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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견제, 1632년 유대인의 길드 가입을 금지시키다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31]
입력 2023.06.18. 08:00업데이트 2023.06.18. 12:54
◇유대인의 상업조합 가입을 금지시키다
네덜란드 정부는 유대인들이 급격히 성장하자 자국민들의 상업적 경쟁력을 보호할 필요를 느꼈다. 1632년에 법령으로 유대인의 길드 가입을 금지시켰다. 유대 상인의 입지를 제한한 것이다. 당시 길드는 관련 업종의 독과점을 위한 기구였다. 따라서 작업시간이나 작업의 종류, 상품의 질 등을 세세하게 규제했다. 길드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물건을 만들지도 팔지도 못했다. 이후 유대인은 내국인과 충돌하거나 경쟁할 우려가 적은 대외무역과 금융 분야에 진력하거나 개인 직업으로는 약사나 의사, 히브리서 출판 등에 종사했다.
그 결과 조합이 없었던 직물업과 다이아몬드 세공업과 수출입업에 유대인이 몰렸다. 현대에도 네덜란드가 벨기에와 더불어 다이아몬드 무역 강국인 이유이다. 또 그들이 히브리서 출판업에 참여한 것은 유대 경전인 ‘토라’와 ‘탈무드’를 인쇄해 자손들에게 유대교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유대인 길드 가입 금지 조치는 특히 아쉬케나지 유대인들에게는 타격이었다. 세파라디계 유대인들은 이미 덩치가 커져 조합 밖의 도매상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상업에서 배제된 아쉬케나지 유대인, 금융산업을 주도하다
네덜란드 정부의 이러한 제약이 오히려 아쉬케나지 유대인에게 보약이 되었다. 산업과 무역업의 규모가 커진 상태에서 상업에서 배제된 유대인들은 이들 실물경제를 뒷받침해 줄 금융산업에 힘을 쏟았다. 당연히 금융계와 증권계를 그들이 선도했다. 이후 금융산업이 실물경제를 리드하면서 유대인의 자본축적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유대인들의 재력은 당시 암스테르담 중앙에 세워진 웅대한 시나고그와 그들 집들의 호화로움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렇게 유대인들의 부가 외부로 노출되자 유대인들에게 돈이 많다는 소문이 돌면서 항상 강탈과 납치의 대상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감췄다.
이런 제약이 무기명채권이라는 금융상품을 개발하는 동기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중세 베네치아 이래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거래를 할 때 문서에 기독교식 이름을 사용했다. 또는 합자회사를 만들어 경영은 기독교인에게 맡기고 뒤에서 자본을 대는 자본가가 되어 유대인 리스크를 줄였다. 그러다가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치루면서 전쟁채권 시장이 발달하자 가명도 쓰지 않는 채권을 개발했는데 그것이 무기명채권이다. 그들은 항상 위협 속에 살았기 때문에 언제든 추방될 경우 환어음이든 무기명채권을 들고 피난 갈 필요가 있었다.
◇유대인, 길드를 와해시키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반전이 일어났다. 길드가 유대인들을 상업에서 소외시킨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 막강한 길드를 와해시켜 버린 것이다. 18세기에 유대인이 벌인 폭넓은 상업과 금융 활동은 괄목할 만했다. “그것이 주된 원동력이 되어 근대 자본주의가 성립했다.”고 생각하는 경제사학자가 바로 베르너 좀바르트이다. 일생에 걸쳐 자본주의의 기원과 진화에 대해 연구한 좀바르트는 1911년 <유대인과 경제생활>을 출간했다. 거기서 그는 유대인들이 길드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길드 체제를 와해시킬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중세 상업은 길드가 정한 원칙을 따르고 있었다. 그것은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정액의 임금과 가격 그리고 ‘공평한 제도’의 추구였다. 여기서 말하는 공평한 제도란, 합의에 의해 시장에서의 일정 분배율이 결정되고, 이익이 보장되며, 생산 한도가 설정되는 것 같은 제도를 가리킨다. 유대인은 이런 제도에서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파괴하고 대신에 근대 자본주의를 채택했다는 것이 좀바르트의 설명이다.
