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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 '나귀에게 차이다.'
조주선사가 시중(市衆)하여 말했다.
“시비가 있기만 하면 어지러이 본마음을 잃는다고 했는데, 여기에 대답할 말이
있는가?”
한 스님이 나와서 사미(沙彌)의 뺨을 한 대 때리고 휙 나가버리자, 조주선사는 방장실로 돌아갔다. 다음날이 되어 시자에게 물었다.
“어제 그 스님은 어디 있느냐?”
“그때 바로 가버렸습니다.”
“30년이나 말을 탄 주제에 나귀한테 차이다니.”
여기서 조주가 설한 법문(法文)은 위 334번에서 나온 내용과 같다. ‘마음속에 시비가 일어나면 곧 생각이 어지러워져서 본심을 잃어버린다. 여기에 대하여 누가 한마디 하겠는가?’
위 문답에서는 한 스님이 시자를 툭 치면서 "어째서 큰스님에게 대답하지 않는가?"하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구라도 나서 보라는 조주의 말씀에 한 스님이 갓 불문에 들어온 어린 사미의 뺨을 때리고는 그냥 나가버렸다.
그러자 조주는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나중에 다시 응대하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어린 시자만 괜히 대낮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다.
다음날 시자에게 “어제 그 스님은 어디에 있느냐?” 물으니, “그때 바로 가버렸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조주는 허탈해하면서, “내가 30년 동안 말을 타왔는데 이번에는 이 당나귀한테 차였구나.” 했다.
조주 자신도 새파란 후배에게 한 방 맞을 날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스님이 서릿발 같은 법을 씀에 조주도 얼떨결에 주장자를 반쯤 놓쳐버린 것이다. ‘그 당나귀 뒤꿈치에 입이 달렸다’고나 할까?
옛날에 임제선사가 입적하기 전 제자인 삼성 혜연선사에게 법을 물려줄 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정법안장을 멸하지 않게 하라” 하니, 삼성이 “어찌 감히 화상의 정법안장을 멸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임제가 “혹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하니, 삼성이 얼른 악! 소리를 지르니, 임제가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먼 나귀에 의해 멸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라고 했다.
조주의 당나귀와 임제의 당나귀는 같은가, 다른가? 말은 누구이고 당나귀는 누구를 말하는가? '말, 당나귀, 소는 모두 축생이다.'
342. '이렇지 않게 온다면’
한 스님이 물었다.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큰 스님께서는 맞이해 주십니까?”
“맞이해 준다.”
“이렇지 않게 오는 사람도 큰스님은 맞이해 주십니까?”
“맞이해 준다.”
“이렇게 오면 큰스님의 응대에 따르겠습니다만 이렇지 않게 오는 경우에 어떻게 맞이해 줍니까?”
“그만, 그만! 더 말하지 말라! 내 법은 미묘하여 헤아리기 어렵다.”
한 수행자가 이상한 질문을 하고 있다.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잘 맞이해 주십니까?” 조주에게 저처럼 이렇게 가르침을 구하려 찾아오는 사람을 잘 응대해 주느냐고 묻는다. 조주는 당연히 '잘 맞이해 준다.'고 말한다.
다시 묻기를, “이렇지 않게 오는 사람도 큰스님은 맞이해 주십니까?” 이렇지 않게 찾아오는 사람을 맞이해 준다 라고? 거참, 질문을 교묘하게 비틀어서 선사를 곤경에 빠뜨리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는데, 그 의미는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도 조주는 친절하게 '잘 맞이해 준다.'고 말한다.
그러자 이 수행자는 마치 무슨 꼬투리라도 잡은 것처럼 조주를 다그친다. "이렇게 찾아오는 사람은 저처럼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따르겠습니다만, 이렇지 않게 찾아오는 사람에게도 어떻게 가르침을 베푼다 하십니까?” 자신이 엉터리로 질문을 하고선, 그 허물을 남에게 덮어 씌우고 있는 것이다.
