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을 아는가? 허영만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도전정신’이다.
내가 ‘허영만’이라는 세 글자에 친숙해진 계기는 ‘각시탈’이라는 만화를 보고나서였다. ‘각시탈’의 플롯에는 두 개의 벤치마킹이 있다. 그 내용의 구체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절정의 무공을 지닌 자가 부패한 강자를 무찔러 힘없는 약자를 돕는다는 플롯은 오래전에 ‘홍길동전’이나 ‘임꺽정전’에서 이미 등장한 플롯이며 벤치마킹의 그 첫째요, 탈을 쓰고, 즉 자아를 감추고 활동한다는 플롯은 이미 오래전에 영화화한 ‘일지매’의 플롯이 대표적인 것으로 벤치마킹의 그 둘째다. 첫째의 벤치마킹, 즉 일본의 순사와 친일무리, 나아가 일본인 내지 일본을 격퇴하여 식민지배하의 조선의 백성을 구한다는 플롯 자체는 허영만이 등단했던 시기의 많은 만화가가 이미 대중에게 보여준 익숙한 플롯이다. 그런데 허영만이 ‘각시탈’을 세상에 내놓은 시기는 만화가들이 본격적으로 일본의 만화를 표절하던 시기라는 점이 아이러니컬한데, 이를 선해(善解)하자면 아마도 만화가들이 비록 자신들의 상업적인 성공을 위하여 일본의 만화를 베끼기는 하더라도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잃지 않겠다는 각오의 반영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일일 드라마에서 줄기차게 청춘 스타를 중심으로 ‘사랑과 결혼’을 테마로 플롯을 짜는 것은 시청자에게 익숙한 연기자와 이미 본 적이 있는 플롯으로 드라마를 제작하면 성공은 몰라도 최소한 실패는 하지 않는다는 드라마 제작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각종 드라마의 플롯이 국화빵처럼 대동소이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처럼 ‘각시탈’의 플롯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기에, 허영만의 만화가로서의 출발은 미약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각시탈’에서는 만화가로서 대성을 예고하는 주목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사물에 대한 세심한 펜의 터치가 빛이 나는 세화(細畵)가 자주 등장했고, 사람의 감정을 명쾌하게 그린 섬세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다는 점이다. 가령, 격투장면에서 타격을 받는 자의 고통을 극대화하는 빼어난 세밀한 펜의 터치는 사람과 사물을 단순화한 명랑만화에서 볼 수 없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그리고 촌철살인이 빛나는 감각적인 대사의 전개도 허영만의 만화가로서의 역량을 예고하는 부분이다. 이렇게 허영만은 ‘각시탈’을 통하여 독자를 사로잡는 마력을 예고했다.
만화가를 포함한 모든 작가에게 유행을 따른다는 말은, 좋게 말하면,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작품의 구상을 위한 처절한 고뇌를 하지 않고 시류에 영합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유행을 따른다는 말은 벤치마킹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80년대는 기존의 국민스포츠였던 복싱에 더하여 새로 야구나 축구나 프로화를 통하여 국민스포츠가 되었다. 국민스포츠가 되었다는 말은 국민들의 관심사요, 시대적인 트렌드라는 것을 당연한 전제로 한다. 그래서 이현세의 ‘설까치’, 박봉성의 ‘최강타’, 고행석의 ‘구영탄’, 허영만의 ‘이강토’는 모두 야구선수도 되었고, 복싱선수도 되었다.
