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대 |
중 요 사 항 |
1세 인종원년 (1545) |
3.8(양력 4.28) 자시(子時)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출생(현 인현동1가) |
- 부(父) 이정(李貞), 모(母) 초계변씨(草溪卞氏)의 셋째 아들로 출생 | |
- 생후 6개월에 명종(明宗)이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남 | |
어린시절 |
외가가 있는 아산(牙山)으로 이사하다. |
- 불의와 부정이 활개치는 서울을 떠남. | |
- 글공부도 열심히 하고 전쟁놀이도 즐김. | |
- 도리에 어긋나면 화살을 쏘려하여 어른도 두렵게 여김. | |
※ 아산으로 이사한 시기는 8세, 16세 등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 |
21세 명종20년 (1565) |
혼인 |
- 보성군수(寶城郡守) 방진(方震)의 외동딸 상주방씨(尙州方氏)와 결혼 | |
22세 명종21년 (1566) |
10월 무인(武人)이 될 것을 결심(무예 배우기 시작) |
-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시(賤視)하는 사회풍조이나 무사(武士)로서 충성과 효도를 다하겠다 결심 | |
23세 명종22년 (1567) |
2월 아들 “회”가 태어나다 |
27세 선조4년 (1571) |
2월 아들 “울(蔚)”이 태어나다 |
28세 선조5년 (1572) |
8월 훈련원(訓鍊院) 별과시험(別科試驗) 응시, 낙마로 좌각 절골 |
- 절골된 다리를 버드나무 껍질로 동여매고 일어남. | |
32세 선조9년 (1576) |
2월 식년 무과에 응시 병과(丙科)에 합격 |
- 무과 중 무경강독(武經講讀)에서 장량이 죽지 않고 신선이 되었는지를 묻자 강목(綱目) 중 장량의 사망 귀절을 들어 답변하여 시험관을 놀라게 함. | |
- 인고의 수련 10년만에 합격 | |
- “나라에서 써줄 것 같으면 죽음으로 충성을 다할 것이요, 써주지 않으면 시골에서 밭을 갈며 살겠다”고 다짐 | |
12월 함경도(咸鏡道)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權管)이 되다 | |
※ 동구비보의 위치 : 평북 삼수군 압록강 상류 | |
- 권관(權管) : 종9품의 초급 장교 | |
- 함경감사(咸鏡監司) 이후백(李後白)은 곤장감사(棍杖監司)로 유명하여 활쏘기 시험 등으로 변방 장수들이 곤욕을 치뤘지만 이순신(李舜臣)의 성실함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음. | |
33세 선조10년 (1577) |
2月 아들 “염(苒)”이 태어나다 |
- 뒤에 "면( )"으로 개명 |
연 대 |
중 요 사 항 |
35세 선조12년 (1579) |
2월 훈련원(訓鍊院) 봉사(奉事)가 되다. |
- 봉사(奉事) : 종8품으로 인사관계를 맡음.(掌務官) | |
- 병조정랑(兵曹正郞) 서익(徐益)으로부터 차서(次序)를 뛰어넘어 승진(昇進)시키라는 부당한 인사청탁을 받고 거절함.(공과 사의 뚜렷한 구별) | |
- 병조판서(兵曹判書) 김귀영(金貴榮)이 공의 사람됨을 알고 서녀(庶女)를 첩으로 출가시키려 했으나 거절함. ("벼슬길에 처음 나온 내가 어찌 권세 있는 집에 의탁하여 출세하기를 도모하겠느냐") | |
10월 충청병사(忠淸兵使)의 군관(軍官)이 되다 ※ 충청병영의 위치 : 충남 서산군 해미 | |
- 병사(兵使) :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약칭 | |
- 거처하는 방에 옷과 이부자리밖에 없는 청빈한 생활을 함. | |
- 공의 상관인 병사가 취중에 부하 군관의 집을 찾아가려는 실수를 직언하여 고치게 함. | |
36세 선조13년 (1580) |
7월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내의 발포(鉢浦) 수군만호(水軍萬戶)가 되다. 고흥(高興) ※ 발포의 위치 : 전남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 |