조주는 간단히 대답한다. "그만 그만, 말할 수 없다. 내 법은 미묘해서 헤아리기 어렵다.”이 말은 법화경 방편품에서 석가모니가 사리불에게 설한 것과 같으니, "나의 법은 미묘하여 생각하기 어려우니 여러 증상만자(增上慢者, 제 잘난 체하는 거만한 사람)이 듣는다면 반드시 공경하지 않고 믿지 않으리라"고 했다. 조주의 법어도 헤아릴 수 없이 비밀스러워 알아듣는다 해도 믿을 자는 극소수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문답에 대하여, 우리나라 조선 초기의 고승인 구곡각운(龜谷覺雲)선사는 염송설화에서 해설하기를, '이렇게 찾아옴은 지금 현재(今時)를 말함이요, 이렇지 않게 찾아옴은 본분(本分)만을 지키는 사람이다' 라고 지적했다. ‘이렇지 않게 찾아옴’은 말과 생각을 떠난 자리에서만 알아챌 수 있다는 말씀인데, 토끼의 뿔,석녀의 자식 같은, 법이 아닌 것(非法)도 결국 분별없는 마음 하나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그 수행자는 실제 이런 이치를 전혀 모르고 말이 성립되지 않는 말을 했지만 조주는 항상 본분사로만 응대할 수 있어 어렵지 않게'이렇지 않게 찾아오는 사람도잘 맞이해 준다.'고 응답한 것이다.
우리 마음의 근본 바탕을 확실히 깨치지 못한 사람은 이런 법의 미묘함을 정식(情識, 알음알이)으로는 전혀 헤아릴 수 없으니 오직 마음으로 의심하여 투철하게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래야 이 스님처럼 '어떻게 이렇지 않게 오는 자를 잘 응대해 준다고 말하느냐?' 라고 생떼를 쓰지 않을 것이다.
343. '한 개 이빨로 차근차근 씹는다’
진부의 대왕(鎭府大王)이 물었다.
“큰스님께서는 연세가 높으신데 치아는 몇 개나 남아 있습니까?”
“어금니 한 개 뿐입니다.”
“그럼 음식을 어떻게 씹으십니까?”
“한 개 뿐이지만 차근차근 씹습니다.”
진부의 대왕(鎭府大王)은 조주가 당시 살았던 조(曹)나라의 왕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曹操)가 태어난 곳이 바로 조나라이다. 진부대왕은 조주선사를 매우 존경하여 관음원을 여러 번 방문한 것 같다. 오늘은 조주가 이빨이 어금니 하나만 남았다 하니, 대왕이 측은하다는 듯이 음식물을 어떻게 씹는지 묻는다.
"음식을 어떻게 씹으십니까?”
“한 개 뿐이지만 차근차근씹습니다.”
항상 본분사로만 응대하는 조주가 어금니를 두고 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어금니 한 개로 음식을 차근차근 씹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여기서 느낌이 문득 와야 한다. 항상 무심(無心)의 상태에서 하나 뿐인 마음으로 수행자들이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 사람, 한 사람 세밀하게 살펴 근본 바탕으로 응대하는 게 조주의 큰 사명이다. 조주의 모든 언행은 깨달음으로 귀결되는 것을 알아채야 한다.
344. '우리의 보배구슬'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학인의 보배 구슬(學人珠) 입니까?”
“큰 소리로 물어라.”
그러자 그 스님이 절을 했는데 조주선사가 말했다.
“그대는 물을 줄도 모르는구나. 크고 작음은 묻지 않겠지만 무엇이 학인의 보배
구슬입니까? 하고 왜 묻지 못하느냐?”
그 스님이 다시 묻자 선사가 말했다.
“하마터면 이 놈을 놓칠 뻔했구나(洎合放過者漢)!"
'학인의 보배구슬(學人寶珠).'
중생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는 마니주라고 하는 우리 마음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뭣꼬? "큰소리로 물어라!" 조주는 더 큰 소리로 외친다. 어떤 뜻으로 이렇게 외치는가? 큰 소리로 묻는 그 친구가 바로 보배 구슬이란 것을 조주는 즉시 가르쳐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보배 구슬이다. 지금 큰 소리로 '무엇이 저의 보배 구슬입니까?'하고 한번 외쳐 보라. 외치는 그 보배구슬을 콱 잡아채야 한다. 온몸과 마음으로 체험해야 한다. 그렇게 외쳤는데도 아직 느낌이 오지 않는가?
