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재, 『나무의 유적』, 도서출판 그루, 2014(초판 1쇄).
이은재는 1994년 대구문학신인상으로 수필 부문에서 수필가로 등단한다. 시인 이은재는 2012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에 「나무의 유적」이 당선되어 재등단했다. 1949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을 거쳐 고려대학교 인문정보대학원 문학예술학과를 마쳤다. 2016년 12월 국제 펜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도서출판 그루의 발행인이다. 이 시집은 그의 첫 시집이다. 굴곡과 자양분이 풍부한 삶의 체험을 재료로 한 그의 시는 독자들로 하여금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긍정의 세계로 인도한다. 담담하고 진솔하게 그려내는 그의 시편에는 아픔의 족적들이 많이 발견된다. 어려움을 견뎌내면서도 시인은 다부지게 자신의 의지를 성취해 왔다. 그러기에 시인으로서 이은재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봄맞이하고 싶어 가슴 졸이지만
그늘 벽이 너무 높아
마음만 쉽게 드러나고 지워져요
가끔씩 눈꽃들 몰려와
빈 하늘 놓고 가지만
상처 없는 삶이 어딨어요
창가 목련 이야기를 듣는 사이
아지랑이 출렁거리는 하늘 연못
새들 둥그렇게 앉아
서로 깃을 골라주고 있어요
20-21쪽 「목련2」 전문
시인은 인간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물인 목련에게도 상처는 공존한다. 봄맞이하고 싶은 소망은 그늘 벽에 지워지기 일쑤이다. 가끔씩 눈꽃들이라도 몰려오면 빈 하늘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은재의 시는 상처를 드러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부드러운 위로의 배경을 설정한다. 상기한 시에서도 목련이 누군가에게 삶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 곁들여 아지랑이 출렁거리는 하늘 연못의 부드러움과 새들이 제 체온으로 서로의 깃을 골라주는 따사로운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상처 없는 삶은 없지만 서로가 어울리고 의지하는 가운데 삶은 견딜 만한 것이 된다.
무딘 손으로 무채를 썰고 있던 아내가
무 하나를 뚝 잘라 무두일미를 맛보라 한다.
무심결에 무를 먹고 있노라니
무성산 채소밭이 눈에 보이고
무 잎같이 푸른 소년 하나 보인다
무시로 솟는 배움의 열망 감당할 수 없어
무작정 가출할 여비를 마련하려고
무성산 산마루를 오르내리면서
무단을 져 나르고 있다
무를 짊어진 다리가 이리저리 비척대는 동안
무가 양 어깨에 무청 같은 얼룩을 남겨 놓았다
무성산을 떠나왔지만 불빛
무성한 도시에도 그가 찾던 배움의 길을 없었다
무슨 일이든지 소화하며 살기로 했다
62-63쪽 「무」 부분
이 시는 각 행의 시작이 모두 ‘무’자로 되어 있다. 줄줄이 이어지는 ‘무’자의 언어유희는 부부가 함께 하는 일상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전 생애를 집약하는 장면들이다. 배움의 길을 찾기 위해 가출을 결심했을 때도 무단을 져 나르고, 마땅한 일거리가 없을 때도 무를 팔러 다녔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시인은 여유를 배치한다. “무시로 공치는 비철에는/무위도식하는 백수를 길들이기 위해”, “무도회장을 지나온 탓일까/무가 모두 바람 들어 빈손으로 돌아왔다”라며 고단한 삶을 가볍게 넘어서는 웃음과 재치를 보여준다. 삶은 누구에게나 거친 바다이고 작열하는 사막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헤쳐 나가는 긍정의 자세에서 건강한 아름다움을 체득한다. 시인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숱한 역경을 지나 지금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느낀다.
“나무의 생은 둥글지만/끊어질 듯 이어지는 꿈길 있어 /나무는 쉼 없이 걸었으리라//꽃 피는 오솔길/천둥치는 들판/술 취한 모롱이 돌아/언 강에 발목 빠뜨렸으리라/갈수록 좁아지고 어둑해지는 골짜기/길을 잃기도 했으리라//푸른 날들이 /제 몸에 새겨 넣은 파문이/하얗게 마르고 있다”라는 고백처럼 우리네 인간의 삶은 꿈과 좌절이 끊임없이 있기에 이은재의 시어들은 독자들로부터 공감의 지평을 획득하고 쉽게 읽혀지는 것이다. 생명체의 모든 것들은 기쁨과 보람으로 한 생을 영위하려는 희망을 지니고 있기에 고난도 견딜만한 힘이 되는 것이다.
그는 양질의 식감을 지닌 시상을 건져 올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감포 바다에 나가 시어(詩漁)의 월척을 기대하며 느낌을 드리워 본다. 궂은 날에도 나가 보고 일 년 중 가장 좋다는 시월상달에도 온 마음을 바친다. 그렇게 정성을 다 바쳤는데도 시어는커녕 물거품 가득한 파도 소리가 방안까지 따라와 시인을 비웃다니! 독자들은 무릎을 치며 깨웃음을 웃는다.
역설적이게도 결핍과 상실의 공간에서 대어를 낚는다. 일상이나 특별한 경험, 또는 추억이나 꿈도 시재로 가져오고 한평생 친하게 지내온 활자에서도 시의 옷을 입혀 본다. “시옷을 만들었다/시옷 차림으로 거울 속을 걸어 본다/그를 받쳐 주지 못하는 건 시옷이 아니다.//무성한 숲을 걷어내듯/몸을 갈았다/허리가 낭창하도록/몸을 닦았다//안성마춤 시옷을 입고/ 봄 길을 걸어본다/나들이 시선들은 그에게로 몰려가고//시에게 시옷을 입혀 보지만/맞는 옷이 없다” 「ㅅ」에서 시옷은 활자 ‘ㅅ’이면서 ‘시의 옷’이라는 겹의미를 얻는다. 오랫동안 활자를 만져온 이은재는 말놀이를 유쾌하게 즐길 줄 아는 시인이다.
어느 눈 먼 점성가는
나의 생에는 학업 운이 없다고 말했다
무쇠라도 갈아서
세상에서 가장 귀 밝은 바늘 하나 만들까
억지 춘향 맨몸 가시나무에 올려놓고
육십갑자 다 가도록 기다렸다
한 생을 부려놓는 회갑 날
나는 고졸 검정고시를 치렀다
아득했던 열망들이 파르르
너를 위하여 꽃 한 송이 피우고 싶다
67쪽, 「나의 생」 전문
자신에게 친절하지 않았던 삶의 역정을 시인은 누구나 치러내는 과정으로 여기고 여유롭게 대처하며 미소를 머금고 회고한다. 시인들에게 상처는 인생이 내리는 특혜라고 미화하기도 하지만 한창 때의 학업에 대한 갈망은 가진 것이 볼펜 한 자루뿐이었던 소년기의 은재에게는 사치였다. 학업의 좌절은 성장을 제한하는 가시나무로 내면을 찔렀을 것이다. 활자에 대한 경의로 출판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한다. 작품 「길」에서의 압축된 고백이다. “열아홉 나이에 활자와 첫 인연을 맺고/나는 열녀처럼/그만을 섬기면서 살아왔다/출판의 외길 걸어왔다” 금맥이 아닌 문맥을 따라 걷는 그의 행보가 독자의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