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의 교회론
Ⅰ. 들어가는 말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라는 점은 교회가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선포하고, 그 말씀을 실천해가야 할 중요한 실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께서 활동하시며 일하시며 말씀하시는 장소이며, 궁극적으로는 역사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며, 완성하시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가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못하여 시대적 사명을 망각하고 그 사명에 충실하지 못할 때 그 사회는 어두울 수 밖에 없었으며,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을 면할 수 없었던 반면, 교회가 말씀을 바로 해석하여 그 말씀을 세상에 선포할 때 그 사회는 빛을 발하면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여 쓰임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그런 의미에서 성서에 근거한 교회의 분명한 자기 정체성의 확립과 세상속에서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본회퍼의 신학에 있어서 통일된 주제를 찾는다면 그것은 “교회와 세상의 관계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저작들 중에서 ‘교회론’이라는 제목의 책은 단 한 권도 없지만 어느 것 하나도 교회론적인 배경이 없이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학위논문이었던 ꡔ성도의 교제ꡕ(Sanctorum Communio)에서 그는 교회론적 사회학을 검토하였고, ꡔ행위와 존재ꡕ(Act and Being)에서는 계시의 교회론적 관점을 보여주었으며, 1933년 베를린 대학에서의 기독론 강의에서도 그리스도를 교회가 선포하는 말씀(word), 교회에 의하여 집행되어지는 성례전, 그리고 교회 공동체 자체와 동일시하였던 것이다.
1934년 고백교회가 창설된 이후에는 심지어 ‘고의적으로 교회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하는 이는 구원이 없다’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그의 전 생애는 교회론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본회퍼의 주요한 저작에 나타난 본회퍼의 교회론의 본질을 밝힘으로써 오늘 이 세상 속에서 한국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과 존재의 의미, 그리고 앞으로 가야할 방향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Ⅱ. 본회퍼의 생애와 신학적인 배경
1. 본회퍼의 생애
본회퍼는 단순한 신학자로나 목사, 또는 행동가로서의 한 사람이 아니고, 이 셋이 한 인격안에 결합되어 있는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학자로서의 본회퍼 하나만으로도 한 사람이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학의 교수였을 뿐만 아니라, 교목으로, 교회의 목회자로 또는 고백교회 항거운동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참여자로서 충실한 목사였다. 그는 신학자와 목사로서 뿐만 아니라, 그가 쓴 글들을 따라서 행동으로 산 행동인이었던 것이다.
독일의 정치적 변혁기와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격동기를 거치면서 그의 삶은 단편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그의 모든 계획과 글들도 단편적이다. 대학시절과 베를린 시절을 제외하면 그의 글들은 걸어가면서 생각하고 피해 다니며 쓴 것들이다.
J. Godsey는 본회퍼의 생애를 1) 신학적 형성의 시대(1906-1931), 2) 신학적 응용의 시대(1982-1939), 3) 신학적 결단의 시대(1940-1945)로 구분하고 있는데, 그의 구분에 따라 본회퍼의 생애를 개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A. 신학적 형성의 시대(1906-1931)
1906년 독일 블레슬라우의 교양있는 중류가정에서 8남매중 6째로 태어난 본회퍼는 화란에서 이주해온 루터교적 전통을 가진 경건한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으며, 항상 건강하였다. 1912년에 베를린 교외로 이주했으며, 여덟살 때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16년에 그류네발트(Grunewald) 지역으로 이사한 이후 이곳에서 저명한 교수들과 교제하고,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자랐던 것이다.