- 발포만호(鉢浦萬戶-종4품)로 최초의 수군 생활을 시작함. | |
- 감사(監司) 손식(孫軾)이 벌을 주려고 능성(綾城)에서 발포의 공을 불러 시험했으나 진서강독(陣書講讀)과 진도작성(陣圖作成)을 보고 "내가 진작 그대를 바로 알지 못했던 것이 한이다."라고 경탄 | |
- 좌수사(左水使) 성박(成 )과 오동나무(공과 사의 구별) "이 오동나무는 국가의 물건입니다. 여러 해 동안 길러온 것을 하루아침에 사사로이 베어버릴 수 없습니다." | |
- 좌수사(左水使) 이용과의 관계 : 공이 상사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포구를 순시하고 거짓으로 조정에 보고하려다 실패하고 전라감사와 함께 장수들의 근무평가를 할 적에도 그릇되게 하려했으나 "이순신(李舜臣)이 군사를 다스리는 법이 도내에서 제일이라는 말을 들어 압니다. 나쁘게 평할 수 없습니다."라는 조헌(趙憲)의 항의로 좌절됨 | |
※ 조헌(趙憲) : 당시 전라감영(全羅監營)의 도사(都事) | |
37세 선조14년 (1581) |
12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 서익(徐益)의 모함으로 파직되다. |
- 서익은 공의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 시절의 상관으로 당시 부당한 인사청탁을 거절한 데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음. | |
38세 선조15년 (1582) |
5월 훈련원(訓鍊院) 봉사(奉事)로 복직되다(종8품) |
-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율곡(李栗谷)이 만나기를 원했으나 공은 "나와 율곡(栗谷)이 동성(同姓)인 까닭에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상(銓相)으로 있는 한 만나지 않겠다."v | |
- 병조판서(兵曹判書) 유전(柳琠)과 전통(箭筒)문제 "전통을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전통 하나로 인하여 더러운 말을 듣게 될까봐 그것이 두렵습니다."(행록 行錄) |
연 대 |
중 요 사 항 |
39세 선조16년 (1583) |
7월 함경도(咸鏡道) 남병사(南兵使)의 군관(軍官)이 되다. |
- 남병사 이용의 내신으로 군관이 됨. (이용은 3년 전 공을 벌주려 했던 분으로 공의 정명함에 자기의 잘못을 뉘우쳐 서로 상교하려고 함) | |
10월 건원보(乾原堡) 권관(權管)이되다. ※ 건원보의 위치 : 함북 경원군(慶源郡) | |
- 건원보는 여진족(女眞族)(울지내 鬱只乃, 니탕개 泥蕩介)의 침입이 잦았다. | |
11월 훈련원(訓鍊院) 참군(參軍)으로 승진하다.(정7품) | |
11월15일 부친 별세(향년 73세) | |
- 공은 울지내(鬱只乃)를 유인 사로잡았다. 이 공로로 조정에서 상을 내리려 했으나 북병사(北兵使) 김우서(金禹瑞)의 시기로 무산됨. | |
40세 선조17년 (1584) |
1월 부친 부음을 듣고 아산에서 분상(奔喪) 휴관(休官)하다. |
- 공을 아끼던 재상 정언신(鄭彦信)이 공의 몸이 상할까 염려하여 “성복(成服)하여 귀향하라” 하였으나 “한시각이라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 | |
42세 선조19년 (1586) |
1월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로 기용(종6품) |
- 사복시 : 궁중의 거마(車馬)를 관장 | |
부임 16일만에 조산보(造山堡) 만호(萬戶)로 전직(유성룡 추천) | |
- 조산보는 함북 경흥군에 있으며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 이를 막을 적임자로서 공이 선정됨. | |
43세 선조20년 (1587) |
8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다. |
