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배 달 나 라
1. 태백산 개천
뒤에 한웅씨가 일어나 천신의 조칙을 받들어 백산(白山)(백산: 태백산이라면 중국의 서안근교에 3천 7백여 높이의 태백산과 서안근교에 6-7천년된 유적지인 반파박물관이 있다.)과 흑수(黑水)(여기서는 흑용강인 듯) 사이에 내렸다.
천평에 아들샘과 딸샘을 파고 청구(靑邱: 산동성 주개(周愷) -(청구국의 수도))에 정지(井地)를 긋고 천부인(天符印: 모습은 지금 꼭 알 수 없으나 ? 둥글, 네모 . 세모인 듯 하고, 통치자의 신표인 것은 명확하다.)을 가지고 오사(五事)를 주관하며, 재세이화(在世理化)로 홍익인간하였다.
신시(神市)에 도읍하고 나라를 배달(倍達)이라 하였다. 3.7(21)일을 택하여 한얼님께 제사지내며 바깥일을 삼가고 문을 닫고, 스스로 수양하며 주문으로 빌며 공을 이루고, 약을 먹고 신선이 되며, 괘(괘)를 그어 미래를 알고, 괘상을 잡아 신을 움직였다. 신령과 선관들에 명하여 보필을 삼고, 웅씨네 딸을 맞아 왕후로 삼아, 혼사의 예를 정하여 짐승의 가죽으로 폐백을 삼고, 종자를 심고 짐승을 기르며 저자를 열어 맞바꾸며 살았다. 후인들이 그를 받들어 지상 최고의 신으로 삼고 세세로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 . 신시한웅의 뒤에 치우천왕(제 14)이 청구를 개척하였으며 18세를 전하니 역년이 1,565년이었다.<고기4>
풍백, 우사, 운사, 뇌공을 거느리고, 곡식, 명령, 형벌, 질병, 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정확하게는 366이다. 송호수저 한민족의 뿌리사상 “366사의 의미” 참조) 가지의 일을 주관하였으며, 세상을 이치대로 다스려 모든 인류를 최대 행복케 하였다.
이 때에 곰족과 범족이 이웃하여 함께 살았는데 일찍이 신단수에 빌기를 신의 계율(치화경 366조)을 지키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므로 한웅이 그를 듣고, 가르칠 수 있겠구나 하여 주술로써 신이 되어 깨우치게 한 다음 신령한 쑥 한다발과 마늘 20낱을 주고, 훈계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은 이것을 먹고 백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선인의 모습을 얻을 것이라 하였다. 웅족과 호족은 그것을 받아먹고 3․7(21)일 동안을 웅족은 능히 배고픔과 추위를 참고 계율을 지키어 제 모습을 얻었으나, 호족은 방만하여 참지 못하였으므로 선업(善業)을 얻지 못하였다.
두 성(姓)이 이같이 서로 달랐다. 웅녀는 같이 살 사람이 없으므로 신단수 아래서 잉태하기를 주술로 원하였다. 한웅은 짐짓 한(桓)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하게 되니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장막을 둘렀다.
한웅천왕이 처음으로 개천하여 백성에게 교화를 베풀 때 천경을 연설하고 신고(神誥)를 강론하여 크게 무리를 가르쳤다. 이로부터 치우천왕이 토지를 개척하고, 구리와 쇠를 캐서 병사를 단련하고 산업을 일으켰다.
때에 9한(九夷)은 모두 하나같이 삼신을 한 뿌리의 조상으로 하였다. 수두(蘇塗)를 맡아 관리하고 관할 경계(管境: 관할하는 경지)를 관장하며 관할을 못 넘게 하여 무리들과 의논하여 한결같이 화백(和白: 환국 대부터 내려오는 민주제도. 서구식 민주제는 다수결제이고, 화백민주제는 만장일치 제도다.)하고 아울러 지혜와 몸을 같이 닦아 전계대로 살았다.
이로부터 9한족은 삼한관경(三桓管境)을 천체 아들에 의해 통합되었으니 이의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밀기(密記)(표훈의 삼성밀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안함. 세조의 수서령에 그 목록이 있다. 여기 저기 [삼성밀기]의 단편이 있다.)에 이르기를
한국의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족(强族)이 있었다. 한웅이 삼신의 가르침 베풀고 전계(佺戒)로써 업(業)을 삼아 무리를 모아 서약을 하니 선을 권하고 악을 벌(권선징악) 하는 법을 두니, 이로부터 갈기고 제거하는 법이 엄격하였다.
때에 각 부족의 족호가 같지 않았다. 풍속이 점점 나뉘어지더니 본디부터 살았던 이는 범족이었고, 새로 옮아온 이들이 곰족이었다.(곰족 범족이란 씨족의 호칭이다. 김씨 박씨 이씨처럼, 김씨가 금덩이가 아니요 박씨가 쪽박이 아니요. 이씨가 오얏나무가 아닌 것처럼. 웅녀를 앙곰이라는 동물로 보는 것은 큰 잘 못이다.)
범족의 성품은 잔인하고 약탈을 전업으로 하였으며 곰족은 성품이 미련하고 괴팍하면서도 뽐내어, 비록 같은 마을에서 살되 오래 될수록 멀어져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일찍이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며, 결혼하지 않으며, 일마다 거의 따르지 않아, 모두 뜻이 합해지지 않았다. 이때에 곰녀의 임금이 한웅의 신성한 덕성을 듣고 곧 무리를 이끌고 와서 알현하고 말하기를
“원컨대 굴터 하나를 주십시오.” 하고, 신선 계율을 받아 지킬 것을 맹세하므로 , 한웅이 곧 그를 허락하고 그들로 하여금 머물러 있을 곳을 정하여 아들을 낳게 하였다.
범족은 끝내 고치지 못하므로 밖으로 쫓겨났다. 한겨례의 일어남이 이에서 비롯하였다. 뒤에 제 10세 갈고한웅(갈고한웅: 배달나라 제 10세 독노한 한웅이라고 하는데 재위는 1백년 수는 1백 2십 5세였다.)이 염제신농씨의 나라와 나라의 경계를 정하였다.
2. 치우천왕
몇 대를 전하여 자오지(慈烏支)한웅(자오지한웅: 곧 치우천왕이며 배달왕조의 제 14대 천왕이다.)은 신기한 용맹이 뛰어났으니 구리머리에 쇠이마(동과철로된 투구. 갑옷 등을 말한다.)로 능히 안개를 일으키고, 구야(九冶)를 만들어, 쇠를 캐서 녹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크게 두려워하여 세상에서 그를 이름하여 치우천왕이라 하였다.
치우는 속언에 “우뢰와 비를 크게 만들어 산하를 바꾼다.”는 뜻이다. 치우천왕은 염제신농이 쇠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웅대한 뜻을 품고, 서녘에서 여러 차례 천병을 일으켜 색도(索度)로부터 진격하여 회수 대산(岱山)을 검거하고 헌원의 나라까지 이르러 바로 탁록(𣵠鹿)의 들에 들어가서 헌원을 잡아 신하로 삼았다.
