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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시작한 1시간 동안의 창덕궁 전각(殿閣)탐방을 마치고, 이어서 11시에 시작하는 후원 관람시간에
맞추어 현재 창덕궁과 창경궁을 잇는 통로인 함양문 앞으로 이동..
인터넷 예약과 현장에서 합류한 10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조선시대 왕들이 사랑한 정원인 창덕궁 후원으로 들어갑니다..
◈ 창덕궁 후원(昌德宮後苑)
창덕궁 북쪽에 창경궁과 붙어 있는 한국 최대의 궁중 정원으로 궁원(宮苑), 금원(禁苑), 북원(北苑), 후원(後園)으로도 불립니다.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 할 당시 조성한 후원은 성종대에 건립된 창경궁까지 그 영역이 확장되었으며, 이들 궁궐이 다른 궁궐보다
특히 왕실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은 넓고 아름다운 후원 때문일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후원이 훼손되어 광해군이 창덕궁과 함께 1610년(광해 2)에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인조, 숙종, 정조, 순조 등 여러 왕들이 개수하고 증축하여 많은 전각과 누각과 정자가 시대에 따른 특색을 보여줍니다..
후원에는 왕실 도서관이었던 규장각과 더불어, 영화당(映花堂), 주합루(宙合樓), 서향각(書香閣), 영춘루(迎春樓), 소요정(逍遼亭), 태극정(太極亭), 연경당(演慶堂) 등 여러 정자와 연못들, 물이 흐르는 옥류천(玉流川)이 있고, 많은 나무, 꽃들이 심어져 있습니다..
또한 후원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약간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해 자연을 더 아름답게 완성한 절묘한 솜씨를 보입니다..
네 개의 골짜기에는 부용지(芙蓉池), 애련지(愛蓮池), 관람지(觀纜池), 옥류천(玉流川) 영역이 펼쳐지며 들어갈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깊숙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인 곳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뒷산 응봉으로 이어집니다.
세계 대부분의 궁궐 정원은 보고 즐기기 위한 관람용으로 한눈에 볼 수 있는 장대한 경관이 펼쳐지나, 창덕궁 후원은 작은 연못과
정자를 찾아 여러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온몸으로 체험해야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후원 배치도~
창덕궁의 동궁지(地)였던 중희당(重熙堂) 터를 출발해서 대조전 일원과 창경궁 사이 돌담길을 따라 250m를 걸으면 후원의 첫 번째
정원인 부용지에 이르게 됩니다..
부용정(芙蓉亭).. 부용지 남쪽, 위에서 보면 열 십(十)자 모양을 이루는 정자로 원래 1707년(숙종 33)에 택수재(澤水齋)를 지었다가
1792년(정조 16년)에 부용지를 고치면서 부용정(芙蓉亭)이라 불렀습니다.. 연못 안에 팔각 석주를 세운 다음 그 위에 목재를 얹어서
누각을 지었으며, 창을 들쇠에 매달면 정자는 사방으로 트이게 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왕이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축하해 주기도 했으며, 정조는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고 전합니다..
부용지 중앙에는 소나무를 심은 작은 섬이 있는데, 네모난 연못과 둥근 섬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반영한 것입니다..
어수문(漁水門).. '주합루'에 오르는 문으로 왕만이 출입할 수 있었고, 신하들은 양 옆 협문으로 드나들었으며 취병을 설치했습니다.
주합루(宙合樓)..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창건한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왕실 직속 도서관인 규장각을, 위층은 열람실 겸 누마루를
만들었습니다.. 주합루 주변은 화계(花階)로 정원을 꾸몄으며, 누마루에서 바라보는 부용지는 창덕궁 후원의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단원(檀園) 김홍도의 규장각도(奎章閣圖)..
주합루 좌측에는 서향각(書香閣)이라는 규장각의 부속건물이 있는데 이곳은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 어제(御製; 왕이 지은 글),
어필(御筆)을 옮겨와 폭서(曝書; 서책을 볕에 쬐고 바람에 쐬는 일)하던 곳이었습니다..(현재는 보수중으로 가림막을 설치함..)
영화당에서 바라본 좌측에는 부용정과 우측은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으로 '네개의 샘물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는 집' 이라는 뜻..
