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환’ 지음『수필, 이렇게쓴다.』(전 호남대교수. 현, 대한문학 사장)
차 례
제1부 수필이란?
1.수필에 대한 오해 1)문학성이란 2)허구에 대한 오해
2.수필의 즐거움 3.수필이란 무엇인가? 4.수필작품에 대한 해명
제2부 창작의 기본원리
1.필력의 함양 2.짜임새있는 문장 3.상상력의 도야 4.전통의 원용
제3부 읽히게 하는 장치
1.승부는 앞부분에
① 서두의 중요성 ② 서두의 요령
2.인상이 강한 문장
① 살아 있는문장 ② 생소한문장 ③ 명쾌하고 정감이 있는 문장
④ 독창적이며 맛이 나는 문장
3. 돋보이게 하는 비결
① 정서적인 분위기 ② 인생에 대한 반항 ③노래하는 수필 ④ 사랑의 아름다움
⑤ 신기성 있는 이야기
4. 경이로움의 정체
5. 개성 있는 작풍
① 전아한 작풍 ② 신기한 작풍 ③ 유현한 작풍 ④ 명쾌한 작풍
⑤ 화려한 작풍 ⑥ 간결한 작풍 ⑦ 장쾌한 작풍 ⑧ 경미한 작풍
제4부 수필 탄생을 위한 과정
1.정기적으로 쓴다. 2.창작과 모방 3.수필과 종자
제5부 수필창작의 실제
1.수필의 형상화
①종자의 형상화
2.형상화 방안
① 사적인 기술성 ② 적당한 거리성 ③ 현상 밖의 무관성 ④ 발견의 신성성
*이상의 순서에 의해 수필창작자료를 몇 차례에 이어 올릴 계획입니다.
(1차로) 제1부 1.수필에 대한 오해 와 제2부 1.필력의 함양 2.짜임새있는 문장, 들을 올리겠습니다.
정주환씨의 <수필, 이렇게 쓴다>를 요약해서 끝까지 올릴생각입니다. 절반정도 읽어본후 '수필'을 써서
제게 보내주시면 첨삭한후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해서 수필 창작을 해서 잘된 작품은 신인
상 에 응모하도록 해보겠습니다. '이메일 주소:keonjisan@hanmail.net'(백송룡/010-6780-5490)
제1부 수필이란
1)문학이란 무엇인가?
수필이 문학인가? 수필이 문학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문학이란 한마디로
“예술적인 언어의 구조를 말한다.” 그러면 그 예술이란 또 무엇인가.
인간의 유회가 바로 예술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 유회에 대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긴 장대를 사타구니에 넣고 말타는 시늉을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척 흥미와 재미를 동반했을 것이다. 그 재미 그것이 일종의 ‘예술’이다.
그것은 유회를 통한 의상(意象)을 객관화 하여, 구체적인 정경(情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장대를 타는 정취가 집중될 때 장대는 실재의 장대가 아니라, ‘정말’ 그것은 말(馬)이라고 하는 창조적인 정경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장대는 사실 죽어있는 물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이는 그것이 살아 뛰는 생명체인 말(馬)과 동일함을 얻게 된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무한한 재미와 함께 그것이 유회라는 사실을 잊은 채, 어떤 환상의 세계로 젖어들게 된다. 이렇듯 문학과 예술은 결국 환상의 결과요, 현실에 대한 초월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과 문학은 하나의 심심풀이 같은 것이요, 삶의 정취인 것이다.
문학과 예술은 손바닥의 앞뒤와 같은 것으로 우리와 함께 늘 존재하고 우리 주위 어디에나 항상 널려 있다. 즉 농부가 모내기할때 구성지게 불러대는 이앙가도 문학이고, 할머니의 신세타령이나 한숨도 문학이다. 새댁의 시집살이에 대한 흥얼거림도 문학이요, 우리들의 흔히 베어있는 신화도 문학이며 선인의 내력을 적은 비문(조동일 교수역시 한국문학통사에서 비문을 문학에 자리매긴 바 있음)도 문학인것이다. 그리고 다정한 친구끼리 술잔을 기울이며 노작거리는 음담패설도 문학이며, 침몰된 ‘서해 페리호’의 백선장에 대한 세인의 구설도 문학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옛날 ‘민요나 구전’을 오늘날 소중한 문학으로 간직하고 있고, 백선장에 대한 화제는 현실감 있는 문학적 꽁트로 우리의 가슴에 남아있지 않은가. 이렇듯 우리들의
가슴 트이는 이야기가 문학이요, 우리들의 정서를 대변해주는 것이 문학이며, 다방에서나 길거리에서 파적을 깨는 화제들이 모두 문학이다.
