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수필창작교실 8기-12차시 합평자료(2023년 5월 20일 토)
1.선물 /정원주(1)
1. 친정아버지께 처음으로 잠바를 사드린 적이 있었다. 내 나이 쉰이 살짝 넘어서였다. 왜 그때 그런 생각 밖에 못했을까!
2.결혼한 후 살아오면서 부모님께 기껏 잘한다는 게 명절이나 생신, 어쩌다 친구분들과 여행 가는 걸 알게 됐을 때 용돈을 약간 드리는 정도였다. 아버지에게 필요한 건 당연히 어머니가 다 챙겨 주실 거라 믿었던 탓이기도 했고, 치수나 취향을 몰라서도 아버지께 옷을 사드릴 생각은 정말 못했던 것이다.
3.그런데 내가 사드린 아버지 잠바는 어버이날이라든지, 생신이라든지 하는 특별히 기념될 날에 사드린 것이 아니었다. 그날은 혼자 백화점에 들러 남편 옷 치수 교환하고 돌아서 나오다가 무심코 남성용 층을 한 바퀴 휘 둘러보았다.
4.마침 7층 한쪽 모서리에서 남성용 옷 세일 행사를 하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유명 상표는 아니었다. 남편 옷 잠바가 20~30만 원 하는 데 비하여 5배나 싼 행사용 가격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5.붐비는 사람들 틈 속에서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정말 우연히 흰색 바탕에 옅은 노란색과 갈색 체크무늬가 전체적으로 있는 단정한 색상의 잠바 하나를 발견했다. 모양과 색상은 괜찮은데 광택이 번들거리는 원단이 아무래도 거슬렸다. 놓아버릴까 하다가 친정아버지 생각이 났다. 밭에 일하러 나갈 때 편하게 봄, 가을용으로 입으면 되겠다 싶었다.
6.그런데 막상 사려니 치수를 모른다는 사실이 살짝 당혹스러웠다. 작은 키는 아니지만 어깨가 넓적한 체격이라 100호를 하려다가 105호 치수를 선택했다. 번거롭게 교환하러 와야 되면 어쩌나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착한 가격이라 샀던 것이다.
7.주말 퇴근길에 친정집에 들러 가벼운 마음으로 엄마한테 툭 던져주며 이제 아버지 밭에 나가서 일할 때도 환한 옷 좀 입고하라고 다짐두듯 하고 왔다. 유난스레 거무튀튀한 낡은 옷을 입고 다니시던 아버지 모습이 언제부턴가 마음에 박혀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잊어버리고 지냈다.
8. 2009년 8월 말 인지 9월 초이었던 듯하다. 음력으로 7월 10일인 아버지 생신을 축하드리려고 울산대공원 옆에 위치한 횟집에 온 가족이 모였던 날이었다. 막바지 무더운 열기가 온몸을 칭칭 감기게 하던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9.큰 남동생 차를 타고 부모님이 식당으로 들어서는데 보니, 아버지는 언젠가 내가 사드린 흰색 그 잠바 차림이셨다. 여름 햇볕 아래서 얼마나 일하셨던지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이 잠바색과 대비되어 그날 따라 더욱 초췌한 모습으로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10.“맙소사, 아버지 오늘 같은 날 이런 옷을 입으시다니.... 안 더우세요?”
11.밭에서 일할 때나 입으라며 사다 드린 그 잠바를 오늘 같은 날 입고 오게 하다니! 갑자기 엄마와 올케에게 서운함을 토로했다. 아버지 나들이옷 제대로 챙기지 않고 뭐 했냐고. 그런 소릴랑은 하지 말라며 엄마가 손을 크게 휘저었다.
12.“말도 말거라, 너희 아버지! 세상에서 제일 편한 옷이 저거라며 다른 옷은 죽으라고 안 입고 댕기신다 아이가.”