뒤에 오장군(五將軍)을 보내어 서쪽의 고신(高辛)을 쳐서 공을 세우게 하였다. 때에 천하가 솥발처럼 삼각으로 대치하여 탁수(𣵠水: 하북성 탁록현 탁록부근을 흐르는강.) 북에는 대요)가 있고, 동에는 창힐이 있고, 서에는 헌원이 있었는데, 서로가 군사로써 싸워 승리를 얻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처음에 헌원은 치우보다 잠시 후에 일어났으므로 싸울 때마다 불리하여 대요에 의지하고자 하였으니, 두 나라는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대요는 일찍이 간지술(干支術)을 배워갔고 창힐은 부도문(符圖文)을 받으니 당시의 제후로 신하가 되어 섬기는 자가 이러하였다고 하였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사기)에서 <고기 8>
제후가 다 와서 복종하되 치우가 가장 포악하여 천하가 능히 치지 못하고 헌원이 섭정하매 치우가 형제 81인이 있어 짐승의 몸으로 사람의 말을 하며, 머리는 구리요 몸은 쇠로서 모래를 먹으며, 오구(오구)의 장대(무기의 이름)와 칼, 창, 태노(태노: 틀이 달린 기계식 활인데 “쇠뇌”라고도 함.)를 만들어 천하를 흔드니 치우는 옛 천자의 호이다.< 고기 8> 라고 적고 있다.
3. 고시례와 불
진역유기(震域遺記)(고려말기의 학자 정평 이객이 세권을 지었다고 하나 지금 전하지 않음. 세조 수서목에 들어있다).신시기 (神市紀)에 이르기를 한웅천황이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성된 것과 만물이 각기 그 자리를 얻은 것을 보고, 곧 고시례(高矢禮: 경작과 곡식을 맡은 주곡관 즉 농관)로 하여금 먹고사는 임무를 맡게 하였으니 이가 주곡관(主穀官)이다. 이때에는 아직 농사법이 없었고 불씨도 없었다.
어느 여름날 우연히 깊은 산속에 들어가니 잡목들이 뒤엉키어 있고 늙은 줄기의 죽은 가지가 어지럽게 얽혀 서 있는 것을 오랫동안 보고 있다가, 깊은 시름에 잠겨 말이 없었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숲을 불어 닥쳐 만 가지 나무들이 거칠게 흔들려 늙은 회화나무가지를 분질러 불을 만들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튿날 다시 잡목 숲에 이르러 배회하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갑자기 한 마리 호랑이가 우짖으며 뛰어 나오니 고시씨가 외마디 소리로 크게 꾸짖으며 돌을 날려 맹타했으나 잘못하여 바위의 모서리를 내리치자 번쩍하고 불이 일어나므로 크게 기뻐하고 돌아와서 다시 돌을 쳐서 불을 얻었다.
이에 따라 백성들은 익혀먹는 법을 얻게 되고 풀무로 쇠 달구는 기술을 처음으로 일으켜(화식: 부쇠쳐서 불을 일으키고, 풀무로 쇠를 달구는 제련법의 비롯이다.)만드는 기술 또한 점차로 진보하였다. < 고기 59>
4) 글씨의 비롯
한웅천황은 또 다시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하여 글을 만들게 하였다. 대게 신지씨는 대대로 주명(主命)의 직을 맡아 들이고 내는 일을 맡았으나 다만 목소리에 의존하고 이릭이 문자로 저거두는 방법이 없었다.
하루는 무리에서 떨어져 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놀라서 일어난, 암사슴 한 마리를 보고 활을 당겨 쏘려고 하다가 놓쳐 버리고 말았다. 사방으로 찾아 산과 들을 지나서 평평한 모래바탕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발자국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것을 보고 향방을 알았다.
머리를 숙이고 시름에 잠겨 있던 신지는 갑자기 깨달은 바가 있어 “적는 방법은 오직 이 같은 것 뿐 이구나.”하고 이날은 사냥하는 것을 그만두고 돌아와서 반복하여 깊이 생각하고, 넓게 살핀 끝에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고 문자를 처음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태고문자의 시초인 녹도문이였다.(태고문자 : 즉 사슴 발자국을 본떠 만든 녹도문을 말한다. 현재 경남 남해군 양하리의 錦山의 중턱 바위에 있다. 졸저 “위대한 민족”책걸 사진 그 뒷겉 안쪽에 해석이 있음.)<고기 9>
다만 후세에 연대가 아득하고 멀므로 태고 문자는 형적이 없어져서 존재하지 아니하니 그 글자가 불편함이 있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찍이
△남해도 양하리 계곡
△경박호, 선춘령과
△오소리(烏蘇里) 밖의 바위 사이에서
때때로 범자(梵字: 인도 글자는 파리문과 범서문이 있는데 범서 즉 산스크리트 문자)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닌 것이 발견 된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신지씨가 만든 옛 글자 아니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우리나라의 미진함과 우리 겨레의 약함을 한탄한다.<고기 60. 사회 34>
우리나라의 문자는 옛부터 있었다. 지금 남해현 양하리의 암벽에 신시의 옛 색임이 있다. 부여사람 왕문(王文)이 쓴 법류부의전(法類符擬篆)과 자부선생의 내문(內文)과 태자부루의 오행은 모두 한단시대에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은학(殷學, 갑골문)과 한문은 아마도 왕문이 끼친바 일 것 이니 유기(留記)에 “신획(神劃)이 일찍이 이 태백산의 푸른 바위벽에 있었다.”는 글이 있다.
그 모양은 ㄱ과 같으니 세상에서는 신지 선인이 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것이 글자 만듦의 비롯이다.”라고 한다. 곧 그 획은 바른 하나와 구부린 둘 直一曲二의 모양이다.
그 뜻은 관제(管制)의 형상도 있다. 그 모습과 소리는 또한 계획된 뜻에서 나온 것도 같다. 그러니 신인의 덕과 사랑으로 세상을 구하려는 참 가르침의 행해져서 세상은 바루어진다.
어질고 능력 있는 이는 벼슬을 하고
늙은이 어린이는 따뜻이 봉양하여
젊고 씩씩한 이는 의리에 순종하니
모두가 감동하여 송사는 그쳐 지고
창과 칼의 모함은 그치고 사라지네
이것이 또한 섭리대로 살아가는 외길이니라
理化之一道也
대변경주(大辯經註)에 이르기를 남해현 양하리 계곡 바위에 신시의 옛 색임이 있으니 그 글에서는
“환웅천왕이 사냥와서 삼신께 제사 올리다.”
고 했다. 또 이르되 대시(大始)에 옛 것을 전함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만 의지한지 오래다. 나중에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또 다시 그림이 발전하여 문자가 되었다. 대저 문자의 근원은 나라의 풍속을 중하게 여기는 데서 나오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고기 92>
삼신은 밖으로 일기(一氣)를 머금었고, 바깥 것도 하나이고 그 안도 하나이며 그 통째도 하나이다. 역시 모두가 포함되어 있을 뿐, 놓을 수는 없다. 그것이 글자가 만들어진 근원이 된다. 함회집귀(含會執歸)의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함회집귀: 셋을 머금어 하나로 잡아, 모아 합하여 한테로 돌아감) <고기 93>
신시에 산목(算木)이 있었고 치우에게 투전목(鬪佃目)이 있었으며 부여엔 서산(書算)이 있었다. 그 산목이란 <이태백전서>의 옥진총담(玉塵叢談)에 “발해국에 글이 있었는데 당나라에서는 이를 아무도 해득하지 못했다. 이태백은 이를 능히 풀어 이에 대답했다.” 라고 했다.
<삼국사기>엔 헌강왕(신라 제 49대 임금) 12년에 봄에 북진으로부터 적국인(발해인)이 진에 들어와 나무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갔다. 드디어 그 나무에 글씨 15자를 써서 바쳤는데 “보로국과 흑수국( 발해 제 2세 무예왕 즉위, 이해 개마, 구다, 흑수등 여러 나라가 신하되기를 청하며 공물을 바쳤다.<고기 대진국본기> 16년 구다, 개마, 흑수 나라들이 항복해오니 이들을 성읍으로 삼았다<위책>)사람이 같이 신라국과 화통코져 한다”고 하였다.