따라서 오랜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문학적 활동을 해왔고 또한 해가고 있다. 그런데 문학이 왜 저 높은 곳에만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무나 붙잡을 수 없는 어떤 신성불가침의 깃으로만 여기는가. 그 책임은 작가에게 있다.
그것은 무리하게 작가를 직업인으로 만들어버린 데 있다. 그리고 그 직업의 당연한 결과로서 직업작가만 글을 쓰는 것으로 인식된데 있다. 문학을 여러 장르로 산산조각 내놓은 것을 비평가는 거기에 한몫 거들어, 문학을 더더욱 이질화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이와같은 구분이나 권위가 언제까지 갈 수는 없다.
실로 문학이란 우리들의 숨소리며, 우리들의 발자취다. 우리의 살아가는 이야기요, 가치있는 체험의 기록이다. 우리들이 먹고 마시고 놀고 뛰노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 문학이요,
방에 앉아서 입담 좋은 사람이 내놓는 우스갯소리도 문학이다.
재주 좋은 말의 반죽만이 문학의 전부는 아니다. 중년이 된 두 남녀가 마주 앉아 술을
마신다. 서로가 얼큰히 취해 있다. 저의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짙은 농담이 오고 간다.
“김여사, 나를 좋아하는 거지?”
“뭐예요? 나는 임자 있는 몸이라오.” 그러자 남자가 하는 말,
“아니, 골키퍼 있다고 공이 안들어가나?”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가 다방 같은 데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농담이다. 그러나 이건 축구 시합에 대한요령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엔 언외, 즉 말 밖에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문학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렇듯 문학은 어디에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무엇이라고 구분 필요성도 없다. 그런데 시(詩)는 무엇이고 소설(小說)은 무엇이며 수필(隨筆)은 또 무엇인가. 모두가 문학 아닌가.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여러가지 정감의 표현 아닌가. 마음과 정신을 구별할 수 없듯이, 문학도 경계가 없다.
태고의 사람들은 마음속에 문학이란 하나로녹아서 있었다. 시와 소설이 따로 없었다.
있었다면 단지 노래와 리듬, 그리고 해학(諧謔)이었다. 사실 오늘날 여성들이 즐겨 입는
반바지가 속옷인가? 겉옷인가? 그것이 겉옷이라면 속옷의 개념은 어디까지인가.
여인들의 속옷과 겉옷의 개념을 구분지을 수 없듯이, 문학에도 담도 없고 벽도 없다.
아니, 그 경계가 불분명한 것이 문학이다. 하나의 드라마 성격을 지닌 것이면, 모두가 문학이다. 즉 하나의 이야기가 문학인 것이다. 때로는 사회적인 모순에 대한 이야기요 또는 역사의 모순점에 대한 이야기며 개인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가 인간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들이다. 그것이 하늘위로 향하건 땅으로 향하건 껴안은 여인을 향하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을 초월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 문학이다. 그러면 김기림의 다음 두 작품을 보자.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젖어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과 여름이, 가을과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둑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소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들아을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겨 준다. (길)
강은 그의 모든 종족과 함께 대지의 영훤한 하수도입니다. 아마존과 다뉴브, 쎄느와 라인, 한강과 두만강, 미시시피… 최후로 저 위대한 땅을 흐르는 양자강.
그렇지만 시민들은 한번도 수도료를 낸 일이라곤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용을 거절당한 일도 없습니다. 지금 그는 아침의 들을 달리며, 물레방아를 굴리며, 느껴 울며, 노래하며 깊은 안개 속에 속을 굴러 떨어집니다. (강)
위 두 편의 글 가운데 어느 것이 시이고 어느 것이 수필인가? 정작 그것을 쓴 작가가
아니고는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 어느 것도 이렇다할 특징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은 그의 수필집에 들어 있는 엄연한 수필이요 (강)은 그의 시집에 들어있는
엄연한 시다.