그러면 이 스님처럼 자기 성품에 들어있는 부처에게 예배한다 생각하고, 절을 10번 한 후에 다시 외쳐 보라. '무엇이 저의 보배 구슬입니까?' 반복, 반복하면서 여기서 확 깨달으라. 더 이상 시일을 끌 필요가 없다. 바로 여러분의 주인공이다.
조주도 나처럼 반복하도록 시킨다. "크고 작음은 묻지 않겠지만, 무엇이 학인의보배구슬입니까, 하고 왜 묻지 못하느냐?” 이것처럼 반복도 해보라. 이렇게 묻는 이것은 무엇인가? 크게 의심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계속 물어야 한다.
조주는 다시 말하기를, "(그대가 물어보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이 놈을 잊어버릴 뻔 했구나!"라고 했는데, 이제 확 당겨오지 않는가. 조주가 말한 이놈이 누구냐? 이 친구가 도대체 누구냐? 악!
345. '금년에는 풍파가 없다'
한 스님이 물었다.
“안팎이 모두 고요하고도 고요한데 스님께서는 어떻게 법을 펴시겠습니까(二邊寂寂 師如何闡揚)?"
“금년은 풍파가 없는 해로다(今年無風波)."
원문에‘이변(二邊)이 고요하고 고요하다’고 했는데, 이변, 곧 두 가장자리는 처음과 끝, 안과 바깥, 위 아래, 왼쪽, 오른쪽 등 사물과 시, 공간의 양 끝을 일컫는 말이다. 안팎, 시공이 모두 맑고 고요하면 어떠한 자극이 오더라도 흐트러질 일이 없다. 이러할 때 조주는 어떻게 도(道)를 펼치는가? 하는 질문이다.
“금년은 풍파가 없구나(今年無風波)."
작년 이전까지는 산과 바다에 비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이 치솟았지만, 금년은 참 고요하구나! 이 뜻인가. 깨닫기 이전과 그 이후를 가름하는 한마디를 한 것이다. 모두 깨달음으로 귀결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기와 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향엄선사는 '작년의 가난은 가난도 아니다. 작년 가난은 송곳 꽂을 땅이라도 있었으나 올 가난은 그 송곳마저 없다'라고 오도송을 읊었다.
어떠한가? 이제 작년의 풍파를 뛰어넘을 수 있겠는가? 그러면 금년에는 갈대밭 속에 고요하게 깃드는 한 마리 소쩍새가 될 것이다.
346. '나무를 끌어다가 법당을 짓자'
한 스님이 물었다.
“대중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는데 무슨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오늘은 나무를 끌어다가 승당을 짓자(今日拽木頭 豎僧堂)."
“그것이 바로 학인을 지도하는 것입니까?”
“나는 쌍륙이나 장행 같은 놀이는 할 줄 모른다(老僧不解雙陸不解長行)."
오늘은 어떤 특별한 날인지, 조주의 설법을 듣기 위해서 관음원에 구름처럼 많은 대중이 모였다. 아마도 관음원 창립 기념일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대중들이 다 모이자 수좌나 상좌 중에서 누군가가 ‘좋은 설법 부탁드립니다.’ 하고 조주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조주는“오늘은 날이 좋으니 나무를 끌어다가 법당을 세웁시다."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많은 대중이 모였으니 오늘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기상천외한 설법이 나올줄 알았는데, 울력을 나가서 나무를 베오자고 하니 실망한 대중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그러면 이 설법은 정말로 모처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니 모두 울력을 나가(노동 품팔이를 해서) 나무를 베가지고 와서 승려들이 거처하는 방,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을 더 만들어야 하겠다는 뜻인가? 말 그대로 따라가 보면 이런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어느 스님이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투덜거린다. “그 말씀이 도대체 이토록 많은 수행자들을 지도하는 방편입니까?” 그런 이야기 하시려면 이 많은 대중들이 왜 모였습니까? 하고 울분을 삭이는 표정으로 머리를 질레 질레 흔들었을 것이다.