또 고려의 광종(고려 제 4대 임금)때 장유(張儒)는 접반사(接伴使)로서 저명인인데 처음 난을 피하여 오월(吳越)에 이르렀다. 월나라에 일꺼리 좋아하는 자가 있었다. 동국의 한송정곡(寒松亭曲)을 거문고 밑바닥에 새기고 이를 물결에 띄웠다. 월나라 사람들은 그 글을 풀지 못하였더니, 마침 장유를 만나 절하고 그 글의 뜻을 물으니 장유는 그 자리에서 한시(漢詩)로서 풀었다.
닭밝은 한송정의 밤
물맑은 경포대 가을
슬피 울며 오고가는
모래밭 갈매기 뿐
아마 그 거문고 밑바닥에 새겨진 글은 가림다 등류였을 것이다.
<고기 94>
원동중(元董仲)의 삼성기 주의
“왜(倭), 진(辰), 여(餘)국은 혹은 가로쓰고 혹은 노끈으로 매듭하고 남무에 새김질한다”고 되어 있다. 오직 고려만이 뛰어난 법을 모사했으니 생각건대 한단의 상고시대에는 반듯이 문자의 새김이 있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일찍이 신지의 옛 비석에 새겨진 천부경을 얻어 다시 첩지를 만들어 세상에 전했으니 양하리의 각서는 바로 그 실제의 자취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시때는 녹서(鹿書)가 있었고
자부때는 우서(雨書)가 있었고
치우때는 화서(花書)가 있었고
<鬪佃文등은 남은 흔적이다>
복희때는 용서(龍書)가 있었고
단군때는 신전(神篆)이 있었다.
이들 글자들은 널리 백산 흑수 청구 구려에서 쓰여졌다고 했다. 부여사람 왕문(王文)은 처음 전문을 번거롭다 여기고 그 획을 줄이고 새로 부여 예서(隸書)를 만들어 이를 사용했다. 진(秦)나라 때 정막(程邈)은 숙신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문의 예법(隸法)을 한수(漢水)에서 얻었고, 또 그 획을 계승하여 그 형을 바꾸었다.
이것이 지금의 팔분(八分)체이다. 晉(진)나라 때 왕차중(王次仲)은 해서(楷書)를 만들었는데 그는 왕문의 먼 후예이다. 지금 그 글자의 근원을 탐구해보면 모두가 신시에서 전해진 법이며 지금의 한자(漢字)도 역시 그 지류를 계승한 것임이 명백하다.<고기 95>
5. 삶터의 언저리
환웅천황이 풍백 석제라(釋提羅)를 시켜 새, 짐승, 벌레, 고기의 해를 없이 하였으나, 인민(人民)은 오히려 동굴과 토굴속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바닥의 습기와 외풍이 사람을 핍박하여 병들게 하고 또 새, 짐승, 벌레, 고기들이 쫓겨 점차 스스로 피해 숨어버리므로 잡아먹기가 불편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때에 우사(雨師) 왕금(王錦)을 시켜 사람이 살집을 짓게하고 소, 말 , 개, 돼지 , 수리, 호랑이 등의 짐승을 맡아서 길러 이용하게 하였으나 운사(雲師) 육약비(陸若飛)를 시켜 남녀간의 혼인법을 정하게 하고 치우(治尤)에게는 병마와 도적을 막는 일을 관장케 하였다.
이로부터 치우와 고시 및 신지의 후예들이 가장 번성하고 치우천왕이 등극함에 이르러 구야(九冶)를 만들어 구리와 쇠를 캐서 쇠를 제련하여 칼과 창 그리고 대노(大弩)(쇠뇌: 여러개의 화살을 한목 쏘는 큰활)를 만들어 수렵하고 물리쳐 이기므로 먼 곳 무리들이 신으로 알고 매우 두려워하였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소위 “이(夷)는 큰활로부터 나온 글이니 동방사람(夷從大從弓爲東方人者)”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짓기에 이르러 “이(夷) 의 이름을 마침내 융(戎), 적(狄)과 아울러 더러운 것이라고 지칭한 것은 서글픈 일이다.”고 하였다.
삼성밀기(三聖密記)에 이르기를 한국의 말(末)에 다스리기 어려운 거치른 족속이 있었는데 그것이 걱정이었다. 한웅이 나라를 위하여 곧 삼신을 가르치고 무리를 모아 엄밀히 제거하는 뜻이 들어 있는 맹세를 하게 하였다.
그 시절에는 족호(族號)가 한결 같지 않고, 풍속은 점차로 갈라져 본디 살던이(原住者)는 범족(虎族)이 되고 새로 옮은 이(新移者)는 곰족(熊族)이 되었으나, 범족의 성품은 탐욕하고 잔인하여 약탈을 일삼았으며, 곰족의 성품은 우직하고 오만하여 조화가 안되므로 비록 같은 굴에 살고 있었으나, 오래 될수록 멀어져, 일찍이 서로 빌려 주지 아니하고 서로 혼인도 하지 아니하며, 일마다 서로 화목치 못하여 다같이 하나로 뭉치기가 어려웠다.
6) 무리 교화
이에 이르러 웅녀왕이 한웅의 신성한 덕망을 듣고 무리를 거느리고 찾아와서 말하기를 “ 웨컨대 살자리 굴터를 주시어 같은 신선계를 지키는 백성이 되게 하소서”하므로 한웅이 허락하고 머무를 곳을 정하여 주니 아들을 낳았다.
범족은 끝내 깨닫지 못하므로 추방하여 버렸다. 사해(四海) 한족(桓族)의 일어남이 이에서 비롯하였다고 하였다.
조대기(朝代記: 세조의 수서목에 들어있다. 발해 때 편찬된 옛 조선시대의 역사책 <사화. 고기>)에 이르기를 “사람들이 많이 남으로 물자가 모자라서 근심스러웠으나,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서자부(庶子附)에 대인 한웅이 있었는데 여론(與論)을 깊이 듣고 지상에 광명세계를 만들고자 내려오기로 하였다.
때에 아바지가 금악(金岳)과 삼위(三危)와 태백(太伯)을 두루 살피고 태백이 가히 홍익인간(弘益人間) 할 수 있으므로 한웅에게 명하여 “이제 사람과 만물이 할 일이 이미 만들어졌으니 그대가 노고를 아끼지 말고 무리를 거느리고 몸소 그쪽으로 가서 나라를 열고 가르침을 베풀어 천신제를 주관하며, 부권을 세우고 서로 서로 의지하며 평화로 돌아가, 스승의 도리로서, 세상이 이치대로 되어가 자손 만대의 큰 법도가 되게 하라.” 하고 천부인(天符印)세 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한웅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처음에 태백산(神檀樹: 지금도 각 지방의 마을마다 마을제를 올리는 신단수가 있다. 말하자면 그 마을의 수호신단이다) 아래로 벌, 질병, 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순리대로 가르쳐 모든 사람을 최대 행복케 하였으니 이를 한웅천왕이라고 한다.
때에 곰족과 범족이 이웃에 살면서 항상 신단수에 빌고 또 한웅에게 청하기를 “예컨대 한얼계률을 받아 지키는 백성이 되게하소서” 하므로 한웅이 신비로운 주문으로 환골탈태하여 신비한 유법으로 영험을 얻게 하였다.
