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3: 18 거울을 보는 것 같이 ( 4 )
5]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주의 영광을 바라보는 성도는 주의 형상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성도들의 존재가 신격화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마치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이 성도들의 얼굴에서 빛으로 나타난다고 보아서도 안 된다.
본문의 의미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에 대한 지식을 받고 그 내면이 변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할 때 성도들은 점점 더 높은 단계의 영광으로 진전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주의 재림이 실현될 때는 성도들의 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완전한 영광의 형체(形體)를 얻게 될 것이다.
* 빌 3: 21 -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그런데 이렇게 변화되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의문의 율법이 아니라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 성도들의 영광은 자신들의 노력이나 업적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 롬 8: 29-30 –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6] 수건을 벗어버리고 (고후 3: 12-18) : 박조준 목사
본문의 배경은 구약 출애굽기 34장입니다. 거기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서 40일 40야를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하나님이 두 판에 기록하였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했기 때문에 얼굴에 광채가 났는데 모세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므로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알게 된 모세는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말씀하신 것을 그들에게 명하기를 마친 후 수건으로 자기의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출애굽기 34장 33절에 보면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했습니다. 다른 성경 번역에 보면 “모세가 말을 마칠 때까지 그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알고 있던 히브리 원전의 올바른 번역은 모세가 말을 마쳤을 때에 그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것입니다. 옛 이야기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모세가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린 것은, 빛나던 영광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백성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바울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첫째로 생각한 것은 옛 언약, 하나님과 인간과의 옛 관계가 가지고 있는 영광은 본질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계시는 참되고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계시는 충분하며, 최종적이며, 그리고 완전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약 성경이 신약 성경과 같은 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부정하는 것은 구약 성경에 대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요. 한편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같은 수준에 놓으면 신약 성경에 대해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구약은 영광을 위한 한 단계이고, 신약은 영광의 절정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은 수건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을 여러 가지로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구약 성경의 말씀을 들을 경우 그들의 눈에 수건이 씌워져 있어서 그 진실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 말씀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인데도 수건이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눈이 수건으로 가려져서 성경의 참된 의미를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윌리엄 바클레이).
가령, 편견이라는 수건으로 가려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가를 겸손히 배우려 하지 않고 내 주장을 지지해 줄 것을 찾기 위해서 성경을 읽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우 조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대라는 수건으로 가려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 있는 그 말씀의 뜻 자체를 발견하기보다는 거기에 있기를 기대하는 것을 찾으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관한 구절들은 잘 읽지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관한 구절들은 일부러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찾기를 기대하는 것은 찾으며, 보기를 원치 않는 것은 무시합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술을 끊지 못하시는 분은 디모데전서 5장 23절을 자주 읽습니다. 거기 보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향하여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했습니다. “아니, 바울 선생도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마시라고 성경에 말했는데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술 마시는 것 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천주교에서는 술을 마시든 담배를 피우든 관계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신부들도 술이나 담배를 잘 합니다. 또한 천주교인들 모임에는 의례히 술이 끼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천주교의 신부 가운데 알콜 중독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술을 약으로 쓴다든지, 음식의 맛을 내거나 고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요리 과정에서 쓰는 것은 그냥 마시는 것과는 문제가 다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작은 부인을 데리고 사는 사람이 혹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신약 성경을 읽지 않고 꼭 구약만 읽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구약에 보면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보통 부인을 여럿 거느리고 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기대하는 것만 찾아 읽는 것은 수건을 벗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수건을 쓰고 있으면 말씀을 바로 읽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단편적인 생각의 수건으로 가려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성경의 한 절을 보려면 그 한 장을 보아야 합니다. 한 장을 바로 보려면 그 한 책을 보아야 합니다. 한 절 한 절을 따로 떼어 내어 생각하고 비평하는 것은 퍽 위험한 일입니다. 성경으로부터 어떤 성경 구절은 취하고, 어떤 것들은 버림으로 자기 개인의 생각에 맞도록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의 구절을 여기저기서 따오게 되면 못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전체적인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읽을 때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빛에 비춰 가면서 읽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성경의 바른 의미를 볼 수 없게 하는 수건뿐만 아니라 그들과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리는 수건도 있었습니다.