좋은 법문 들으려고 그 먼 길을 찾아와서 귀를 쫑긋하고 선사를 주시하고 있는데, 기껏 ‘우리 모두 나무를 해서 법당을 짓자’ 하니 대중들의 입이 퉁퉁 부었다. 만약에 조주가 불자를 한번 치켜들고는, ‘오늘 법문을 마쳤다’ 하고 곧바로 강단을 내려왔으면 아마도 폭동이라도 일어날 판이다.
그래도 조주는 태연히 “나는 쌍륙(雙陸)이든 장행(長行) 같은 놀이는 할 줄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 두 놀이는 우리나라의 윷놀이, 주사위 놀이 같은 것이라고 하는데, 어릴 때 출가한 조주는 한 번도 잡기를 해본 적이 없어서 아무 놀이도, 게임도 할 줄 모를 것이다. 하물며 나무를 베어와서 나무로 윷을 만들겠는가? 이 뜻이다. 조주가 아는 것이라곤 본분의 일인, 마음을 송곳으로 콕 찔러주는, 나무를 끌어다 승당을 세우는 것 밖에 없다.
그럼, 바로 여기서 나무를 끌어다 승당을 짓는 일이 무엇인지 탁 다가와야 하는데 여러분 어떠한가? 지금까지 나를 잘 따라왔으면 이제는 쉽게 알아챌 것이다. 꼭 절에만 법당을 지어야 하는가. 아직도 모른다면 우리 마음속에도 큰 도량을 지어야 부처가 되는 길을 터는 것이다. 부처를 뽑는 도량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다. 알겠는가? 헐!
347. '진실한 사람의 몸'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진실한 사람의 몸(眞實人體)입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이다(春夏秋冬)."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대는 내게 진실한 사람의 몸을 묻지 않았느냐?”
이번에는 ‘진실한 사람의 몸’이 무엇인지 물었다. 마음, 본심(本心)의 또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사대오온(四大五蘊)으로 구성된 몸과 생각, 감정, 의식 등을 '나' 라고 생각하지만, 이것들은 다만 인연 화합으로 이루어진 허깨비일 뿐이다. 이 몸뚱이와 허망한 생각 등은 항상 변하는 무상(無常)한 것인데, 이것을 자기 자신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진실한 사람의 몸'인가? 한 마디로 부처의 성품을 고스란히 갖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우리의 자성(自性), 본심이다. 이것을 알거나 보지 못하니 영원히 중생의 길을 가고 있다.
'진실한 사람의 몸'은 다른 말로 법신불(法身佛)이다. 우리 본성(本性)이 붓다임을 수백, 수천번 반복해 말한다. 조주는 엉뚱하게도“(진실한 사람의 몸은) 봄, 여름, 가을, 겨울(春夏秋冬)이다."고 했다. 정말로 기상천외한 대답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어떻게 알아듣습니까?” 전혀 상상치도 못한 대답이 나오니 이 스님은 애처롭다 못해 악다구니를 쓴다. 여러분은 이제 알아챌 수 있겠는가. 마른하늘에 번갯불 치듯이 나오는 조주의 한 마디에 모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기에다 조주는 “그대가 진실한 사람의 몸을 묻지 않았느냐?”하고 덧붙이니, 모르면 기가 차고 똥이 찰 지경이다.
‘나는 진실한 사람의 몸에 대하여 그 실제 모습을 말했을 뿐이다. 자연의 법칙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여름,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옴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인데, 진실한 사람의 몸은 어떠한가? 우리 자신의 성품, 근본 바탕의 마음은 진리 그 자체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아마 처음 깨친 사람도 이런 해석 정도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비밀스런 뜻이 숨겨져 있다. 사실 전혀 비밀스런 뜻이 아닌데 그렇게 말할 뿐이다. 간단하다. 세상 모든 것의 실상(實相)은 공(空), 무상(無相), 무주(無住)이다. 우리 근본 마음도, 우주 만물도, 사계절도 이 실상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그러니까 오로지 마음 하나로 모두 평등하다는 뜻이다. 춘하추동이든, 똥막대기든, 호떡, 만두든..