※ 녹둔도 : 두만강(豆滿江) 입구 작은 섬 | |
- 이운용(李雲龍), 선거이(宣居怡)와 교유 | |
- 공의 재질을 잘 안 정언신(鄭彦信)의 건의로 북방에 군량을 상비하기 위하여 둔전을 설치하고 민호 수백을 이주 개간시킴. | |
- 방비의 허술함을 느낀 공이 병사 이일(李鎰)에게 증원병 파견을 여러 차례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음. | |
- 안개가 낀 날 병사들이 벼를 거두러간 틈을 타고 여진족이 침입, 공은 이운용, 이경록 등과 협력하여 반격 을 가해 적 두목을 사살하고 50여명의 백성을 도로 찾기까지 했으나 병력 부족으로 10여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사로 잡혀감. | |
- 공은 이 전투에서 왼쪽다리에 화살을 맞았으나 군사가 놀랄까봐 싸움이 끝난 뒤에 화살을 뽑음. | |
10월 1차 백의종군 | |
- 병사 이일은 공을 죄주고자 형틀을 차리고 패전 책임을 추궁하였으나 증원병을 파견치 않은 병사의 잘못을 반박함. 그러나 이일은 공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장계를 올려 "이순신은 패전한 사람으로 볼 수 없으니 백의 로 종군하여 공을 세우도록 하라"는 왕명이 내림. | |
44세 선조21년 (1588) |
1월 백의종군 해제 |
※ 북병사 이일이 지휘한 여진족의 시전(時錢)부락 정벌에 공을 세워 특사됨. - 최유해(崔有海)의 행록(行錄) | |
윤 6월 귀가 한거하다 |
연 대 |
중 요 사 항 |
45세 선조22년 (1589) |
1월 불차탁용(不次擢用) 2위에 천거(薦擧) |
- 좌의정 이산해(李山海),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이 공을 추천 | |
2월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 이광(李洸)의 내신(內申)에 의해 군관겸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이 되다. | |
- 이광(李洸)은 공과 본관이 같고 충무공을 잘 알아준 분이다. "그 같은 영재를 가지고 펴지 못하고 지내니 가엾다." | |
11월 선전관(宣傳官)을 겸하다. | |
12월 정읍현감(井邑縣監)이 되다.(종5품) | |
- 남솔(濫率)로 비판받음.“내가 비록 남솔로 파직이 될 망정 차마 의지없는 어린조카들을 내버릴수 있겠는가” | |
- 이때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나 연루의심을 받던 조대중의 수색물 중 공의 편지가 있어 이를 제거 해주마 고 생색내는 금부도사에게 “내 편지는 조대중의 편지에 답신한 문안편지에 불과하며 수색물품을 사사로이 뽑아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거절 | |
- 많은 선비들이 수난을 당했으며 특히 정여립이 속한 동인들의 피해가 컸다. 공을 아끼던 우의정 정언신 (鄭彦信)도 정여립(鄭汝立)과 9촌간이라는 이유로 유배되어 갑산(甲山)서 병사(病死)함. | |
- 정언신이 투옥되었을 때 옥으로 문안을 갔다. 이때 금오랑(金吾郞)들이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죄가 있고 없는 것은 왕이 가릴 것이나 재상이 옥중에 있는데 미안한 일이 아니냐"고 꾸짖음. | |
- 태인현감(泰仁縣監)을 겸임하면서 그 동안 밀렸던 미결서류를 일사천리로 처리하는 솜씨에 태인고을 사람 들이 공을 태인고을 전담현감이 되게 해달라고 어사에게 청원함. | |
46세 선조23년 (1590) |
7월 고사리진(高沙里鎭) 첨절제사(僉節制使)로 발령, 대간들의 반대로 불발 |
- 고사리진, 만포진 : 평북 강계군에 있음. | |
8월 만포진(滿浦鎭) 첨절제사로 발령, 대간들의 반대로 정읍현감(井邑縣監)에 유임 | |
- 정읍현감 재직기간이 8개월밖에 안되므로 대간들이 반대함. | |
47세 선조24년 (1591) |
2월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전임 발령 |