영화당(暎花堂).. 임진왜란 전에 창건됐으며, 지금의 건물은 1692년(숙종 18)에 개건한 것으로 숙종은 왕자와 왕손을 모아 꽃구경을 하고 시를 쓰기도 했으며, 영조는 공신들을 접견하고 시를 하사하기도 했고, 순조 때에는 문무신하들이 이곳에 모여 시예(試藝)를
겨루기도 했습니다..(영조가 친필로 기록한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영화당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춘당지(春堂池)와 춘당대인데, 춘당지는 후원의 북쪽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부용지에서 동으로 흘러드는 물이 모여드는 연못으로 창경궁의 춘당지가 바로 그것이며, 춘당지에서부터 영화당에 이르는 평평하고 높직한 마당을 춘당대라합니다.. 현재 창경궁과 나뉘는 담장에 가로막혀 일부밖에 볼 수 없는 춘당대는 조선시대 선비라면 누구라도 한번쯤
서보기를 소원했던 곳으로, 몇 단계의 과거 절차 가운데 국왕이 친림(親臨)하는 최종시험인 전시(殿試)가 이곳에서 열렸습니다..
전시가 열리면 임금은 영화당에 거둥하여 시험을 참관했었고, 국왕의 활쏘기 연습장, 기우제, 연회를 벌이는 공간으로 활용되는 등
국가의 다양한 공식·비공식 행사를 치르는 중요한 야외 공간이었습니다..
춘당대를 지나 북쪽으로 이동하면 좌측으로 길게 이어지는 담장에 두 개의 문이 차례로 나있는데, 첫 번째 문은 금마문(金馬門)으로
이 문 안쪽에 '의두합'과 운경거(韻磬居)가 들어서 있으며, 두 번째 문은 애련지와 연경당으로 통하는 '불로문'이 있습니다..
의두합(倚斗閤).. 지금은 기오헌(寄傲軒)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데, 왕실 건물이기보다 선비의 조촐한 사랑채처럼 작고 소박합니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할 때 옛 독서처 자리에 고쳐 지은 집으로 당시 이름이 '의두합'이었으며 효명세자의 검소함을 알 수 있습니다..
불로문(不老門).. 애련지와 연경당으로 통하는 문으로 화강암 통돌을 아무 장식 없이 ㄷ자 모양으로 다듬어 세우고 그 위에 '不老門'
이라 음각을 했으며, 모서리의 안쪽은 각지게 마감하고 바깥쪽은 둥글게 서로 다른 기법으로 처리한 점이 눈길을 끕니다..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 의두합에서 건너다보이는 네모진 연못이 '애련지'이고, 애련지 북쪽 물가에 선 정자가 '애련정'
입니다.. 연꽃을 사랑한다는 뜻의 '애련'은 숙종이 정자에 붙인 이름인데, 그래서 연못은 자연스레 애련지가 되었습니다..
애련지 서편의 작은 못을 지나 도랑을 가로지른 조그만 돌다리를 넘어서면 연경당(演慶堂)이 나오는데, 원래는 120여 칸에 달하는
이 건물군의 사랑채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건물 전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관람동선으로 인해 아래에서 설명합니다..)
애련정을 좌측에 끼고 작은 언덕을 넘어 좀더 북쪽으로 나아가면 깊은 수림 속에 두 개의 연못과 그 주위에 다양한 모습의 정자가
오밀조밀하게 어우러진 곳에 이르는데 '관람지'라 부릅니다.. 주변은 잘 자란 나무와 여러 형태의 정자가 어우러져 옥류천 일원과
더불어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잘 정돈되고 그윽한 운치를 선사하는 곳으로, 왕실 정원의 품격을 엿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관람정(觀纜亭).. 관람지에 모여있는 세개의 정자 가운데 하나로 부채꼴의 이국적인 모양이 특징입니다..(건너에 보이는 승재정..)
승재정(勝在亭)에서 내려다본 관람정..(확연하게 들어나는 부채꼴 모양의 지붕과 그 위에는 용마루와 용두도 보입니다..)
존덕정(尊德亭).. 관람지 일대의 중심건물인 존덕정은 선조의 어필 현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선조 때에는 있었던 듯하며, 마치
지붕이 이중으로 겹쳐 있는 것 같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고, 관람정, 승재정과는 또 다른 형태인 육모형의 정자입니다..