곧 그것들은 그것을 먹고 자유로이 “참(眞)”을 이루어 평등하게 만물을 구제 할 것이니,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아니하면 문득 선인(仙人)이 되어 천형(天形)의 대인(大人)이 되리라 하였다.
곰가와 범가의 양가(兩家)가 다 얻어먹고 3×7(21)일 동안 금기하고 스스로 수련하기에 힘써 곰족은 춥고 배고픔 음을 참고 천계를 잘 지켜 한웅과의 약속을 지키고 건강한 여자(仙女)의 모습을 얻었다.
범족은 속이고, 거만하고, 금기를 지키지 못하고, 한얼계율을 어기어 끝내 천업(天業)을 얻지 못 하였다. 이렇게 두 성이 같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곰씨의 여자들은 고집이 세고 어리석어 그와 함께 돌아 갈 사람이 없으므로 늘 신단수 아래에 떼 지어 모여 장막을 치고 아이배기를 주송하며 원하므로 환웅이 짐짓(假花) 한(桓)(이때에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를 한이라 하였다.)이 되어 관경을 얻고 그들과 혼인하여 자녀를 낳은지라 이로부터 여성들과 남성들이 점차로 서로 통혼하게 되었다.
그 후 단군 왕검이 있어 아사달, 지금의 송화강 하얼빈에 도읍을 세우고 비로소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삼한, 고리,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와 맥이 다 그 관할 지경이다.<고기 62>
7) 달력의 처음
배달한웅 때에 일곱 번 제사 올리는 달력이 있었다.
1회 날은 일신(日神)에게,(天神․한얼님)
2회 날은 월신(月神)에게,
3회 날은 수신(水神)에게,
4회 날은 화신(火神)에게,
5회 날은 금신(金神)에게,
6회 날은 목신(木神)에게,
7회 날은 토신(土神)에게
제사 지냈다.
그래서 역(曆)을 만드는 것은 이에서 비롯하였다. 그런데 옛적에는 세수(歲首-正月)를 계해(癸亥)(10월)로 썼고, 단군 구을(丘乙)(전 2099년)이 비로소 갑자를 써서 10월로써 상달을 삼았다(제 5세 단군 구을). 이것이 세수(歲首: 졸고 개천절과 국경일 참조.)다 육계(六癸)는 한웅천왕이 신지에게 명하여 짓게 한 바 계(癸)로써 수(首)를 삼은 것이니 계는 계(癸)(열다)요, 해(亥)(씨앗)는 핵(劾)이요, 일출(日出)의 뿌리이다.
신시 강림때는 산에는 길이 없고, 늪에는 배오 다리가 없었다. 새 짐승은 무리를 지었고 풀 나무는 마침내 길게 자랐다. 곳곳마다 새 짐승들이 무리를 짓고 있었다. 만물의 금수의 떼와 어우러져 서로 얽히어 놀고 까마까치의 둥지에 기어올라가 엿보고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그 피와 고기를 끼니로 삼고 옷을 짜고 먹거리를 갈고 심어 살림살이가 넉넉하였다. 이때를 말하여 지극히 덕성스런 세상(至德之世: 지극한 덕성으로 다스리는 세상)이라한다.
백성이 살면서 할 바를 알지 못하고, 가면서 갈 곳을 알지 못하고, 그 거동함은 묵묵하였고, 그 보는 것은 담담하였다. 배부르게 먹고 기뻐서 배를 두드리며 놀다가 해가 뜨면 다시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니, 한얼의 은택에 감회되어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 살았다.
후세에 내려와 무리가 더욱 번성하므로 소박한 것은 점점 없어져서 , 절름발이와 앉은뱅이까지도, 힘써 일을 해야만 하고, 늙은이마저 부지런히 일을 해도 살림 때문에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농사를 짓는 사람은 밭이랑을 다투고, 고기 잡는 사람은 갯 구역을 다투게 되니, 다투지 않고도 얻는 것은 장차 어려움을 면하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이와 같이 된 뒤로, 활을 만드니 새와 짐승은 숨어버리고, 그물을 치니 고기와 새우는 모습을 감추었다.
이에 칼과 창을 들고 갑옷을 입은 병정이 나타나 너와 내가 서로치며, 이빨을 갈고, 간과 뇌에 피를 흘려 땅에 바르니, 이 또한 한 얼의 뜻이 진실로 이런 것인가? 이에 가히 전쟁을 면할 수 없음을 알았다. 지금 그 뿌리를 따져 보면 대게 한 뿌리의 조상에서 나왔다.<고기 63>
그러나 땅은 이미 동서로 나뉘어져, 각기 한쪽을 차지하고, 국경은 아주 멀어 사람과 굴뚝 연기가 통하지 아니하여, 백성은 나만알고, 남은 알지 못하게 되었다. 일찍이 사냥하고 나무하는 일밖에는 힘든 일이 없었는데 수천년 후로 내려와 세상살이가 이렇게 변하였다.
중국은 서녘 땅의 보고(寶庫)가 되었다. 기름진 들판 천리에 바람만 불어 재끼고, 우리나라에서 그 지역에 옮겨가는 자가 침을 흘리고 찾아가니, 터백이 들도 또한 많이 모여 들였다.
이때에는 같으면 한당(黨)이 되고 다르면 원수가 되어 방패와 창이 서로 움직이니 이것이 실로 만고 전쟁의 시작이었다.
한웅천황으로부터 5세를 전하여 태우의 한웅이 있었다. 사람들에 묵념(黙念)을 가르쳐 청심(淸心), 조식(調息), 보정(保情)을 하게 하니, 이것이 곧 늙지 않는 꾀었다. 아들 12인이 있었는데 큰 아들을 다의 발 한웅이라 하고 막내를 태호(太嘷)라 하였다.
태호는 다시 호를 복희(伏羲)라 하였다. 어느 날 꿈에 삼신이 몸에 강령하여 만리를 다 알게 되고, 인하여 삼신산에 가서 한얼에 제사 지내고, 천하(天河)에서 괘도(卦圖)를 얻었으니, 세 끝은 이어졌고, 세 끝은 끊어졌는데(三絶三連) 그 자리를 이리저리 바꾸어 이치를 미루어보면 묘하게도 삼극을 품고 있어 변화가 무궁하였다.
밀기(密記)에 이르기를 복희는 배달한웅 때에 태어나서 우사(雨師)의 직을 세습하고 뒤에 청구와 낙랑을 경유하여 마침내 진(陣: 지금의 하남성 회양현 서남쪽)으로 옮겨 수인(燧人), 유소(有巢)와 함께 서토(西土)에서 그 이름이 달랐다.
후예들이 풍산(風山)(139. 치우천황, )에 살았으므로 역시 성이 풍(風)이며 뒤에 마침내 패(佩), 관(觀), 임(任), 기(己), 포(庖), 이(理), 사, 팽(彭)의 8성으로 나뉘었다. 지금 산서의 제수(濟水: 연수의 하류, 황하의 하류에서 산동쪽으로 갈려나간 분류로 보아진다.) 에 희족의 옛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임(任), 숙(宿), 수(須), 구(句), 수유(須臾) 등의 나라가 모두 복희의 후예들이라고 하였다.
대변경(大辯經)에 이르기를 복희는 배달조에 태어나서 우사직을 지내고 신룡의 변화를 보고 괘도를 지었으며 신시의 계해(癸亥) 역법을 고쳐 갑자(甲子)로 세수(歲首)를 삼았다. 여와(女蝸: 복희의 女弟.)는 복희의 제도를 이었다 주양이 구 문자에 인하여 비로소 육서를 전하였다.
