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억 이하 집 있으면 평생 보장되는 '주택연금'
5억 주택 담보로 가입한 70세 부부 모두 사망까지 月162만 원. 국민연금 더해 노후 생활비로
회사원으로 정년퇴직한 강모(73·경기 성남)씨는 180만 원짜리 월급쟁이라고 자부한다. 매월 꼬박 나오는 국민연금 31만 원과 함께 주택연금(시가 5억원 주택)에 가입해 월 150만 원씩 받고 있기 때문이다. 12년 전 퇴직할 때 직장에서 받던 월급(250만 원)의 72%다. 강씨는 이 돈으로 아파트 관리비와 부부 약값을 합쳐 생활비로 월 120만 원을 쓰고, 남는 돈 60만 원은 저축한다. 미래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아내와 나 중 누구든 먼저 죽으면 남은 사람은 노인 요양 시설에 가기로 했어요. 주택연금에서 월 150만 원씩 정액으로 꼬박꼬박 들어오니 그 돈으로 간병비를 해결하기로 했어요" 하고 말했다.
은퇴 후 중산층이 기댈 언덕은 국민연금이다. 하지만 국민연금 액수는 너무 적어 노후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전체 수령자의 평균 액수는 월 36만 원이고, 20년 이상 가입해도 월평균 80만 원대에 그친다. 이런 빈약한 국민연금을 보충할 가장 효과적인 노후 보장 제도가 주택연금이다. 9억 원 이하 주택을 갖고 있으면 이를 담보로 평생 연금을 받을 수 있다. 미국·싱가포르 등에서도 시행하는 제도다.
실제 한국인들은 노후 자산의 80%가 부동산(주택)이어서 주택연금이 노후생활 안전판 역할을 할 수 있다. 주택연금은 부부 중 한 사람이 60세가 넘으면 가입할 수 있는데, 몇 살에 가입하느냐에 따라 액수가 달라진다. 가령 시가 3억 원짜리 집이 있는 65세는 평생 월 80만9,000원, 5억 원 주택이라면 월 134만9,000원을 받게 된다. 그러나 70세에 가입하면 3억 원 주택은 월 97만2,000원, 5억 원 주택은 월 162만 원을 받는다. 부부 중 어린 나이를 기준으로 연금액이 정해지는데, 부부가 모두 사망할 때까지 지급한다. 가입자 10명 중 6명은 3억 원 미만 주택이어서 연금액을 가장 적게 받은 경우가 월 6만8,000원이고, 평균 수령액은 월 98만 원이다.
그러나 주택연금은 2007년부터 시행해 아직 가입자가 3만5,537명에 그친다. 집은 자녀들에게 남겨줄 유산으로 여기는데, 자칫하면 은행에 넘기게 된다는 생각에 가입을 주저하기 때문이다.
한국주택금융공사 류기윤 주택연금부장은 "자식에게 유산을 남겨주는 것보다 오히려 자녀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노후를 보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장수의 덫… 수명 7세 늘면 노후자금 1억3,000만 원 더 필요.
한국, 75세 이상 노동 OECD 1위
"60대 후반이면 여기서는 막내지. 일흔, 여든 넘는 사람도 많아."
폭염(暴炎)이 한창이던 지난 7월 말 서울 동대문종합시장 앞. 구릿빛 피부에 눈가 주름이 깊은 최석기(가명·76) 할아버지는 "이 나이에 돈 벌기가 쉬워? 밥값에 용돈 벌려면 (일하러) 나와야지"라고 했다. 소싯적엔 평범한 회사에 다녔다는 최 할아버지를 비롯한 노인 30여 명이 이날 시장 앞 인도에 놓아둔 간이 의자에 앉아 시장 상인들이 내놓은 옷 배달 일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 할아버지는 "한 달에 30만 원쯤 번다"고 했다.
중산층이 노후에 절대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실버(silver) 파산'의 배경엔 중병이나 황혼 이혼, 투자 실패 같은 요인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과거보다 수명이 늘면서 급속하게 진행되는 고령화가 노후 준비가 부족한 중산층을 절대 빈곤으로 몰아갈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본지가 통계청 자료를 분석한 결과, 60세 남성(여성)의 예상 수명은 1990년 75.6세(80.3세)에서 2014년엔 82.4세(87.4세)로 6.8세(7.1세) 늘었다. 오는 2035년 60세가 되는 현재 41세 남성(여성)의 경우 기대 수명은 84.4세(88.5세)로 더 늘 것으로 추정됐다.
