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천상의 가실바꾸미 길 ( 해안거님길 2구간) 코스 : 옥화마을(옥림,하촌)-해상테크-혹돔 바위-범바위-큰돌골(너덜지대)-송곳바위-가실바꾸미-옛날군부대-북바우,턱바우-쉼터-총바우-갈매기똥산바우-작은,큰돔자리-주공,은아아파트 갈림길-윤개공원(4km 1시간 20분) 가실바꾸미 길 (해안거님길2) 출발지는 옥화마을(옥림리)이다. 옥림마을은 상촌과 하촌 선창마을 그리고 서간도 마을이다. 옥림마을은 옛날에 주림포(舟(林浦)마을 즉 배숲개라 했다. 그 뜻은 바람이 불면 지세포는 센바람이 불어오므로 배가 피신하기 좋은 옥림 하촌마을로 이동하였기에 지세포에서 보면 배가 숲을 이룬 듯이 많다는 뜻이다. 뒤에 옥림(玉林)이라는 마을 이름은 옥녀봉 아래 숲이 울창하다는 뜻이며 최근에 옥화(玉花)마을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이는 항구가 어머님 배속처럼 포근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개명하였다고 한다. 상촌과 하촌마을 중간에 집이 서너채 있었는데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살기 힘든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마을이다. 마을 어귀에는 여기저기에 문어 간판이 보이고 벽화 골목도 보인다. 옥화마을은 옆 장승포항과는 달리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시내버스조차 운행하지 않던 오지 아닌 오지였다. 젊은이들이 하나둘 마을을 떠나고, 낚시꾼만 마을을 찾으면서 각종 쓰레기로 몸살을 앓던 동네였다. 그러던 옥화마을이 변화를 시도했다. 주민 스스로 “우리가 모두 새로운 옥화마을을 만들어 보자”라며 자발적으로 마을 가꾸기에 나섰다. 마을 곳곳에 방치되던 쓰레기를 치우고, 우중충한 마을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 활력을 불어넣었다. 포구 물양장에 나뒹굴던 어구와 기자재 등은 줄줄이 붙인 파란색 컨테이너에 넣어 예술작품처럼 깔끔하게 정리했다. 각종 매스컴에 20여 차례 소개되면서 귀어 귀촌인과 다문화가정이 불어나면서 마을에 활기가 넘친다. 옥화마을(옥림마을) 입구 안내판 거제도 천상의 가실바꾸미 길 ( 해안거님길 2구간) 코스 : 옥화마을(옥림,하촌)-해상테크-혹돔 바위-범바위-큰돌골(너덜지대)-송곳바위-가실바꾸미-옛날군부대-북바우,턱바우-쉼터-총바우-갈매기똥산바우-작은,큰돔자리-주공,은아아파트 갈림길-윤개공원(4km 1시간 20분) 선착장에 주차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2~3분 가니 해상테크가 나온다. 전체 길이는 370m이고 지심도 일출 경관 지점은 따로 55m 길이로 바다 쪽으로 벋어있다. 검푸른 바다와 기미산 밑의 몽돌밭 100m에 걸쳐 조성된 동백나무는 11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꽃을 피운다. 바다 윗길 해안테크와 동백이 멋진 조화를 이루어 따스하고 포근한 남쪽 나라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지심도 해맞이 해안테크 해안테크가 끝나는 지점에 정자가 있고 여기서부터 장승포 윤개공원까지는 약 3km이고 45분 걸린다고 안내되어 있으나 두어 번 걸어보니 1시간가량 걸린다. 50m 옆의 바닷가는 백여 평 되는 평 바위이며 이곳에서 혹돔을 많이 낚았다고 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서는 몸무게가 5kg에서 큰 놈은 20kg 잡혔다고 한다. 이 큰 혹돔을 잡는 낚시는 5가닥 정도의 강한 철사로 직접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미끼는 참게나 지렁이를 사용했고, 약 1m 정도는 철사로 경심 대신 사용하였다. 그 시절에는 기름이 귀한 시절이라 혹돔의 혹을 따서 등잔불의 기름으로 사용하였다. 