존덕정에서 북쪽으로 언덕을 올라서면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옥류천(玉流川) 영역이 나오는데, 이곳은 창덕궁
후원의 특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공간으로 평가됩니다..
취한정을 지나면 옥류천과 소요정(逍遙亭)에 이르게 됩니다..
소요정 앞에서 담은 옥류천 상류의 모습.. 옥류천은 주어진 자연의 조건을 그대로 살리면서 최소한의 인공을 가해 만들어낸 물길로,
옥류천 상류의 중심에는 바위 소요암과 주변에 넘치지 않는 인공물이 조화롭게 어울어져 있습니다..(뒤로 보이는 어정과 청의정..)
소요암(逍遙巖).. 옥류천의 중심지로서 바위 하단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그 위에 새겨진 '오언절구' 시조는
이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입니다..
[펌] 소요암 주변의 인공수로와 폭포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진 한 장을 빌렸습니다..
인조는 소요암 주변의 계곡과 더불어 자연의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약간의 변형을 주었는데, 소요암의 바닥돌에 오목하게 홈을
파서 왕이 길어다 먹었다는 어정(御井)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흘러들어 얕고 넓게 고였다가 암반을 둥글게 휘돌아 소요정 앞에서는
작은 폭포가 되어 떨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청의정(淸漪亭).. 소요정에서 소요암을 지나면 청의정이 나오는데, 현재 궁궐 안에 단 하나 남은 초가지붕 건물이라서 이색적이고,
또한 정자 앞에는 작은 논을 만들어 농민의 정서를 체험하려는 배려가 느껴집니다..(범준이를 찾아라!..)
관람동선 때문에 존덕정과 옥류천 일원을 먼저 탐방하고 돌아 나오는 길에 들린 연경당(演慶堂),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집으로, 우리 건축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면서 짜임새 있게 지어졌으며 또한 미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고종대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연경당은 120여 칸에 이르는데 현재의 규모도 이와 비슷하며, 벽돌로 쌓은 담장, 사랑채나 정자 문살의
고급스런 치장, 사랑채 팔작지붕 합각의 꽃담, 정자 주변의 돌난간 등 사대부 상류주택에서는 보기 어려운 요소가 많아 궁가(宮家)에
가깝습니다.. 다만 정자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홑처마지붕에다 단청을 올린 집채는 하나도 없어 전체적인 인상은 소박합니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1828년(순조 28)경에 창건했으며,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대 이후 규모가 크게 확대되고 모습도 달라지면서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된 듯합니다..
장락문(長樂門).. 연경당의 대문으로 '즐거움을 오래오래 누리는 곳에 들어가는 문'이란 뜻으로 이상 세계로 들어감을 나타냅니다..
장락문을 들어서면 두 개의 중문이 있는 내행각이 나오는데, 우측은 사랑채로 통하는 장양문(長陽門)이고 좌측은 안채로 연결되는
수인문(修仁門)입니다..(사진에 장락문 안쪽으로 보이는 문이 장양문입니다..)
연경당 사랑마당에서.. 장양문을 들어서면 전면으로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 오른쪽으로는 선향재(善香齋)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연경당(演慶堂)은 사랑채의 당호이면서 집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왼쪽 뒤편으로 안채와 연결된 구조입니다..
오른쪽 끝 2칸은 누마루이고, 계단 앞에는 말을 타고 내릴 때 딛도록 만들어놓은 디딤돌도 보입니다..
선향재(善香齋).. 서재 겸 응접실로 쓰이던 건물로서 측면 벽체는 청나라풍 벽돌을 사용하였고 전면은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해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데 이런 요소는 연경당이 고종이나 순종대 이후 변화하는 과정에서 채택된 것으로 보입니다..
연경당의 마당 좌측으로 일각대문과 사랑채와 안채를 가르는 담장이 중간에 한 번 꺾이면서 남북으로 뻗어 있고, 그 앞에는 괴석을
심은 석함이 여럿 보입니다..
pm 12:34분, 구 선원전 일원과 궐내각사를 끝으로 창덕궁 후원 관람을 마치고 금천교와 진선문이 보이는 돈화문 안쪽에 도착..
창덕궁에서의 모든 탐방일정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다시 담은 정문인 돈화문의 모습..(점심식사를 하고 다음 코스인 창경궁으로..)
