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亞扁說羅, Henry G. Appenzeller, 1858. 2. 6~1902. 6. 11) 선교사
주제어 [내한 선교사]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 서더튼에서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스위스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로부터 출생하여, 미국에 있는 플랭크린 마샬대학을 졸업(1878)했다. 두루 신학교에 진학(1882)하였으며, 1884년 12월 엘라 닫지(Ella Dodge)와 결혼했다.
1876년 10월 6일 웨스터체스트의 장로교회에서 봉사하던 풀턴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고 1879년 4월 20일에 좀더 활동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1878년 프랭클린 마샬대학을 졸업하고 드루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881년경부터 인도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던 중 파울러 감독의 요청으로 선교지를 한국으로 정하여 1885년 2월 1일 스크랜튼, 언더우드와 더불어 부산으로 출발하여 4월 2일에 도착하였고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 항구를 통하여 입국하였다.
아펜젤러는 성서를 번역하였으며(마태복음,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 감리교 인쇄 출판소를 확장하여 각종 선교잡지를 발행하기도 했고, 1885년 8월 3일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선교에 힘쓰는 한편 1895년 정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보다 앞서 인천내리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내리교회의 시작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아펜젤러 미국 감리교 선교사가 제물포 항에 도착했는데 이 때에 약 45일 동안 제물포에 체류했다. 이것이 교회의 뿌리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교회의 창립 기념일은 1885년 7월 29일로 지키고 있다.
정동교회에서는 서재필, 이승만, 윤치호, 주시경, 이상재, 남궁억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 지회가 결성되었는데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구파의 모략으로 독립협회는 해체되고 중요한 인물들이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을 순례하며 구호와 전도활동을 하였는데 이때 이승만, 이상재 등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896년부터는 서재필의 독립신문을 인쇄하면서 편집에 도움을 주었으며, 1897년 [교회]지를 확대하여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 발간하고, 협성회보도 발간하였다. 1889년 교리서인 [미이미 교회강례]와 [성교촬요]를 발행했으며, 1900년까지 25만여권의 서적을 인쇄·출판하였다. 또한 배재학당, 이화 학당, 인천 영화학교 등 기독교 계통학교의 교과서 및 성경 및 찬송을 출판하는 현대적인 인쇄와 출판의 효시를 이루었다.
또한 아펜젤러는 성서번역사업에도 헌신하여 [누가복음]을 비롯하여 스크랜튼, 언더우드 등과 함께 여러 신약성서를 출판하였다. 1890년에는 종로서점을 설치하고, 대한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아펜젤러(H.G.Appenzeller)는 서울 정동(貞洞)에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최초로 설립한다. 1885년 8월 아펜젤러가 이겸라(李謙羅)와 고영필(高永弼) 등 두 학생을 가르치면서 시작된 배재학당은 정동에 있는 민가 몇 채를 사서 1886년 신축·이전하였으며, 이 해 6월 8일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아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그는 서울, 평양, 인천, 수원, 공주, 대구, 전주 등지로 여행하며 전도활동을 수행하였다. 한국에서의 아펜젤러의 사역은 그의 사역기간 5년동안 체중이 180파운드에서 131파운드로 줄어들었을 정도로 정열적인 것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 활동 중 1902년 6월 첫 주일, '레이놀즈' 미 남장로회 선교사 주재 구역의 목포에서 개최되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할 계획에 있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무어감독 등과 '무지내교회' 방문(1902. 6. 1)하게 되었는데, 이때 경부선 철도건설 현장(시흥)을 통과하다가 주장이 엇갈려 일본인 노무자들에게 마구 구타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재판의 증언 때문에 목포 출발이 지연되어 다른 선교사보다 늦게 구마가와마루(熊川丸) 배를 타고 가던 중 어청도 근처 해상에서 밤중의 짙은 안개로 인하여 기소가와마루(木曾川丸) 배와 정면 충돌, 침몰되어 1902년 6월 11일 밤 10시경 순직하였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배를 버리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아펜젤러의 순직 직전의 이야기는 두 가지로 전해진다.
1) 그의 비서 조한규가 미처 선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그를 구하기 위해 침몰하는 배의 선실로 뛰어들었다는 이야기와
2) 함께 동승한 이대 여대생들을 구조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다.
배는 아펜젤러를 비롯한 23명과 함께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때 유일한 생존자는 보올비(J. F. Bowlby : 미국 인디애나로 돌아가던 운산광산 근로자)였고 아펜젤러 선교사 외에 한국인 14명, 일본인 4명, 선원 4명도 실종(사망)했다.
아펜젤러의 장례식은 1902년 6월 29일 주일에 치뤄졌는데 장례식에서는 이 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리고 민족 구원을 위한 애국 애족활동을 기리기 위해 애국가가 불려졌고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아펜젤러의 장남은 배재학교 교장으로, 장녀는 이화학당 교장으로 봉직하다 한국 땅에 묻혔으며 막내 또한 이화학당의 교수로 한국선교에 헌신하였다.
1935년에는 아펜젤러 기념비가 정동교회에 세워졌고, 1989년에는 배재학교 총동창회에 의해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추모비가 세워 졌다. 동방의 한 작은 나라, 아직 어둠에 잠겨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의 빛으로 밝히기 위하여,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사르던 선교사 아펜젤러는 결국 이 나라의 한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의 죽음은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은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오늘 이 땅에는 1200만이라는 열매가 맺혀졌다. 이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로부터 얻은 빚을 갚을 때이다.
그 빚을 갚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의 죽음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룬 아펜젤러, 하나님께서는 그를 우편에 앉히시고 그의 머리에 생명의 면류관을 씌우셨을 것이 분명하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그의 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남아있다.
"만일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한국의 모든 지방을 방문하여, 북쪽의 호랑이 사냥꾼으로부터 남쪽의 벼농사꾼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설교하고 싶다."
※주요연표※ - 조병철 목사(감리회본부) 참고
1858. 2. 6. 미 펜실베니아주 서더튼 출생, 루터교 부모
1876. 10. 1. 영적 생일-매년 기념함
1877. 웨스터체스터 주립사범학교 졸업
1879. 4. 20. 랭카스터 제일감리교회등록
1882. 프랭클린 마샬대학졸업
1884. 12. 17 E. J.Dodge 양과결혼
1884. 12.말 한국선교사로 임명
1885. 1. Drew 신학교 졸업
1887. 3.14. 배재학당 현판식
1887. 12. 25. 첫한국어 설교
1888. 가을 배제제본소(삼문출판사)
1889. 5. [교회] 발간
1890. 1. 종로서점설치
1890. 6. 25. 대한성교서회 회장 피선
1892. 1. 영문 월간지 [Korean Repository] 발간
1895. Korean Repository 속간(~1898까지)
1895. 9. 9. 정동제일교회 정초식
1897. 2. 6. 독립협회창설, [대한그리스도인 회보] 창간,편집인
1898. 12. 감옥에 있는 이승만을 도와줌
1900. 9. 9. 신약전서 출판기념예배
1902. 5. 남한지역 총리사로 임명
1902. 6. 11. 성서번역위원회 참석차 목포로 가던중 선박충돌사고로 하나님의 부름받음(군산앞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