지금도 그 자리가 홈돔자리인줄 모르고 낚시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혹돔은 이름은 돔이 붙으나 돔 종류가 아니고 놀래기과 고기로 돔과 비교하면 맛이 약간 떨어진다. 이런 혹돔은 성장하면서 성별이 바뀌는 물고기다. 새끼 혹돔은 성별이 불확실하고 성장하면 띠무늬는 사라지고 암컷으로 성장하게 된다. 여기서 더 성장하게 되면 머리에 혹이 생기고 아래턱이 더욱 두꺼워지게 되면서 수컷이 된다. 혹돔자리 평바위와 혹돔바위 좀 더 가노라면 둘 무더기가 산골짜기를 흘러내려 싸여있는 무디기를 자주 본다. 이 돌무더기를 돌서렁, 너덜지대, 너덜겅, 돌강, 덜겅이라고 한다. 그런데 구미산(기미산 주변에는 산기슭에 수많은 돌무더기를 볼 수 있는데 그 이름이 큰돌골, 작은돌골이다. 거제도 산에 돌무더기가 흘러 내린 것은 애추(너덜지대, 너덜경)이고, 둔덕에 있는 마고덜겅은 암괴류로 평탄한 지형에 암석의 크기도 너덜경에 비해 크다. 기미산 주변으로 흩어져 있는 돌무더기는 너덜경이며 띄엄띄엄 바윗돌이 보이는데 이는 핵석이다. 이런 너덜지대는 아이가 죽으면 관도 없이 삼베옷에 싸서 무덤도 없고 평장을 하며 돌을 쌓아 놓는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너덜지대에 갔다 묻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무덤을 애정(葬) 또는 아기 장이라 한다. 그 이유는 알 길이 없으나 아마 어린아이 영혼을 빨리 잊어버리기 위해 풍화가 빨리 일어나는 너덜지대에 묻었던 것 같다. 큰,작은돌골이라는 이름이 있는 너덜지대 선착장에 주차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2~3분 가니 해상테크가 나온다. 전체 길이는 370m이고 지심도 일출 경관 지점은 따로 55m 길이로 바다 쪽으로 벋어있다. 검푸른 바다와 기미산 밑의 몽돌밭 100m에 걸쳐 조성된 동백나무는 11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꽃을 피운다. 바다 윗길 해안테크와 동백이 멋진 조화를 이루어 따스하고 포근한 남쪽 나라 향기를 느낄 수 있다. 혹돔자리 평바위와 혹돔바위 좀 더 가노라면 둘 무더기가 산골짜기를 흘러내려 싸여있는 무디기를 자주 본다. 이 돌무더기를 돌서렁, 너덜지대, 너덜겅, 돌강, 덜겅이라고 한다. 그런데 구미산(기미산 주변에는 산기슭에 수많은 돌무더기를 볼 수 있는데 그 이름이 큰돌골, 작은돌골이다. 거제도 산에 돌무더기가 흘러 내린 것은 애추(너덜지대, 너덜경)이고, 둔덕에 있는 마고덜겅은 암괴류로 평탄한 지형에 암석의 크기도 너덜경에 비해 크다. 기미산 주변으로 흩어져 있는 돌무더기는 너덜경이며 띄엄띄엄 바윗돌이 보이는데 이는 핵석이다. 이런 너덜지대는 아이가 죽으면 관도 없이 삼베옷에 싸서 무덤도 없고 평장을 하며 돌을 쌓아 놓는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너덜지대에 갔다 묻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무덤을 애정(葬) 또는 아기 장이라 한다. 그 이유는 알 길이 없으나 아마 어린아이 영혼을 빨리 잊어버리기 위해 풍화가 빨리 일어나는 너덜지대에 묻었던 것 같다. 큰,작은돌골이라는 이름이 있는 너덜지대 선착장에 주차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2~3분 가니 해상테크가 나온다. 전체 길이는 370m이고 지심도 일출 경관 지점은 따로 55m 길이로 바다 쪽으로 벋어있다. 검푸른 바다와 기미산 밑의 몽돌밭 100m에 걸쳐 조성된 동백나무는 11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 꽃을 피운다. 바다 윗길 해안테크와 동백이 멋진 조화를 이루어 따스하고 포근한 남쪽 나라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지심도 해맞이 해안테크 해안테크가 끝나는 지점에 정자가 있고 여기서부터 장승포 윤개공원까지는 약 3km이고 45분 걸린다고 안내되어 있으나 두어 번 걸어보니 1시간가량 걸린다. 50m 옆의 바닷가는 백여 평 되는 평 바위이며 이곳에서 혹돔을 많이 낚았다고 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서는 몸무게가 5kg에서 큰 놈은 20kg 잡혔다고 한다. 