근대 자본주의에서는 경쟁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이런 길드의 제약을 받지 않고 오로지 ‘고객 만족’으로 승부를 보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고객을 유일한 법으로 생각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씨앗으로 작용했다. 길드에서 배제된 유대인들이 ‘의로운’ 가격, ‘착한’ 가격으로 중세 상업의 기반을 흔들어 놓았다. 유대인들은 길드가 정한 가격과 이익체계를 해체시켜 버리고, 고객 중심의 자유 경쟁체제를 도입했다.
<유대인의 역사>를 쓴 폴 존슨은 그의 책에서 길드에서 배제당한 유대인들이 이룬 혁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중세 상업의 기반인 고정된 봉급과 가격이라는 체제를 뒤흔들어 놓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곧 관습적으로 이어지던 상품가격과 판매 이익을 근본적으로 해체시켜 버렸다. 상품을 보다 잘 진열하는 방식으로 고객을 확보했고, 상품광고를 고안해내어 물건 살 사람들에게 직접 다가갔다. 또 유대인들은 경제 규모가 지닌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때문에 낮은 가격으로 많이 팔아 큰 이익을 남기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그뿐만 아니라 사고방식이 늘 혁신적이었다. 주식시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만들어낸 경제적인 혁신은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은 상업 정보를 수집하고 사용하는데 능통했다. 시장이 모든 유형의 상거래에서 주도적인 요소가 되어가고 동시에 일련의 세계적인 체제로 확장되어 감에 따라 정보는 최고의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유럽 각처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네트워크가 무역과 금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들은 기존 경제체제보다 낫고, 보다 용이하며, 보다 저렴하고, 보다 신속한 방식들을 만들어내는 합리주의자들이었다. 현대사회에서도 유대인 출신 경제인들이 놀라운 부를 축적한 배경에는 이처럼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았던 역사적인 배경이 바탕이 되어 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영국 동인도회사를 압도하다
그 무렵 영국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의 해상권 장악과 해상무역의 지배를 그저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육지와 바다에서 두 강대국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영국은 유대인이 버티고 있는 네덜란드를 상대하는 데는 번번이 실패했다. 더구나 17세기 중엽 영국에서는 상인 세력을 견제하려는 귀족과의 갈등으로 영국 동인도회사의 권한에 제한이 가해졌다. 반면 무제한의 권한을 위임받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해외시장에서 영국을 압도했다. 이로써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한때 존폐 위기에 몰릴 때도 있었다. 게다가 강력한 군사력으로 무장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해적행위로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배들이 극심한 피해를 보기도 했다.
◇네덜란드, 대서양 횡단을 장악하다
1620년대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출범하자 대서양 무역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당시 선박은 해조류나 따개비를 제거하는 바닥 청소를 주기적으로 해주어야 했다. 당시에는 목조선박이라 배 무게가 그렇게 무겁지 않아 도크와 설비가 있으면 배를 뒤집어서 따개비를 긁어냈고, 도크가 없다면 아예 배를 해안가 모래까지 끌어와서 기울여서 청소하기도 했다. 이런 청소 때문에 바다를 항해하는 시간이 제한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개 함선은 대서양을 네 번 정도 건너면 수명을 다했다. 따라서 대서양 해상무역 물동량이 늘어나자 선박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여러 사람이 배의 소유권을 나누어 갖는 네덜란드식 관행은 투자를 쉽게 하여 배의 공급을 늘렸다. 이는 대량 건조로 제작 비용을 더욱 낮추었다. 이러한 규모의 경제에 의해 네덜란드 조선업 경쟁력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 앞서 나갔다. 네덜란드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조선업을 국책산업으로 지정하여 육성했다.