이 기간중에 중요한 사건은 그가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다. 14살 때에 부모는 음악을 권유하기도 했으나 그는 목사가 되기로 한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고교시절에 그는 고전 및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랑케, 폰하제(증조부), 플로티누스, 줄리안 황제, 슐라이엘마허, 프리드리히 나우만, 퇴니스, 막스 베버등의 저작을 섭렵했다. 1923년, 튀빙겐 대학의 신학부에서 신학수업을 시작한 그는 Adolf von Harnack, Ernst Troeltsch, Max Weber의 사상에 접촉하였고, 튀빙겐의 유명한 신약학자였던 슐라터(Adolf Schlatter)와 하이트 밀러(Wilhelm Heitmüller)와 칼 하임(Karl Heim)에게서 수학했다. 1년후 베를린으로 옮겨 공부하는데 여기서는 Adolf Deissmann과 Hans Lietzmann, 교회사가 하르낙, 구약교수 Sellin에게 배웠다. 학생으로서의 본회퍼는 조숙하였고 독립심이 강하였다. 그는 베를린의 자유주의를 단순히 방관한 것도, 칼 바르트 같은 신학자를 그대로 추종하지 않았다.
1927년 본회퍼는 제베르크의 지도하여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는데, 그 제목이 「성도들의 교제:교회의 사회학에 대한 교의적 탐구」였다. 이 작품에서 그는 계시와 교회를 긴밀히 연결시키고 있으며, 1929년에는 스페인에서 베를린 대학으로 다시 돌아와 교수가 되기 위한 논문을 제출했는데, 이것이 1930년에 끝마친 「행동과 존재: 조직신학에 있어서 초월주의적 철학과 존재론」이었다. 1930년에 미국을 방문한 본회퍼는 거기서 미국교회들이 교회와 삶을 강조, 교회의 사회, 정치, 경제문제의 정열적 관여, 참 형제다운 교제와 에쿠메니시티의 생활화를 보았다.
B. 신학적 응용의 시대(1932-1939)
1931년 미국으로부터 돌아온 그는 가을학기부터 시작해서 1933년 여름학기까지 강의한 다음 2년동안 영국 런던에서 목회했다. 1936년 독일에 돌아온 그는 고백교회가 운영하는 핑켈발데 신학교의 책임자로서 목회자를 양성하는 한편 1938년 8월 대학의 강의 금지령을 받을 때까지 베를린에서 강의를 계속하였다.
1932년 여름에 본회퍼는 “교회의 본성”과 “기독교 윤리가 있는가?”에 대해 강의하고 겨울학기에 “창조와 죄”(창세기 제1장-3장까지의 신학적 주석)를 강의했다. 이 시기에 그는 런던에 있는 국제청년협의회 서기로서 그의 에큐메니칼 직임을 감당하였다. 본회퍼가 강단에서 활약했던 1932년, 바야흐로 히틀러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는 교회의 영역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국회에서 나찌당이 230석이 됨에 따라 독일은 완전히 나찌당에 장악되었고 독일의 목사들은 기독교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를 종합하기 위한 운동으로 “독일 기독교 신앙운동”에 가담하였다. 이 시기의 본회퍼의 투쟁은 두 가지의 형태를 취하였다. 하나는 독일 ‘고백교회’ 운동에 가담하여 국가가 지지했던 ‘독일적 그리스도인들’ 운동에 항거한 교회적 투쟁이며, 또 하나는 1940년 10월부터 시작된 정치적 항거이다. 이 시기에 그는 교회투쟁을 계속할 내일의 젊은 목회자들의 훈련의 근거지로서 ‘목회자 연수소’의 책임을 맡아 일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저작으로는 「제자의 길」, 「성도의 공동생활」, 「기독론」, 「창조와 타락」, 「다윗왕」, 「유혹」, 「성서의 기도의 책」 등이 있다.
C. 신학적 결단의 시대(1940-1945)
이 시기는 유니온 신학교의 초청으로 미국에 갔다가 또 귀국하는 본회퍼의 결단으로 시작해야겠다. 1939년 여름, 고백교회의 허락으로 미국에 갈 수 있었으나 곧 그는 내적 번민에 휩싸이게 되었다. 물론 사태가 험악해지면 독일로 돌아간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지만 말이다. 미국에서 강연과 회의, 대학의 교수접촉 등을 주선하며 제시받았으나, 그 해 9월에는 틀림없이 전쟁이 일어난다는 집으로부터의 편지를 받고 그는 곧 귀국을 결심하였다. “내가 외국에 온 것은 잘못이었다. 나는 우리 민족역사의 이 난국을 독일에 있는 신자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 라인홀드 니버와 P. 레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독일로 돌아오면서 그는 “미래에 대한 나의 내적 번민은 없어졌다.”고 쓰고 있다.