부임전 가리포진(加里浦陣)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전임 발령 | |
※ 가리포진 : 전남 완도군 | |
부임전 2월13일 전라좌수사로 임명되다.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 | |
- 좌의정 겸 특명이조판서(特命吏曹判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추천으로 임난 14개월전 국난 극복의 기회부여(권율도 의주목사로 추천) | |
-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 있는 나무가 광풍에 넘어지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나 어깨로 지탱해 바로 잡았는데 그가 이순신이더라” 공의 친구의 꿈 | |
- 관할 오관오포(五官五浦)(순천, 보성, 낙안, 광양, 흥양 및 사도, 방답, 여도, 녹도,발포)에 대한 군사 조련, 무기 점검, 연대 축조, 거북선 건조 등 군력 증강에 힘씀. |
연 대 |
중 요 사 항 |
48세 선조25년 (1592) |
1월 12일 소관 전체 진영 무예훈련 |
4월 11일 거북선 돛 만들기 | |
4월 12일 거북선에서 지자?현자 방포 시험 | |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다 | |
- 4월 13일 왜군 당일 오후 5시 부산 도착, 4월 14일 오전 6시 상륙 개전(開戰) | |
- 4월 15일 원균으로부터 왜적침략 통보를 받고 이광, 최원, 이억기에게 공문을 보냄. | |
4월 27일 출전지시 어명 | |
5월 1일 여도 수군(呂島 水軍) 황옥천 처형 효시 | |
- "무릇 살피고 망보는 일을 각별히 단속하고 남은 전쟁 기구와 여러 비품을 철저히 정비하여 사변에 대비하 라"고 관할 포구에 지시 | |
5月 경상도로 출전, 옥포(玉浦)?합포(合浦)?적진포(赤珍浦)해전에서 왜선 42여척을 격파하다. (5월 23일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자) | |
- 개전일성(開戰一聲) "망동하지 말고 산과 같이 정중하게 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 물령망동 정중여산) | |
- 출전 중에 선조의 몽진 소식을 접함.(옥포 승첩 장계) | |
5월말 및 6월초 사천(泗川)?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해전에서 왜선 70여척을 격파하다. (8월 16일 자헌대부로 승자) | |
- 거북선 출전(귀선 돌격장 이기남, 이언양) | |
- 출전중 꿈에 머리 흰 노인이 적이 왔다고 깨움 | |
- 왼편 어깨에 탄환을 맞아 이듬해까지 장기간 고초를 겪음. | |
- 당포해전이 끝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함대가 합류함. | |
- "적병의 수급을 취하기 보다 사살하는데 주력하라"고 훈시 | |
7월 견내량(見乃梁) 및 안골포(安骨浦)에서 왜선 60여척을 격파(정헌대부로 승자) | |
- 소서행장(小西行長) "일본 해군 10만이 서해로 오는 길이니 대왕의 수레가 이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소 이다"라고 선조(宣祖)임금을 조롱하던 상황 | |
9월 부산포해전에서 왜선 130여척 격파 | |
- 부하 정운장군(鄭運將軍) 전사 | |
49세 선조26년 (1593) |
2월 ~ 4월 웅포등지의 왜적을 일곱차례 공격함. |
7월 15일 본영을 여수(麗水)에서 한산도(閑山島)로옮기다. | |
※ 6월29일 진주성이 함락됨. | |
- 전선건조, 수군 확보, 의병 파송 등에 힘썼으며 특히 피난민을 위해 돌산도에 집단 이주처를 마련 개간. | |
-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라 만일 호남이 없으면 곧 나라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어제 진을 한산도로 옮겨 치고 이로써 바닷길을 가로막을 작정입니다”(지평현덕승에게 보낸 충무공 서간) | |
