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 다락골 성지 - 최양업 신부의 고향, 그리고 무명순교자가 잠든 곳 |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676-1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다락골길 78-6
농암리의 자연부락 이름 다락골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토박이말로 ‘달안골(月內谷)’이라 한 것이 다락골로 바뀌었다고도 하고 혹은 다래가 많이 나서 ‘다랫골’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그리고 후대에는 한자로 ‘누리(樓里)’라고도 했다는데 이는 누각집인 다락에서 취한 것이다. 이 중에서 ‘달안골’이 뜻으로나 소리로나 아름다운 이름이어서 지금 성지 표지석에도 달을 안은 마을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아름다운 이름의 마을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진산사건이 일어난 1791년이다. 최양업 가문의 첫 천주교 신앙인은 최 신부의 증조부 최한일인데 그는 1787년 내포의 사도 이존창에게 세례를 받았다. 신해박해의 모진 서슬에 증조부 최한일이 세상을 떠나자 증조모 경주이씨는 12살 아들 최인주(최양업 신부 조부)를 데리고 그녀의 친정인 이곳 충청도 홍주 다락골로 들어왔다. 이들 모자(母子)는 몇 년후 다락골에서 약 700m 떨어진 외딴 곳에서 터를 잡고 새 땅을 개간해 살림을 이어 갔는데 이로부터 점점 이웃이 늘어나서 교우촌이 형성되어 마을 이름을 새터〔新垈〕로 불렀다.
그후 최인주는 새터에서 혼인하여 세 아들을 두었는데 셋째가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이다. 최경환은 역시 이곳에서 이성례와 혼인하여 양업을 위시하여 6형제를 두었다. 이성례는, 이존창의 딸이자 김대건 신부의 조모인 이 멜라니아의 조카이다. 최양업 신부의 가계도를 보면 이존창 가문의 딸들과 관련이 있는데, 이점은 김대건 신부의 가계와도 비슷하여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 두 가문이 또한 간접적으로 엮여져 있음을 알게 된다.
최양업 신부, 김대건 신부의 이존창 가문과의 관련
3대 신앙을 지켜오던 최경환 가족은 박해의 파도가 이곳에도 미쳐 신앙이 자유롭지 못하자 박해를 피해 서울로 이주한다. 최양업 신부가 만 6세 때였다. 하지만 고향을 떠난 최양업 일가는 정착생활을 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유랑생활을 하게 된다. 특히 1836년 최양업 신부를 신학생으로 마카오로 떠나보낸 후에는 관청이나 관청에 회유된 배교자들로부터 더할 수 없는 압박과 감시를 받아 한양 벙거지골, 부평, 춘천 등을 전전하다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은 안양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다락골을 떠난 최양업 신부 가문의 고난의 순교사는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다. 한번더 여기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아들 양업을 신학생으로 마카오에 보낸 후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면서 그는 전교 회장직을 맡아 열렬한 선교 활동을 편다.
하지만 그를 쫓는 발길은 수리산 깊은 산골에까지 미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그의 집을 급습한 포졸들은 부인 이성례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고 난 뒤 40여 가구에서 골고루 한 명씩을 잡아갔지만 최경환만은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 이성례, 아들 희정 · 선정 · 우정 · 신정 그리고 젖먹이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잡아가 옥에 가두었다.
후손들의 눈시울을 적시는 최씨 일가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다섯 자식을 모두 끌고 옥에 갇히게 된 어머니 이성례는 세 살짜리 막내가 굶주림으로 숨이 끊어지자 그만 실성할 지경이 되고, 네 아이를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배교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고 네 아이를 이끌고 풀려나온다.
하지만 곧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정신을 차린 그는 아이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 다시 갇힌 몸이 되고 어머니를 목메어 부르는 4형제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다. 어린 자식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고 그 후로 동냥한 음식을 옥에 갇힌 부모에게 사식으로 넣어 주었다.
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1일 그 부인 이성례는 당고개에서 참수된다. 어머니의 참수에 앞서 소식을 들은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 달라며 쌀자루를 건네는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당일 한 칼에 목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린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한다.(당고개 성지 순례기 참고)
새터 성지
하오 2시 30분이 조금 지나 다락골 성지에 거의 다와 가는데 새터 성지 표지석이 먼저 나타난다. 새터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최경환, 최양업 부자가 태어나서 자란 교우촌이다.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394-1
이곳에 최양업 신부 기념 경당이 건립된 것은 2023년도였다. 당시 다락골 성지 전담 김영직 신부가 부임하여, 생가는 사리지고 터만 남은 새터의 모습을 보고 너무 허전하게 느껴 성전을 짓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한 평 봉헌’이라는 이름으로 30만 원씩 900여 명의 신자가 후원하여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 경당 건립을 시작했다. 마침내 최양업 신부의 사제수품 기념일인 2023년 4월 15일 대전교구장 김종수 주교의 주례로 경당 봉헌 미사가 거행됐다.