귀국한 본회퍼는 쾨슬린(Köslin)과 쉬바케(Schwache) 지방에 있는 ‘집단 목회훈련’의 지도자로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1939년 본회퍼는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그의 신학교도 문을 닫았으며, 독일내에서 책을 출판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이 금지되고, 일거일동을 경찰에 보고해야 했다.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된 본회퍼는 이제부터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되는 정치적 반항의 지하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는 Beck장군과 그의 동료들의 히틀러 정권전복의 비밀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고, Oster 장군과 도나니를 통해 독일군 정보부의 민간 정보원의 뮤니히 사무처에 추천되어 시민증을 얻게 되었으며, Canaris 제독의 사무실에서 오스터와 도나니를 돕는 히틀러의 부하(?)의 한 사람으로서 뮤니히 사무실에 파견되었다.
그는 그들의 음모내용을 에큐메니칼 접촉을 통해 세계 교회에 알게 하는 사명을 가졌으며, 만일 히틀러 정권 제거 계획이 성공하는 경우 연합군의 입장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과 독일에 대한 적대감정을 완화시키자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 본회퍼는 유대인 그룹들을 구하고 그들을 독일로부터 도피시키는 일을 돕는 지하운동을 하는 한편 숙원이던 ‘윤리학(Ethik)을 썼다.
1942년 가을에 본회퍼는 약혼하였으며, 1943년 3월에 두차례의 히틀러 암살 시도에 실패하였다. 1943년 4월 5일 본회퍼는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었고, 18개월 동안이나 베를린에 있는 테겔 형무소에서 보냈다. 그는 투옥기간 동안 성경(특히 구약)은 물론 문학, 과학, 역사, 신학 등에 관한 많은 책들을 읽었다. 그러나 치밀한 조사끝에 1945년 4월 5일에 있었던 히틀러의 특별지령에 따라 본회퍼는 처형될 인사들의 명단에 실렸다. 부헨발트의 강제수용소로 옮겨진 그는 그곳에서 유럽 여러 곳에서 체포되어온 유명인사들과 합류했고, 1945년 4월3일 플뢰센부르크에 있는 비밀경찰 강제수용소로 옮겨졌으며, 1945년 4월 8일 동료 옥중 인사들을 위하여 예배를 인도하고 난 후 급기야 1945년 4월 9일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2. 본회퍼의 신학적 배경
본회퍼의 신학에 크게 영향을 준 사상은 루터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 그리고 실존주의 신학과 바르트의 사상을 들 수 있다. 이제 그가 그러한 신학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살펴보자.
A. 루터 신학의 영향
본회퍼는 본래 루터교 신학의 전통위에 뿌리박은 루터란이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의 중심에는 루터의 사상이 늘 자리하고 있는데, 베를린 대학시절의 스승이었던 칼 홀로부터 「이신득의」에 대한 교리와 희랍정교회 및 러시아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필립스는 본회퍼 해석에 있어서, 본회퍼의 기독론에서 루터교적 특성을 발견하였다. 그는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 자신을 현현하셨으며, 인간은 업적(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라는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에 의거하여 자신의 기독론과 하나님 이해를 구축하였다.
결국 본회퍼는 루터의 사상적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이 루터의 영향은 그의 스승인 홀과 제베르크로 말미암았다고 할 수 있다.
