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봄 <시에> 신인상 시부분 당선작
붉은 길 / 황지형
손금을 들여다보다가 일정한 간격으로 밀려오는 물결에 빠지고 말았죠 빙글빙글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갔어요 발이 닿는 곳은 시간의 틈새가 아니었어요 쉬었다 갈 수 있는 오아시스는 어디인가요 사막의 갈비뼈인 활무늬가 있는 언덕 달콤한 구멍에 빠지는 개미지옥도 있다죠 지리부도에 없는 길이 주름진 손안에 있군요 깊게 뿌리 내린 티눈이 선인장처럼 자랐네요 매니큐어 칠한 손톱이 빨간 꽃을 피웠군요 박박 긁었던 자국은 지울 수 없을 텐데 말이죠 이제 우리 손잡지 않을래요? 말굽무늬 지문이 겹쳐지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지도 모르잖아요 손바닥이 참 부드럽군요 확대경으로 사막에 닿았던 기억을 들여다봐요 옆걸음질 치는 모래물결이 보이나요 출렁이는 언덕이 어지러울 거예요
바둑판 밤색 가디건을 뜨다 / 황지형
코바늘로 사슬뜨기 다섯 코를 만들고 대바늘로 바꾸어 이야기를 쭉쭉 늘릴 거예요 밖으로 나가고 싶은 계절, 우리의 일기변화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죠 보온성이 좋은 말로 앞뒤를 뜰 거예요 겉뜨기와 안뜨기로 다섯 단씩 짜던 바둑판무늬도 풀어야 할 때가 있지요 오돌오돌한 이야기를 짤 수 없다면 여간 고역이 아니잖아요
신축성 좋은 고무뜨기는 사슬을 몰고 장문으로 달려가겠죠 목선까지 짰던 줄거리도 한 코씩 풀어내야 한답니다 복통이나 감기 정도로 생각하던 일기장을 훔쳐본 이야기죠 여름과 겨울 사이에 시계바늘이 있어요 머릿속 그림과는 다르다는 걸 아시겠죠 가능하다면 일기장 문구들을 베끼고 코 걸기 힘든 그림자들을 짜 넣어 볼 거예요 현기증과 황홀감도 섞여 있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어깨선에 단추를 달고 주머니도 붙이면 맨몸이던 겨울 숲에 눈이 내리겠죠 대바늘을 아무리 움직여도 한 줄도 꿸 수 없을 거예요 그럼 코바늘로 바꾸어 피콧뜨기로 마무리 할까요 안뜨기와 겉뜨기로 빼곡한 문장의 코가 거짓말처럼 풀어졌어요 방울코는 안 되겠죠 돗바늘로 이음새 터진 줄거리를 엮어 볼 거예요 당신이 읽고 있는 문장은 게이지를 낼 수 없군요 이제 입어보실래요?
천상문집 앞을 지나치다 / 황지형
천상문집 앞을 지나간다
외닫이 미닫이 쌍여닫이 문틀이 세워져 있다
천상, 문을 만드는 집이다
간판에 새겨진 글자를 보며
천상을 최초로 두드린 자는 누구일까
미닫이를 밀고 문집으로 들어간다
어깻죽지에서 바스락바스락 날개가 돋는 것 같다
벽 속에 얼굴을 밀어 넣고
맨몸으로 간다
외미닫이 쌍미닫이를 똑똑 두드리자
안에서 구름이 걸어나온다
구름아 안녕!
