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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쪽으로 우뚝 솟은 낙하산(落霞山)과 보두산(步斗山)을 주룡(主龍)으로 하여 배경을 삼고 서남(西南)쪽으로 응천강(凝川江) 상류인 북천수(北川水)의 물줄기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아름다운 마을이다. 동으로 산외면 엄광리(山外面 嚴光里)와 비암고개를 넘어 이웃하였고, 서는 북천수를 건너 안인리와 들판을 마주 보고 나누어졌다. 남으로는 비학산(飛鶴山)을 사이에 두고 산외면 남기리(山外面 南沂里)와 경계가 되었으며, 북(北)으로는 옛 마을 금산리(金山里)와 연접해 있다.
밀주구지(密州舊誌)에는 옛날에 세 당상(堂上)과 두 사인(舍人), 여덟 만호(萬戶)의 벼슬 자리가 한 시대(時代)에 나란히 나오는 곳이라 하여 가곡(嘉谷)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했다. 실제로 그러한 관인(官人)의 출세(出世)가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가곡(嘉谷)이라는 지명(地名)은 어느새 가곡(佳谷)으로도 표기되어 계속 아름답고 좋은 마을임을 자랑하고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行政 區域 改編時)에도 이웃 마을과의 통폐합이나 경계 조정이 없었고 그 후 동세 확장(洞勢 擴張)에 따라 가곡(佳谷)의 구동(舊洞)을 내가곡 외가곡(內佳谷 外佳谷)으로 나눈 외에 길곡(吉谷), 新村(새각단)등 네 개의 자연 부락(自然 部落)으로 법정리(法定里)를 구성하고 있다.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구가곡(舊佳谷)에는 이조 중종(李朝 中宗) 때 월연 이(月淵 李)태와 함께 고을에 재명(才名)을 떨친 군수 박형간(郡守 朴亨幹)이 정착(定着)하여 세거지(世居地)가 되었고, 그 아들 박도생(朴道生)이 명필(名筆)로써 이름을 세상에 알린 곳이다. 또 선조(宣祖) 때는 진사 박영(進士 朴英)이 이 마을에 정착하여 밀성 박씨(密城 朴氏)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는데, 그 아들 참봉 박희량(參奉 朴希良)의 부인 여흥 민씨(夫人 驪興 閔氏)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정열(貞烈)로 순사(殉死)하여 마을에 정여(旌閭)가 내렸다. 손자 박종민(孫子 朴宗閔)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화왕산성(火旺山城)의 의거(義擧)로써 공신(功臣)이 되었고, 증손 박선승(曾孫 朴善承)은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올라 귀현(貴顯)으로 마을을 빛냈다.
고적(古跡)으로는 서쪽에 경락암(經絡岩)이 있다 하였고, 바위 위에 고대(高臺)가 있다 하였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1) 내가곡(內佳谷, 後佳谷, 뒷가실)
가곡리의 안쪽 마을이라 하여 내가실 또는 뒤쪽에 있다 하여 뒷가실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본래 가곡의 원(元)터전은 지금의 길곡 부락(吉谷 部落)으로 추정(推定)되고 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밀성 박씨(密城 朴氏)의 한 파(派)가 이 곳으로 이주하여 지금까지 세거하고 있다. 이조 효종(李朝 孝宗) 때 이 마을에 거주하면서 한성우윤(漢城右尹)의 벼슬과 큰 부(富)를 이룩한 박선승(朴善承)이 무진정(無盡亭)이라는 별업(別業)을 세웠으나 그 후에 없어지고 그 자리에 후손들이 원모정(遠慕亭)을 중건(重建)하여 보존하고 있다. 또 박열부민씨정여각(朴烈婦閔氏旌閭閣)은 몇 차례 이건(移建) 끝에 해방 후 마을 앞 국도변에 중건(重建)하였고, 최근에는 모산 박상희(牟山 朴尙熙)를 추모(追慕)하는 경모정(敬慕亭)을 그 후손(後孫)들이 건립(建立)하여 보존하고 있다.
