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1:7-17 내가 돌아왔은즉 이장우 목사 창원늘푸른교회. 11. 22.
7 ○다리오 왕 이년 십일월 곧 스밧월 이십 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니라 8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9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10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11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하더이다 12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지 칠십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13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14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15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17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아니라 나의 나라와 나의 의를 챙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혹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고 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학개서와 스가랴서에 보는 대로 성전을 재건하면 그것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요18:36).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나라이기에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믿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소망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겠느냐고 바울 사도가 증거하였습니다(롬8:24).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양 살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잠시잠깐씩 듣지만 그러나 여전히 돌아서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하여 분노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또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18절입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세상의 모든 보이는 것들이 잠깐입니다. 동물의 왕국 같은 것을 보면 밀림의 왕이라는 사자도 죽게 되는데 그 주검을 카메라로 고정시켜 놓고서 하루에 한 장씩 사진을 찍게 하는 방법으로 몇 달 동안 찍으면 썩어져서 분해되는 과정을 일분 안에 다 볼 수가 있습니다. 결국 단단한 뼈 조각 몇 개만 남고 바람이 휭 하게 부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오늘도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살았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 삶이 결국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엇이 영원히 남는 것입니까? 인생이 풀과 같고 인생의 영광이 풀의 꽃과 같은데 그 풀이 시들면 하루아침에 꽃도 시들어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하는데, 이 한 평생을 동물의 왕국 카메라처럼 우리를 찍으면 일분 만에 태어나서 자라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늙어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는 인간의 천년이 밤의 한 경점 같은 것입니다. 천년이 일분도 아닌 일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나타난 것에 의하여 세상의 결국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3절을 봅니다.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눈에 보이도록 나타난 모든 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원인에 의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 그것을 ‘묵시세계’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묵시라고 하는데 이런 표현이 예언서에 많이 나타납니다. 다니엘서, 에스겔서에서 묵시가 많이 나타납니다. 묵시를 본 것을 다른 말로 환상, 이상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스가랴서도 이런 환상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런 묵시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는가 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이란 보이지 아니하는 묵시세계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역사 세계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독안에 든 쥐 마냥 스스로를 구원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이라는 유대 랍비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진흙속의 황새가 발이 너무 깊이 박혀서 빼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다 머리를 진흙에 박고 다리를 빼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어찌합니까? 이제는 머리를 빼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현실인 것입니다.
인간의 이런 사실과 역사 밖의 묵시세계가 있음을 아는 길은 역사를 연구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서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계시가 어떻게 전달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자기의 선지자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으로 말씀하신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에서 오직 아들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히1:1-2). 왜냐하면 구약의 그 모든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높이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1절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어떻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셔서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기 위하여 천사를 그 종들에게 보내는 방식으로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패턴이 구약에서도 여전히 나오는 것입니다.
스가랴 1:7-17절을 보면 스가랴 선지자가 하루 밤에 8가지의 환상을 보게 되는데 그 첫 번째가 오늘 본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홍마를 타고 화석류 골짜기에 섰고 그 뒤로 홍마와 자마와 백마를 탄 자가 보입니다. 스가랴가 이것을 보고서 내 주여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면서 물을 때에 스가랴에게 말하는 천사가 무엇인지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우리도 꿈에 말 꿈을 꿀 수가 있을 것입니다. 경마하는 사람은 더 많이 꾸겠지요! 그런 꿈이 아니라 분명한 의식이 있는 가운데 환상을 보았지만 그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알려 주십니다.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낸 자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에게 세 천사가 온 땅에 두루 다녀보니 정온하더라고 보고를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라고 표현된 자는 분명 사람의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다니엘도 인자 같은 이를 보았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구약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묵시세계 속에서 활동하시는 분으로 봅니다.
이 분에게 다른 말 탄 자들이 보고합니다. 왜 말을 탄 것입니까? 그 시대에 가장 빠른 기동력이 말입니다. 그리고 말은 전쟁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무기가 됩니다. 결국 온 세상을 주의 사자들이 두루 다 살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살펴보고 보고를 하는데 그 내용이 정온하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조용하다는 것입니다. 이 스가랴 선지자의 계시는 학개 선지자가 성전 재건을 시작한 5개월 후가 됩니다. 그런데 온 세상이 조용하다는 것은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학개 2:6-7절입니다. “6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전 재건이 다 되어 가는데 하늘과 땅이 진동되면서 만국의 보배가 예루살렘으로 올 징조가 없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은 강대국이 지배하고 다스리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볼 때에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며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신다고 믿고 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세상은 여전히 변함없이 든든히 서 있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병원에 가서 오랫동안 줄서서 기다려야 할 때에 초라한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까? 오늘 어떤 전화가 와서 교회의 안전설비 담당하는 사무장을 바꾸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니 두말없이 전화를 끊었습니다. 여러분이 받으셨다면 초라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12절을 봅니다. 천사들의 보고를 받고서 화석류 사이에 서신 분이 만군의 여호와께 말씀합니다. 언제까지 예루살렘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겠습니까? 노하신지 칠십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칠십년 포로생활에서 돌아왔고 이제 성전도 재건이 되었는데 언제 하늘과 땅이 진동하면 만국의 사모하는 것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오는가 하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요한계시록에서 순교당한 자들이 언제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시지 않으시기를 언제까지 하시겠습니까? 하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흰옷을 주시면서 잠시 쉬라고 합니다. 언제까지인가 하면 네 동무들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스가랴서는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13-15절입니다.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는데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향하여 크게 질투하신다는 것입니다. 질투란 사랑의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하여 조금 진노하셨는데 열국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나 바벨론을 하나님의 채찍과 몽둥이로 사용하셨는데 그들이 교만하여져서 자기들이 잘나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처럼 교만하여졌기에 그 몽둥이를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어느 나라가 부럽습니까? 그러나 이 온 세상의 나라들은 다 불살라질 나라들입니다. 없어질 나라들입니다. 그런데도 천년만년 유지될 나라처럼 안일하게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여 버린 이 땅에서 안전하게 살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하여 강대국을 몽둥이로 잠깐 사용하셨는데 그들이 교만하여지자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임당한 곳이 바로 이 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비록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면서 좀 과하게 하였다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우리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받을 형벌이 얼마나 엄청나겠는지를 생각하라고 히브리서 10장 2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온 세상이 어떻습니까? 하늘과 땅이 진동될 조짐이 있습니까? 폭풍전야처럼 조용할 뿐입니다.
16-17절입니다. 1-6절에서 하나님께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돌아갈 능력이 없음을 우리가 이미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위하여 긍휼과 사랑을 인하여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돌아왔기에 이제 성전에 다기 먹줄이 놓여지고 재건이 되고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풍부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시온을 안위하고 예루살렘을 택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때가 언제라고 학개서에서 보았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안위하시는 때입니다. 열방에서 주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올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왔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 편에서 화목제물을 마련하셔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의 풍성함을 드러내시고자 이방인인 우리에게까지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안정되게 사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심을 가장 큰 기쁨과 감사와 기적으로 여기고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