비를 꼬아서 동아줄을 만들어줄까
아니, 아직은 촉촉한 지상이야
문짝에 새긴 국화꽃이 흔들리고
돌쩌귀에서 번개가 친다
벽 속에 밀어 넣었던 얼굴을 꺼내자
감전된 얼굴에 향기가 묻어난다
천상으로 가는 길에 융단을 깔아본다
부드럽게 열리는 문에서
와르르 계단이 쏟아진다
여자가 외닫이를 닫고 새벽으로 뛰어가면
밤을 동행한 남자는 미닫이를 밀며 들어온다
천상, 부대끼는 진흙세계다
층계 아래에 핀 국화의 얼굴이다
[당선소감]
붉은 기운을 찾아서
감기 기운이 들라치면 빨강 옷을 입고 붉은 선짓국을 즐겨 찾았다. 지리멸렬한 시간이 흐지부지 흘러갈 때, 고사리와 토란 줄기에 갖은 양념이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삶에 대한 불씨가 다시 타오르곤 했었다. 억지로 생의 의지를 불태웠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시를 만나고부터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 힘겨울 때마다 만난 시들이 어머니의 손바닥처럼 따뜻한 불씨 역할을 했다. 냉기를 몰아내고 곤히 잠든 아이가 되곤 했었다. 보잘것없는 존재의 의미조차 감내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서서히 붉은 기운이 내 주위를 감돌았다.
오래된 책을 뒤적이며 어설프게 흘러갔던 세월도 살뜰하게 보담을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 나는 그 시간 속에서 행복과 소망을 만났다. 그리고 철저하게 혼자라는 고독과 외로움을 즐겼지만 반대로 매번 두렵고 또 두려울 따름이었다.
당선 소식은 내게 있어 붉은 기운을 찾아 떠나도록 허락한 초록여행이라 생각한다. 매 순간 새순이 돋아났던 순간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이제 푸른빛을 찾아 사막에 첫발자국을 과감히 딛는다.
우주 구석구석 초록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채찍과 격려로 이끌어 주신 임윤 시인께 감사드리며, 시나위 동인과 반문 동인에게도 고마운 마음이다. 시를 쓰면서 가르침을 받았던 수많은 분들에게 일일이 감사 말씀을 못 드리는 것도 그저 죄송스러울 뿐이다. 사막의 길을 딛게 해주신 계간 『시에』와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나는 그 길을 기쁘게 꾸준히 걷고 싶다.
한 달에 몇 번씩 작품 토론을 나누었던 문우들, 그리고 혈육 같이 소중한 자현, 광련 언니에게도 반가운 소식 전한다. 객관적인 잣대로 묵묵히 조언을 해준 남편, 만나기만 하면 토닥거리는 두 아들 춘우, 찬우와 함께 기나긴 여행을 떠나고 싶다.
황지형 시인(본명 황말남)
울산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문과 졸업.
[심사평]
자신의 색깔을 보이라
150여 명의 응모자 중에서 최종심에 올라온 대상이 9명이었다. 이들 9명 중 물론 논란이 된 응모자도 많았다. 특히 장형욱의 작품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높이 살만하다. 그의 모든 작품이 고르고 오랜 수련을 거친 작품이라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작품들이 너무 상이해서 다채롭지 못했다. 김용주의 작품은 현장감은 있으나 그 현장감을 한 차원 높게 상상력으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점이 아쉬웠다. 최현수는 멋을 부리고 있고, 정승현이 경우는 너무 정연해서 문제였다. 그리고 신혜정은 시적 상상력에 비해 구체성이 떨어진다.
이들 외에 박응식, 나문석, 정이향, 황지형의 응모작들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다. 심사위원들 사이에 이견이 엇갈려 합의를 보지 못하다가 결국 네 명 모두를 당선시키기로 최종 결정했다. 박응식은 사투리를 감칠맛나게 활용할 줄 알 뿐만 아니라 그 사투리가 서정적 긴장감 속에서 자리를 잘 잡고 있다는 점을 높이 샀다. 그리고 정이향의 시는 중년여성의 내면이 시적으로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있는 점을, 나문석은 시라고 하는 정서적인 대상을 기하학적인 구조로 처리하려는 의지를 보인 점, 그리고 황지형의 경우는 소재를 자연스럽게 끌고 간 점 등을 높이 샀다.
네 분에게 먼저 등단을 축하한다. 그러나 이제 출발점에 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시인이 넘쳐나는 시대에 나만의 색깔을 가질 수 있느냐를 괴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마르쿠제에 의하면 현대인들은 상황에 너무 쉽게 휩쓸린다고 한다. 남처럼 쓰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길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하기 바란다. 그 길은 아집으로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 삶의현장과 상상력, 그리고 공부를 통해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심사 : 전기철, 이재무, 양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