복희의 능(陵)은 지금의 산동성 어대현 부산의 남쪽에 있다.
신농은 열산(烈山: 곧 여산 안휘숙현 서북. 열산은 일명 여산이기 때문에 신농을 여산씨라고도 한다.)에서 태어났는데 열산은 열수(列水)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신농은 소전의 아들이다. 소전과 소호(성은 己씨 이름은 지(摯) 호는 금천(金天)씨)는 다 고시씨의 방계후손이다.
그때의 백성은 정착하여 직업을 가졌는데, 점차 언덕을 만들고 穀, 痲, 藥, 石의 기술 또한 점점 갖추게 되어 , 낮에는 저자에 나가 서로 서로 맞바꾸고 돌아 왔다.
유망(신농왕조의 마지막 제 8세왕) 이 정치를 함에 이르러 급속히 여러 읍을 묶어 두 백성을 이끄니 흩어지는 사람이 많아 세상이 자못 어지러웠다 치우천왕이 신시의 열풍을 이어 백성과 더불어 다시 일어서니 능히
나라를 열어 삶을 알게되고 開天知生
토지를 열어 삶을 다스리고 開土理生
사람을 열어 삶을 숭상하고 開人崇生
하는 이치를 펴 나갔다. 만물을 중히 여기는 원리가 다 스스로 살피게끔 되었으니
덕(德)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고,
혜(慧)가 마땅치 않는 것이 없고,
힘(力)이 가추지 않는 일이 없게
되었다. 곧 백성과 더불어 범족을 나누어 하삭(河朔: 황하 이북의 지역)에 가서 살게 하였다.
안으로는 병사를 양성하고, 밖으로는 시운의 변화를 살피다가, 유망의 정치가 쇠약하여지나 곧 군사를 일으켜 출정하였다. 형제집안에서 81인을 뽑아 모든 군사의 사령이 되게 하고, 갈로산의 금을 캐어 검, 개, 모, 극, 대궁, 호시(화살로 쓰기 적합한 나무인 호나무로 만든 화살)를 만들어 하나로 아울러 간추렸다.
탁록을 정벌하고 구혼에 올라 연이어 승첩하니, 대세가 질풍과 같았다. 만군을 승복시키니 위엄이 천하에 떨쳤다. 한 해에 무릇 아홉 제후의 땅을 무찔러 버렸다.
다시 옹호산(雍狐山: 지금 섬서성에 옹산이 있다.)나아가 구야로써 수금(水金)과 석금(石金)을 발굴하여 예(芮)의 창과 옹호산의 갈래창을 만들고, 다시 군사를 정비하여 몸소 군사를 이끌고 양수로 출진하여, 공상(공상: 진유현 유망의 도읍지)에 진격하니 공상은 지금의 진류로 유망이 도읍했던 곳이다.<고기 64>
이해에 12제후의 나라를 아울러 병탄하니 시체가 들에 가득 차게 되었다. 서토의 백성이 담이 서늘하여, 도망하여 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때에 유망이 소호와 더불어 크게 싸웠다.
또 크게 안개를 만들어 적의 장병으로 하여금 혼미케하여 스스로 혼란에 허우적거리게 하니 소호가 크게 패하여 급히 달아나 버렸다. 치우천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 천하가 태평하기를 빌고 다시 출정하여 탁록을 포위하고 쳐들어가서 일거에 멸망시켜버렸다. 관자(관자)가 소위 [천하의 임금이 싸움에서 한번 노하니 시체가 들에 가득하였다] 고 한 것은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이때에 공손헌원(공손: 황제(皇帝)의 성)이 있었으니 토착민의 괴수였다 비로소 치우천왕이 공상에 입성하여 새 정치를 크게 베푼다는 말을 듣고 감히 스스로 천자가 되겠다는 뜻을 품었다.
곧 병마를 크게 일으켜 와서 싸우고자 하므로 천왕이 먼저 항복한 장군 소호를 보내어 탁록을 포위하고 쳐들어가 멸망시켜버렸다.
그러나 오히려 헌원이 굴복하지 아니하고 감히 1백번을 싸우니, 천왕이 9군에게 명령을 내려 네 길로 나눠 출전하게 하고 스스로 기마병 3천을 이끌고 곧바로 탁록의 유웅의 들에서 헌원과 연속 싸웠다.
군사를 풀어 사방으로 조여 들어가 참살하였으나 승산이 없으므로, 또 크게 안개를 만들어 지척을 가릴 수 없게 하고 전진을 독려하니, 적군이 곧 마음은 다급하고 손을 떨며 달아나 숨고, 명령을 듣지 않으므로 1백리 안에 병마를 볼 수가 없었다.
이 때에 기주와 연주 회대의 땅이 다 점거 되어 탁록에는 성을, 회대에는 집을 세우니 헌원황제의 무리가 다 신하로 자칭하고 조공을 바쳤다
대게 당시 서토의 사람들은 헛되이 활과 돌의 힘만을 믿고 개갑( 갑옷)의 용범과 가치를 알지 못하였으며 치우천왕의 법력이 높고 강하여 마음은 놀라고, 담은 서늘하여 전투마다 번번히 참패하였다.<고기 65>
8. 무기의 발명
운급(운(雲)급(笈))의 헌원기(헌(軒)원(轅)기(記))에 이르기를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으니, 그때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머리는 구리요 몸은 쇠로 되었다고 한 것은 역시 가히 그 낭패가 심하였음을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치우천왕이 더욱 군대를 정비하여 사면으로 진격한지 10년간에 헌원과 더불어 73회를 싸웠으나 장수들은 피곤한 기색이 없고 군사들은 물러가지 않았다.
뒤에 헌원이 여러 차례 싸워 치우에게 패하고도 더욱 군사를 크게 일으키고 우리 천왕을 본받아 무기를 많이 만들고 지남차(指南車)를 제작하여 감히 전의가 생기지 못하게 좇아 습격하여 그들과 더불어 크게 싸워 일진(一陣)을 마구 몰살시킨 연후에야 바야흐로 싸움이 그쳤다.
이 싸움에서 우리의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공을 급히 다투다가 불행하게도 진중에서 죽었다. 사기(史記)에 소위“ 치우를 금살(擒殺)하였다.”고 한 것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고기 65> (제 1세 단국한검 38쪽: 치우의 선봉이 불행하게 패몰하였다.)
천왕이 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새로 이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만들어 진(陣)을 이루고 연합하여 진격하니 적진이 마침내 항거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정예군을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으로는 예탁의 땅을 지키고 동쪽으로는 회수와 대산을 취하여 성읍을 만들어 헌원이 동침(東侵)하는 길을 지키게 하였다.
치우천왕이 가신지 수천년이 흘렀으나 오히려 만장(萬丈)의 광렬(光烈)은 능히 후인의 감명을 일으키게 하였다.
지금 한서(漢書)의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그 능이 산동 동평군 수장현의 궐향성중에 있으며 높이가 7장(丈)인데 진한(秦漢) 시절에, 주민들이 오히려 항상 10월에 그를 제사지냈다고 한다. 그때마다 반드시 붉은 기(旗)를 내뿜었는데 진홍색의 베바닥과 같았으며 그를 말하여 치우기(蚩尤旗)라고 하였다. (치우와 진한시대라면 약 2500년 뒤인데 10월 치우제사 때 마다 진홍색의 치우기를 내뿜었다고 한다.)