17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네덜란드를 포함해 포르투갈․프랑스․덴마크․영국․스웨덴 등 6대국의 해양 진출이 두드러졌다. 이들이 경쟁적으로 인도 및 신대륙과 교역하는 과정에서 상선이 크게 발달했다. 상선에는 해적의 습격에 대비해 마치 군함처럼 장비가 갖추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호위용으로 작고 빠른 전함이 개발되었다. 배의 밑 부분에는 벌레가 나무를 갉아먹거나 바다 동식물이 달라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구리판을 씌웠다. 그 결과 순항속도도 매우 빨라졌다.
◇네덜란드 선박의 대형화로 스페인 상선 쇠퇴하다
네덜란드 선박의 대형화. /위키피디아
나중에 암스테르담 선단은 규모가 커져 주로 승무원 800명의 2000t(톤)급 대형선박들로 선단이 구성되었다. 그러자 운임 단가는 더 내려갔다. 그 결과 거의 모든 화물들이 네덜란드 선박으로 운송되었고, 거의 모든 화물이 중계 기지인 암스테르담으로 집결했다.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곡물과 금속의 유통기지이자 창고가 되었다. 이러한 월등한 대형선박 제조 및 운용 기술로 당시 세계 선박의 반 이상이 네덜란드 선박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기술은 네덜란드 해군을 발트해에서 남아메리카에 이르는 해상의 지배자로 부상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네덜란드는 아메리카에서 들여오는 스페인 세비야의 무역까지도 통제했다. 1640년경 스페인 항구에 들어오는 상품의 4분의 3이 네덜란드 선박에 실려 왔다. 당시 스페인은 그들과 독립전쟁 중이었던 적에게 이익을 주었던 셈이다. 그만큼 네덜란드 선박의 경쟁력이 탁월했다. 그 뒤 경쟁력에 밀린 스페인 상선은 급격히 쇠퇴했다. 당시 대서양 횡단용으로 등록된 스페인의 선박이 1620년에는 1363척이었으나 20년 뒤 1640년대에는 722척으로 줄어들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증권거래소, 은행들은 이러한 해상 권력을 금융․무역․산업 분야에서 우위로 전환시켰다. 수도 암스테르담은 해상무역과 더불어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네덜란드, 물류 중심지로 급성장하다
네덜란드 정부는 출범 이래로 무역을 적극 권장하고 지원했다. 이에 힘입어 유대인들은 대규모 해외무역을 손쉽게 장악해 나가면서 네덜란드의 모든 항구에 상업거점을 확보했다. 그리고 지중해 연안을 포함한 유럽 내 모든 무역망은 물론 그들이 사용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시절의 무역망을 계승 확대하여, 멀리 오스만터키 제국과 남아메리카 등지로 진출했다. 그리고 북미 대륙에도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신대륙을 발견하면서부터 오히려 네덜란드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신대륙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 점령되었지만, 신대륙에서 가져오는 물자를 유럽 지역으로 운송하여 전파하는 일은 네덜란드 유대인들이 주로 맡게 된 것이다.
네덜란드의 무역은 무역량에 있어서나 다양성에 있어서나 사상 유례없는 번영을 거듭했다. 네덜란드 선박은 당시 전 세계 상품의 대부분을 맡아 운송했다. 서유럽의 목재 및 조선재료, 철, 납 이외에도 북유럽 지방의 곡물을 운송했다. 그리고 또 중유럽 상품의 유통도 맡았다. 한 마디로 전 유럽의 물품을 운송했다. 이렇게 왕성한 해운업과 내륙으로 통하는 운하 덕분에 물류 유통업도 당연히 같이 발달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정다운
게다가 북쪽의 발트해는 늦가을과 겨울철에 결빙되어 이 기간에 네덜란드는 북쪽으로 향하는 사치품과 남쪽으로 향하는 곡물 등 부피가 큰 상품을 대량으로 모아 둠으로써 거대한 창고가 되었다. 이로 인해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의 창고는 세계 곳곳에서 모인 상품들이 가득했다.