◈ 창경궁(昌慶宮)의 연혁
1) 조선 전기
- 1408년 태종이 세종에게 이양하고 거처한 수강중 터에 1483년(성종 14)에 창건.
- 세명의 대비,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추존왕 덕종의 비 소혜왕후 한씨, 그리고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 를 모신 새 별궁.
2) 조선 후기
- 1616년(광해군 8) 일부재건, 현존하는 궁궐 중 시대적으로 가장 오래된 궁궐.
- 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통명전, 환경전, 양화당 등 내전의 대부분이 불타고 1633년(인조 11)에 중건됨.
- 1648년(인조 26)에는 동궁인 저승전을 건립.
- 효종 7년에 요화당, 난향각, 취요헌, 계월각을 새로 지음.
- 1679년(현종 11)에 건극당이, 숙종 12년에는 함인정 서쪽에 취운정이 건립됨.
- 정조 즉위년(1776년) 생모 헌경왕후(혜경궁홍씨)를 위해 통명전 북쪽에 언덕위에 자경전을 건립.
- 1830년(순조 30)에 창경궁은 화재로 많은 전각을 소실하고 순조 34년에 중건.
- 창경궁은 고종 연간까지는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다가 일제에 의해 변형 왜곡됨.
- 1911년부터 궁이름이 창경궁에서 창경원으로 바뀜.
3) 대한민국
- 1983년 창경궁 복원사업이 시작되면서 창경원에 있던 동물원을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일본이 일부러 심어놓았던 벚나무도
뽑아내었다. 1986년에는 명정전 회랑과 문정전 등 일부 전각을 복원했으며, 해방 이후 조선시대 왕실의 도서를 관리하던 장서각의
이름으로 남아 있던 자경전터의 박물관은 그 기능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넘겨준 뒤 1992년 헐리고 지금은 녹지가 되었다.
현재 창경궁에는 정문 영역의 홍화문과 옥천교가 있고, 외전 영역으로는 동쪽의 명정문과 서쪽의 빈양문을 경계로 명정전·문정전·
숭문당이 있으며, 내전 영역으로는 함인정·경춘전·환경전·통명전·양화당·영춘헌·집복헌이 있다.
지금은 창덕궁에 속한 부용지 일대까지 아우르던 후원 영역에는 춘당지와 관덕정, 그리고 일제 때 세워진 식물원이 남아 있다.
~창경궁 조감도~
창경궁 안내책자..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을 궐내에서 담은 모습.. 다른 궁궐의 정문이 남향인 것과는 달리 동향을 하고 있으며, 궁궐의 정문이 갖는 웅장함이나 화려함보다는 반듯하고 아담한 모습으로 위엄을 갖추고 있습니다..
현재 홍화문을 가장 멋지게 볼 수 있는 방법은 명정문이나 명정전 앞에서 뒤돌아보는 것으로, 정면 코앞에서 올려다보는 것과 다르게 오히려 당당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홍화문의 좌우로 이어진 담장에는 행각과 연결되어 꺾이는 부분에 십자각이 있는데 이것은 궁을
지키는 망루 역할을 하던 곳으로 경복궁 동·서 십자각의 변형된 형태입니다..
옥천교(玉川橋)..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의 앞을 흐르는 금천(禁川)인 옥류천에 가로 질러 놓여 있는 다리로서 양옆에는 아름다운
돌난간을 세웠으며 양끝에는 석수(石獸)를 돌로 깎아 세웠습니다.. 그 앞에는 정전으로 들어서는 명정문도 보이고..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 2개를 이어 옥천교를 지탱하고, 역삼각형 공간에는 억센 표정을 한 도깨비(나티) 얼굴을 새겨놓았습니다..
옥천교의 또 다른 매력이라면 서울에 남아 있는 여느 궁궐과 달리 그 밑을 흐르는 금천이 유일하게 살아 있다는 점으로 가뭄이 아주
심하지 않으면, 창경궁의 금천에는 북쪽의 춘당지에서 나온 물이 옥천교를 거쳐 늘 남쪽으로 흐릅니다..