13.며느리가 사준 남방도 있고 둘째 딸이 사준 티셔츠도 있건마는 한 번 입고는 도통 안 입는다고 했다. 큰딸이 밭에 나갈 때 입으라 했는데, 우얀 일인지 면사무소 갈 때도 입고 신협에도 댕기고, 마을회관에서 놀러 갈 때도 걸치고, 갑장계 모임에도 저 옷만 차려입고 나선다는 거였다.
14.순간 나는 온몸이 화끈거리며 죄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정신이 아득해 왔다. 일상에서 가볍게 사용하라고 사드린 옷이 아버지의 삶을 온통 함께 할 줄이야!
15. 호주머니도 많고 어깨가 특히 편해서 저 잠바만 입고 나선다는 엄마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앞에 놓인 모둠회가 출렁거리며 목구멍을 꾹 막아버리는 듯했다. 어깨가 편안해서 좋다는 그 잠바는 그날 따라 왜 그렇게 추레하고 커 보였던 걸까!
16.그런데 회를 좋아하셨던 아버지가 그날은 나처럼 제대로 먹지를 않으셨다. 무더운 날씨에도 춥다시는 아버지의 표정이 불안하게 느껴져, 날짜를 잡아 병원에서 종합건강검진을 받아보기로 하였다.
17.그 후 아버지는 병상에서 1년 6개월 남짓 투병생활을 하셨다.
종합병원검진 갈 때도 기어이 입고 가셨던 그 잠바를 입원해 계시는 동안 수납장 한편에 조용히 걸어 놓았었다. 18.2011년 3월 2일 새벽 7시경 (음력으로 1월 28일). 의사가 가슴에 붙여 준 패치의 힘이었을까? 아버지는 우리 육 남매를 둘러보며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치셨을까? 마지막 기운을 있는 대로 모아 손뼉을 마구 치시는 게 아닌가!!
19.“모두 고맙다. 모두 참말로 고맙다.”
“열심히 살아라, 열심히 살거래이!”
우리 육 남매 형제에게 아버지는 마지막 말씀을 선물처럼 남겨 주시며 이 세상을 떠나셨다.
20. 내가 태어났을 때 ‘큰 딸은 살림 밑천’이라며 그렇게 좋아하셨다던 아버지. 당신께서 떠나신 지 벌써 12년이나 되건마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아버지 생각으로 마음이 아려오곤 한다.
21.궁핍한 생활이었건만 당신은 온 생을 다 바쳐서 큰딸을 대학까지 공부시키며 뒷바라지해 주셨다. 정작 그 딸은 당신에게 번듯한 잠바 하나 선물하지 못한 이 불효를 어찌해야 하나! 사는 게 바빠서... 불효막심한 이 변명이 너무 부끄러워 지금도 견딜 수가 없다. 자신의 삶에만 집착했던 이기심과 무심함, 아니 내가족에게는 비싼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불했으면서 아버지께는 어찌 그리도 인색한 마음이었던가!
22.제대로 된 선물 마련할 시간이 그렇게도 없었다면 아버지 이름으로 된 통장이라도 만들어 매달 용돈이라도 보내 드렸더라면... 당신이 제대로 자랑하고 다닐 선물 하나는 한 셈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2023. 4. 25.)
2. JHT의 돌탑/ 유광목(2)
1.아침에 동네 뒷산으로 올라가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면 마음이 상쾌하다.
2.어느 여름날, 산 중턱에 있는 대나무 수풀을 지나 층층 계단 밑 빈터에 돌탑이 보였다. 둘레길 옆 큰 돌 위에 자그마한 돌을 수천 개를 주워 모아 하나씩 하나씩 쌓아올려 만든 탑이었다. 몇 발자국 앞에 작은 탑도 비슷했다.
3.며칠 후, 둘레길로 내러왔다. 첫 번째 탑을 어느 사람이 허물어트렸다. 주위가 헐빈했다. 산에 오는 사람은 대부분 어른들이라 어린이의 장난은 아니다. 공을 들여쌓은 탑을 무참하게 부순 사람이 밉살스러웠다.