최양업 신부 기념경당은 최양업 신부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기억하기 위해서 1860년 경신박해 때 은신했던 언양 죽림굴의 모습을 따왔다. 경당에서 제대는 가장 낮은 자리에 위치한다. 신자들을 올려다보며 미사를 봉헌하는 겸손함이 드러나는 배치다. 제대 위 천정에는 조선의 별자리 지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나타내어 최양업 신부가 9만 리 밤길을 걸으며 만났던 별들과 그의 시간을 기억하도록 하고 있다.
경당 앞에 이르니 성모자상이 자리하고 있다. 성모상은 마치 몸 아픈 아이를 안고 병원에 가서 고쳐 달라고 울먹이며 애원하는 우리네의 어머니와 같은 인상을 준다. 치마폭에는 순교의 팔마가지가 새겨져 있고, 받침석에는 최양업 신부가 1860년 죽림굴에서 마지막으로 쓴 편지에 나오는 당신의 자비를 잊지 마소서라는 구절이 친필로 새겨져 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마소서. 저희 눈이 모두 당신의 자비에 쏠려 있습니다. 저희 모든 희망이 당신의 자비 안에 있습니다. 저희를 재난에서 구원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저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저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하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높은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성수대를 거쳐 경당 안에 들어가니 전면 나지막한 위치에 죽림굴에나 있을 법한 큰 바위 제대가 놓여 있고 천정과 벽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온통 선(線)의 세계, 선(線)의 천지였다. 천정은 동심원이고 벽은 평행선 일색이었다. 그야말로 하늘의 별자리의 운행을 본 딴 것이다
벽에는 14처가 한 곳에 모여 십자가 형상을 이루고 그나마 나지막한 광창을 통해 동굴 같은 경당 내부에 빛을 유입하고 있다.
경당 밖에는 돌담으로 둘러싸인 경사진 넓은 터가 있는데 이곳이 최양업 신부의 생가가 있었던 곳으로 앞으로 생가를 복원할 예정인 터이다. 지금은 최양업 신부의 동상만 우뚝 서 있다.
생가 터 들머리에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새터 성지에서 다락골 성지까지는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다락골 성지
다락골 성지는 2003년 2월 17일 대전교구에서 성지 본당으로 설정하고 상주(常住) 사제를 임명하여 성지 개발 및 보존과 순례자와 인근 교우들에 대한 사목을 담당토록 하였다. 2008년 11월 9일 대전교구는 교구 설립 60주년을 기념하여 최경환 성인 일가와 무명 순교자들의 순교 영성 및 선교 정신을 널리 현양하기 위한 기념성당을 다락골 성지에 건립하여 봉헌하였다. 2019년 10월 3일에는 성지 성당 내에 최양업 신부 기념관을 마련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주차장에 내리니 다락골 성지 소개와 성지 배치도 안내판이 먼저 나온다. 그리고 내포천주교 순례길 안내판을 보면 다락골이라는 명칭의 유래가 좀 구체적으로 타나 있다.
다락골의 원래 이름은 다래골이고 교회 기록에도 다래골로 표기되어 왔다. 다래는 머루와 함께 즐겨 따먹는 구황식용 열매 이름으로 이곳에 다래나무가 많다는 뜻이다. 다락골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44년 유영근 신부가 이곳을 답사하고 나서 쓴 글에서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최상중 신부의 글에서 다락골의 한자 표기인 누곡(樓谷)이 처음 등장한다. 1960년대에 다래골과 다락골을 혼용한 것으로 보아 해방 전후부터 지역주민들이 이미 다락골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이 성지 지정과정에서 반영되어 지금은 다락골로 통일된 것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달을 안은 마을’이라는 뜻은 근거가 없다는 말이 된다.
순례 안내도에 따라 최양업 기념성당인 대성당, 소성당, 성체조배실을 참배하고 무명순교자 묘지인 줄무덤을 순례하는 것으로 코스를 정했다.
주차장에 내려서 담벽에 쓰인 다락골 성지 안내에 따라 올라가면 사무실과 성물방이 있다. 그리고 달꽃 카페 쉼터가 있다. 이 이름도 물론 다락골이 ‘달을 안은 골짜기’라는 설에서 붙인 이름이다. 성체조배실을 지나 소성당에 이르렀다.