B.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자유주의 신학이 신정통주의 신학에 의해 서서히 쇠퇴해 갈 무렵 본회퍼는 베를린 대학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거성들인 하르낙과 트뢸취, 그리고 칼 홀과 제베르크 등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스승들의 자유주의 신학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그들로부터 받은 영향은 실로 큰 것이었다. 본회퍼의 지적인 청렴은 하르낙으로부터, 루터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칼 홀로부터, 사회학적인 안목은 제베르크로부터, 그리고 에큐메니칼의 문을 열어준 것은 다이스만으로부터 받은 것들이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입장이었으나 그것의 장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C. 실존주의 신학의 영향
본회퍼의 신학이 세상을 향해 개방되어 있으며, 실존론적인 그리스도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것은 전적으로 불트만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불트만은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우리 자신이 우리의 실존을 파악하기를 원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지고 여기에 대해 “대상과의 현실적인 만남”을 강조하였고, 결국 그는 신약성서의 사건들을 비신화화하여 실존론적 해석의 길을 걸었다. 다시 말하면 세속화된 현대의 과학사조속에 사는 현대인에게 신약성서의 초자연주의(신화)는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신화론은 신약성서의 언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세속화)하는 것이다. 본회퍼의 옥중서간은 그가 이러한 불트만의 해석학적 방법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을 불트만의 비신화화에 비교한다면, 그 둘의 차이점은 불트만은 지적이었고, 본회퍼는 정신적, 정치적 의미에서 보다 더 행동적이었다. 불트만이 구원의 자유한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을 강조했다면, 본회퍼는 그것을 넘어서서 세상적 책임성의 문제에 보다 더 관심을 가졌다. 즉 불트만이 해석학에 더 관심을 가졌다면, 본회퍼는 윤리적 측면에 더 관심을 가진 것이다.
D. 바르트 신학의 영향
본회퍼 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바르트였다. 본회퍼에게 끼친 바르트의 결정적인 영향은 “로마서 강해”와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 그리고 잡지 “중간시대” 때문이며, 1927년에 쓴 성도의 교제는 헤겔과 제베르크의 용어를 사용했지만, 결정적으로 바르트의 초기 변증법적 신학의 산물이다. 「성도의 교제」는 결정적으로 바르트의 영향아래 있었으며, 다만 그는 바르트의 계시의 행동에 대해서 계시의 존재의 면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바르트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행동과 존재」에서는 바르트의 초월주의적 계시신학을 극복하며, 후기에 가서는 오히려 바르트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바르트가 교의학적으로 발전하였다면 본회퍼는 윤리적, 설교적으로 발전하였다. 바르트의 관심이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론으로 향해 움직이는 계시의 문제라면, 본회퍼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론, 즉 접근과 계시의 세속적 해석이라고 할 것이다.
Ⅲ. 본회퍼에 있어서 교회와 세상
본회퍼의 해석에는 두 주류가 있다. 하나는 전기와 후기를 단절시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이 양자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전자에 속하는 학자들로서는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자인 H. Müller, 세속 문화적 해석, 혹은 기독교 휴머니즘에로의 해석을 시도한 W. Hamilton과 J.Philips가 있고, 후자에 속하는 학자들로서는 계시의 구체성의 연속으로 보는 E. Bethge, 그리스도론적 교회론에서 일관성을 찾으려는 J. Godsey가 있다. 본회퍼의 사상을 급진적으로 해석하려는 학자들은 우선 「옥중서신」과 그 이전의 작품들 사이의 단절을 선포한다. 대체로 전기와 후기의 단절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기독론적 교회론’ 및 ‘교회의 분명한 정체와 사회참여’와 같은 주제가 처음부터 「옥중서신」에 이르기까지 발견되는 것을 무시한다. 몰트만은 「윤리학」(Ehthik)과 「옥중서신」을 다른 작품들과 고립시켜 다루는 것을 비판하면서 초기의 심오한 신학이론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기와 후기의 연속성을 바탕으로 교회와 세상이라는 두 왕국 사상의 주제가 초기와 후기에 걸쳐 일관성을 보이고 있음을 살펴보면서 그의 교회론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고자 한다.