이 큰 혹돔을 잡는 낚시는 5가닥 정도의 강한 철사로 직접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미끼는 참게나 지렁이를 사용했고, 약 1m 정도는 철사로 경심 대신 사용하였다. 그 시절에는 기름이 귀한 시절이라 혹돔의 혹을 따서 등잔불의 기름으로 사용하였다. 지금도 그 자리가 홈돔자리인줄 모르고 낚시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혹돔은 이름은 돔이 붙으나 돔 종류가 아니고 놀래기과 고기로 돔과 비교하면 맛이 약간 떨어진다. 이런 혹돔은 성장하면서 성별이 바뀌는 물고기다. 새끼 혹돔은 성별이 불확실하고 성장하면 띠무늬는 사라지고 암컷으로 성장하게 된다. 여기서 더 성장하게 되면 머리에 혹이 생기고 아래턱이 더욱 두꺼워지게 되면서 수컷이 된다. 혹돔자리 평바위와 혹돔바위 좀 더 가노라면 둘 무더기가 산골짜기를 흘러내려 싸여있는 무디기를 자주 본다. 이 돌무더기를 돌서렁, 너덜지대, 너덜겅, 돌강, 덜겅이라고 한다. 그런데 구미산(기미산 주변에는 산기슭에 수많은 돌무더기를 볼 수 있는데 그 이름이 큰돌골, 작은돌골이다. 거제도 산에 돌무더기가 흘러 내린 것은 애추(너덜지대, 너덜경)이고, 둔덕에 있는 마고덜겅은 암괴류로 평탄한 지형에 암석의 크기도 너덜경에 비해 크다. 기미산 주변으로 흩어져 있는 돌무더기는 너덜경이며 띄엄띄엄 바윗돌이 보이는데 이는 핵석이다. 이런 너덜지대는 아이가 죽으면 관도 없이 삼베옷에 싸서 무덤도 없고 평장을 하며 돌을 쌓아 놓는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너덜지대에 갔다 묻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무덤을 애정(葬) 또는 아기 장이라 한다. 그 이유는 알 길이 없으나 아마 어린아이 영혼을 빨리 잊어버리기 위해 풍화가 빨리 일어나는 너덜지대에 묻었던 것 같다. 큰,작은돌골이라는 이름이 있는 너덜지대 ◉ 범바위의 전설 범바위는 예전에 옥림마을 뒷산에 수호랑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이 호랑이가 하루는 해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이상한 동물을 보았다. 바로 인어였다. 호랑이는 인어를 보는 순간 반하여 사랑을 고백하였다. 인어는 지심도 바다 밑 용궁에서 살던 공주였다. 어느 날 수달이 배숲개 마을의 감성돔 너릉에서 감성돔을 많이 잡아먹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용왕은 인어공주에게 수달로부터 감성돔을 잡아먹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용왕은 인어공주에게 수달로부터 감성돔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인어공주는 그 임무를 가지고 나왔던 찰나에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호랑이의 사랑 고백을 받은 공주는 용왕님에게 허락을 받아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용궁으로 갔다. 인어공주는 호랑이에게 감성돔을 못 잡아 먹게 하고 수달도 오지 못하도록 임무를 맡겠다. 이에 호랑이는 오늘이나 올까 봐 내일이나 올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인어공주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지만, 약속대로 오지 않았고, 그리움과 배고품에 지쳐서 바위에 누웠다. 호랑이는 인어공주를 그리워하다 죽고 말았다. 죽은 호랑이는 파도에 밀려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나는 죽어서도 가죽을 남겨 놓고 인어공주 당신을 기다렸다’는 표시를 새겨 놓앗다. 천년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바위가 바로 범바위다. 