품계석이 세워진 조정을 지나면 전면에 보이는 건물이 창경궁의 법전인 명정전으로 단층 건물로서 조선시대 궁궐의 다른 법전 전각,
즉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중층구조의 웅장하고 권위적인 규모를 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인데, 이는 성종의 대대적인
창경궁 확장이 대비전의 세 어른을 위한 것이었음에서 알 수 있듯이, 외전보다 내전이 발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명정전(明政殿)..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의 전각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창경궁이 창건되었던 때인 1483년(성종 14)에
건립되어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옛 모습으로 복원했고 이때 지어진 것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었습니다..
월대계단 중앙의 답도에는 봉황이 새겨졌으며, 명정전 사면의 문은 꽃창살로 장식되었고 내부 천장의 단청은 부드럽고 차분합니다..
창경궁의 해설은 '우리궁궐지킴이' 소속 해설사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창덕궁에 비해 비교적 적은 인원이었지만 더욱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주시는 해설사님..)
명정전의 내부와 어좌(御座)..(조선 왕조의 정전 중 가장 오래된 명정전은 국보 제226호입니다..)
중앙 칸 천장의 봉황은 나무 조각을 따로 해서 채색 후 장식한 것으로, 그 모습이 무척 평화롭고 사실적이며, 이렇게 명정전 내부의
구조나 설치물은 다른 궁궐과 비슷하나 소박하면서도 멋스러운 고전적인 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 5대궁궐 정전(正殿)의 천장 비교.. 용: 경복궁-근정전, 경희궁-숭정전, 덕수궁-중화전 봉황: 창덕궁-인정전, 창경궁-명정전
명정전에서 문정전으로 이어지는 복도각(複道閣).. 비나 눈을 맞지 않도록 지붕을 씌워 만든 통로..
문정전(文政殿).. 문정전은 왕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이었지만, 왕실 특히 왕대비의 신주를 모신 혼전으로도 많이 활용됐습니다..
혼전(魂殿).. 왕이나 왕비의 국상(國喪) 중에 장사를 마치고 난 뒤, 종묘에 입향할 때까지 신위를 모시는 공간..
창경궁의 외전 영역에서 유일하게 남향을 하고 있고, 사정전·선정전 등 다른 편전과는 다르게 사각기둥을 사용한 것이 특징입니다..
숭문당(崇文堂).. 문정전을 돌아나오면 서쪽 경사진 곳에 문정전과 함께 명정전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숭문당은 건물이 들어서 있는
자리가 모호하고 주변 건물에 비해 규모도 작지만 고풍스럽고 당당한 느낌을 주는 전각입니다..
건물의 앞에는 툇마루가 개방되어 있으며, 퇴칸의 기둥이 2층 누각처럼 높은 주춧돌이 받쳐져 있지만, 뒤쪽은 낮은 초석을 이용한
아기자기한 구조로 앞에서 본 건물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입니다..
학문을 숭상한다는 편액의 의미대로 영조 때는 이곳에서 친히 성균관의 태학생을 불러 시험을 치르기도 하고 주연을 베풀기도 했다.
'崇文堂' 편액과 '日監在玆'(일감재자) 현판은 영조의 어필입니다..
함인정(含忍亭).. 명정전 뒤의 행각 끝으로 보이는 빈양문(賓陽門)은 외전과 내전을 이어주는 문으로, 이 문을 나서면 바로 보이는
전각이 함인정입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인양전이 외전에서 복도로 연결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창경궁의 전각이 대부분 불타버리자
1633년(인조 11)에 인경궁에 있던 함인당을 이 자리에 옮겨 세우고 함인정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영조 때는 이곳에서 문무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등 크고 작은 접견 행사가 이루어졌습니다.. [2005년 1월 촬영]
함인정 북쪽으로 내전의 중요 전각인 환경전과 경춘전이 있는데, 남향한 환경전이나 동향한 경춘전 모두 휑하니 넓은 곳에 번듯하게 앉아 있는 이유는 이 건물들을 이어주던 부속건물이 모두 사라지고 지금처럼 본채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전(歡慶殿).. 임금의 정침으로 시대에 따라 여러 임금과 세자가 머물렀는데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했고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요절했을 때에는 빈전(殯殿)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편액은 순조의 어필입니다..
