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계화(20240530)
화분에 물을 준다. 일찍 일어나 물을 주고 출근해야 하는데 깜빡했음이다.
옥포를 지날 거라는 말에 가져갈 수 있게 상추를 도려 세숫대야 안에 넣어두면서도 바로 옆에 있는 꽃을 보지 못했다. 아니 아무리 무관심이라도 어떻게 요렇게 앙증맞은 꽃을 보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분명 피지 않았음이다. 그렇다면 출근한 뒤에 피었다는 건데 시간 차이를 두고 피었다 하더라도
한 송이는 초로의 모습이고, 다른 한 송이는 20대의 발랄한 청춘의 모습인데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인가.
꽃의 생태가 원래 그러한 건가.
지난해 건넛마을에서 선물을 받았다. 건넛마을이라도 다 아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은 들어 온, 그야말로 낯선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보라고 대문 앞에 화분들을 내놓았는데 지나가는 사람마다 입을 대지 않을 수 없게끔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용기 내어 꽃을 구경하며 그 집 대문으로 들어서니 밖과 다르지 않았다.
꽃이 이웃을 맺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고나 할까.
식물들은 주인의 정성스러운 손길을 받으며 자라고 있었다. 생소한 식물들이 많아 이것은 뭐냐, 저것은 뭐냐 물었지만 돌아서니 생각나지 않았다.
주인 남자가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작은 식물 하나를 주었다. 찔레 같다고 했더니 비슷하다며 키워보라고 했다. 선물이라고는 하지만 손가락 길이만 하여 ‘저걸 어느 세월에 키우라고, 어차피 줄 것이면 좀 더 큰 걸 주면 좋을 텐데’ 하는 욕심을 냈던 기억이 난다.
1회 용 용기에 담긴 걸 들고 와 조금 큰 화분에 옮겨 심고 나름 물을 주었다. 물론 내가 물을 준 횟수는 그리 많지 않다.
찔레 종류라고 했을 뿐 찔레라고 하지 않았는데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하듯 나한테 오면서 그 식물은 이미 찔레였다. 지금까지 찔레라고 불렀고 그이도 그리 알고 있다.
찔레는 하얀 꽃이 핀다. 그런데 이 꽃은 붉은색이 아닌가. 여간 귀여운 꽃이 아니다. 두 송이가 나를 불러 자리를 뜨지 못하게 했다. 계단으로 옮겨 사진 찍어 가족 단체방에 올렸다. 찔레꽃이 피었다고. 서울사는 둘째가 예쁘다고 댓글을 올렸다. 지인에게도 보냈다.
지인은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카메라로 찍어 척척박사인 네이버에게 물었더니 ‘월계화’라고 했다.
종속과목강문계..장미목이었다.
꽃까지 족보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월계화라는 이름도 좋다. 초로의 꽃이 의지할 수 있도록 지지대로 나무젓가락을 꽂았다. 제법 허리를 펴고 둘이 다정한 모습으로 나를 보고 활짝 웃는다.
김춘수 선생의 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처럼
월계화도 네이버의 도움으로 다시 이름을 불러 주니 더 활짝 웃는 것 같다.
누구에게나 이름이 있다. 찔레였던 식물이 꽃이 핌으로 월계화라는 이름을 바로 찾았음이다.
참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