지금도 하촌을 둘러싸고 있는 산을 호암산이라 하고 그리고 범바위와 감성동 너릉 주위에는 지금도 낚시꾼들이 찾아오고 있다. ◉ 가실바꾸미마을에 도착하다. 오늘 해안거님길 중 가장 중요한 가실바꾸미마을에 도착했으나 표지판이 없다, 실제 1950~1970년대까지 이곳에 거주하였던 두분의 증언을 들어보자 바닷가 오지마을 가실바꾸미 (증언 이 무근 74세) 하촌마을에서 10리 떨어진 이곳에는 처음 130년 전 박 씨라는 사람이 논밭을 일구어 한집 두집 모이기 시작하여 총 8가구가 살기도 한 곳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1950`1960년대 살다가 나온 이 무근 씨의 증언에 의하면 좀 다르다. 할아버지 이만엽씨는 옥포 서간도에 살다 1930년대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이곳에는 외떨어진 바닷가로 미역, 다시마, 톳나물 등이 풍부하고 참돔 혹돔 감성돔 등이 지천으로 갈려 있으며 홍합, 굴 가리비, 해삼, 전복 소라 등이 많아 한때는 해녀들이 몰려와서 아랫방 옆방 등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대충 한 20~3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6.25 전쟁이 난후에는 피난민들이 몰려와서 10여 가구도 살기도 했다고 한다. 외지고 농작물과 해산물이 풍부하여 제삿날이라도 되면 앞집 뒷집 옆집 이두원, 이민열, 이태민, 박금도, 진연일, 김석록 그리고 총쟁이집 할아버지 참석하여 날이 새고 다시 밤이 될 때까지 술 마시고 노래하고 담소를 나누었다고 한다. 논은 25마지기 밭은 1천여 평 되었으며 논에는 물이 풍부하여 벼농사를 짓고 밭에는 고구마와 감자를 심었으나 일부는 돼지 밥이 되었다고 한다. 가실바꾸미 해변가에서 추억의 톳나물 ◈ 박금도 증언 (79세) 증조부가 밀양에서 살다가 정삼품까지 했으나 끝까지 벼슬을 하지 못하고 둔덕으로 다시 옥림으로 살다가 조용한 가실바꾸미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일부 책자에 나와 있는 130년 전 박 씨가 살았다고 기술한 부분이 박금도씨 할아버지라고 추측해본다. 가실바꾸미에는 4집이 살았는데 이두윤, 이만엽, ? 그리고 박금도 증조부가 터를 잡고 살았으며,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바뀌어 이름이 다르게 나타난다. 가실바꾸미 주변 바닷가에는 과녁바위, 안장바위, 양귀바위 등이 있었는데 안장바위 주변은 큰바위와 깎아 지른듯한 절벽 때문에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에 빨갱이들이 5~6명 살았는데 가실바꾸미 사람들이 무서워서 파출소에 신고하여 한 달 동안 추적 끝에 소탕하여 바닷물이 빨갛게 물들었다고 한다. 우리 고향에서도 빨갱이 사건으로 두 사람이 살해당하고 한 명은 행방불명이 된 사건이 있어 관심이 가는 부분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그 시절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어릴 때 장승포초등학교에 다녔는데 두 시간 정도 걸러 학교에 도착했으면 집에 돌아올 때는 언제나 어둠이 컴컴하게 내려앉을 무렵에 도착햇다. 도시락은 없고 호주머니에 고구마나 감자 그리고 밤이나 감을 가지고 다녔는데 무거워서 바위 뒤에 숨겨놓고 집에 갈 때 찾아보면 산짐승들이 먹어버려 쫄쫄 굶고 집에 가다 잠을 자다 가곤 했다. 때로는 산돼지나 개여시를 만날 수 있기에 호주머니에는 언제나 돌멩이 두 개와 손에는 막대기를 갖고 다녔다. 