그의 영웅적인 혼(婚)과 씩씩한 백(魄)은 스스로 보통의 사람과는 아주 달리 2천 5백년을 지내고도 오히려 다하지 아니하였을 따름 이었다.
헌원은 이로써 쓸쓸해지고, 유망 또한 따라서 영원히 추락해 버렸다. 치우천왕의 남은 충열이 세습하여 능이 떨치고, 다 유주와 청주에 있어 명성과 위엄이 떨어지지 아니하므로 헌원 이래로, 치우가 세상을 뜰 때까지 편안하지 못하였다.
사기(史記)에 소위 “산을 헤쳐 길을 내도 편안하게 살지 못하고 탁록하(𣵠鹿河)에 읍을 정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느라 정한 곳이 없었으며 군사를 시켜 진영(陣營)을 지키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대게 그 전긍(戰肯)의 뜻을 역력히 볼 수 가 있는 것이다.<고기 66>
상서(尙書)의 여형(呂刑)에도 역시 이르기를
만약 옛 가르침이 있다면 오직 치우가 난을 일으킨다. 고 하였다.
저들의 두려움이 탈기가 되어 세상이 그 가르침을 전하고 후인을 위하여 경계한 것이다. 역시 심한 것이다. 그 후 3백년은 무사하였으며 오직 전욱(顓頊)과 싸워 그를 깨뜨려 버렸다.<고기 66>
대게 신시 개천(開天)으로부터 18세 1565년을 지나 비로소 단군왕검이 웅씨의 비왕(裨王)이 되었다가 마침내 신시의 대를 이어 구역(九域)을 통일하고 관경(菅境: 관할하는 국경)을 삼한으로 나누었다. 이를 일러 단군조선이라 한다. 하였다.
<고기 66>
<삼한비기(三韓秘記)>에 이르기를 복희가 이미 서쪽 변방에 봉함을 얻어 자리에 올라. 정성을 다하므로 방패와 창을 쓰지 않고도 지역이 승복되었다. 그 후에 갈고(曷古) 한웅(제 10세)이 있어 신농(神農)의 나라와 국경을 그어 정리하고 공상(空桑) 이동을 우리에게 속하게 하였다.
또 수대를 전하여 자오지(慈烏支) 한웅에 이르렀다. 신기한 용기가 뛰어나고 그 머리와 몸은 구리와 쇠였으며 능히 안개를 짓고 구야(九冶: 아홉 번 쇠를 달구는 제련 과정의 시설을 말함.)를 만들어 주철을 채광하여 병기를 만들어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만들므로 천하가 그를 두려워하여 함께 받들어 천제자(天帝子) 치우가 되었다. 무릇 치우란 세속에서 뇌성과 비를 말하는 것이며 크게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이다.
치우천왕이 신농이 쇠퇴하는 것을 보고 큰 뜻을 품고 여러 차례 서쪽에서 천병(天兵)을 일으켜 진격하여 회수, 대산 사이를 점거하였다. 헌원黃帝가 있는 곳에 이르러, 직접 탑록의 들에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은 후에 오장군(五將軍)을 보내어 서쪽으로 고신(高辛:지금의 하남성 언사현)을 쳐서 공을 세우게 하였다.
고 하였다. <대변경(大辯經)>에 이르기를
배달신시씨는 전(佺)으로써 수계(修戒)하여 사람을 교화하고 제천하였다. 이른바 전(佺)은 사람이 스스로 전 한 바를 따라 능히 통성하여 진을 이루는 것이다.
청구씨는 선으로써 설법하여 사람을 교화하고 관경하였다. 이른바 선은 사람이 스스로 산한 바를 따라 능히 지명(知命)하여 선(善)을 넓히는 것이다.
조선(朝鮮)씨는 종(倧)으로써 건왕(建王)하여 사람을 교화하고 책화(責禍)하였다. 이른바 종(倧)은 사람이 스스로 종(宗)한 바를 따라 능히 보정(保情)하여 미(美)를 건지(濟)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佺)은 허(虛)하면서 천(天)에 본(本)을 두고
선(仙)은 명(明)하면서 지(地)에 본(本)을 두고
종(倧)은 건(健)하면서 인(人)에 본(本)을 둔다.
<거기 67>
고 하였다. 주에 이르기를
한인(桓因)을 또한 천제(天帝)라고 한다. 천(天)은 곧 대(大)요 일(一)이다.
한웅(桓雄)을 또한 천왕(天王)이라 한다. 왕(王)은 곧 황(皇)이요 제(帝)다.
단군(檀君)을 또한 천군(天君)이라 한다. 군(君)은 곧 제사(祭祀)의 長이다. 왕검은 또한 감군이요 국열을 관할하는 장이다.
그러므로
한울로부터의 광명을 한(桓)이라 하고
땅으로부터의 광명을 단(檀)이라 하고
소위 한(桓)은 곧 구황(九皇)을 말하는 것이다. 한(韓) 또한 곧 대(大)다.
삼한을 풍백, 우사, 운사라 한다.
가(加)는 곧(家)다. 오가(五加)는
우가 주곡 (牛加主穀),
마가 주명 (馬加主命),
구가 주형 (狗加主刑),
저가 주병 (豬加主病),
양가 주선악(羊加 主善惡)
이라 한다. 민(民)은 64가 있다. 도(徒)는 3천이 있다.
견왕이세(遣往理世)를 개천(開天)이라 한다.
개천은 그러므로 능히 뭇것을 창조한다. 이것을 허의 동체이다.
탐구인세(貪求人世)를 개인(開人)이라 한다.
개인은 그러므로 능히 인사(人事)를 순환(循環)한다. 이것은 혼(魂)의 구연(俱衍)이다.
치산통로(治山通路)를 개지(開地)라고 한다.
개지는 그러므로 능히 시무(時務)를 개화(開化)한다. 이것은 지(智)의 쌍수(雙修)다.
고 하였다.
<삼한밀기>에 이르기를
“ 대게 백두 큰 산은 큰 벌판 중에 걸쳐 있고 가로는 1천리에 뻗쳐 있으며 높이는 2백리나 솟아 있다. 웅장한 위용은 높이 빼어나 꿈틀거리고 꾸불꾸불하니 배달천국의 주산이다. 신인의 오르내림이 실로 이곳에서 시작하였다. 어찌 구구히 묘향산이 다만 서쪽으로 달리다가, 낭림의 맥에 매달려, 이 같은 성스러운 일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세속에 이미 묘향산을 태백산이라고 한 것은 곧 그 보는 눈이 다만 동압록수 이남 한 구역의 땅에 국한했기 때문이요 문득 산의 조종(祖宗)은 곤륜이라고 부르짖고 소중화가 되는 것을 기뻐하고 스스로 달콤해져서 그 조공 바치는 사신이 북행하는 것이 여러 백년이 지났어도 그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하였으니, 이것은 곧 책이 없어진 까닭이요 길게 한 숨 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동방의 여러 산을 태백이라고 이름한 것이 많으니 세속에 영변 묘향산으로써 좇아 그것을 당(당)한 것은 실로 일연씨의 <삼국유사>의설에 연유한 것으로써 저들의 눈구멍이 콩도 같고 팥도 같으니 어찌 족히 그들과 더불어 논의할 수 있겠는가.
지금 백두산은 정상에 큰 못이 있는데 주위는 8십리가 되고 압록, 송화, 두만의 모든 강이 다 여기에서 발원하니 천지라고 한다.
곧 신시씨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다. 묘향산은 일찍이 조그마한 웅덩이 하나도 없었다. 또 한웅천왕이 처음으로 그곳에 내려온 것도 아니다 태백이라고 논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고 하였다. <고기 68>.