4.보름 후에 와서 보니, 허물어진 탑이 밑바닥에서 반쯤 올라왔다. 탑 옆으로 길을 쓴 흔적과 큰 돌, 작은 돌, 납잘 돌, 뾰족 돌, 둥근 돌 들이 있었다. 탑을 새로 쌓으니, 허물어뜨린 사람이 두 번 다시는 탑을 무너뜨리는 일이 없겠지.
5.그 뒤에 공든 탑이 무너져 있었다. 탑을 쌓지 못 하도록 돌을 아예 없애 버렸다. 무너뜨린 사람을 원망했다. 돌 쌓던 사람이 탑을 다시 쌓을지, 포기할지 한 달간 두고 보았다.
6.계절이 지났다. 무너진 탑 자리에 다시 차근차근 쌓아서 탑의 모양이 되살아났다. 백 년 전, 마이산 이갑룡 처사는 낮에는 돌을 날랐고 저녁에는 기도하다가 한밤중에 돌을 쌓았다고 한다. 돌 쌓는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야밤에 산에 와서 새벽까지 머물다가 지켜볼까.
7.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아내와 같이 단풍을 보려 산에 올라와 해질 무렵에 옥련선원을 거쳐 둘레길로 내려왔다.
8.멀리 보니 돌탑이 있는 곳에 붉은 조끼를 입은 사람이 탑 주위로 서성이었다. 첫 번째 두 번째 탑의 군데군데에 산에서 볼 수 없는 흰 돌이 박혀져 있어 다른 사람이 세운 탑과 구별이 되었다. 무심코 탑 옆을 지나 갈 때는 몰랐는데 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 흰 몽돌이었다.
9.세 번째 돌탑에 조끼 입은 사람이 탑이 이상이 없는지 이리저리 살펴보고 돌 사이사이로 작은 흰 돌, 검은 돌을 끼어 넣고 있었다. 그 사람에게 탑을 쌓은 분인지 물어보았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일 년간 돌탑의 주인을 찾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대단하시다고 인사를 드렸다.
10.돌탑을 쌓은 주인공은 74세이며 K제강에서 근무하다가 작년에 퇴직하여 백산 인근에 이사를 왔다. 조끼는 젊었을 때 새마을 청년회원으로 지역에서 봉사할 때 입었던 단체복이었다. 돌탑을 누가 허물었을 때 화가 나지 않는지 물었다. 그것에 개의치 않고 쉬엄쉬엄 쌓는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한 직장만 40여 년간 근무하고 정년을 했으므로 성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는 다른 곳에도 탑을 쌓는다고 말하고 헤어졌다.
11.한 해의 마지막 달로 접어들었다. 산행하고 길옆에 새로 쌓은 돌탑을 보았다. 먼저 쌓은 탑과 타인이 쌓은 탑과 다른 형태의 탑이었다. 쌓은 날짜를 ‘22.11’ 검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탑 위에 웃는 보살의 얼굴, 중간쯤에는 입술인 붉은 보살의 얼굴도 그려져 있어 자세히 보았다. 돌에 영어 대문자로 ‘JHT’로 표기해 보통 탑과 달랐다. 돌탑의 규모도 컸고 정성을 더 들였다.
12.다음 달, 새로 만든 탑 위에 명상하는 보살 얼굴, 밑에는 ‘22.12’ 표시가 있었다. 다섯 개 탑이 둘레 길 옆으로 세워졌다. 탑을 쌓을수록 완공 기간이 짧아지고 기술은 향상되었다.