그리고 배가 고프면 남의 집 밭에 고구마나 무 서리를 하고 들키면 혼나게 매를 맞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배가 고파 미군집차들이 지나가면 달려가서 매달리면 과자나 초콜릿을 얻어먹은 기억이 생생하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흉년이 들면 거릉뱅이 들어 4~5명 진을 치고 밥 달라고 구걸했다. 6.25 전쟁 전후 세대들은 이런 추억들이 송골송골 떠 오를 것이다. ◉ 범바위의 전설 범바위는 예전에 옥림마을 뒷산에 수호랑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이 호랑이가 하루는 해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이상한 동물을 보았다. 바로 인어였다. 호랑이는 인어를 보는 순간 반하여 사랑을 고백하였다. 인어는 지심도 바다 밑 용궁에서 살던 공주였다. 어느 날 수달이 배숲개 마을의 감성돔 너릉에서 감성돔을 많이 잡아먹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용왕은 인어공주에게 수달로부터 감성돔을 잡아먹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용왕은 인어공주에게 수달로부터 감성돔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인어공주는 그 임무를 가지고 나왔던 찰나에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호랑이의 사랑 고백을 받은 공주는 용왕님에게 허락을 받아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용궁으로 갔다. 인어공주는 호랑이에게 감성돔을 못 잡아 먹게 하고 수달도 오지 못하도록 임무를 맡겠다. 이에 호랑이는 오늘이나 올까 봐 내일이나 올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인어공주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지만, 약속대로 오지 않았고, 그리움과 배고품에 지쳐서 바위에 누웠다. 호랑이는 인어공주를 그리워하다 죽고 말았다. 죽은 호랑이는 파도에 밀려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나는 죽어서도 가죽을 남겨 놓고 인어공주 당신을 기다렸다’는 표시를 새겨 놓앗다. 천년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바위가 바로 범바위다. 지금도 하촌을 둘러싸고 있는 산을 호암산이라 하고 그리고 범바위와 감성동 너릉 주위에는 지금도 낚시꾼들이 찾아오고 있다. ◉ 가실바꾸미마을에 도착하다. 오늘 해안거님길 중 가장 중요한 가실바꾸미마을에 도착했으나 표지판이 없다, 실제 1950~1970년대까지 이곳에 거주하였던 두분의 증언을 들어보자 바닷가 오지마을 가실바꾸미 (증언 이 무근 74세) 하촌마을에서 10리 떨어진 이곳에는 처음 130년 전 박 씨라는 사람이 논밭을 일구어 한집 두집 모이기 시작하여 총 8가구가 살기도 한 곳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1950`1960년대 살다가 나온 이 무근 씨의 증언에 의하면 좀 다르다. 할아버지 이만엽씨는 옥포 서간도에 살다 1930년대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이곳에는 외떨어진 바닷가로 미역, 다시마, 톳나물 등이 풍부하고 참돔 혹돔 감성돔 등이 지천으로 갈려 있으며 홍합, 굴 가리비, 해삼, 전복 소라 등이 많아 한때는 해녀들이 몰려와서 아랫방 옆방 등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대충 한 20~3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6.25 전쟁이 난후에는 피난민들이 몰려와서 10여 가구도 살기도 했다고 한다. 외지고 농작물과 해산물이 풍부하여 제삿날이라도 되면 앞집 뒷집 옆집 이두원, 이민열, 이태민, 박금도, 진연일, 김석록 그리고 총쟁이집 할아버지 참석하여 날이 새고 다시 밤이 될 때까지 술 마시고 노래하고 담소를 나누었다고 한다. 논은 25마지기 밭은 1천여 평 되었으며 논에는 물이 풍부하여 벼농사를 짓고 밭에는 고구마와 감자를 심었으나 일부는 돼지 밥이 되었다고 한다. 