1. 성도의 교제(Santorum Communio)
A. 성도의 교제에 나타난 교회론의 특징
본회퍼는 베를린 대학 신학부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성도의 교제」는 먼저 그 자신이 영향받았던 19세기 이후의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계시’와 ‘교회’를 강조하고 있다. “교회의 현실은 계시의 현실이다. 교회는 이 계시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에 이 교회란 믿어야 하는가 믿지 않아야 하든가 할 대상이다”라고 성도의 교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논문은 그의 지도교수인 제베르크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제베르크는 ‘역사적인 것’과 더불어 ‘사회적인 것’을 인간의 본질적 특징으로 보았고, 본회퍼가 ‘사회적’이라고 하는 범주를 중요시한 것은 제베르크에게서 배운 것이다. 이형기 교수는 그의 책 「교회와 사회」에서 “「성도의 교제」의 중심주제는 ‘교회 공동체로서 실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역사적, 특히 사회학적 본성을 지니셨다는 사실”이라고 말하며, 그러므로 “본회퍼에 있어서 교회란 기독교적으로 재규정된 사회성을 지닌 사회학적 성격의 교회”라고 함으로 본회퍼의 사회학적 개념의 교회개념을 강조한다.
본회퍼는 「성도의 교제」에서 계시와 교회를 긴밀히 연결시키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공동체로서 경험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땅위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비록 그것이 여러 가지 상대적 형태들을 취하며, 불완전하고 겉치레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이라고 말함으로써 계시와 교회를 밀접히 연결시킨다.
B. 「성도의 교제」에 나타난 교회론
본회퍼는 먼저 교회를 정의하기 위해 신약성경에 근거하여 바울의 교회 개념으로부터 교회론을 출발하며, 이에 근거한 교의적 교회론을 확립한다. 여기서 교회의 근거는 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대리행동이 교회를 기원시켰으며, 생성시킨 원리라고 한다.
교회란 이 세상의 일반 사회성이 기독교적으로 개변된 것을 포함한다. 즉 “교회로서 실존하시는 그리스도”는 이처럼 개변된 사회성과 연합하셨고, 계속해서 이 세상적 사회성을 기독교화 시킨다. 그러므로 본회퍼에 있어서 교회는 기독교적으로 재규정 사회성을 지닌 특수 공동체이다. 그러나 이 “성도들의 공동체”는 질적으로 새로워진 사회성을 갖게 되나 이 역사안에 존재하는 한에는 “죄인들의 공동체”의 측면을 면할 수 없다. 한마디로 “성도의 교제”에 나타난 교회론은 기독교적으로 재규정된 사회성으로서의 교회의 정체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본회퍼는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바울의 ‘에클레시아’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정한 지역내에 있는 개교회”도 역시 에클레시아로 표현한다. 이는 “개교회란 하나님의 전 교회의 구체적인 모습이요”, “이 개교회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교회”이며, “전 교회가 이 개교회를 통하여 한 장소에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 본회퍼는 먼저 “교회는 영원전에 그리스도에 의해서 선택되었다”(엡1:4,살후2:13;요15:16)고 함으로써 교회의 영원적 선택을 설명하고 그리스도는 교회의 초석임을 여러 가지 말로 성서에 근거하여 표현하고 있다. 교회의 초석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와 이중적 관계를 맺는데 한편으로는 “교회의 창조자”요, 다른 편으로는 “교회를 통치하신다”고 한다. 여기서 성령과 그리스도가 교회에서 하는 역할이 달라지는데, 본회퍼는 “그리스도께서는 전 교회와 관계하시고 성령은 개인과 관계하신다.”라고 하면서 “성령은 교제의 원리요, 통일의 원리”(고후12:4 하 특히11-13;엡4:4)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그리스도의 교회안의 현존인데, 이 점에 대해 “그리스도는 오직 교회 안에 현존하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안에 현존한다”(고전1:30;3:16;고후6:16;13:5;골3:9;2:17) 따라서 “그리스도안에 있음”은 “교회 안에 있음”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에 현존하는 방법은 말씀을 통해서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연결하는 끈은 사랑임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본회퍼는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교회인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계시적 실재로서 개인은 이 실재의 한 부분인데 하나님에 의하여 공동체 안에서 선택된 개인으로서 전체로서 개인이다”고 하며 “바울의 유기체적 교회관은 우선 모두가 모든 지체들을 통일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며, 나아가서 모두가 개인으로서 그 안에 살 수 있는 바 하나님의 공동체에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결론짓는다.