13.탑에 쓰인 JHT는 탑을 쌓은 사람의 성과 이름 첫 글자처럼 보였다. 탑 옆으로 지나갈 때 그의 한글 이름을 지어 보곤 했다. 돌탑을 보고 있는 아주머니를 만나서 돌 쌓는 사람을 언제 보았는가 물었다. 구보에 보도되었으며, 요사이 길 청소도 한다고 했다. 구보를 찾아보니, 빨간 조끼를 입은 그의 사진이 있고 이름은 ‘정현태’ 이다. 산행 오는 주민들이 다치지 않고 즐겁게 다녀오도록 청소를 하고 탑도 쌓는다고 써져있다.
14.올해 삼월 경칩일인 음력 2월 보름날, 첫 번째 돌탑 위에 깔깔한 새 돈 1천원 권 2장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 돌탑에 기원을 드리고 놓고 갔다. 여러 산을 다녀 보았지만 JHT의 돌탑 같은 모양은 없었다. 색깔 있는 돌과 보살 얼굴, 제작자 이름과 완공 일자가 새긴 돌탑이 특이했다.
15.석공 JHT의 선행을 보면, 직장 다닐 때도 맡은 업무를 위하여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충실히 근무해서 회사에 기여를 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탑도 자기 이름을 걸고 돌을 쌓는다. 새 돌탑이 세워지고 있다. 뒷산에서 J를 만나 장군 바위에 앉아, 막걸리 한잔을 마시면서 지나온 삶을 듣고 싶다.
3. 타이밍 /이수진
몇 해 전 수능을 앞두고 아이가 심한 치질에 걸렸다. 그동안 학문병원이 소리나는 대로의 진료과목이라며 간판을 보고 웃었는데 더는 웃지 못하고 성실히 드나들었다. 불쾌한 상상을 불러올 듯해 수술과 회복과정에서의 숱한 헤프닝을 지인들에게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타이밍에 관한 상황이 생기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퇴원 후 샤워를 마친 아들이 거울을 뒤로해서 연고를 환부에 발라야 하는 상황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아빠가 기꺼이 발라주겠다고 나섰다. 아들은 잠시 망설이더니 선뜻 아빠한테 큰 엉덩이를 들이댔다. 체중이 100kg에 육박해도 환부의 피부는 너무나 민감해서 면봉을 사용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발라 주었다. 문제는 그 뒤였다. 약을 바르고 난 아빠는 손을 씻으러 화장실로 갔고 지켜보던 아들은
"아니, 아빠! 약 바르기 전에 손을 씻어야지, 왜 바르고 나서 손을 씻어요?"
라며 볼멘 목소리로 따졌다.
"발랐으니까 씻어야지!"
"병균옮으면 우짜라고, 아부지꺼 아니라고 너무한거 아입니까?"
아이는 강조하고 싶었는지 사투리까지 썼다.
"넌 양심도 없냐? 바르고 나서 씻는게 당연하지."
"양심의 기준은 어디입니까?"
아들은 자신의 그 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어디긴, 내 마음이지."
아픈 아들이지만 아빠는 한 마디도 양보하지 않았다. 둘은 억양을 높이는 듯, 피식 웃어대며 나름의 입장차이를 굽히지 않고 설명으로, 고집으로, 나중에는 철학까지 논했다. '그래, 성적과 성격 중에 우리 아들은 성격을 건졌지!' 나는 그저 함께 웃는 것이 좋아서 타이밍에 따른 입장차이와 아쉬움은 언제나 존재하고 감수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들어 놓친 타이밍에 입장차이가 용납되지 않는 경우를 느낀다. 며칠 전 친정 어머니의 팔순잔치가 있었다. 아버지가 80세 생신에 돌아가신데다가 어머니가 두어 달 전부터 크게 편찮으셨기에 어머니의 산수연은 우리 형제들에게 특별했다. 2주 전부터 기적처럼 회복하시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현실에 감사했다. 각자 역할을 분담하고 인터넷서칭과 아이디어를 더했다. '기쁘다 구주오셨네' 노래를 개사하여 입장하실 때 가족 모두 힘차게 노래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자식들의 재롱이 시작되었다. 어머니에 대한 퀴즈를 풀 때는 연세가 더해지면서 어머니의 식성과 취향이 변해 정답이 선택지에 없거나 바뀌어 폭소가 터졌다.