가실바꾸미 해변가에서 추억의 톳나물 ◈ 박금도 증언 (79세) 증조부가 밀양에서 살다가 정삼품까지 했으나 끝까지 벼슬을 하지 못하고 둔덕으로 다시 옥림으로 살다가 조용한 가실바꾸미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일부 책자에 나와 있는 130년 전 박 씨가 살았다고 기술한 부분이 박금도씨 할아버지라고 추측해본다. 가실바꾸미에는 4집이 살았는데 이두윤, 이만엽, ? 그리고 박금도 증조부가 터를 잡고 살았으며,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바뀌어 이름이 다르게 나타난다. 가실바꾸미 주변 바닷가에는 과녁바위, 안장바위, 양귀바위 등이 있었는데 안장바위 주변은 큰바위와 깎아 지른듯한 절벽 때문에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에 빨갱이들이 5~6명 살았는데 가실바꾸미 사람들이 무서워서 파출소에 신고하여 한 달 동안 추적 끝에 소탕하여 바닷물이 빨갛게 물들었다고 한다. 우리 고향에서도 빨갱이 사건으로 두 사람이 살해당하고 한 명은 행방불명이 된 사건이 있어 관심이 가는 부분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그 시절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어릴 때 장승포초등학교에 다녔는데 두 시간 정도 걸러 학교에 도착했으면 집에 돌아올 때는 언제나 어둠이 컴컴하게 내려앉을 무렵에 도착햇다. 도시락은 없고 호주머니에 고구마나 감자 그리고 밤이나 감을 가지고 다녔는데 무거워서 바위 뒤에 숨겨놓고 집에 갈 때 찾아보면 산짐승들이 먹어버려 쫄쫄 굶고 집에 가다 잠을 자다 가곤 했다. 때로는 산돼지나 개여시를 만날 수 있기에 호주머니에는 언제나 돌멩이 두 개와 손에는 막대기를 갖고 다녔다. 그리고 배가 고프면 남의 집 밭에 고구마나 무 서리를 하고 들키면 혼나게 매를 맞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배가 고파 미군집차들이 지나가면 달려가서 매달리면 과자나 초콜릿을 얻어먹은 기억이 생생하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흉년이 들면 거릉뱅이 들어 4~5명 진을 치고 밥 달라고 구걸했다. 6.25 전쟁 전후 세대들은 이런 추억들이 송골송골 떠 오를 것이다. 가실바꾸미 해변의 북바위와 송곳바위 ◉ 장승포와 옥림의 중간지대 군부대(초소) 있는 곳 가실바꾸미 둘레길의 중간지점이다. 윤개공원에서는 30여 분 총쟁이집에서는 바닷가로 5분 정도 내려오면 평평한 대지가 보인다. 차 바퀴를 박아 놓은 곳은 밭터이고 무덤은 이무근 할아버지 묘이다. 그 주변 밭은 이태민밭과 이만열 밭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집채만 한 큰 바위들이 무덤을 이루며 전망이 좋은 산기슭에는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다. 장승포와 옥림 중간지점의 군초소와 옛날밭자리 오른쪽으로 바닷가로 5분 정도 내려가면 자갈밭이 있고 턱바우가 있다. 아주 큰 바위로 턱바위라고 하기보다는 할메,할베바위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상 싶다. 정확한 안내판이 없어 가는 이가 별로 없다. 바닷가의 흉상 턱바우( 일명 할베 할메바위) ◉ 정자를 지나 총바우 갈매기 똥 싼 바위를 지난다. 이 해안 길은 먼 해양을 보고 가는 길이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전망이 좋다. 숲이 울창하여 그늘 속에서 걸으며 골짜기마다 물이 있어 음이온을 배출하여 상쾌함을 더해준다. 해안가에는 유난히도 돌이 많고 여가 많다. 거제도는 반도 아니고 섬이다. 해상지명에 보면 대륙-반도-섬(島)-여(礖)-서(嶼)-초(礁)등으로 구분한다. 해양지명 중 만입 된 곳을 해만, 만, 포(옥포만, 외포, 덕포) 라하고 돌출된 곳을 갑, 곶, 말, 반도( 갈곶, 서이말, 한반도)라 한다. 그리고 암(岩)과 관련된 단어는 여, 서, 암, 탄, 바위, 바우라 한다. 기미산 주변의 해변에는 수많은 바위와 여가 많다. 