수명 연장으로 준비해야 할 노후 자금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가 분석한 결과, 2014년 현재 60세 남성은 1990년 당시 60세보다 수명이 6.8세 늘면서 필요한 노후 자금은 1억2,900만 원(현재 가치·2인 가구 기준) 더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늙어서도 일자리를 전전하는 노인들도 세계 톱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 고용률은 30.6%로 회원국 중 아이슬란드(38.7%)에 이어 2위, 75세 이상은 1위(17.9%)였다.
원조 '실버 파산' 일본… 老人 가구 절반이 생활보호 수급자
연봉 800만엔 받던 중산층도 이혼·질병·자녀 문제로 무너져
노인가구 17%, 저축 한 푼도 없어
작년 11월 일본 수도권 사이타마현 구마가야(熊谷)시에서 일가족 3명이 차를 타고 강에 뛰어들었다. 몸이 아픈 아버지(74)와 치매를 앓는 어머니(81)가 시신으로 발견됐다. 셋째딸(47)은 저체온증으로 병원에 실려 갔다가 회생했다. 자살 방조 및 살인 혐의로 법정에 선 딸은 "살아남아 미안하다"고 했다.
일본 언론이 행적을 추적했다. 일가가 살던 곳은 월세 3만3,000엔짜리 셋집이었다. 딸은 과자 가게에서 일하며 10년간 치매 어머니를 돌보다 3년 전 직장을 포기했다. 아버지가 신문 배달로 월 18만5,000엔씩 벌었는데, 몸이 아파 도저히 더 못 할 상황이 됐다. 사건 발생 열흘 전 신문 배달을 그만둔 아버지는 딸에게 "같이 죽어주겠니?"라고 했다. 생활보호 수급 신청 절차를 밟느라 정신적으로 자포자기 상태였던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건은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일본의 중산층 하부가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지만, 비슷한 사건이 워낙 많아 며칠 만에 묻혔다. 연봉 600만~800만 엔을 받던 중산층 직장인이 은퇴 후 받는 연금은 24만엔 안팎인 반면 일본 수도권에서 살아가려면 한 달에 최소한 16만 엔이 든다. 노인들에겐 세 가지 암초가 있다. 없는 돈을 그나마 반 토막 내는 황혼 이혼, 나이 먹어도 독립하지 못하는 비정규직 자녀, 뜻밖의 병과 사고다. 이 세 암초 중 어느 하나라도 만나면 금세 생활보호 수급자로 전락한다.
그 결과 일본은 혼자 사는 노인이 600만 명, 월 10만엔 미만으로 살아가는 노인도 200만 명이나 된다. 교도통신은 생활보호 수급자 164만 가구 중 노인 가구 비율이 83만 가구로 올해 처음 50%를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후생노동성 조사 결과, 일본 노인 가구의 16.8%는 저축이 아예 한 푼도 없었다.
젊을땐 골프에 술값도 펑펑… 70代엔 택배 배달로 근근이.
살날은 많은데 노후 준비 제로
- 49%가 "노후 자금 준비 안 해"
"연봉 5,000만 원 버는 족족 다 써… 아들 집 사주고 아내엔 밍크코트… 은퇴 후 깨달았을 땐 너무 늦어"
- 일하려고 해도 '저임금 일용직'
수명 늘어 어쩔 수 없이 일터로… 할 수 있는 건 경비·청소업무뿐
열차가 방금 떠나 텅 빈 승강장에 한민석(가명·75)씨가 빠른 걸음으로 내려왔다. 지난 7월 28일 오전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한씨는 책자가 가득 든 종이 쇼핑백 2개를 왼손에, 빵이 든 또 다른 쇼핑백은 오른손에 들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지하철로) 배달 한 번 해주면 내 손에 한 7,000원 정도 들어와요. 예전엔 그렇게 떵떵거리고 살더니 (택배 일하는 노후를 남들이 알면) '꼴 좋다'는 사람이 있을까 봐 그게 걱정이네요."
노후 준비가 부족한 노인이 많아 한국의 75세 이상 노인 고용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 가장 높은 17.9%에 이른다.
한씨는 서울 중구의 한 지하철 택배 회사에서 일한다. 만 65세 넘는 노인들은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어 이를 활용해 택배업을 하는 '실버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다. 한씨의 경우 하루에 3~4건 배달해 2만~3만 원 정도씩 한 달이면 50만 원쯤 손에 쥔다. 그러나 그는 정년퇴직 전까지만 해도 연봉 5,000만 원짜리 대기업 간부 운전사로 일하던 중산층이었다.