2. 나를 따르라(Nachfolge, 1937)
본 작품은 1937년, 히틀러 주의를 경험 한 이후에 무엇보다 고백교회 시대의 경험과 더불어 쓰여졌다. 본 작품에서 그는 교회의 거룩한 삶, 그리고 세상과는 달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본회퍼는 히틀러 당시의 독일 그리스도인들이 이신칭의를 왜곡하여, 은총을 값싼 은총으로 만든 것에 항거하여 칭의에 따르는 행위 내지는 세상속에서의 성화를 강조한다. 그래서 본회퍼는 두 가지 의미에서의 값비싼 은총을 말한다. 즉 복음을 통한 구원(Indicative)과 이것을 전제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Imperative)수행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본회퍼는 다음에 산상수훈을 풀이하면서, 그리스도인(교회)의 비상성을 역설한다. 역시 구원얻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강조이다. 본회퍼는 당시의 제자들은 교회요, 무리들은 세상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제자의 모습은 교회의 모습이요, 이는 곧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모습으로 실존하신다”라고 하는 기독론적, 교회론적 명제가 여기에서도 그 일관성을 보인다.
본회퍼는 산상수훈 풀이에서 교회와 세상을 날카롭게 대립시킨다. 본회퍼는 제자들이 보여주는 교회의 모습이 그 당시 ‘독일 국가교회의 대표들과 설교자들’과 얼마나 다른가를 말한다. 이렇게 볼 때 본회퍼는 참 교회의 모습을 제자들 내지는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찾음으로 당시 독일 교회에 대한 대립을 선포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와 세상의 과격한 간격을 외쳤다. 본회퍼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관련하여 말하기를, “이 ‘의’란 제자들의 의로운 판단과 행동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이것 때문에 무리들과 다르다. 이미 이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소유를 포기했고, 행운, 권한, 의, 명예, 힘을 포기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은 이런 제자들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제자들은 바로 이 의(義) 까닭에 핍박을 받았다····”
본회퍼는 제자들 내지는 참교회란 “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라고 한다. 이 빛과 소금은 그리스도인이 수행해야 할 명령(Imperative)이기 이전에 구원의 선물(Indicative)이며, 이는 그리스도인의 전 실존이 참여해야 할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제자들, 곧 교회는 가시적 공동체이다.
본회퍼는 산상수훈들에 나타난 가시적 공동체에 이어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가 바울의 교회관과 연속성을 갖는다고 역설함으로 계속해서 가시적 교회공동체를 강조한다. 부활, 승천하시고 영화롭게 되신 예수께서 오늘날에도 설교와 성례를 통하여 성경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신다.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제자들보다도 더 친밀히 들을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회퍼는 ‘신비스러운 몸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한다.
설교와 성례전 뿐만 아니라 다기능의 유기체(롬 12:5, 고전 12:12이하)라는 점에서 교회는 가시적이요, 나아가서 공간을 차지하는 직제 역시 교회를 가시적이게 한다. 성령께서는 “교회의 직책들을 통하여 자기를 가시적이게 하신다.” 교회의 가시성은 삶의 공간에서 나타나며, 각 지체의 일상적인 삶 전부가 공간을 차지하므로, 기독교적 사회윤리와 직업윤리는 교회를 가시적이게 한다. 이런 식으로 “교회는 세상의 삶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그리스도를 위해서 영토를 점령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본회퍼는 교회는 세상과 단절되어야 한다는 역설의 진리를 말한다. 즉 그리스도의 세상 내적 실존에 유비(analolgie)된 교회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회퍼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하는 교회의 세상참여를 강조하면서도 이 세상과 질적으로 다른 교회의 특수성을 항상 강조한다.