그 대표적인 곳이 평바우, 범바우, 북바우, 송곳바우, 삼여, 턱바우,총바우,명물바우,,굴바우, 오리바우, 갈매기똥산바위, 작은돔자리, 큰돔자리, 윤개여 등이다. 가실바꾸미 해변의 북바위와 송곳바위 ◉ 장승포와 옥림의 중간지대 군부대(초소) 있는 곳 가실바꾸미 둘레길의 중간지점이다. 윤개공원에서는 30여 분 총쟁이집에서는 바닷가로 5분 정도 내려오면 평평한 대지가 보인다. 차 바퀴를 박아 놓은 곳은 밭터이고 무덤은 이무근 할아버지 묘이다. 그 주변 밭은 이태민밭과 이만열 밭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집채만 한 큰 바위들이 무덤을 이루며 전망이 좋은 산기슭에는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다. 장승포와 옥림 중간지점의 군초소와 옛날밭자리 오른쪽으로 바닷가로 5분 정도 내려가면 자갈밭이 있고 턱바우가 있다. 아주 큰 바위로 턱바위라고 하기보다는 할메,할베바위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상 싶다. 정확한 안내판이 없어 가는 이가 별로 없다. 바닷가의 흉상 턱바우( 일명 할베 할메바위) ◉ 정자를 지나 총바우 갈매기 똥 싼 바위를 지난다. 이 해안 길은 먼 해양을 보고 가는 길이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전망이 좋다. 숲이 울창하여 그늘 속에서 걸으며 골짜기마다 물이 있어 음이온을 배출하여 상쾌함을 더해준다. 해안가에는 유난히도 돌이 많고 여가 많다. 거제도는 반도 아니고 섬이다. 해상지명에 보면 대륙-반도-섬(島)-여(礖)-서(嶼)-초(礁)등으로 구분한다. 해양지명 중 만입 된 곳을 해만, 만, 포(옥포만, 외포, 덕포) 라하고 돌출된 곳을 갑, 곶, 말, 반도( 갈곶, 서이말, 한반도)라 한다. 그리고 암(岩)과 관련된 단어는 여, 서, 암, 탄, 바위, 바우라 한다. 기미산 주변의 해변에는 수많은 바위와 여가 많다. 그 대표적인 곳이 평바우, 범바우, 북바우, 송곳바우, 삼여, 턱바우,총바우,명물바우,,굴바우, 오리바우, 갈매기똥산바위, 작은돔자리, 큰돔자리, 윤개여 등이다. (쉼터정자, 물개바위,암괴류, 핵석) 깎아지른 듯한 비릉 주위를 가다 보니 위험한 곳이 두어 군데 있다. 30여 년 전 그곳에서 굴러떨어져 죽은 사건이 있은 곳이라고 한다. 머리끝이 쭈뼛해진다. 소나무가 들어서 있던 해안 절벽은 지구 온난화로 인해 난대 상록수림으로 변하고 있다. 동백나무, 사스래피나무, 우묵사스레피, 후박나무, 참식나무, 돈나무, 구실잣밤나무, 까마귀쪽나무, 팔손이, 황칠나무, 백서향, 감탕나무 그리고 송악, 자금우, 마삭줄, 남오미자,개복숭아, 밤나무, 돌배나무, 산삼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있다. 약수암 가는 길이 보이고 저 멀리 장승포 1구 망산과 해안 둘레길이 보인다. 흰 물살을 뒤로 한 채 고깃배와 유람선이 쉼 없이 왔다 갔다 한다. 이 길을 가노라면 모두가 시인이 되고 향수에 젖어 들며, 대해를 바라보며 청운의 꿈을 꿔보기도 한 길이기도 하다. 바실바꾸미 어린애들이 학교 가는 길 낚시꾼들이 낚시하려고 가는 길 목동들이 소 먹이려고 가는 길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나무하려고 가는 길 가실바꾸미 할메 할배가 장 보려고 가는 길 우리는 옛 추억의 길을 걸으며 향수에 젖기도 하며 시원한 산림에 산림욕도 하며 몸과 마음의 휴식하고 휴양하며 때론 아무 의미도 없는 무아의 경지에 빠져들기도 한다. 쉬엄쉬엄 걷다 보니 장승포 마전마을이다. 이 마전마을 삼밭이라 하는데 1940년대 60년대까지는 20~30가구 정도가 띄엄띄엄 살았다고 한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피난민과 수월, 양정 등지에서 소개 나온 이들이 많았으며 1980년대에는 대우조선이 들어서면서 사원아파트가 건립되어 마전동이 생겼다. 지금은 조선소 불황으로 장승포동과 합병되었다. 산비탈에는 해성 중고등학교가 있었으며 진도선 씨는 전쟁고아를 돌보는 임마누엘( 현 마전어린이집)을 설립하였다. ◉ 마지막 종점 윤개공원 장승포 끝자락에 있는 작은 공원을 윤개공원이라하며 이곳은 일출이 장관이며 작은 자갈밭에는 윤개여가 있다. 