나는 웃다가 갑자기 울컥해졌다. 마지막 20년 중 대부분의 세월을 병상에 계셨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지금은 어머니의 어린애같은 행동을 자식들은 귀엽게 보고 더 감싸드린다. 하지만 아버지께는 그러지 못했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들 하지만 아버지는 정말 자식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뭐든지 혼자 해결하려 하셨다. 어쩌다 모시고 여행이라도 가면 갖은 걱정과 안하던 잔소리까지 하며 얼른 돌아가자고 하셨다. 무엇을 해드려도 좋다기보다는 왜 했냐는 핀잔만 주셨다. 심지어 병원도 안가도 된다고 고집을 피우셔서, '왜 아버지는 우리의 성의를 몰라주실까?', '왜 자꾸 더 힘들게 하실까?' 라고 서운해만 했었다. 같은 연령에서 어머니의 인지능력과 감정표현에서 아이가 되어가시는 모습을 보아오면서 아버지께는 그런 마음을 내어드리지 못했던 과거의 내가 생각나 슬쩍 눈물이 났다. 종일 어린애같은 표정으로 좋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에 기쁜 만큼 비례해 마음도 아팠다.
고개돌려 창 밖을 보니 막 진초록을 머금다가 눈이 마주친 나뭇잎이 멋적게 흔들린다. 계절도 어느 순간 바뀌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매 순간 바뀌고 있었는데 나는 아버지를 언제나 크나큰 존재로만 붙들고 있었나 보다. 급변하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정작 아버지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적응은 커녕 마음으로 감싸드려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한 사이에 떠나신 아버지가 무척 그립지만 자책도 이젠 묻어둘 타이밍인지도 모른다. 그리움을 아픔으로 붙들고 있기엔, 주변에 많은 흘러가는 것들 속에도 제각각 유한한 타이머가 숨어 있는 것 같다. 나이든다는 건 감정을 잘 갈무리해서 주변색과 어울리는 관계 속 타이밍을 챙겨 시행착오를 줄여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운내며 나 자신에게 묻는다. 지금은 무엇을 할 타이밍인지, 그리고 알아차렸다면 그것을 향해 후회없이 나아가자고. 창밖 저만치에서 나뭇잎에 더 짙게 스며든 봄이 격려하듯 손을 흔든다.
4. 오진 誤診 /양경호
1.부친의 긴 투병으로 웬만큼 소문난 병원은 한 번씩 다 거쳐 간 것 같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차도는 없고 병색은 더 짙어가고 있는 듯 했다. 병명이 무어냐고 물어봐도 병원 측 에서는 치료하면 쾌차 할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만 한다.
2.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있을 즈음, 답답한 마음으로 좀 더 큰 병원에 입원을 했다. 병원장은 부친의 두 다리를 보고 절단하면 차도가 있을 것 이라고 한다.
부친의 다리는 부어 있었고 한쪽다리는 검붉은 색깔로 부패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 눈으로 봐도 절단해서 치료될 병은 절대로 아닌 듯 했다. 깜짝 놀라 극구 반대했다.
3.그 후 두 달도 안 돼 부친은 돌아 가셨다. 병원장의 말대로 두 다리를 절단 했더라면 크게 후회 할 번했다.
부친의 나이는 아직 50대로 젊은 편인데 병명도 모른 체 돌아가셨다. 어디에서 잘못 되었던 간에 분명히 정상은 아닌듯했다. 부친의 사망으로 인하여 나의 충격은 컸다.
4.공대에 입학하여 엔지니어가 되어보겠다는 꿈은 아무 의미가 없는듯했다. 여러 가지로 복잡한 생각에 젖어 있다가 일단 입대를 결심했다. 제데 후 복학을 하게 되면 의예과로 전향할 계획으로......