경춘전(景春殿).. 환경전 서쪽의 동향 건물로 주로 왕비와 세자빈이 머물렀으며 왕실의 안살림이 이루어지던 대표적인 생활공간이며,
또한 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크게 장수한다는 뜻을 지닌 편액 또한 순조의 글씨입니다.. [2005년 1월 촬영]
통명전(通明殿).. 창경궁의 침전으로 내전의 중심건물, 남향을 하고 있으며 내전의 건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며 서쪽의 산자락을
화계로 처리하고 그 아래에는 연당을 조성하여 건물이 지닌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비의 침전이기에 지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으로, 용마루가 없는 이유는 왕(용)이 사용하는 침전 위에 불경하게 다른
용이 위에서 내리눌러서는 안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창경궁의 경우는 왕의 일상적인 거처가 아니었기 때문에 왕비의 침전인 통명전만 있고 국왕의 침전은 별도로 없습니다..
양화당(養和堂).. 통명전의 동쪽에 위치한 건물로 통명전에서 생활하던 내명부(內命婦)의 수장들이 접대 공간으로 사용했던 건물로
추정되며,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 양화당을 거처로 삼았다고 전합니다..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 양화당 동쪽 너럭바위 너머에는 행랑으로 둘러싸인 영춘헌과 영춘헌의 서행각인 집복헌이 있다. 영춘헌은 정조가 재위하는 동안 기거한 곳이자 1800년에 승하한 곳이기도 하며, 집복헌에선 1735년(영조 11) 사도세자가 태어났으며,
1790년(정조 14)에는 순조가 태어났습니다..
지금의 모습은 2000년에 변형된 부분을 해체하여 복원한 것인데, 너무 말쑥하고 무표정하여 아쉬움이 남습니다..
2010년 궁궐 통합관람권 실시와 종묘의 제한관람으로 지금은 패쇄된 창경궁과 종묘를 연결했던 육교위에서.. [2005년 1월 촬영]
종묘는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숲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일제감정기 1931년 현재의 율곡로를 만들고 궁궐을
훼손 시키며 갈라놓고 일본식 육교로 연결했었습니다..
지금은 창경궁·종묘 연결 복원 사업이 한창으로 율곡로를 지하화하고 담장을 새로 쌓는 등 연결해 고궁녹지를 확보한다고 합니다..
◈ 종묘(宗廟)의 연혁
1) 조선 전기
- 1392년(태조 1) 태조 이성계 조선 건국, 4대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에게 존호를 올림.
- 1395년(태조 4) 종묘 창건, 신실 7칸 좌우익실 각각 2칸 규모로 정전을 세움.
- 1421년(세종 3) 별묘인 영녕전 건립, 신실 4칸, 좌우익실 각각 1칸.
- 1546년(명종 1) 정전을 4칸 늘려 총 11칸 규모.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불에 탐.
2) 조선 후기
- 1608년(광해군 즉위년) 정전 11칸, 영녕전 10칸 규모로 다시 세움.
- 1667년(현종 8) 영녕전을 2칸 늘려 총 12칸 규모.
- 1726년(영조 2) 정전을 4칸 늘려 총 15칸 규모.
- 1836년(헌종 2) 정전을 4칸 늘려 총 19칸, 영녕전을 4칸 늘려 총 16칸.
3) 대한민국
- 1995년 종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 2001년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
종묘(宗廟).. 유교를 지배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뒤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하고 국가적인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왕실 조상의 혼을 신주(神主)로 받들어 국가적인 제례를 올리며 왕권의 존엄성을 내외에 과시하고 왕조의 근간을 확립하였던, 숭고하고 상징적인 유교적 공간이며 최고의 사당 건축입니다..
~종묘 조감도~
종묘 안내책자..
종묘의 정문인 창엽문(蒼葉門)은 원래 전면 중앙에 돌계단이 있었고 기단도 높았으나 지금은 전면 기단이 도로에 파묻혔으며, 문은
정면 세 칸의 평삼문(平三門)으로 3개의 판문 위에 홍살을 두고, 정문 좌우로는 종묘외곽을 두르는 담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문은 종묘의 다른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구조가 아주 단조롭고 소박하지만 우직한 느낌에 편안한 모습입니다..
종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표지석..