연기설에 따른 공(空), 모양 없음(無相)의 이치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불생불멸에 대하여 완전히 통달해야 한다. 그래야 공(空), 무자성(無自性), 무생(無生), 무상(無相), 무주(無住), 무원(無願), 무념(無念), 무심(無心) 등 도(道)의 핵심에 전혀 막힘이 없을 것이다. 확철한 깨달음의 기본 바탕이다.
348. '궁전 속의 주인공'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불법의 큰 뜻(佛法大意)입니까?”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아무개입니다(某甲).”
“함원전 안, 금곡원 속이다(含元殿裏 金谷園中)."
'불법의 큰 뜻(佛法大意)‘ 또는 불법적적대의(佛法的的大意)‘는 앞에서 여러 번 나왔다. 큰 도(大道), 선(禪), 부처, 조주의 가풍, 한마디 말은 모두 같은 뜻이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 스님은 불법의 큰 뜻을 물었는데, 조주는 도리어 그 스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본다. “아무개입니다(某甲)"
항상 근원을 꽉 붙들고 있는 조주 같은 사람이 이름을 물으면 우리가 흔히 부르는,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말해라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본래면목을 내놓아 봐라’ 이 뜻이다. 그저 ‘제 이름은 아무개입니다.' 라고 대답하니 조주는“함원전 안이요, 금곡원 속이다(含元殿裏 金谷園中)"라고 주의를 준다.
함원전은 중국 당나라 시대에 천자(天子)가 살던 궁궐이고, 금곡원은 진(晉)나라 때 석숭(石崇)이란 큰 부자가 살던 별장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면, 조주의 말씀은 '큰 대궐 안이요, 대 부호의 별장 가운데이다'이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에 누가 사는가? 바로 여러분의 주인공들이 고요하게 살고 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349. '7불의 스승'
한 스님이 물었다.
“7불의 스승(七佛師)은 어떤 분입니까?”
“자고 싶으면 자고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난다."
칠불(七佛)이란 석가모니와 그 이전에 출현했다는 여섯 부처를 가리키는 말이다. 비파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루손불, 구나함불, 가섭불, 석가모니불을 말하는데, 한 스님이 칠불의 스승이 누구인지 물었다. 조주는“(그 스승은) 자고 싶으면 자고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난다."고 대답했다.
모든 부처는 별도로 특별한 스승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맑고 깨끗하고, 때 없는 마음이 바로 그대의 스승이다. 고요한 마음 그대로만 따라가면 된다. 그것만 깨달으면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그냥 자는 하릴없는 늙은이, 도인이 된다. '입이 많이 아프구나!'
350. '사물 밖의 도(道)'
한 스님이 물었다.
“도(道)는 사물(物)의 밖에 있는 것도 아니요, 사물의 밖에 있는 것은 도가 아닙니다. 무엇이 사물 밖의 도(道)입니까?”
조주선사가 별안간 후려치자 그 스님이 말했다.
“저를 때리지 마십시오. 뒤에 사람들을 잘못 때릴지도 모릅니다.”
“용과 뱀을 가리기는 쉬우나 납자(衲子)는 속이기 어렵다.”
도(道)는 법(法)이요, 진리요, 우리 마음이다. 도(道)는 사물의 안팎 어디든 있지도 않고, 그러면서 있지 않은 데도 없다. 그것이 둘 아닌 중도(不二中道)의 불법이다. 이 말을 제대로 소화해야 하는데, 이 스님은“도(道)는 사물(物)의 밖에 있지도 않고, 사물의 밖에 있는 것은 도가 아니라고 하고선 다시 무엇이 사물 밖의 도(道)입니까?”하고 말을 이리저리 비비꼬아 물으니, 조주에게 살짝 한 대 맞았다.
다시, 이 수행자는 찌질하게 어리광을 피우고 있다. “큰스님! 저를 때리지 마십시오. 뒤에 수행이 깊은 사람을 잘못 때렸다고 소문날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제법 깊은 도(道)를 체득한 것처럼 착각에 빠져서 잘못 때리지 말라고 했다.
“용과 뱀을 가리기는 쉬우나 납자(衲子)는 속이기 어렵다.”
깨달은 자인지, 삿된 도를 행하는 자인지 조주는 금방 가려낸다. 이 노승을 그대가 속일 수 있을까 보냐? 어디 감히 조주를 시험하려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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