소성당
대체로 성지의 미사는 11시나 11시 30분이 많다. 오늘은 주말이라서 대성당에 11시 30분 미사가 있다는 공지문이 출입문 유리창에 붙었다.
내부에 들어가니 특이한 것은 전면 제단 벽이 투명 유리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미 성가산 성지 등지에서 보아온 바이기도 하여 그리 신기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 유리창 바깥에 십자가 고상 등을 마련하여 사계절 자연 풍광과 함께 미사를 드리게 함이다. 봄날의 꽃,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 가을 단풍, 겨울의 흰 눈··· 참 멋지다.
전면 벽에는 최양업 신부의 영정이 걸렸고 양쪽 측면 벽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걸렸는데 예수님과 성모님의 인물 사진으로 고난의 상황과 심리를 표출한 점이 특이했다.
대성당
대성당 입구 왼쪽에는 하늘을 날아오르시는 성모승천상이 있다. 파릇파릇 돋아는 줄장미 덩굴을 타고 오르시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장미의 계절에는 얼마나 예쁠까?
성전 내부는 소성당에 비해 엄청 넓다. 제대 후벽에는 두 팔이 잘린 예수님의 참혹한 모습이 걸렸다. 그리고 그 밑에는 성모님과 최양업 토마스 신부상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두 팔이 잘려 나가 몸통만 남은 이 십자가상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폐허가 된 독일 슈바르츠발트 지역의 한 성당을 재건하던 도중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우리들이 잘라버린 예수님의 팔,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팔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제대 전면에는 유리 감실이 있어 성인 유해를 모시고 있다. 모셔진 성인 유해는 왼쪽 성광에 성 최경환 프란체스코의 손뼈, 그리고 오른쪽에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 모방 베드로 신부,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의 유해 일부이다.
그리고 전면과 좌우 벽의 상부에는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가 조성되었고 제대 앞 왼쪽 벽에는 소성당에서 본 인물 사진 형식의 14처가 한곳에 모여져 십자가 형상을 이루고 오른쪽 벽에는 자비의 예수님 상이 걸렸다.
성당 뒤편에는 103위 한국순교성인화(문학진 토마스 화백), 124위 한국순교복자화(김형주 이벨다 화백), 그리고 최양업 신부 가족 성화가 걸렸다.
바깥에는 고해실이 있고 벽면에 역시 성화가 걸렸다.
대성당 밖을 나오니 바로 로비 왼쪽에 최양업 신부 기념관이 있다. 로비 벽면에는 가슴과 발목에 못 자국이 크게 난 예수님상이 걸렸고 벽 아래쪽에는 최양업 신부의 세 번째 편지에 나오는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에 저를 온전히 맡깁니다.”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최양업 신부의 영정 액자가 의자 위에 세워져 있다.
최양업 신부 기념관
최양업 신부 기념관은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2021년)을 앞 둔 2019년에 건립되어 그해 10월 3일에 축복식을 가졌다. 기념관의 위치는 기존 다락골성지 대성당 좌측 100㎡ 규모 공간에 마련되었기에 성당을 찾는 순례객이나 교우들이 접근성이 좋아 최양업 신부의 최양업 신부의 신앙과 삶을 배울 수 있는 기회의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기념관은 탄생·성가정·귀국·사목활동·선종 등 최양업 신부의 생애를 요약하는 5가지 주제를 담은 자료들을 중심으로 신앙과 순교의 의미를 묵상하도록 꾸며졌다. 또한 기념관은 최 신부가 태어난 다락골 새터와 무명 순교자들이 묻힌 줄무덤에 대한 안내와 소개도 하고 있다. 기념관은 특별히 ‘길 위의 사제’를 주제로 전체 전시 공간을 관람객들이 길을 걸어가듯 자연스럽게 관람하도록 꾸며졌다. 몇 전시품을 소개한다.
▲ 최양업 신부의 탄생지 - 1821년 3월1일 동틀 무렵 다락골 새터에 조선 교회를 밝히는 빛이 세상에 왔다.
▲ 최양업 신부의 성가족 - 1836년 12월 모방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최양업 신부 부모는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교우’라고 했다.
▲험난한 귀국길 - 그는 다섯 번이나 귀국 탐색에 실패한 후 여섯 번째인 1849년 12월 드디어 변문, 차꾸, 의주를 거쳐 입국에 성공했다. 첫 입국을 시도한지 7년, 유학을 떠난지 13년 만이다.