또한 불순종의 수건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지적인 면에서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면으로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할수록 그만큼 하나님을 점점 더 볼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맙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한 말이 그 뜻입니다.우리의 생활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해야만 내 심령의 눈이 수건으로 가려지지 않아서 하나님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궁창이 그 손으로 만드신 것을 나타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할 때, 깨끗한 눈으로 일월성신과 산천초목과 자연계를 바라볼 때,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을 자연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무의미한 반복이 아닙니다.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납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 놓고 읽을 때 이 성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정한 마음, 수건으로 가려진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수건을 벗고 깨끗해야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 드릴 때 하나님을 볼 수가 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을 보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인 것입니다. 참된 기쁨, 참된 평화, 참된 행복, 하늘 나라의 경험을 이 가운데서 미리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깨끗이 하고 수건을 벗어버려야 하늘 나라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우려고 하지 않는 자세의 수건이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속담에 “배우지 않으려는 사람이 가장 심한 맹인이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교사라고 해도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며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평생 배우려는 자세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늙어도 성장하지만 배우지 않는 사람은 젊어서도 모든 것이 정지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늙어도 배우는 것을 계속해야 합니다. 계속 새 것을 배우고, 새 시대를 이해하고 어떻게 하든지 새 시대에 뒤지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의학상으로 보면 나이가 많다고 반드시 머리가 둔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보통 자기 스스로 “나는 이제 늙어서 둔해졌다”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속 사람이 새로워지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인도의 시성 타골은 “나는 나이가 점점 많아지므로 내가 젓는 노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제는 돛을 높이 달고 바람을 의지하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나 자신을 너무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돛을 높이 달고 하나님께서 바람을 주시는 데에, 그의 능력에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이 어두워질 때 신령한 눈이 밝아집니다. 나뭇잎은 떨어질 때가 아름답습니다. 과일은 가을이 되어 익을 때가 아름답습니다. 노년은 인격이 완숙하고 아름다워질 때입니다.
현대는 실력 경쟁의 시대요, 능력 본위의 사회입니다. 실력 있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결국은 승리합니다. 어디서나 인재를 찾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 사람은 많지만 인재는 드뭅니다. 그 자리에 없어서 안 될 사람, 무슨 일을 맡겨도 마음놓을 수 있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고, 나의 능력이 부족한 것을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인재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배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격변하는 시대입니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과 이론이 분출하는 시대입니다. 낡은 이론이나 지식은 얼마 안 가서 무용지물이 됩니다. 격변하는 환경 속에서 창조적으로 적응하려고 하면 매일 새로운 정신으로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쉬지 않고 걷는 사람이라야 산꼭대기에 오를 수가 있습니다. 쉬임 없이 분투․노력하며, 배우고 익히는 사람만이 유능한 인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항상 배우고 공부해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제1인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무한한 잠재력과 놀라운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속엔 위대한 힘이 잠자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잠재력과 가능성을 개발할 책임이 있습니다.
삶이란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오, 성장하는 것이요, 향상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배우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를 자져야 합니다. 세상은 학교요, 우리 인생은 학생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성장하고, 배우는 사람은 향상합니다. 그래서 비범한 인재가 됩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 자세의 수건을 벗어버립시다. 우리가 얼굴에 수건을 쓰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볼 때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가 그의 영광을 반영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형상, 주님의 영광이 우리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만 바라보면 자연히 닮게 됩니다. 부부간에도 늘 바라보면 자연히 닮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쳐다보면서 걸어가면 드디어는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가 비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영광입니다.