이러한 창고업의 발달과 더불어 두 도시는 바다와 라인강을 잇는 운하 덕분에 내륙 운송망도 발달되어 물류 중심지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창고마다 곡물을 필두로 스페인의 양모, 지중해산의 포도주, 올리브유, 벌꿀은 물론 멀리 말레이제도의 향료 및 후추, 실론의 진주 및 계피, 인도의 면화, 설탕, 유리, 아편, 중국과 일본의 비단, 도자기, 구리, 차, 샴의 수피 및 염료용 목재, 아연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계의 다른 어느 곳에서 이토록 손쉽게 편리한 물품들과 진기한 물품들을 만날 수 있으랴. 세계의 다른 어느 나라에서 이토록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1631년 암스테르담에 머물던 데카르트가 한 말이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교역과 물류뿐 아니라 생산과 소비를 연결시키는 유통업 그리고 배 만드는 일과 관련된 조선업, 해운업, 어업 등 연관 산업에서도 경쟁력을 획득했다. 그 뒤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해외로 뻗어나갔다. 신대륙 각 거점마다 교역로를 개설하고, 공장을 세우고,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고, 은행을 설립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해외투자는 국민 총생산의 2배가 넘었다.
◇20만명 대도시로 급성장한 암스테르담, 3분의 2가 외국인들
이에 힘입어 암스테르담 인구도 급격히 불어나 1620년에 10만명이 1670년에 20만명의 대도시로 급성장하게 된다. 1650년 통계에 의하면,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는 사람의 3분의 2가 외국계 혈통으로 네덜란드는 진정한 인종의 용광로가 되었다. 그 무렵 암스테르담 인구의 11~12%가 유대인이었다. 그간 암스테르담에 유대인이 크게 불어난 시기가 5번 있었다.
첫 번째는 1576년 앤트워프에서 반란을 일으킨 용병들에 의해 시민 7000여 명이 살해당하자 유대인들은 앤트워프를 탈출해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당시는 1568년에 시작된 스페인 왕국에 대한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두 번째는 1609년 앤트워프에서 스페인과 네덜란드 간의 12년간 휴전조약 체결로 인해 네덜란드와 스페인 간 무역 거래가 재개되었을 때였다. 당시 스페인이 지배하던 플랑드르 지역 등에 살던 유대인들이 종교의 자유가 선언된 네덜란드 특히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등 항구도시로 이동해 다시 스페인과의 무역에 뛰어들었다.
세 번째는 1640년 말 포르투갈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을 때였다. 따라서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사이에 외교 관계가 시작되어 1641년 7월 무역 협정을 맺고 무역이 재개되었다. ‘12년 휴전’ 때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이 기회를 잽싸게 잡았다. 이때 포르투갈과의 무역업에 종사하는 유대인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네 번째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에서 일어났다. 1630년 전후로 네덜란드가 브라질 일부를 점령해 식민지를 삼았다. 지금의 헤시피 주변 지역이다. 그리고 식민지에서 종교의 자유를 선언했다. 그러자 많은 유대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식민지로 몰려들었다. 몇 년 후 포르투갈이 네덜란드 세력을 내쫓고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다시 가톨릭의 박해를 받게 된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다섯 번째는 1648년 독일 뮌스터에서 일어났다.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전쟁을 끝내고 평화조약을 맺은 것이다. 이제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은 당당하게 스페인과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 이베리아반도에 살았던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스페인에 있는 동족들 곧 개종 유대인들과 무역을 시작했다.([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201~202쪽, 로데베이크 페트람, 조진서 옮김)
그 뒤 동인도회사의 배는 1670년대 150척의 상선, 40척의 군함, 5만 명의 직원과 1만 명 규모의 군대를 거느린 거대 조직이 되었다. 그 뒤 배가 대형화되자 선박의 톤수가 두 배로 늘었다. 이후 동인도회사 전성기에는 대형선박이 1500척까지 불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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