■ 비암(날바위, 飛岩)
내가곡(內佳谷) 북쪽 골짜기에 있는 땀 이름이다. 비암사(飛岩寺)의 절터라고도 하고, 이 곳에 있는 바위의 모양이 날아갈 듯 솟아 있다고 하여 비암(飛岩)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행정 부락(行政 部落)으로는 내가곡(內佳谷)에 속해 있으나 6.25 때 폐동(廢洞)이 된 후 현재는 인가가 없다고 한다.
■ 보담산(步斗山)
비암 동북쪽에 솟아 있는 산봉우리로 옛날 보담이라는 감여가(堪輿家)(天文 地理에 能通한 사람)에 대한 전설이 얽힌 산이다. 보두산은 보담산을 표기(表記)한 것이라 한다. 보담노장에 얽힌 전설은 보두산(步斗山) 너머에 있는 산외면 엄광리(山外面 嚴光里)에도 비슷한 것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 곳 가곡리(佳谷里)와는 그 양태(樣態)가 조금 다르다. 이에 가곡리 쪽의 전설을 몇 가지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보담노장의 징검다리
보담이란 노장은 옛날 중국 왕조의 고관을 지냈는데 나라에 죄를 짓고 이 곳 보두산에 들어와 귀양살이를 했다. 천문지리에 통달하여 이 산에 와서는 산성(山城)을 쌓고 암자(庵子)를 지어 살면서 고독(孤獨)하게 지냈다. 그가 사람 사는 마을에 출입할 때는 항상 토호(土豪)들이 사는 가곡(佳谷)과 평릉(平陵)을 피하여 항상 엄광산등을 타고 내려와 강을 건너 성내로 들어가곤 했다. 그리하여 강을 건너는 징검다리를 놓았는데 그 돌이 하나같이 바위와 같아서 큰 홍수에도 떠내려 가지 않았으나 강의 제방을 쌓을 때 모두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② 보담노장의 발자국터
가곡과 평릉 사이에 있는 볼수바위(평릉쪽에는 생이듬)에 큰 발자국터가 남아 있는데 이것이 보담노장의 것이라고 한다. 걸음의 자국을 남기고 북두별을 상징하는 두자(斗字)를 아울러서 산이름을 보두산(步斗山)으로 했다는 전설이다.
③ 보담이 점지한 墓자리와 날아간 鶴
보담노장이 평소에 혜택을 많이 받은 엄광의 정씨(鄭氏)에게 은혜를 갚고자 좋은 묘(墓)자리 하나를 점지해 주었다. 문득 억새풀 새끼를 던지면서 그 끝부분 지점을 파면 큰 판석(板石)이 나올 터임에 그 위에 하관(下棺)을 하되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관을 마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이윽고 땅 속에서 판석이 보이는데, 별안간 마을에 불이 나 정씨(鄭氏)의 집이 타고 있었다. 작업을 중단하고 허겁지겁 마을로 달려갔으나 불은 커녕 아무 일도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묘터로 다시 돌아온 그는 그 사이 인부들이 판석을 들어내고 그 밑에 시신(屍身)을 묻었는데 판석을 들어내는 순간 그 속에서 학(鶴) 세 마리가 날라 나왔다고 한다. 그 중 한 마리는 엄광 숲마을 뒤쪽 수리등으로 날아가고, 또 한 마리는 큰갓 벌묘등으로 날아갔으며, 나머지 한 마리는 연장으로 때려잡아 눈이 상(傷)한 체 죽은 것을 이 곳에 묻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보고를 하는 것이었다. 보담노장은 아무리 明堂(明堂)이라도 주인의 분복과 운수가 아니면 제 것이 될 수 없구나 하고 탄식을 했다고 한다.