그러면서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과거 구약시대의 여러 가지 의식적인 율법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분명히 선포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자유를 가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옛날 이 복음이 처음으로 전파될 때, 특히 이방 신자들에게는 문제되는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구약의 모든 의식적 율법을 그냥 지키느냐, 지키지 않아도 되느냐? 가령,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 제사도 그냥 해야 하느냐? 안식일을 그대로 지켜야 하느냐? 음식에도 부정한 것이 있는데 가려먹어야 하느냐?”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허다한 허례허식에서 온전히 자유를 얻어서 그런 것들을 다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것이 지금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깊은 내적인 자유를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죄의 속박 가운데서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는 죄의 종이 되어 살았었습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은 정욕의 종이 되고, 돈의 종이 되고, 악한 습관의 종이 되고, 중독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이와 같이 죄의 사슬에 얽매인 심령들에게 자유를 주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속박에서 벗어나 거룩하고 깨끗한 자유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죄의 사슬을 끊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끊어집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 곳에는 사망에서 해방을 주십니다. 허물과 죄에 싸인 사람은 살았다고 하나 실상 그 영혼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 “너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라”고 했습니다. 죽은 심령을 다시 살려서 새로운 심령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마지막 날 다시 오실 때는 우리의 죽은 육체까지도 다시 살리려고 하시는 큰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사망의 속박에서 자유케 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라는 말이 언제나 오해를 가져 오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라”고 했습니다.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자유를 얻은 사람에게는 그 자유를 옳게 쓸 책임이 있습니다. 자유를 남용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악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유를 선용할 책임이 있습니다. 종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왜요? 종은 그저 주인의 명령대로, 기계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유인이 되면 책임을 집니다. 그러므로 자유가 좋으면서도 위험한 면이 있습니다. 칼과 같습니다. 칼은 필요한 것이며 바로 쓰면 얼마나 유익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칼을 잘못 쓰면 손을 상하고, 사람을 상하게 합니다. 자유는 불과 같습니다. 불이 얼마나 요긴합니까? 그러나 그 불을 잘못 쓰면 내 집을 태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린이에게는 자유를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어린이는 아직도 자유를 바로 쓸 수 있는 저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정신병자에게도 자유를 줄 수가 없습니다. 자유를 바로 쓸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자유는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소욕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는 하나님이 주신 법 안에서 사용될 때만 온전하여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 상호간에 고귀한 도덕의 법칙을 주셨습니다. 이 법칙 안에서 우리의 자유가 사용될 때에만 그 자유가 내 자신과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를 범죄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까? 그것은 인간에게 자유가 있어야 장성할 수가 있고 발전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독수리를 그냥 조롱 속에 가둬 두면 독수리 구실을 할 수가 없습니다. 호랑이를 어릴 때부터 우리 속에 가둬 두면 호랑이 구실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가 자유로워야 합니까? 그래야 발전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유에는 봉사의 책임이 따릅니다. 봉사하는 개인, 봉사하는 교회, 봉사하는 민족이 복을 받습니다.
끝으로, 자유는 수호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시는 정욕의 종이 되지 말라.” “술의 종이 되지 말라.” “돈의 종이 되지 말라.” 개인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이 다시는 외국 사람의 종이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다시는 독재자의 종이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소중한 자유를 바로 사용합시다. 이 귀한 자유를 가지고 개인과 나라가 발전해야겠습니다. 이 자유를 가지고 우리는 봉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자유를 수호할 책임이 있습니다.
본 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새 언약 아래 있다.
그것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이다.
* 눅 22: 20 -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한 바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의 중생과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과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를 내포한다.
* 렘 31: 33-34 –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는 모세의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아래 있다.
거기에는 많은 특권이 있다.
둘째, 우리는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를 정죄하고 절망케 한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주었다.
* 갈 2: 16 -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룩함을 얻었고 완전케 되었다.
* 히 10: 10, 14 –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셋째, 우리는 성령을 받았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신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며 이 세상에서 몸의 죄성을 극복하며 성화를 이루어간다.
* 롬 8: 13-14 –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갈 5: 16 -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넷째, 우리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얻었다.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은 실상 율법의 요구를 성취한 것이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이 없고 우리를 위협할 것이 없다.
거기에 그리스도의 참된 자유와 평안이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 6에서,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