그러므로 본회퍼에게 있어서 교회란 자기 고유의 주권 영역과 삶의 길을 갖는 “제자의 공동체”(고전 14:33)로서 ‘거룩한 교회’(엡 5:27), ‘성도들의 공동체’(고전 14;33), ‘창세 전에 피택된 사람들’(엡 1:)이며, 교회는 성령의 인침을 받고 하나님의 직접 개입으로 이 땅위에 세워졌다. 이 교회는 ‘성 위에 세워진 동네’이다. ‘세상은 세상이고, 교회는 교회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로부터 세상으로 퍼져나간다. 그래서 교회는 이 땅과 이 땅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선포해야 한다. 끝으로 본회퍼는 독일 국가교회의 체제상의 모순을 직시하고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교회는 세상이 교회되는 것을 막아야 하고, 교회는 교회가 세상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교회와 세상의 분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성역확보를 위해서 쟁취해야 할 십자군의 싸움 그것이다.”
3. 윤리학(Ethics,1949)과 옥중서신(The Letters and Papers from the Prison, 1944-1945)
A. 윤리학(Ehics)
본 작품은 1949년에 편집된 것으로 기독교적 사회윤리를 그 주제로 한다. 이 Ethics에서는 소위 ‘세상’이라고 하는 삶의 영역이 단순히 교회와 대립하고 있는 영역이 아니고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윤리가 수행되는 삶의 장으로 등장한다. 여기에서 본회퍼의 사상 발전을 발견할 수 잇다. 본회퍼는 ‘종말적인 것’과 ‘전(前) 종말적인 것’을 구별하면서 이신칭의를 얻은 그리스도인의 전 삶의 영역이 ‘전(前) 종말적’인 영역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종말적인 것만을 절대시하는 과격주의와 전 종말적인 것만을 강조하여 자율적인 것, 일상적인 것,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집착하는 세속주의도 배격한다. 그는 전자는 ‘심판주와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에 집중하고 후자는 ‘창조주와 보호자’로서의 하나님에 집중한다고 하면서 성육신의 신학, 십자가의 신학, 부활의 신학을 골고루 중요시해야 할 것을 역설한다.
본회퍼는 기독교 내지는 교회의 윤리적 삶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현실’ 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이 세상의 현실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규정한다. 본회퍼에 의하면, 하나님 없는 세상도 없고, 세상없는 하나님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와 행동을 취하셨는가는 우리 그리스도인(교회)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기독교인은 이 세상을 만날 때에 ‘이 세상이 이미 하나님의 현실 안에서 지탱되었고, 용납되었으며, 화해되었다’는 것을 안다고 한다.
Ethics에서 취급하는 교회와 세상에 대한 이해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본회퍼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이 만인구원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임 때문이다. 그는 신약성경시대 이후 문제된 교회와 세상 사이의 갈등을 비판적으로 관찰한 다음, 계시와 신앙에 입각해 볼 때 그리스도인에게는 양자가 두개의 현실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현실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세상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되었음을 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갈등의 사람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현실이 하나이기 때문에 이 현실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은 분별없는 전인(전인)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회퍼가 계시와 이성, 종말과 전종말, 교회와 세상을 혼동시키거나 단순히 만인 구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사건은 세상적인 것, 세속적인 것, 이성적인 것, 자연적인 것, 비기독교적인 것까지 포함한 온 세상의 온 인류를 위한 현실이라는 주장이다. 교회는 이것을 말씀을 통하여 선포해야 하고 이 현실성에 입각한 윤리를 펼쳐야 한다.