④ 정봉사(장님)의 신통술
보담노장이 엄광 정씨에게 점지해 준 묘자리에서 날아 나온 세 마리 학 가운에 인부들이 때려 잡아 눈을 상하게 한 그 학(鶴)을 무덤 자리에 정씨는 결국 묻음을 썼는데, 뒷날 후손(後孫) 중에 장님이 나와 신통술이 있었다. 지난 일을 알아 맞히는 것은 말할 것 없고 앞으로의 일을 예언하는 것도 틀림없이 적중(的中)하였다. 가령 꿩이 산에 알을 낳으면 멀리 앉아 사람을 시켜 아무데 나무 밑에 가 보면 방금 낳은 꿩알이 몇 개 있으니 주워오라는 등 신통하기가 이를데 없었다고 한다.
■ 비파등(琵琶嶝)
길곡 산등성이에서 신선(神仙)이 비파(琵琶)를 타는 소리가 났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신선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 약물등(藥水嶝)
가곡 뒷산에 있는 등성이로 이 곳에 약물이 나는 샘이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장구등(長鼓嶝)
엄광리로 넘어가는 고개의 양쪽 산등성이의 모양이 장고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 딱박고개(따박고개, 楮田峴)
길곡에서 엄광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인데, 이 고개에 닥나무밭이 있었으므로 생긴 지명이다. 또 이 고개에 따박솔(盤松)이 있다고 하여 따박고개라고도 했다.
■ 고답고개(高畓峴)
비암에서 고답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가리킨다.
■ 매마리고개
내가곡(內佳谷) 새각단에서 평릉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인데, 보담노장에 대한 전설이 얽혀 있다. 옛날 보두산에 있었던 보두암(步斗庵)의 노승(老僧)이 풍수지리(風水地理)에 통달(通達)했는데, 평소에 원망(怨望)이 깊었던 가곡의 박씨(朴氏)에게 좋은 묘(墓)자리가 있으니 선산(先山)을 이장(移葬)하라고 갖은 말로 꾀인 끝에 드디어 박씨(朴氏)는 이장을 결심하고 보담이 시키는 대로 선산의 묘를 파기 시작했다. 반쯤 묘를 파 들어가는데 별안간 묘혈(墓穴) 속에서 하얀 김이 풀석 솟아 오르더니 매(鷹)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 나오면서 고개 너머로 사라졌다. 그제서야 박씨(朴氏)는 속은 줄 알고 보담노장을 찾았지만 이미 온데간데가 없고 선산은 엉망이 되었다. 그 뒤 그 후손은 손해를 봤다. 보담은 통쾌하게 앙갚음을 한 셈이었다. 이 고개는 그 때 무덤 속의 매가 날아간 고개라 하여 매말리 고개가 되었고, 보두암노장(步斗庵老丈)이라 하여 보담노장이라 했다는 것이다.
(2) 길곡(吉谷, 佳谷)
가곡리 한가운데 자리잡은 구가곡(舊佳谷) 마을로 가장 큰 부락이다. 비록 행정적으로는 1980년 이래(以來) 가곡, 길곡 두 부락으로 나누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길곡은 곧 가곡을 가리키고 있다. 길곡이란 지명도 가곡(佳谷)이나 가곡(嘉谷)과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좋은 골이란 뜻을 지니고 있으나 일설(一說)에는 마을 뒷산에 신선암(神仙岩)이 있어 신선(神仙)이 사는 마을은 吉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가곡은 본래 이 마을에 있는 함박등이 그 취락의 발상지라 전하고 있으며, 고려 시대(高麗 時代) 때 이 고을 토호(土豪)였던 밀양 박씨(密陽 朴氏)가 터를 잡고 산 이후 지금까지도 박씨의 世居地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약 200년전부터 재령 이씨(載寧 李氏)와 광주 안씨(廣州 安氏)가 입촌하여 살고 있으며, 구한말(舊韓末) 이후 순천 박씨(以後 順天 朴氏)도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 범떡골(虎谷)
길곡 뒷산에 있는 골짜기인데, 옛날 범이 자주 나타나 호환(虎患)이 빈번했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 부채골(扇谷)
범떡골 위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골이 부채 형상으로 생겼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 서당골(書堂谷)
새각단(新담)북쪽 돌구산 아래 골짜기의 이름으로 박씨(朴氏)들이 이 곳에 서당(書堂)을 지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지금은 서당이 없어지고 이름만 남아 있다.