2015년 OECD 회원국 고령층 고용률
65세 이상
1위 아이슬란드 38.7%
2위 한국 30.6%
3위 콜롬비아 29%
8위 일본 21.7%
11위 미국 18.2%
21위 영국 10.1%
26위 독일 6.1%
회원국 평균 13.8%
75세 이상
1위 한국 17.9%
2위 멕시코 17%
3위 일본 8.3%
10위 영국 2.4%
14위 독일 1.8%
회원국 평균 4.8%
연령대별 저임금근로자 비율
15~ 49세 - 임시직 19.6%, 일용직 4.5%
50세 이상- 임시직 19.3%, 일용직 8.9%
60세 이상- 임시직 23.3%, 일용직 10%
65세 이상- 임시직 25%, 일용직 10.3%
◇부족한 준비에 '장수의 덫'까지
"멍청했지요." 한씨는 노후 준비를 안 한 자신의 젊은 시절을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매달 들어오는 월급은 아내와 아들 하나까지 세 식구 살기에 부족하지 않은 수입이었지만 '번 만큼 많이 쓴 것'이 문제였다고 했다. "골프도 치고, 여행도 맘껏 다녔어요. 친구들이랑 술 먹으면 술값은 늘 내가 내는 줄 알았고, 아내한테 밍크코트 사주고, 외아들한텐 집 장만도 해줬지요." 매달 월급이 들어오니 돈은 '화수분'처럼 샘솟는 줄 알고, 노후 대비는 사실상 '제로(0)'였다는 게 한씨 설명이다. 은퇴하고 얼마 안 지나 노후 자금 부족을 느끼고 선택한 것이 지하철 택배 일이었다.
문제는 노후 준비 부족이 한씨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란 점이다.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의 중산층 설문(1128명)에선 응답자의 48.7%가 "노후 준비를 안 한다"고 답했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의 작년 11월 조사(대도시 거주 성인 1,771명)에서도 경제적으로 은퇴 준비가 충분한 것으로 조사된 응답자는 34%뿐이었다.
이처럼 초라한 노후 준비에 의학 기술 발전 등으로 살아갈 날은 점점 늘고 있어 '실버 파산'의 수렁은 더 깊어질 조짐이다. NH투자증권이 통계청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 2014년에 60세인 남성의 예상 수명은 82.4세로 24년 전에 비해 6.8년 늘어나고 이에 따라 1억2,900만 원(2인 가구 기준·현재 가치)의 노후 자금이 더 들 것으로 추산됐다. 2035년엔 8.8년 더 늘어 노후 자금이 1억5,900만 원쯤 더 소요된다. 추가 필요 자금은 통계청의 2015 가계금융복지조사에서 도출했다. 노후 생활비 평균이 254만 원(2인 가구 기준)인 것을 근거로 60대 중산층은 250만 원, 70대 중산층은 175만 원(70%), 80대 중산층은 125만 원(50%) 정도가 필요할 것으로 가정했다.
◇그나마 초라한 일자리뿐
"야간에 건물 관리하는 것 말고는 눈 씻고 찾아도 할 일이 없더라고…." 중소기업 임원 출신인 정민수(가명·74)씨는 "은퇴해도 여윳돈이 충분해 '공격적 투자'도 했었다"며 "은퇴 자금을 상가 임대 사업에 투자했다가 실패했고, 투자 소송비까지 쓰면서 남은 재산을 탕진했다"고 했다. 이후 당장 생활비조차 없어 작년부터 야간 건물 관리인으로 일한다. "기업 임원 출신이라 경력을 살릴 일이 있을 줄 알았지만 아무 곳도 노인을 써주지는 않더라"고 했다. 노후 준비 부실에 기대 여명이 늘면서 노인들은 어쩔 수 없이 일터에 내몰리지만, 그나마도 시간제 경비·청소 업무 등이 대부분이라 노후가 더욱 힘겹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취업자 중 임금 근로자의 비중은 47.5%에 불과하며, 임금 근로자이면서 상용직인 사람의 비율은 더 낮아 10명 중 1명꼴(12.3%)이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장은 "고령화 추세에다 황혼 이혼과 같은 예기치 않은 리스크까지 충분히 감안해 미리 노후 계획을 짜놓지 않는다면 중산층이라도 실버 파산을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주택연금 [住宅年金 - reverse mortgage loan]
고령자가 집을 은행에 담보로 맡기고 자택에 거주하면서 노후 생활자금을 사망할 때까지 매달 연금식으로 지급받는 금융상품으로 2007년 7월에 도입됐다. 부부 중 한 사람이 사망할 경우 남은 배우자가 사망할 때까지 같은 액수의 연금이 지급된다. 오래 살수록 가입자에게 유리하며, 총 지급액이 주택가격을 넘어도 정부가 지급을 보증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