5. 군에 입대한 후 육 개월 만에 첫 휴가 명령을 받았다. 날아갈 듯이 기쁜 마음으로 고향집으로 달려갔다. 휴가 중 입대 전에 사귀던 여자 친구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큰언니라고 소개를 시켜주는데 배가 몹시 불러 있었다. 임신 중이라 몸을 풀러 친정집에 와 있다고 한다. 형부와는 오래전에 이혼을 하고 혼자 산다고 한다. 나는 그녀의 말에 의아심이 생겼다. 혼자 사시는 분이 어떻게 임신을 할 수 있는가? 이다. 6.믿을 수가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물어 볼 수가 없어서 병원은 가 보았느냐고 물어봤다. 모 병원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물론 그 외 다른 식구들도 병원 측의 말을 믿고 있는듯하여 더 이상 캐 묻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 큰언니를 데리고 다른 산부인과에 가서 한 번 더 진찰을 받아보라고 했다. 그러나 나의 걱정과 염려는 그녀에게 받아 드려지지 않았다.
7. 두 번째의 휴가를 맞아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녀의 큰언니는 없었다. 몃 달 전 복막염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 병원에서는 복막염을 임신으로 오진을 한 것 같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일반인들도 대강은 알 수 있는 일이며 본인인 큰언니는 더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의사의 진단만을 맹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오히려 병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한사람의 소중한 생명이 오진과 어리석음으로 끝나고 말았다.
8. 군에 입대하기 전 겪은 부친의 사망에 이어 그 녀의 큰언니의 죽음으로 인하여 내 꿈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러나 군복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보니 나의 꿈은 현실에서 너무나도 멀리 가 있었다. 가장으로서 가족들의 생계가 우선 이었다.
의예과로 전향한 후 의사가 되어 일선에서 직접 꿈을 펼 수 없다면 간접적으로라도 의료진에서 일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나의 바람이 절실 했던지 하늘은 제 2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일터를 허락했다.
9. 칠십년 대의 우리나라의 의료기 분야는 황무지나 다름이 없었다. 대부분 청진기 하나로도 간단히 진찰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오진은 물론 알게 모르게 의료사고가 수없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러한 오진과 의료사고를 막는 방법 중 하나는 최신의료장비를 계속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의료진들의 끊임없는 노력이다.
나는 선진국에서 최신장비가 도입 될 때 마다 세미나를 통해 홍보활동을 꾸준히 했다. 그러나 의료진 측에서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고정관념이 너무 깊었고 장비는 워낙 고가품이라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꼭 바뀌어야만 한다. 그래야 소중한 생명을 하나라도 더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꼭 변화가 오리라는 신념으로 힘든 행군이었지만 전국을 뛰어 다니며 영업활동을 전개했다. 최신형 장비를 설치 할 때 마다 큰 보람을 느꼈다. 소득도 괜찮은 편이어서 가정도 지킬 수도 있었다.
10. 지금은 그 업종을 떠나 다른 일에 종사하고 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다. 혼자서 한일은 아니지만 내가 그토록 바랐던 변화가 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가장 최신형 의료장비가 전국에 골고루 설치되어 있지 않은가? 의술도 선진국 수준이다. 종합의료보험제도까지 모든 국민에게 잘 적용되어 누구나 최신 시설로 치료를 받을 수 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5. 기다림 /권은희
1. 30년 넘게 하고 있는 모임이 있다.
2. 결혼 후 친하게 지내던 비슷한 또래의 이웃들과 첫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만든 모임이다. 자연스럽게 입학, 졸업, 취업, 결혼 시기를 비슷하게 겪으면서 힘든일은 같이 아파하고 좋은 일은 서로 축하 해주었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알아 흉 허물이 없는 늘 편하고 즐거운 이웃사촌 모임이다.