■ 연당골(蓮堂谷, 연디미)
길곡 부락 국도 바깥에 있는, 큰거렁 남쪽에 있는 지명이다. 옛날에 연당이 있었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또 연디미, 연드미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 볼수바위
보두산의 남쪽 가곡과 산외면 엄광(山外面 嚴光)의 경계 지점에 우뚝 솟은 바위의 이름이다. 마을에서 쳐다보면 마치 디딜방아의 몸통을 바치고 있는 볼수처럼 보인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볼수는 볼씨의 사투리다.
■ 생이듬(喪輿崖)
가곡쪽의 볼수바위가 있는 지점을 평릉쪽에서 말하는 지명인데, 마치 장사 지낼 때 시신(屍身)을 운반하는 상여와 같은 모양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생이는 상여에서 온 말이다.
■ 총각.처녀 무덤(처녀총각묘)
생이듬 위에 있는 무덤을 가리키는데, 3기의 묘(墓) 중에 2기가 해당된다. 이 무덤에 올라가려면 따로 길이 없고 건장한 장정들이라도 겨우 올라 갈 수 있는 높고 험한 층듬이다. 이 무덤 있는 곳의 북쪽은 병풍처럼 가리워져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방안에 든 것처럼 온화한 곳이라 한다. 이 온화한 곳에 총각, 처녀의 무덤이라 전하는 2기의 묘(墓)가 있는 데 음력 8월만 되면 깨끗이 벌초(伐草)하는 사람이 있고, 또 벌초를 하게 되면 소원 성취가 된다는 전설이 있다.
■ 문바위(門岩, 문지기 바위)
보두산에는 옛날의 성지(城址)가 남아 있는데 그 입구에 바위가 하나 서 있다. 이 바위 앞을 지나가지 않으면 성지(城址)에 오를 수 없다 하여 문바위 또는 문지기 바위라고 한다.
■ 보두산성터(步斗山城址)
보두산 봉우리의 서쪽 지점에 잇는 산성(山城)터를 말한다. 뒤쪽에 큰 산이 가로 막힌데다가 앞쪽에는 산이 험하고 암석 투성이다. 산의 정상 중앙부에는 평평한 성채가 제법 기다랗게 남아 있어 성터가 완연하다. 성터 북쪽 등성이에 있는 바위가 문바위이다.이 산성터에 대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이 산 보두암에서 생활한 보담노장이 절과 함께 이 산성을 축조했다는 전설을 남기고 있다.
■ 부처바위 (佛岩)
보두산 문바위 근처에 있는 바위의 이름이다. 비교적 넓은 부지 뒤 쪽에 큰 바위가 병풍처럼 가리워져 있는데, 그 바위 아래에 몇 사람이 비를 피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 그 곳에 옛날 부처를 모셨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 송장바위(屍身岩)
비암 앞산에 있는 바위인데 산쪽으로 엎어져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바위에 글자를 새긴 것 같은 흔적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고 송장바위라고 한데는 얽힌 전설이 있다.옛날 이 바위의 북쪽 산 너머에 한 여인이 살았는데, 남편의 병이 위중하여 온갖 수단으로 남편을 구하려고 하였지만 백약(百藥)이 무효(無效)였다. 하는 수 없이 남쪽 산 너머 엄광리(嚴光里)의 정(鄭)봉사(장님)한테 가서 점을 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이 바위 밑을 지나가려 하는데 갑자기 괴한이 나타나 욕을 당하였다. 그러자 여인은 우선 남편의 병이나 고쳐 놓고 보자는 정성에서 분함을 참고 정봉사에게 가서 점을 보아 달라고 간청했다.정봉사는 여인이 오는 도중에 바위 밑에서 괴한에게 욕을 당한 사실을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그대로 돌아가시오. 가다가 봉변을 당한 그 자리에 쓰러져 있는 그 놈의 시신 위에 그대의 속적삼이나 벗어 덮어주고 가시오." 하였다. 하는 수 없이 왔던 길로 되돌아 왔는데 과연 바위 밑에 그 괴한의 시체가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여 속적삼을 벗어 시신 위에 덮어 주고 쫓기듯이 집에 당도해 보니 어찌된 일일까, 남편은 씻은 듯이 병이 나아 있지 않는가. 여인은 남편의 병이 완쾌한 것을 본 후 다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그 바위를 찾아가 자결다고 한다.