정문에서 우측 숲길로 들어서면 연못 동쪽으로 향대청 일원에는 망묘루, 공민왕 신당, 향대청이 보이는데 망묘루(望廟樓)는 종묘를
관리하는 관원들이 업무를 보던 곳으로 이름에는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先王)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공민왕 신당(恭愍王神堂).. 망묘루 동쪽에는 남향으로 단칸의 전각이 있는데, 고려 31대 공민왕과 왕비를 모신 사당으로 종묘를 창건
할 때 건립했다고 전합니다.. 조선 왕조의 신성한 종묘 안에 고려 왕의 사당을 모신 것은 역성혁명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고려
전통 왕계의 마지막 임금이자 개혁군주인 공민왕을 모셔 고려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의미를 전하고자 함으로 해석됩니다..
향대청(香大廳).. 제사 전날 왕이 종묘제례에 사용하기 위해 친히 내린 향·축문·폐백과 같은 제사 예물을 보관하였던 장소입니다..
앞에는 행각이 길게 자리 잡고 있어 두 건물 사이에 남북으로 긴 뜰이 만들어졌고, 툇마루 앞에는 신발을 벗는 섬돌을 길게 설치해
여러 사람이 드나들기 편하게 했습니다..
재궁 일원의 서쪽에 위치한 어목욕청(御沐浴廳)의 현재 모습은 건물이 고유의 기능을 잃었듯이 구조도 변한 상태입니다..
재궁에서 제례 준비를 마친 왕과 세자는 서협문을 통해 나와서 어로와 세자로를 따라 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습니다..
정전(正殿)은 왕과 왕비의 승하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에 그 신주를 옮겨 와 모시는 건물로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됩니다..
정전의 신실 19칸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재위 중인 왕의 4대 조상, 역대 왕 중에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를 모셨습니다..
정전의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 곳인데, 남문은 신문(神門)으로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고, 동문으로는 제례 떼 제관이 출입하고
서문으로는 악공, 춤을 추는 일무원, 종사원이 출입합니다..
동시대 단일 목조건축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형태인 정전은 신위가 늘어날 때마다 신실을 증축했기 때문이며, 이런 구조는 중국의
종묘 건축과는 다른 조선의 형식입니다.. (넓은 월대의 박석은 궁궐보다도 더 투박하고 울퉁불퉁 한 것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신실의 동서쪽 끝에는 창고와 부속실들을 마련했으며, 특히 직각으로 꺾이며 남쪽으로 이어진 5칸의 월랑은 종묘 건물만의 특이한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외국 관광객을 위해서 별도로 해설을 하고 있는 연세가 지긋하신 해설사님..)
공신당(功臣堂).. 정전의 넓은 월대 아래 동쪽에 있는 기다란 건물로 역대 왕의 공신들의 위패 83위(位)가 모셔져 있는 사당입니다..
태조 때 처음 3칸으로 창건됐으나 정전이 증축됨에 따라 동쪽으로 이설(移設)되며 증축되어 지금처럼 16칸의 긴 건물이 되었습니다..
단순함과 소박함이 미덕으로 드러나는 공신당은 정전의 위엄과 규모에 눌려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지만 우리 건축에서 단일 건물로
가장 긴 목조건축물 중 하나입니다..
칠사당(七祀堂).. 월대 아래 서쪽에 있는 건물로 토속신앙과 유교사상이 합쳐진 사당이며 왕실과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의 생활이
무탈하게 잘 풀리도록 봄·여름·가을·겨울의 운행과 관계되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영녕전(永寧殿).. 1421년(세종 3)에 정종의 신주를 정전에 모시며 신실이 부족하자 모시고 있던 신주를 다른 곳에 옮겨 모시기 위해
새로 지은 별묘로, 영녕전은 신주를 정전에서 옮겨 왔다는 뜻에서 조묘(祧廟)라고도 하며 형식은 정전 일원과 유사하지만 정전보다
규모가 작고 좀 더 친근감 있게 지어졌습니다..
pm 4:20분, 영녕전의 신실 16칸에는 모두 34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습니다..(담 밖에서 바라본 영녕전 일원..)
영녕전의 가운데 4칸은 태조의 4대 조상과 그 비를 모신 곳으로 다른 신실보다 지붕이 높으며 좌우의 각각 6칸의 신실에는 정전에서
옮겨 온 왕과 왕비 및 추존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있고, 이중으로 된 월대 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세곳에 문을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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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궁궐길라잡이로 나서보시죠?
잘 봤어요. 수고하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