9. 삼신산 불노초
위서(魏書)의 물길전(勿吉傳)
에 이르기를
나라의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386년 道武등극)에서는 태백(太白)이라고 하였다. 범과 표범과 곰과 승냥이가 있는데 사람을 해치지 아니하므로 사람도 산에 올라 오줌을 누는 자가 없으므로 동물들이 성하였다고 하였다.
한웅천황의 첫 내림이 이미 이산에서 있었으며, 또 이 산은 신주(神州) 흥왕(興王)의 영지(靈地)인 즉 수두제천(蘇塗祭天)의 옛 풍속은 반드시 이 산에서 시작 되었으며 자고로 한족의 높고 거룩함은 또한 이 산에서 시작 되였으니 떳떳한 것이다.
또 그 금수가 다 신화에 젖어 편안하게 이 산에서 살며 일찍이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으므로 사람 또한 감히 산에 올라 오줌을 누어서 신을 모독하지 아니하므로 항상 만세 토록 공경하는 징표가 되었다.
대게 우리 한족은 다 신시에서 나와서 3천도단의 장막에 이끌린 바가 되었는데 후세로 내려와 비록 여러 씨족으로 나누였지만 실은 한단(桓檀) 한뿌리의 후예들인 것이다. <고기 68>
한웅천왕께서 강립하신 공덕은 오래도록 외어 잊혀지지 아니하였으므로 앞 임금과 앞 무리들이 그 삼신제를 올리는 성지를 가리켜 삼신산(三神山)이라고 하였음이 또한 틀림이 없는 것이다.
대게 신시 이후로 신성한 다스림과 가르침은 점점 해를 다투어 더욱 회복되고 갈수록 깊어졌다. 나라세우고 세상 다스리는 근본은 사람과 나라와 더불어 매우 달랐다.
그 신성한 풍속은 멀리 천하에 전파되어 천하 만방의 사람들이 신리와 성화를 숭모하여 반드시 삼신을 높여 받들기에 이르러 동북신명사(東北神明舍)라는 호칭이 있기까지 되었는데 급기야는 말류에 폐단이 젖어들어 점점 요사스러움에 빠지고 갈수록 점점 더 괴상하여져서 괴상무지의 설이 소위 연나라 제나라 해상(海上)의 괴이한 방사(方士 : 신선술을 닦는 사람)에서 번잡하게 나돌았다.
대게 그 땅은 구한의 신시와 더불어 서로 접하여 있으므로 백성과 산물의 교류가 특히 성하였는데, 제 나름으로 소문을 듣고 놀라고 신기하게 생각하고, 또 다시 미루어 덧붙여 말하기를 삼신산은 발해중에 있는 봉래, 방장, 영주라고 운운하여 세상을 현혹시키는 주장을 하였다.
그 때 사람들은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면 바다가 끝이 없으므로 발해의 가운데에 다시 다른 바다가 있는 것을 모르고 문득 말하기를 삼신산은 발해 가운데에 있다고 운운하였으나 실인즉 삼신산은 각각 삼도산(三島山)에 있는 것이 아니다.
봉래(蓬萊)는 쑥이 무성하게 자라는 묵정밭 곧 천왕이 내려온 곳이요, 방장(方丈)은 사방이 일장(一丈)인 각(閣) 즉 수두(蘇塗)가 있는 곳이며, 영주(瀛注)는 못이 섬처럼 둘러싼 모양 즉 천지가 나오는 곳이니 이것들을 말하여 삼신산이라고 하였다. 삼신은 곧 일상제(一上帝)인 것이다.
그런데 더욱 그 황당무괴한 자는 삼신의 본말을 알지도 못하면서 금강(金剛)을 봉래, 지리(智異)를 방장, 한나(漢拏)를 영주라고 하였다. <고기 69>
사기봉선서(史記封禪書)에 이르기를
그것은 발해의 가운데 있으며 일찍이 가 본 사람이 전하기를 모든 선인(仙人)과 불사약(不死藥)이 있고, 그곳 것들은 짐승은 다 희고 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지었다고 운운하였다.
또 선가서(仙家書)에 이르기를 “삼신산에 환혼불로(還魂不老)등의 풀이 있는데 일명 진단(眞丹)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지금 백두산에는 자고로 흰 사슴, 흰 꿩 ,혹은 흰 매 등속이 있다.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조수(鳥獸)와 초목이 다 하얗다”고 하였다. 또 백두산 일대에 산삼(山蔘)이 많이 나는데 세인이 그를 비겨 불로초(不老草)라 하고 산 사람들이 캐려고 할 때는 반드시 먼저 목욕재계하고 산에 제사를 지낸 후에야 감히 출발하였으며 그 환혼불로라는 이름 또한 착상이 여기에서 근원한 것이다.
세기(世紀)에 이르기를 “단군 오사구(五斯丘)(제4세 단군) 임금은 원년에 북녘으로 순행하여 신영한 풀을 얻었다.”고 한 것은 이것이요 또한 징험(徵驗)하는 것이다.<고기 69. 70>
10월 제천은 마침내 천하 만세의 전해지는 풍속이 되었다. 이는 곧 신주(동방 우리나라를 말함) 특유의 성전(盛典)이며 외방(外邦)에 비할 바가 아니다.
태백산은 홀로 곤륜의 이름을 눌렸으며 역시 그 이유를 가지고 있다. 옛날의 삼신산은 곧 태백산이다. 또한 지금의 백두산이다.
대게 옛날 신시의 인문교화가 근세에 이르러 비록 튼튼하게 행하여지지 못하였으나, 천경(天經)과 신고(神誥)가 오히려 후세에 전하여 나라 안의 모든 남녀가 역시 다 말없는 가운데 높이 받들어졌다. 곧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이 주관하는 바라고 말하며, 어린아이 10세 이내의 신명(身命), 안위(安危) 지우(智愚), 준용(俊庸)을 다 삼신에게 맡겼다. 무릇 삼신은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만든 천일신(天一神)이다. 사마상여가 한왕 유철에게 말하기를 “ 폐하 겸양하여 함부로 하지 말아야 삼신의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했는데 위소가 쓴 주(注)에서는 “삼신상제(三神上帝)의 설은 일찍이 저들의 나라에 전파된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진역유기(震域留記)에 이르기를 [제(齊: 기원전 11세기에 건국, 성은 姜(太公)씨. 땅은 지금의 산동성 북녘에서 산동성 동녘까지 확장, 서울은 관구 . 서기전 386년에 全씨에게 찬탈당함.)나라의 풍속에 팔신제가 있으니 8신은 천주(天主), 지주(地主), 병주(兵主), 양주(陽主), 음주(陰主), 월주(月主), 일주(日主), 사시주(四時主)다. 천(天)은 음(陰)을 좋아하므로 그것에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높은 산의 아래 작은 산의 위에서 지냈다. 곧 태백산록에서 제천하던 유법이다.
지(地)는 양(陽)을 귀하게 여기므로 그것에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못 가운데의 모난 언덕(方丘)(울산 언양에 방구대가 지금도 있다.)에서 지냈다. 이것 역시 참성단에서 제천하던 습속이었다. 천주(天主)는 삼신을 제사하고 병주(兵主)는 치우를 제사 하였다. 삼신은 천지 만물의 조(祖)요, 치우는 만고 무신(武神) 용강(勇强)의 조로 큰 안개를 만들고, 물과 불을 몰아내며 또 만고 도술(道術)의 종(宗)으로 바람을 불게 하고 비를 부르는 만신이다.