■ 칠성바위(七星岩)
길곡 부락 일대엔 북두칠성 모양으로 일곱 개의 바위가 배열되어 있었다. 내가곡에 네 개, 길곡에 세 개를 합하여 일곱 개를 칠성바위라 했는 데 지금도 그 중 네개의 바위는 남아 있고, 세 개는 도로와 대지를 조성할 때 매몰되었다.
■ 낙화듬(落花崖, 落花岩, 낙화더미, 落花峰)
마을 북쪽 산에 높다랗에 서 있는 절벽의 이름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倭兵이 이 곳까지 쳐들어오자 가곡 마을에 살던 밀성 박씨(密城 朴氏)의 부녀자인 여흥 민씨(驪興閔氏)(朴希良의 夫人)는 다른 부녀자 두 사람과 함께 이 산 바위굴에 숨어서 피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왜병에게 발각되어 화(禍)를 면할 수 없게 되자, 이 벼랑 위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평정(平定)되자 민씨(閔氏)의 부녀자로서의 깨끗한 정절(貞節)을 표창(表彰)하여 마을에다 열부(烈婦)의 정여(旌閭)를 내렸다. 그로부터 이 절벽은 민씨(閔氏) 등이 꽃처럼 깨끗하게 떨어져 죽은 벼랑이라 하여 낙화암이라 이름 지어진 것이다. 또 산의 형세(形勢)가 꽃이 지는 것 같다 하여 락화산(落花山)이라 했다고도 한다. 낙화데미, 낙하봉의 딴 이름도 있다.
■ 서당바위(書堂岩)
비암 아래 저수지 남쪽에 5m정도 높이의 바위이다. 옛날에 글 배우는 서당이 있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바위에 밀성 박장근거지(密城 朴長根居地)라는 음각(陰刻)의 글씨가 있다.
■ 기회보(沂回洑)
응천강(凝川江)이 중섬들(中島坪)을 사이에 두고 두 갈래로 흐르는데, 이 곳에 기회보의 목이 있어 붙인 이름이다.
■ 비암거렁(飛岩)
비암 안쪽 여러 골짜기에서 모여든 물이 비암(飛岩), 가곡(佳谷) 두 저수지(貯水池)를 거쳐 마을 가운데로 흘러내리는 계천인데 아낙네들이 빨래터로 이용하고 있다.
■ 정려껄(旌閭街)
내가곡(內佳谷) 국도변에 있는 박열부민씨정여각(朴烈婦閔氏旌閭閣)거리를 이른다. 민씨부인(閔氏夫人)의 열행(烈行)을 표창(表彰)하여 1600년 경에 처음으로 북산(北山) 아래에다 정여(旌閭)를 내렸으나 건물이 퇴락하여 1722년(景宗2,壬寅)에 다시 낙하산 아래로 이건했다. 그 후 화재로 없어진 것을 해방 후(1946년)에 마을 앞 국도변에 재차 복원(復元)하였다.
(3) 외가곡(外佳谷, 바깥가실, 앞가실)
가곡리의 가장 남쪽에 있는 부락으로 행정적으로는 길곡에 속해 있다. 가곡리의 바깥에 있다 하여 바깥가실 또는 앞쪽에 있다 하여 앞가실이라고도 한다. 약200년부터 안동(安東) 손씨(孫氏)가 청도(淸道)에서 입촌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근처에 성불암(成佛庵)이라는 절간이 있다.
■ 선암사터(仙岩寺址)
외가곡 뒷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절터이다. 원래 선암사가 이 자리에 있었으나 절의 역사는 알 수 없고 절터만 남아 있던 것을 일제 말기(1930)에 성불암을 세웠다.