3. 어느날부터 이 모임이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성인이 된 자녀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손주들 얘기가 많아 졌기 때문이었다. 손자, 손녀 얘기를 할때면 만면에 웃음 띈 행복한 표정으로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했다.
4세, 5세 손주들이 침대에서 뛰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와 우리 손주들 잘 뛰는거 보라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내가 보기엔 아예 이야기 거리조차 안되는 것 인데 다른 회원들의 반응은 나와는 딴판이었다. 맞장구를 치며 각자의 손주들 자랑(?)으로 한동안 웃고 떠들썩하게 시간 가는줄 몰랐다. 손주가 없는 나만 소외된 느낌으로 대화에 동참하지 못 하고 그냥 영혼없이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4. 나도 아들은 결혼 5년째이고 딸은 3년째다. 출산율이 세계 최저수준이고 인구 감소로 어느 도시가 소멸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국가에도 큰 사회문제가 된다는 거창한 이유는 달고 싶지도 않다. 남들 있는 손주 나도 있고 싶고 휴대폰 프로필을 손주 모습으로 하고 싶다.
5. 아들은 2세 생각이 없다고 하고 딸은 신혼 운운하더니 코로나 예방접종 끝나면 생각해 본다며 복장을 두드렸다. 아이는 자연스럽게 생겨야지 그러다 정말 갖고 싶을 때 못 가질수도 있다며 얘기를 해도 귓등으로 듣더니 정말 임신을 하려고해도 안된다며 시무룩해 했다.
6. 용하다는 한의원에도 데리고 갔고 흑염소진액을 먹여봐도 소식이 없었다. 이젠 병원으로 가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얘기를 했더니 별 반응 없이 시큰둥 했다.
6. 그날도 모임을 하고 있었는데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모임중 이라고 나중에 통화 하자고 했다. 집에 오니 또 전화가 왔다. "왜 뭐 할말있니?"했더니 웃으면서 "할머니 되심을 축하합니다"했다 "뭐 할머니"하며 크게 놀라서 반문 했다. 뭔지 어안이 벙벙한게 자꾸 웃음만 나오고 무슨 느낌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남편한테도 할아버지 된다고 얘기했더니 "어"하며 싱글벙글 했다.
7. 며칠이 지났는데도 기분이 한껏 고조되여 발이 공중에 붕 떠있는거 같은게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임신이란 말에도 이런데 실제 손주 본 모임사람들의 마음이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됐다.
8. 딸이 와서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며 심장소리를 들었다며 신기해 했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은 어떤 존재에 무한 애정과 사랑이 느껴졌다. 하루하루가 늘 같은 지루한 날들이라 재미있고 획기적인 일이 없을까 했는데 이건 너무 행복한 일이고 축복이었다.
9. 고목 벚나무 밑둥 부분에 조그만 가지에도 꽃이 소복하게 피어 탐스럽고 오래된 군자란이 힘겹게 꽃대를 올렸다. 이런 것들이 씨앗을 남기기 위한 몸부림 이란 생각에 평소에 무심히 지나쳤던 것이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10.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아있다. 가슴 벅차게 설레는 기다림이다. 성별은 전혀 상관이 없다. 어떻게 생겼을까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지만 궁금 하고 빨리 보고 싶다. 손주 바보 할머니 예약이다. 잘 있다가 건강하게 만나길 기대해본다.
6. 기회 / 남경수3
⓵때가 되어야 만나 지고 때가 되어야 헤어지는 것처럼 드디어 나에게도 그런 때가 온 것일까? 문학 수업 신청을 기다렸다. 드디어 첫날 아침부터 설래임을 안고 신청서를 냈다. 문학 수업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지는 몇 해 전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하지 못했고 언양으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수업을 듣게 된 것이다.
⓶왜 이제야 글쓰기를 만나게 된 걸까? 초등학교 때 시작한 일기 쓰기로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 대학교는 국문학과나 신문방송학과로 진학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로 교대로 진학한 후에는 특별한 목표 없이 살았던 것 같다. 한 번, 딱 한 번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땐 그게 기회인지 몰랐다.