이로써 대시의 세상에 항상 천하 융사(戎事)의 주인이었다 해대(海岱)의 땅은 이미 엄, 람, 양, 개, 우, 내, 서, 회 8족이 살았으므로 팔신(八神)의 설이 8족에서 싹이 터서 당시에 성행하였다.
유방(留邦)은 비록 이족(夷族) 계통은 아니었으나 풍패(豊沛)에서 기병(起兵)하여 풍패의 풍속대로 치우를 제사 지냈으므로 유방 또한 그 풍속으로 인하여 치우를 제사지내면서 희생의 피를 북에 바르고 북을 치며 깃발을 날렸다.
< 고기 71>
마침내 10월에 이르러 패(沛)강의 상류에서 제후와 더불어 함양(함양:진나라의 서울)을 평정하고 한왕(漢王)이 되었으므로 10월로써 세수(歲首)를 삼았다. 이것은 비록 진(秦)의 정삭(正朔)을 이은 것이지만 역시 동횡태일( 단군조선의 임금 곧 단군을 지칭함)을 높이고 치우를 제사 지내는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4년 후에 이미 진나라 전역이 평정되었으므로 축관에게 명하여 장안에 치우의 사당을 세웠다. 그가 치우를 공경하는 마음이 독실한 것이 이와 같았다고 하였다. <고기 71>
진천문지(진천문지: 중국 24사의 하나인 진서의 천문지를 말함.)는 치우의 기(旗)는 혜성(慧星)과 같았으며 뒷모양을 꾸부렸다. 기가 보이는 곳의 바로 아래에는 병사가 있었다. 고 말하였으니 곧 치우천왕이 올라가 별이 된 것이다.
통지(通志: 문헌비고와 더불어 삼통이라는 책)의 씨족략에 “치씨는 치우씨의 후손이다.”고 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창힐과 고신 역시 모두 치우씨의 후예이다 대극성에서 출생하여 산동 회북으로 이사하였다고 하였다. 대게 치우천왕은 영풍과 응열이 먼 지역의 깊은 곳까지 전파되었음을 이로 미루어 알 수가 있다. <고기 71>
연제(燕齊)의 선비들은 신비하고 기이한 속임수의 설에 깊이 빠져들었으며 또한 삼신상의 숭상하였다. 제의 위선과 연의 소시절부터 사신을 보내어 삼신산을 구하였다. 진한 때의 송무기), 정백교, 극상, 선문자고는 최후의 무리인데 연인(燕人)들이다.
문성오리공(文成伍利公)과 손경, 신공(申公)의 종속은 다 제나라 사람들이다. 옛날의 여상(呂尙: 강태공을 말함.) 역시 치우씨의 후예다. 그러므로 역시 성이 강(姜)이다. 대개 치우씨는 강수(姜水)에서 살면서 아들을 두어, 다 강씨가 되었다. 강태공이 제나라를 다스리자 먼저 도술을 닦고 천제지(天祭池)에서 제천을 올렸다. 또한 제나라에 봉함을 받으니 이 땅에 8신의 풍속은 더욱 성하였다.<고기 71>
후세에 그 땅에서 도술을 썩 좋아하는 사람이 신선 황로(黃老)와 더불어 자주 만나 부연(敷演)하고 그것을 다듬으니 이 또한 강태공이 그 풍속을 도운 것이다.
일찍이 음부경(陰符經) 주를 짓고 자부(紫府)선생이 지은 삼황내문(三皇內文)의 뜻을 조술(祖述 : 선인의 뜻을 이어 서술함)하였으니 연, 제의 선비들이 어찌 괴이한 현혹설을 싫어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 황제중경(黃帝中經)의 서문이 태자 부루(夫婁)에게서 나와서 우사공(禹司空)에게 그것이 전해지고 후에 다시 주왕(紂王)으로 전하여 기자(箕子)가 진술한 홍범(洪範)이 되었으니 역시 바로 그것은 황제 중경 오행치수의 설인즉 대게 그 학문의 근본은 신시(神市) 구정균전(邱井均田)(구정균전: 구획을 말하는데, 邱는 16정, 井은 900묘)의 유법인 것이다. <고기 72>
밀기(密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도사(徒死)(무리의 죽음)을 하면 출향하지 아니하고 한곳에 합장하여 지석(支石)을 만들어 표(表)를 하였다. 뒤에 변하여 단(壇) 만들고 지석단(支石壇: 고인돌)이라 칭하였다. 또 한 제석단(祭石壇)이라고도 하였다.
산정(山頂)에 구덩이를 파서 성단(城壇)이 된 것을 천단(天壇)이라 하였으며 산골에 나무를 심어 토단(土壇)을 이룬 것을 신단(神壇)이라 하였다. 지금 승도(僧徒)들이 혼돈하여 제석(帝釋)을 가지고 단(壇)이라고 칭한 것은 옛 것이 아니다.
삼신을 호수(護守)하고 인명을 다스리는 자를 삼시랑(三侍郞)이라고 하였다. 본래는 삼신시종지랑(三神侍從之郞)이었다. 삼랑은 배달신(倍達神)이었다. 역시 삼신 수호의 관(官)을 세습(世襲)하였다고 하였다. <고기 72>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에 또한 이르기를 삼랑은 배달신이다.
심어 가꾸고 거두어 재물을 맡은 이를 업(業)이라 하고
은혜로서 따르게 위복(威福 : 은혜를 베풀어 복종하게함) 가르치는 이를 낭(郎)이라하고
무리들이 공을 이루게하는 이를 백(伯)이라 하였다.
곧 옛 발신도(發神道: 밝신도를 말한 이두표기다)이다.
능히 강령예언(降靈豫言)하여 신의 이치를 누누이 적중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 강화에는 삼랑성(三郞城)이 있다. 성은 곧 삼랑들이 자면서 지키는 곳이다. 낭(郎)은 곧 삼신의 수호의 관직이다. 불상(佛像)이 처음으로 들어와 절을 짓고 대웅(대웅)이라 하였다. 이는 승도들이 불교이전의 고사(古事)를 답습하여 그 대로 부르는 것이지 본래는 불가(佛家)의 말이 아니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승도(僧徒)와 유생(儒生)은 다 낭가(郎家)에 예속되었다. 이로써 가히 알 것이다고 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옛날에 무리들이 계곡에 흩어져 살므로 장사(葬事)에 정한 땅이 없었다.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모두 수혈(수직으로 파 내려간 구덩이)에 옮겨서 천신(天神)과 같이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뒤에 혹 평지에 장사지내고 박달나무, 버드나무, 소나무, 잣나무를 돌려 심어, 무덤을 식별할 수 있게 하였다.(요사이도 묘소 둘레에 소나무, 전나무, 백일홍, 잣나무, 박달나무들을 표나게 둔다) 이처럼 신시의 세상에는 묘의 제도가 없었는데 중고에 이르러 나라가 강해지고 양생을 잘해서 씩씩해지자 죽은 자를 보낼 때도 역시 사치스럽게 제사 하였다. 묘제의 예도 자못 융성하였다.
혹은 둥글게, 혹은 네모지게 하여 지극히 사치스럽게 꾸몄으며 높고, 크고, 좁고, 모나고, 반듯한 것에도 법규가 있었다. 안벽과 밖을 고르게 정리하였으며 또 교묘하게 하였다. 고구려 대에 능묘의 규제가 천하의 으뜸이 되었다.(고구려 집안, 환도성에 돌로 쌓은 네모난 묘군이 평지에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