파도가 몰아치면 장관을 이루어 작가들이 장노출 촬영하려고 오는 길이기도 하다. 한국 궤적작가의 대가 서성원 씨가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 총쟁이집과 총바위 이제까지의 해안거님길은 둘레길이고 남북으로 이어지는 에는 총쟁이집과 약수암과 두서너 집이 있엇다. 거제대에서 가실바꾸미 가지전에 집이 한 채 있다. 이 집을 총쟁이집이라 한다. 현재 집을 지키고 있는 조부 김봉두 씨가 거창에서 갑부로 1910년대 백두산 등지로 호랑이 사냥을 다니다가 거제 장승포에 사는 가네마루(金丸原一)씨를 알게되었다. 그런 연유로 1920년경 옥림에 살다 지금 거주하고 있는 가실바꾸미가는 길에 터를 잡고 재산을 모으거나 직장을 가지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매일 총만 들고 사냥하러 다닌다고 하여 총쟁이집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 김종록 씨는 4남 3녀를 두었으며 김덕곤 씨는 지금 옛날집을 그대로 지키고 있으며 3남 옥곤(개명 김운항) 씨는 문학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가실바꾸미’의 초상이라는 시집을 여러 권 편찬하고 있다. 총쟁이집 주변에는 서너 집이 있었고 가실바꾸미에에도 너덧 집이 있었으나 근접해서는 단독으로 혼자 있었다. 장승포 초등학교 다닐 때는 위험하고 험한 길을 걸어 다녔다고 하니 지금 생각하면 그저 놀랄 뿐이다. 1980년대 이 길을 가다가 장승포 마전 사람이 발을 헛디뎌 죽일 일도 있다고 한다. 1970년대 이후 대우조선이 활항을 이룰 때 이곳 총쟁이 집에 서는 보신탕과 닭백숙을 하여 제법 인기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총쟁이집은 1970년~1980년대에는 토종백숙을 잘하는 집이라 하여 거제사람들이 가끔 찾는 집이기도 했다. 현재는 김덕곤 씨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 총쟁이집.. 현재 앋르이 살고 있음 총쟁이집 바닷가에 있는 총바위( 바위가 총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곳에서는 감성돔,참돔,혹돔이 많이 잡히는 곳이기도 하다) 가실바꾸미... 김운항(가실바꾸미 작가) 아침 골안개 촉촉이 왕대밭에 어리면 부산한 산까치의 날갯짓 단잠을 깨운다…. 도마에 부딪는 엇박자 칼소리 유년의 가슴 다독이던 노모 老母의 손길처럼 정겹다. 된장에 참기름 한 방울 약손으로 주무른 그 정갈한 다래 순 묵나물 저분 끝에 매달고 게눈 되어 훔쳐보는 왕마디 쭈그럭 손 어머니 목숨처럼 소중한 우리 어머니 거제대학 동편에 자리잡고있는 약수암 ◉ 마지막 종점 윤개공원 장승포 끝자락에 있는 작은 공원을 윤개공원이라하며 이곳은 일출이 장관이며 작은 자갈밭에는 윤개여가 있다. 파도가 몰아치면 장관을 이루어 작가들이 장노출 촬영하려고 오는 길이기도 하다. 한국 궤적작가의 대가 서성원 씨가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거제도에는 섬&섬길 14개 코스, 남파랑17길 코스 그리고 해안거님길 5개 코스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어디인가? 주저 없이 2020년 12월에 개통한 해안 거님길 2코스를 추천한다. 그 이유는 전 구간에 걸쳐 해안 경관이 끝내준다. 그다음 등성이와 계곡이 많고 물이 풍부하다. 난대 상록수림이 많고 다양한 야생 과일들이 존재한다. 큰 돌과 작은 돌, 너덜지대(덜경), 핵석, 토어등 암괴류가 많아 어린이 학습에 도움이 된다. 다양한 역사와 전설이 서려 있다. 낚시 명소가 여러 곳 있으며 참돔과 혹돔 등이 자주 잡히는 곳이다. 기미산에서 내려다 본 장승포항...멋져유ㅠㅠㅠ. 멋진 장면을 연출하는 윤개여...장노출 글. 사진... flower & photo Ok geon su 거제도 이야기 카페지기 거제사진연합회장 경상남도 명예기자 자연과 함께하는 자연인 옥건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