8월 15일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다. (10월 1일 교서 도착) | |
- 삼도수군통제사는 직제에 없는 것을 왕이 만들어 임명(고종때까지 303년 208대 후손 12명) | |
12월 진중 무과 설치 주청 |
연 대 |
중 요 사 항 |
50세 선조27년 (1594) |
3월 제2차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 |
- 왜 진영의 명나라 도사(都司) 담종인(譚宗仁)의 금토패문(禁討牌文)에 항의하다. | |
- 금토패문의 "일본진영에 가까이 하지 말고 너의 본 고장으로 돌아가라"에 "영남일대가 우리 땅 아닌 곳이 없는데 일본진영에 가까이 하지 말라 함은 웬 말이며 우리가 우리 땅에 있는데 본 고장이란 도대체 어디입 니까?" 라고 병중임에도 직접 글을 지어 答信함. | |
4월 진중 무과 실시 | |
4월 부하 어영담(魚泳潭) 병사(病死) | |
8월 17일 권율, 곽재우, 김덕령과 회의 후에 9, 10월 장문포(長門浦), 영등포(永登浦)의 왜군을 수륙으로 협공하다. | |
51세 선조28년 (1595) |
2월 27일 원균 충청병사(忠淸兵事)로 전직, 배설(裵楔) 승계 |
- 공은 원균과의 불화로 국사를 그르칠까 염려하여 자신의 직을 갈아달라고 청하였었다. | |
8월 25일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 내영 | |
- 체찰사 이름으로 군사들에게 무예 시험을 실시하고 음식을 내려 위로함. | |
53세 선조30년 (1597) |
요시라의 간계(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가등청정 도해시 공격 권유 - 이미 도해함) |
- 공을 무서워한 왜적이 간첩을 보내 공을 제거하려함. | |
- 영중추(領中樞) 이산해(李山海), 판중추(判中樞) 左議政(좌의정) 김응남(金應南) 등의 주장으로 압송됨. | |
- 서인들과 대간들이 공의 치죄를 주장하였으며 특히 박성(朴惺) 등은 공을 죽여야 한다고 상소함. | |
- 선조는 남이신(南以信)을 보내 조사시켰으나 한산도에 가지 않고 당색에 끌려 중도에서 돌아와 허위 보고 함 "가등(加藤)이 건너오다 7일이나 섬에 걸려 꼼짝못하였는데 나가잡지 않았다." | |
- 공을 추천한 유성룡(柳成龍)마저 제거하려 했기에 유성룡도 불리한 발언을 함. | |
- 도체찰사 이원익이 장계를 올려 "왜적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수군이요, 또 순신은 바꿔서는 안될 사람이 며 원균을 보내서는 안될 일입니다.” | |
원균의 모함과 당쟁의 희생이 되어 서울로 압송 됨(2월 26일) | |
- 부산 앞 바다에 출전 중 귀환한 공은 후임자 원균에게 정중히 예를 갖춘 후 인수인계 뒤에 포박을 당함. | |
3월 4일 옥에 갇히다. ※ 위관(委官) : 윤근수(尹根壽) | |
- 옥 중에서 매헌(梅憲) 정사신(鄭士信)의 위로편지를 받음. | |
-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 또 죽게 되면 죽는 것이다.” | |
- 옥리가 조카 분(芬)에게 뇌물 쓸 것을 권했으나 이 말을 전해들은 공은 분에게 “죽으면 죽었지 도리에 어긋 난 짓을 해서 살기를 꾀한단 말이냐”라고 꾸짖음. (징비록) |
연 대 |
중 요 사 항 |
53세 선조30년 (1597) |
4월 1일 특사되어 합천 초계에 있는 권율의 막하로 백의종군 명을 받다. |
- 정탁(鄭琢)의 신구차(伸救箚)가 선조의 마음을 돌림. "순신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그로 하여금 공을 세우게 한다면 은혜를 갚으려 할 것입니다." | |
- 출옥후 윤자신, 유성룡, 정탁, 김명원, 심회수 등의 위로를 받았으며 4월 3일 서울을 출발하여 과천, 수원, 오산, 평택, 군포를 거쳐 어라산 선영에 성묘를 함. | |