③1994년.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전국을 강타해서 문화답사 붐이 일던 시절이다. 울산시민회에서도 문화답사 모임이 있었다. 아마도 신문 어디선가 이 기사를 보고 전화를 해서 찾아간 것 같다. 돌아다니고 배우는 것을 좋아해서 몇 해 동안 문화답사를 다녔다.
④다산초당과 목포 문화답사를 다녀온 뒤에 글을 한 편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기행문을 썼다. 그 글이 어떻게 알려졌는지 모르겠지만 신문사에서 신문에 실어도 되냐는 연락이 왔다. 울산매일신문이 막 창간되던 시기였었던 것 같다.
⑤당황스럽긴 했지만 기분이 참 좋았다. 내 글이 신문에 실리다니. 신문사 사람들이 학교까지 직접 찾아왔었다. 글이 실린 신문을 아버지한테 보여주며 자랑했던 기억도 난다. 그 뒤에 식사 대접을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원고료 대신 무얼 사주는 것인가 싶어 나갔다. 어느 일식당 같은 곳이었는데 매주 신문에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했다.
⑥이제 겨우 스물 여섯. 내가 세상에 대해 뭘 안다고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땐 또 교육대학원에 진학을 앞둔 시점이기도 했다. 내 글을 읽고 비난하거나 욕하는 것만 상상해도 못 견딜 것 같았다. 두려웠고 겁이 났다. 아는 선배한테 의논을 해봤다. 선배는 대학원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직장생활과 대학원 공부 외에 또 글까지 쓸 수 있겠냐면서. 그 땐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나이도 어리고 대학원 공부를 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거절했다. 서른이 넘으면, 세상을 좀 알게 되면 그때쯤이면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고도 말했다.
⑦하지만 그 뒤로는 연락이 없었으며 나도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했다. 대학원 공부와 결혼, 출산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나중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른 후에야 그게 나에게 주어진 기회임을 알게 되었다.
⑧그런데 더 아이러니한 일은 지금 육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여전히 세상살이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때 글을 썼더라면 책도 열심히 읽고 글도 많이 좋아졌을텐데. 성장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친 것 같아 뒤늦게 많이 아쉬워했다. 대학원 공부도 글쓰기도 모두 해낼 수 있는 것이었는데 용기가 없었고 나 자신을 믿지 못했다.
⑨늘 뭔가를 끄적거렸던 것 같다. 맞벌이하면서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살면서 쌓이는 불만들을 메모 같은 짧은 글로 해소했다. 먹고 사는 일에 매달려 살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긴 글이 적어지지 않았다. 내가 글을 써야 할 일은 없을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글쓰기를 잊었다.
⑩육아가 어느 정도 끝나고 내 시간을 생겼을 때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노래’ 였다. 민요와 판소리. 학교 다닐 때 놀이패 활동을 했던 기억을 살려 노래도 배우고 공연도 했지만 대학교 시절이랑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그때처럼 순수하지도 못하고 진부했다. 내가 나이가 든 것을 몰랐던 것이다.
⑪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노래를 쉬었다가 아이가 대학에 들어간 후에 빈둥지증후군을 겪었다. 길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무기력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예전부터 배워보고 싶었던 ‘한국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쉬게 되면서 생각보다 춤에 빠져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⑫또 길을 잃은 사람이 되었다. 무엇이 삶의 헛헛함을 채우고 이 외로움을 채워줄까? 책을 읽고 싶어서 독서 모임은 간간이 하고 있었지만 글을 쓰지는 않았다. 그 물음에 답을 찾고자 문학 수업을 신청하게 되었다.
13나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 올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두 손으로 꼭 붙잡고 버터내리라.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고 나를 믿고 용기를 낼 것이다. 기회란 내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늘 깨어 있는 정신과 두려움을 이겨 낸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