■ 비암못(飛岩池, 비암아랫못)
이 못은 약 200년 전부터 있어 온 큰 못이었다. 옛날에도 마을 앞 들판의 관개용(灌漑用) 저수지(貯水池) 역할을 해 왔는데, 1936년에 근대식 저수지로 확장개수(擴張改修)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1968년에 가곡에다 또 다른 농업용 관개저수지를 설치한 이후 이 옛날 못은 비암 윗못으로 통하고 있다.
■ 중섬들(中島坪)
운문(雲門), 청도(淸道) 두 내에서 큰 물이 질 때마다 흘러 내려온 흙과 모래가 쌓여서 자연적으로 생긴 삼각주(三角洲)의 들판이다. 두 내의 강물은 이 섬을 좌우에 두르고 흐르다가 응천강(凝川江) 하구에서 다시 합류하니 강 가운데 섬이라 하여 중도라 하였고 섬 전체가 비옥한 전답이 된 것이다.
■ 가실봉답(佳谷奉畓)
가곡은 옛날부터 논보다 밭이 많은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군내에서도 밭이 많기로 유명한 일안태(一安台), 이청용(二靑龍), 삼사포(三沙浦), 사가곡(四佳谷)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이다. 그러한 마을에 가곡, 비암의 두 저수지(貯水池)가 설치된 이후 옛날의 밭이 논으로 많이 바뀌었다. 밭이 논으로 바뀐 곳을 봉답이라 하는데, 지금도 가곡의 봉답은 그 구역이 넓은 편이다. 봉답은 천봉답(天奉畓)에서 온 말로 풍부한 수리시설이 없이 오직 하늘의 우순풍조(雨順風調)만을 받들고 농사 짓는 논을 의미한다.
■ 대청앞들
내가곡 앞 국도서편들인 데 옛날 이 마을에 삼당상(三堂上), 이사인(二舍人), 구만호(九萬戶)가 동시에 났다. 그 때에 대청이 있었다 하며 이로소 대청앞들이라 한다.
(4) 새각단(新村)
내가곡 북쪽에 있는데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에서 새각단 또는 신촌이라고 한다. 내가곡에 속한 땀이다.
■ 솔때백이(솟대백이)
길곡(吉谷) 부락 안에 있었던 지명으로 솟대백이 또는 솔때백이라 했다. 솟대는 옛날에 과거에 합격한 사람을 위하여 그 마을 입구에 높이 세운 것으로 붉은 칠을 한 장대 끝에 푸른 칠을 한 나무 용(龍)을 붙인 것인데 이 마을에서도 솟대가 있었다고 한다.
■ 긴늪 물방앗간
외가곡 앞의 국도와 기회 봇도랑이 교차되는 강쪽에 봇물을 이용하여 설치한 물방앗간이 있었는데 6.25동란 때 없어졌다. 방앗간 위치는 외가곡이었으나 이름을 긴늪 방앗간이라 한 것은 애초 방앗간의 설치를 긴늪(沂回)사람이 했기 때문이라 한다.
■ 응강고개(嚴光峙)
내가곡(內佳谷)에서 도곡리(道谷里)와 엄광리(嚴光里)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으로 엄광(嚴光)이 응강으로 변음(變音)된 것이다.
■ 장딸방우
넙덕방우 동쪽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 절태골(寺址谷)
비암곡 동쪽에 있는 깊은 골짜기로 옛날에 절이 있었다 하여 절터골, 곧 절태골이 되었다.
■ 지름등 모랭이
가곡에서 기회리 쪽으로 돌아가는 모롱인데, 연디미(蓮塘)북쪽 산을 지름등산 또는 지람댕이라고 한다.
■ 촉새방구
배암골 동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촉새방구 동쪽에는 칼방우(劍岩)와 필봉(筆峰)이 있다.
■ 땅고개(地峙)
가곡에서 평릉으로 넘어가는 나즈막한 고개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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