웨슬리 스나입스가 배리 본즈를 롤 모델로 ‘The Fan’을 통하여 야구선수로 변신을 한 것처럼, 허영만의 이강토는 스트레이트보다 파괴적이라는 플리커 잽을 날리던 ‘디트로이트의 코브라’ 토마스 헌즈를 롤 모델로 ‘무당거미’로 변신을 하였다. 나약한 외모와 대비되는 강렬한 펀치를 휘두르는 무당거미는 복싱의 진수를 독자에게 보여준 허영만의 대표작의 하나이지만, 이것은 전술한대로 시류에 영합하여 그린 그림 중의 하나로서 전작 ‘각시탈’과 마찬가지로 허영만 본연의 가치를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만화가로서의 독창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등장하는 이강토는 무협지의 주인공과 대동소이하며, 캐릭터의 설정에서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허영만이 만화가로서 한 단계 성장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 것은 단연, ‘오! 한강’이다. ‘오! 한강’을 한국 만화계의 놀라운 사건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오! 한강’에 이르러 비로소 만화가들이 ‘관념속의 현실’이 아닌 ‘고뇌하는 현실’을 그릴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명랑만화속의 현실은 언제나 ‘밝은 현실’이었고, 공상과학만화속의 현실은 ‘상상속의 현실’이었고, 순정만화속의 현실은 ‘이국적인 현실’이었고, 이러한 현실들은 현실이되 현실에서 존재하지 아니하는 ‘관념속의 현실’이었다. 우리 현대사는 갈등과 굴곡이 다른 어느 나라에 비하여 점철된 현실이었음에도 만화가들은 때로는 자기검열로, 때로는 당국의 검열로 거짓 현실만을 그려냈다. 그러는 사이에 만화가들은 스스로를 격하하는 퇴영의 길로 나갔다. 허영만은 ‘오! 한강’을 통하여 위선과 거짓, 그리고 탐욕이 점철된 현실을 담담히 그려냈다. 그리고 진정한 표현의 자유를 위한 태동을 하였다. 이 작품속 결말부분의 허무한 구성이 비판의 십자포화를 맞고는 하였지만, 80년대라는 이념의 시대에 대하여는 최인훈의 ‘광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작가 한 사람의 시각으로 규정하기에는 그 스펙트럼이 너무나 광범위하기에 결론은 미지수로 여백을 두는 것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먼 훗날의 역사가 올바른 평가를 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오! 한강’을 통하여 만화가들은 ‘만화쟁이’, ‘만화가’라는 다분히 비하적인 명칭에서 ‘작가’라는 진정한 명칭을 얻게 된다. 백성민이 황석영 원작의 ‘장길산’을 만화로 옮기면서 조선의 역사에 대하여 너무 몰라 조선의 역사를 다시 공부하면서 ‘장길산’을 만화로 옮겼다고 고백할 정도로 우리 만화가들은 치열한 탐구정신과 작가정신에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다. 실은 기존의 것만을 짜깁기하는 구태에 빠져서 점점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던 것이 다. ‘오! 한강’은 만화가들에게 표현의 자유의 진지한 화두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허영만 자신 뿐만이 아니라 동료 만화가들에게도 커다란 수확이었던 것이다. 훗날 이현세가 ‘천국의 신화’를 통하여 아무도 시도하지 못했던 개국의 신화를 그린 것도 어찌 보면 허영만의 ‘오! 한강’이 열었던 문을 통과하였기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 한강’이후 허영만의 작품들이 점차 현실에 밀착된 작품이 두드러진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한다. 작가는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발로 글을 써야 한다고. 그리고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도 자신은 발로 ‘태백산맥’을 썼다고 회고를 한다. 만화건 소설이건 그 장르에 관계없이 작품은 치열한 현실을 사실 그대로 그리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허영만의 진면목은 ‘오! 한강’ 이후에 등장한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쓰기 위하여 플로리다로 향했듯이, 허영만은 그의 단짝 김세영과 손을 잡고 치열한 삶이 벌어지는 공간을 직접 찾아간다. 그래서 ‘48+1’을 그렸고, ‘타짜’를 그렸다. 이들 작품을 보다보면, 허영만이 직접 트럼프를 쥐고 있거나 화투장을 조이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아스팔트 사나이’을 보면, 영업사원으로 분한 이강토가 실은 허영만 자신임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치열한 현실에 뛰어든 허영만의 자취가 작품속에 그대로 용해되어 있는 것을 독자는 소름이 끼치도록 깨닫는 것이다. ‘미스터 Q’를 통하여 신입사원의 눈에 비친 회사라는 기업 내부의 부조리가 생생하게 다가오고, ‘식객’을 통하여 요리사의 땀과 눈물이 밴 생생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허영만 특유의 ‘도전정신’에 있다. 눈으로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으며, 작품속의 인물로 변해서 자기에게 눌리는 현실이라는 압박을 몸소 체득해야 비로소 작품속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허영만 특유의 현장성을 중시하는 허영만이라는 작가관의 실체는 바로 ‘도전정신’이라고 명명함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도전정신’이 없는데 현장을 중시할 이유가 없다. ‘도전정신’이 없는데 미지의 세계를 탐구할 이유가 없다. ‘도전정신’이 없는데, 새로운 화두를 던질 이유가 없다. 이 모든 것은 허영만의 ‘도전정신’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의 그 누구도 허영만이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이며, 우리시대의 문화 아이콘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바로 허영만의 ‘도전정신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것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필연이다.
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오늘은 만화방에 가야겠네요..^^
이번주는 돈을 받아야지요..
ㅎㅎ 직접 한 번 뵙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