4월 11일 모친 상을 당하다. (83세) | |
4월 13일 해암(蟹岩)에서 모친 유해(遺骸) 접견 | |
- 오종수(吳從壽), 전경복(全慶福) 입관발상(入棺發喪) 도움 | |
- "나라에 충성을 다하려 했건만 죄가 이미 내 몸에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려 했건만 어버이마저 가버 리셨구나." 탄식 | |
- "뼈가 가루가 되어도 그를 잊지 못하리라"고 입관을 도운 오종수를 고마워함. (일기) | |
4월 19일 장례도 모두 못치르고 떠남. | |
6월 8일 초계의 도원수 권율 막하로 입영함. | |
- 경상도 길은 왜군으로부터의 피해가 커서 광덕, 공주, 은진, 여산, 삼례, 전주, 임실, 남원, 승주, 구례, 악양 , 하동, 단계, 삼가를 거쳐 초계로 들어가는 전라도 길을 택하여 내려감 | |
7月16일 칠천량(漆川梁)해전에서 조선 수군 궤멸(潰滅) | |
- 도원수의 출전 명령을 받은 원균이 안골포 가덕도에서 적을 만나 부산으로 나가지 못하고 되돌아온 뒤 경상우수사 배설의 웅천 접전 전투시에도 원균이 출전치 않아 곤양의 도원수에게 불려가 7월11일 곤장을 맞음. | |
- 다시 출전한 원균 함대는 절영도에서 풍랑을 만난 뒤 가덕도에서 4백여 군사를 잃고 칠천량에서 남은 군사 와 함께있다가 7월15일 밤 왜적의 기습을 받아 원균이 패사하고 이억기·최호(崔湖) 등이 전사하는 패배. | |
- 칠천량에서 도피한 배설은 한산도에 와 집, 곡식, 무기 등을 불태우고 피난민들에게 섬을 떠날 것을 종용 | |
7월 18일 권율의 방문을 받고 칠천량 패전에 따른 사후방책을 마련키 위해 남해안 시찰을 떠남. | |
- 하동, 광양, 화개, 구례, 곡성, 순천, 낙안, 보성, 장흥, 회령포를 거쳐 벽파진에 이름. (12척의 배와 120명의 군인을 모음) | |
김명원과 이항복의 강력 추천으로 7월 23일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됨. (8월 3일 진양군 수곡면에서 교서를 받음) | |
- "우리는 나라의 명을 받았으니 같이 죽는 것이 마땅하다. 한번 죽음으로서 나라에 보답하자.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 |
- 8월 16일 남원, 8월 25일 전주, 9월 금구·태인·정읍 등이 왜적에게 함락되는 어려운 시기였으며 9월 2일에 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도망함. | |
8월 30일 진도(珍島) 벽파진(碧波津)에 본진(本陣)을 두다 | |
- 9월에 조정에서 육전에 합류하라 하였으나 "이제 신에게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죽을힘을 내어 싸우 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전선은 비록 적으나 제가 죽지 않은 한 적이 감히 업신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고 장계함. |
연 대 |
중 요 사 항 |
53세 선조30년 (1597) |
9월 15일 명량을 지나 우수영에 결진 |
- 9월 15일 밤 명량해전을 앞두고 장병들에게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의 정신으로 싸울 것을 훈시함. | |
- 신인이 꿈에 나타나 이길 방법을 가르쳐줌. | |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13척의 전선으로 왜선 133척과 싸워 31척을 격파하다. | |
※ 일기 133척, 행록 333척, 징비록 300여척, 명량대첩비 500여척 등 왜선 수가 각각 다름. | |
-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려는 군사들을 독려하며 명량의 지리를 이용하고 의병전술을 사용하여 빛나는 승리 를 거둠. | |
※ 왜장 마다시(馬多時-來島通總) 전사 | |