이 작품에서 본회퍼는 교회의 세상에 대한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관계(analogia relationis)에 의하여 규명한 다음, 교회와 세상이 위탁받은 네가지 위탁명령을 논하면서 위에 언급한 계시와 신앙에 비추어 본 이 세상의 현실, 그리고 교회의 세상에 대한 태도와 사명을 전제한다. 이 네가지 위탁명령은 ‘세상의 그리스도안에서의 창조’(요1:10;골1:16)라는 교의적 전제아래서 기독론적으로 정위(定位) 되고 있다. 이처럼 본회퍼는 일반 윤리학의 전제가 아니라 교의적인 전제를 가진 교회윤리학을 전개한다. 그래서 본회퍼는 네가지 위탁명령을 신학적으로 통일한다. 즉 각 영역은 이원론적인 구조가 아닌 고유한 특성을 지닌 영역임과 동시에 유기적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B. 옥중서신(The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죽음을 앞두고 쓴 1944년 이후의 본회퍼의 편지를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상황을 앞에 두고 그는 기독교가 무엇이라고 유언(?)하였을까? 과연 그는 그리스도의 왕국과 세상나라의 차이를 없애버렸는가? ‘비종교화의 기독교’(religionless Christianity)라고 할 때, 교회, 설교, 예배의식, 교직 및 기독자의 삶의 자리는 어디인가?하는 것이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종교적인 것의 주님’이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비종교적, 세속적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 Ethics에서 언급한 기독교 윤리의 종교적 전제를 가지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비종교적-세속적 ‘에클레시아’라는 맥락에서 마치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윤리 정치, 학문 등의 가설로서의 하나님’이나 ‘위기에 나타나서 도우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고 급기야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을 믿는다. 본회퍼는 비종교적 세상 한 복판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성육신,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내적 실존에 관심의 초점을 맞춘다.
그리스도인의 세상성이란 교회의 영역 안에서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참 인간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자란 참 인간으로서 타자를 위한 실존인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에 유비된다. 이런 의미에서그리스도인의 사회윤리가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본회퍼는 교회의 자기 동일성을 무시하고 ‘한 왕국’ 사상에로 축소시키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죽음을 앞에 둔 본회퍼는 전적으로 그의 실존을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신 하나님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의 옥중생활의 상황은 기성 독일 국가교회와는 물론 그 어떤 개 교회, 사귐, 설교, 예배의식, 교직등과는 거리가 먼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기능을 타자를 위해서 실존하시는 예수님의 존재에 유비하고 있다.
본회퍼는 결코 교회가 세상속에 용해되어 버려야 하는 의미에서 기독교의 ‘비종교화’나 ‘성경의 세속적인 해석’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교회는 교회요, 세상은 세상이지만 교회가 세상과 담을 쌓고 자체 안으로 내향하는 중세기적 성속의 이층구조를 무너뜨리고, 한 기독자(교회)는 하나의 참된 인간으로서 타자를 위하여 실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Ⅳ. 맺는 말
이상에서 본회퍼의 전기와 후기에 걸친 네 작품에 나타난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성을 고찰해 보았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양자의 관계는 초기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항상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만 그 강조점이 교회로부터 세상에로 향해 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물론 옥중서신에서 전기의 어느 작품보다 과격하고 철저한 사회윤리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외부의 세상 및 일체의 교회관계와 단절된 상태에서 죽음을 감지하고, 현실적으로 고통을 체험하는 가운데 있었음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가 옥중서신에서 제시하는 사회적 책임의 모습은,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철저히 붙들었던 초기 작품에서부터 줄곧 그 실마리가 나타나고 있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와 세상의 질적인 차이에 대한 생각도 초기에서 후기까지 일관되게 연속선상에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 한국교회의 상황을 볼 때, 한편으로는 교회와 세상의 극단적인 분리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세속화를 부르짖는 양극화 현상이 점차 심화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세상을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멸망받을 도성으로만 보고 이를 교회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철저히 내세적이고 몰역사적이며, 세상에 대해서 무관심 내지는 무책임한 분리주의적 역사관에 입각한 교회 획일주의 사상이 오순절 운동이나 자칭 보수교단을 자처하는 부류들 속에서 나타나고 있고, 이와 반대로 해방신학이나 민중 신학운동은 현실적인 요청에 부응하여 현실세계에 대한 기독자의 책임성을 크게 강조하고 있기는 하나 이러한 운동이 자칫 교회 공동체의 고유한 정체성을 망각하거나 도외시한 채 세속화를 지향하는 쪽으로 진행될 위험이 내재되어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본회퍼가 교회와 세상의 긴장관계와 관계성에 고심했던 것처럼, 오늘의 한국교회 상황에서 어떻게 이 양자를 조화시키고, 세상에 책임을 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감당해 나갈 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본다. 교회 없는 세상이나 세상을 등진 교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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