▲애민정신과 천주가사 - 그는 직접 우리글로 교리서를 만들고 우리의 문학인 가사를 직접 창작하여 전주교 사상과 신앙을 교우들에게 보급했다.
▲최양업 신부의 편지들 - 1942년 4월 신학생 시절부터 선종 1년 전 1960년 9월 죽림굴 편지까지 19통의 편지를 썼다.
▲교구와 교우촌과의 연락체계 - 통신수단이 없었던 당시 유일한 수단은 통문이었다. 교구지침이 통문을 통해 교우촌 회장에게 전달된 사실을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길 위의 사제 멀고 먼 목자의 길 - 1850년 이후 1861년까지 11년 6개월 동안 5개 도 137교우촌, 매년 7,000리 밤길을 걸어 초인적 사목활동을 하신 최양업 신부
▲순교 행적 이력서들 - 순교자들의 행적과 이장 내력 등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여 교회사의 생생한 증거가 되었다
▲ 갈매못에서 순교한 4분의 무덤 이장 내력을 담은 기록
▲길 위의 순교자 선종하다 - 최양업 신부는 1861년 6월15일 과로와 장티푸스로 문경에서 쓰러졌다. 배론에서 급히 달려온 프리티에 신부로부터 병자성사를 받고 “예수 마리아”를 끝없이 되뇌며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줄 무덤 - 병인 박해시 처형된 무명순교자의 무덤을 말한다. 현재 인근 산에 3군데에 조성되어 있다.
전시관을 나오면 꿈꾸는 다락방이라는 작은 휴게실이 있는데 순교성화도 걸렸고 최양업 신부의 서간문도 붙어 있다.
주중직심도(主中直心圖)는 주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일편단심으로 신앙을 증거한 한국순교복자 124위의 성화이며 원본은 서울교교 고덕동 성당에 있다. 기념관을 나오면 바로 무명순교자 십자가상과 십자가의 길 기도 공원으로 이어진다.
줄무덤 가는 길
다락골 마을 뒤편 경주 최씨 종산의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와 묘비들이 여러 줄로 서 있다. 이 무덤에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866년 병인박해 때 홍주와 공주 감영에서 치명한 무명 순교자의 시신을 교우들이 야간을 이용하여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는 말이 전할 뿐이다.
현재 총 40기 중 37기가 보존되어 있다.(제1 줄무덤 14기, 제2 줄무덤 10기, 제3줄무덤 13기) 1982년 대전 교구는 무명순교자 묘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주위에 없어진 10가구의 인가 흔적을 보아 천주교 박해 때 마을 전체가 화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박해가 두려원 천주교 신자들의 무덤이라는 것을 숨기고 있던 중 관아에서 마을을 불살라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언제 어디서 죽었든지 간에 확실한 것은 치명자들의 무덤이고 이름 없는 그들의 피 흘림으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것이다.
줄무덤 표지판 서 있는 길을 따라 걷는다. 오르막이지만 그리 경사진 길은 아니다. 가는 길가에 무명순교자 조각상이 새겨져 있다. 처음 나온 것은 ‘죽음’이고 나중 나온 것은 ‘부활’이다.
무명 순교자 조각상을 지나면 십자가의 길이 나온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 상아래에 무명순교자 기도문비가 있고 뒷면에는 봉헌자 교우 명단이 새겨져 있다.
무명 순교자 줄무덤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는 제1,2 줄무덤으로, 오른쪽으로는 제3 줄무덤으로 간다. 1,2 줄무덤으로 갔다가 3 줄무덤을 보고 다시 오른쪽 길로 내려올 수도 있다.
고갯길을 다 오르면 그 너머 바로 제1 줄무덤이 있다. 안내판을 보면 이 줄무덤은 1982년 11월 23일 청양 천주교회 방윤석 신부에 의해 묘지가 정화되고 무명순교자의 묘비가 세워졌다고 되어 있다. 최양업 기념관에는 1982년 대전 교구에서 무명순교자 묘비를 세웠다고 했는데, 아마도 교구청의 지원과 허가에 의해 청양 성당 주관으로 세워졌다고 볼 수 있다.
제1줄무덤
인근에는 비석이 있는 최씨 일가의 묘지도 상당수가 혼재되어 있다. 곁방살이 하는 사람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제2 줄무덤은 제1 줄무덤 밑으로 내려와 옆으로 조금 더 나간 곳에 있다.
제2 줄무덤
제3 줄무덤은 다시 제1무덤으로 올라와 산등성이를 한참 내려와서 있다.
제3 줄무덤
다락골 성당으로 내려오니 벌써 오후 4시가 넘었다. 차에 올라 갈매못 성지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