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강바람 : 섬진진蟾津鎭 터 사진 답사기
언제 : 임인년(22년) 하늘연달 10월 하루(금요무박) 흙날
누구랑 : 다음수도권 산악회 호남정맥 산우님들..
어딜 : 섬진진蟾津鎭 터 -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135
섬진진터의 위치.. 다음지도
두꺼비 전설이 전하는 조형물과 뒤고 수월정이 보이고..
가운데 수월정과 좌 수월정 유허비와 그리고 우측으로 석비좌대와 섬진강 유래비가 자리하고 있다..
수월정과 수월정 유허비..
수월정水月亭과 수월정유허비(水月亭遺墟碑)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135
다압면 섬진마을 섬진강변에 있는 수월정(水月亭)은 광양출신으로 조선 선조 때 나주목사를 지냈던 정설(鄭渫)이 만년을 보냈던 곳으로 송강(松江) 정철(鄭澈)은 수월정기(水月亭記)를 써 이 곳의 멋진 풍경과 아름다움을 노래헀다. 수월정 유허비는 정설이 부친인 정옥천의 유업을 추모하기 위해 송강 정철에게 수월정유허비(水月亭遺墟碑)란 비명을 받아 비를 세웠는데 정옥천유허비라고도 한다.
자료 : 광양시청 여행정보 > 광양 명품 > 수월정, 수월정유허비 (gwangyang.go.kr)
수월정 안내문..
섬진진터에 자리하고 있는 광양다압섬진진터석비좌대 (光陽 多鴨 蟾津鎭址 石碑座臺)
광양다압섬진진터석비좌대 (光陽 多鴨 蟾津鎭址 石碑座臺)
다압이 강 건너 하동으로 연결되는 군사요충지였음을 고려하면 좌대에 세워진 석비는 수군 별장(別將)들의 공적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전에는 17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4기만 남아 있다. 돌로 된 두꺼비 모양 좌대는 길이 125~148cm, 높이 51~58cm이고, 등에는 비신을 올려놓을 수 있다록 홈이 파여 있다.
좌대를 두꺼비 모양으로 만든 배경은 고려 우왕 때 섬진강 하구로 왜구들이 침입해오자 두꺼비 수십만 마리가 나타나 떼로 울부짖어 달아나게 했다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두꺼비 나루'를 뜻하는 '섬진'이라는 이름도 그때 생겼다고 한다.
자료 : 광양시청 관광명소 > 문화유산 > 도지정 문화재 (gwangyang.go.kr)
섬진진터 안내문..
바로 옆에 섬진강 유래비..
섬진강 유래비 1999년 조성
“고려 말에 왜구들의 노략질이 극심하였는데 한 번은 왜구들이 강 하구로 부터 침입해 오자 진상면 섬거에 살던 두꺼비 수 십만 마리가 섬진나루터로 몰려와 울부짖자 왜구들이 놀라 물러갔다. 또 한 번은 강 동편에서 왜구들에 쫒기운 우리 병사들이 섬진나루 건너편에서 꼼짝없이 붙들리게 되었는데 두꺼비 떼들이 강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놓아 우리 병사들을 건네주었다. 뒤쫒아 온 왜구들도 두꺼비 등을 타고 강을 건너던 중 강 한 가운데에 이르러 두꺼비들이 그대로 강물 속으로 들어가 버려 왜구들이 모두 빠져죽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다사강, 모래내, 두치강 등으로 불리우던 이 강을 두꺼비 ‘섬(蟾)’자를 써서 섬진강이라 부르게 되었다.
출처 : 남도일보(http://www.namdonews.com)
안내문..
섬진마을 표지석에서.. 지도상 섬진강 나루터는 섬진마을 윗쪽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기록만 전하는 듯..
섬진나루는 현 하동읍 화심리에 있었던 나루터라고 옛날 지도에 표시되어 있으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지도상으로 섬진나루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 섬진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하동 건너편 광양 쪽에 섬진마을이 있다. 아마 남명이 다다란 곳이 현 섬진마을 건너편에 있었던 섬진나루가 아닌가 추측을 해볼 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섬진나루 (문화원형백과 전통시대 수상교통/뱃길(수상로),ㅌ 2006.,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 답사 사진.. *******************
두꺼지 조형물..
수월정..
섬진진터에 있는 안내판과 백운산 둘레길..
섬진마을앞 공원 감상..
다시 수월정
안내문
초보산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