이렇듯 수필과 시의 구분이 모호하고 유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시와 수필의 개념정립이 실제적으로 어려운 것이다. 이와같이 비슷한작품을 예거하자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을 것 이다. 요즈음 들어 장르의 해체가 가시화 되고 있음도 이러한 구분의 모호성 때문에서 나온 것이요, 장르와 장르가 서로 넘나들기 때문인 것이다.
가령, 최인훈의 소설「소설가 구보씨의 1일」,「서유기」 같은 것도 소설과 수필의 혼합이며 회곡에 가까운 소설로서는 슈누레의「나는 너를 필요로 해」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시 장르에서는 파울 뷔어의「엉터리 책」같은 것으로 소설 문장을 시행처럼 잘라서 나열한 것 등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문학은 담도 벽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문학뿐이겠는가. 미술에 있어서도 동서양화의 구분이 해체되고 혼합장르 회화를 추구, 미감에 맞는 양식을 창출해 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이미 결론을 얻은 셈이다. 시와 소설이 문학이라면 수필도 문학이요, 시와 소설이 문학이 아니라면 수필도 문학이 아니다.『계녀가』가 문학이라면『조침문』도 문학이요, 보카치오가 쓴「데카메론」이 소설이라면, 서거정이 쓴「태평한화」도 수필이다.
문학과 문학의 차이 아닌 것이 어디까지이며 문학성이고 문학성이 아닌 것이 어디인가, 앞에서 장르 구분의 애매모호성을 언급한 것처럼 문학성 또한 실로 애매모호한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성이란 그 말 자체가 추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문학성이란 말을 굳이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재미성」이라고 일단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저질적인 남녀의 성묘사같은 전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상상과 감정을 통한 잘 조직된 이야기요 정화된 미학적 언어 표출이다. 그런데 어찌 수필문학이 문학이 아닐 수 있으며 수필이라고해서, 왜 문학성이 없다는 말인가? 어린 아이들의 그냥 지껄여 대는 언어에도 의미심장한 말이 있는데 하물며 한편의 수필에 있어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문학성이란 눈에 보이듯이 딱 잡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창조적인 교섭과정에서 얻어지는 역동적이며 유동적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수필문학이 문학성이 약하다는 말은 그만큼 문학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자의 잘못된 표현인 것이다. 다시 분명히 언급해 두지만 수필문학이 그 어떤 문학보다도 짙은 문학성을 가지고 있음을 거듭 말해둔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오해에 대한 나의 강한 항변까지를 가지고 있는 것임을 언급해 둔다.
다음 수필을 읽어보자.
자식은 돈을 벌러 외지에 가서 백골로 돌아오고, 딸은 돈벌이로 호텔에서 웃으며 나온다.
죽은 자식은 잊으면 그만이다. 외국 손님품에서 시달리는 딸년은 약간 애처롭지만 아침에 웃고 들어오는 얼굴은 역시 해사하다. 그러나 기쁜 것은 돈이다. 판자집이 양옥이 되고 골덴텍쓰 양복에 제법 반반한 신사가 된 것도 다 이 친구의 덕이다. 이래서 역시 돈이 좋다.
유지 신사 축에 들고 사회 명망가의 대열에 낄수 있다면 약간의 회생은 출세를 위하여, 가문을 빛내기 위하여 잊어야 한다. 냉방에서 콧물을 졸졸 흘리며 도사리고 앉아 준치가시
같기만 했던 잣골 샌님의 후예는 이렇게 변했다. 돈이 더럽다고 젓가락으로 뇌까리던 선비의 후손은 이렇게 황금 앞에 충신으로 변했다. 그리고 소원대로 복을 받아 이제는 남 앞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술을 먹고 체신없이 목을 놓아 울고 있었다.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자기도 모른다는 것이다. 윤오영 (왜 울었던고)
이 글의 맛은 어디에 있는가? 마지막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자기도 모른다는 것이다’에 있다. ‘모른다.’는 그 말이 이 글에 신비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새겨 볼수록 얼마나 묘미가 있는 말인가. 여기에서 백 마디가 무슨 소용이 필요하겠는가. 그 한 마디 바로 그것이 문학인 것이다. 그런데 수필이 문학이 아니라면 그리고 문학성이 약하다면 그는 문학을 모르고 지껄이는 소리다.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현혹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