목조 초가 2동 17간을 완공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전무출신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생활방도가 막연하였으므로 회장인 서중안 선생의 주선으로 동양척식회사 소유의 토지 소작 작농을 통해 스스로 공부할 비용을 모았다. 한편 생활유지 대책이 곤란하여 송적벽, 문정규 선생 등의 발의로 엿장사를 하면서 엿밥과 아카시아잎 반찬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낮에는 각자 맡은 고된 일을 감당하였다. 여자 전무출신들은 고무공장 공원으로 일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가운데에도 밤에는 모두 한 자리에 모여 그날의 경과를 보고하고 대종사의 법설에 법열이 넘치는 공부길을 잡아가는 영육쌍전의 산 도량이 되었다.
![창립기 대각전에서 바라본 총부전경](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won.or.kr%2Fwoni%2Fholyground%2Fpage%2Fimages%2Fik_all.jpg)
또한 중앙총부는 일제의 압박과 경제적 빈곤을 극복하면서 대종사의 일원대도 정법을 전했고, 새 회상의 발전을 위해 힘 기울였던 선진들 희생정신이 스며있는 땅이며 원불교 전법 성지인 동시에 교단의 심장부이다.
동쪽에는 미륵산이 있고 서쪽에는 배산이 있으며 호남평야가 서면으로 펼쳐져 있는데 중앙총부란 말이 처음 나오는 인쇄물은 월말통신 28, 29 합간호로 원기 15년 6월에 발행되었다. 서중안의 열반을 당하여 쓴 위령문에서 [불법연구회 중앙 총부 근고]라 하였다.
대종사 당시 세웠던 대각전, 본원실, 공회당. 종법실, 금강원, 정신원, 구정원등과 소태산 대종사 성탑, 성비, 정산종사 성탑, 영모전 등 각종 사적과 유물, 사료등이 있고 소태산 대종사의 유품 등이 소태산 기념관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지난 86년 3월에 총부 재정산업부에선 장기종합개발계획안이 마련되어 총부의 성지성역화 작업이 개교 백주년 사업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