- 조정에서는 은금(銀金) 20양을 하사하고 명장 양호(楊鎬)가 괘홍용(掛紅用) 홍단(紅緞) 1필, 왕원주 (王元周)가 요대(腰帶), 진국경(陳國敬)이 도배(桃盃) 등을 선사함. | |
10월 벽파진에서 보화도로 수군진영을 옮기다. | |
※ 보화도의 위치 : 전남 목포 고하도 | |
- 어선 검문 및 군사비용 확보를 목적으로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 제도를 실시하여 어선 대·중·소에 따라 통행세를 부과하고 첩지를 교부함. | |
10월 왜적들이 명량해전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아산 공의 마을을 방화하는 등 분탕질 하자 이에 대항하여 싸우다 셋째아들 “면”이 전사함. | |
- 14일 일기에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렇게 어긋난 일이 어디 있단 말이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 |
※ 고금도에서 충무공의 꿈에 면이 현몽(現夢)하여 원수 갚아줄 것을 청하므로 포로로 잡혀와 있던 왜적 중 에서 면을 죽인 왜적을 찾아내어 죽임. | |
12월 공이 상중(喪中)으로 채식만 하므로 선조가 고기반찬을 하사하다. | |
54세 선조31년 (1598) |
2월 18일 고금도(古今島)로 진영을 옮기다. |
※ 고금도 : 전남 완도군 | |
- 애민휼군(愛民恤軍)의 선정으로 민가 수만호가 입주하는 등 한산도 이상의 성세를 이룸 | |
7월 16일 명 수군 도독 진린(陳璘)과 연합하다. | |
※ 명 수군 진영 : 廟堂島 | |
- 공은 아량과 양보로서 진린의 포악한 성품을 무마하였으며 명군의 약탈을 통제할 권한을 얻는 등 신뢰를 받음. | |
7월 19일 절이도로 출동하여 왜적을 쳐부수다. | |
8월 18일 풍신수길(豊臣秀吉) 사망 | |
- 5大老(대로)에게 후사 부탁 및 무사 철귀 유언 | |
※ 5대로 : 덕천가강(德川家康), 전전이가(前田利家),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 모리휘원(毛利輝元), 상삼경승(上衫景勝) |
연 대 |
중 요 사 항 |
54세 선조31년 (1598) |
10월 2일, 10월 3일 왜교 전투 |
- 소서행장이 은거하고 있는 예교(왜교) 앞 바다 장도(獐島)에 진을 치고 예교 뒷편 육지에 있는 명 육군 유정과 협공함. | |
※ 왜적의 피해도 컸지만 유정의 소극적 태도와 명 수군의 무모한 전투로 조수에 걸려 명선 20여척이 적에게 피해를 당하는 등 연합군의 피해도 컸음. | |
※ 공의 사촌동서 황세득(黃世得) 전사 “세득은 국사에 죽었으므로 그 죽음이야말로 영광스럽다” | |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노량해전에서 왼쪽 겨드랑이에 적탄을 맞아 운명(殞命)하다. | |
- 공은 왜적이 귀로를 애원하며 뇌물을 주려 했으나 이를 거절함. “배 한 척도 돌려보낼 수 없다.” | |
- 뇌물을 받은 진린의 묵인으로 왜 통신선 한 척이 빠져나가 사천·고성·남해 등지의 왜적에 연락하여 모두 노량앞 바다에 집결함으로써 소서행장 구출을 위한 전투가 벌어지게 됨. | |
- "이 적을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하늘에 축원 | |
- “전쟁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말라” 유언, 큰아들 회, 조카 완, 군관 송희립 등이 이어 독전 하였으며 왜선 500여척(실록에는 300여척)을 상대로 싸워 200여척의 전선을 격파함. | |
※ 가리포첨사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 방덕용(方德龍), 흥양현감 고덕장(高德將)과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 (鄧子龍) 등이 전사함. | |
선조32년 (1599) |
12월 4일 의정부 우의정을 추증 |
- 최후의 진영인 고금도에 유해 일시 안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