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좋다오에서 보내주신 설교입니다.
광야생활 같은 인생(신8장1-3)
<송구영신예배설교>
성경본문; 신8:1-3
○ 하나님의 훈련과 자비
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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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금년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올해는 여느 해보다 더 다사다난(多事多難)하였던 한 해였다고 생각합니다. 매년 연말이 되면 느끼는 것은 특별히 힘든 해가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수월했다고 생각되는 해는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순탄한 시기가 계속되다가도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갑작스레 다가오고, 그 반대로 어려운 시기가 계속되다가도 다시금 순탄한 시기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고 말씀했다고 생각합니다. 맑은 날과 흐린 날이 교차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좀 더 살아보면 삶이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는 솔로몬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그는 말하기를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 날을 생각할지로다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전 11:8)고 했습니다.
창세기 47장에 보면, 야곱이 요셉의 주선으로 애굽의 바로를 만났을 때, 바로가 야곱에게 “당신의 연세가 얼마입니까?”라고 묻자, 야곱이 대답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입니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험난한 세월을 살아왔으면 그렇게 대답했을까요? 그러나 어디 야곱의 생애만 그렇겠습니까?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모든 사람의 나그네 길이 험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세상 사람들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의 경우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똑같이 겪는 삶의 어려움이지만 성도들에게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고난을 통해서 성도들을 연단하십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성도들이 겪는 삶의 어려움을 일컬어 연단이라고 말합니다. 연단(鍊鍛)을 글자를 바꾸어 단련(鍛鍊)이라고도 하는데, 쇠를 불에 달구어 단단하게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풀무질을 해서 뜨겁게 달군 화로 속에 쇠붙이를 넣어 벌겋게 달군 다음에 그 쇠를 모루에 놓고 쇠망치로 두들깁니다. 그러고는 물속에 넣어 식힌 다음에, 또 다시 불속에 넣어 달구어서 쇠망치로 두들기고 물속에 넣는 과정을 되풀이하면 쇠의 성질이 단단하게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 연단을 한 쇠라야 보검을 만들 수 있고, 쓸 만한 농기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연약한 우리를 고난이라는 풀무 불을 통해서 이모저모로 연단하십니다. 그리하여 작은 시험 앞에서도 맥없이 넘어지던 사람이 연단을 통해서 어떤 시험도 능히 이겨내는 강한 신앙인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윗 왕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이 불순종하자 사무엘 선지자를 이새의 집에 보내어 홍안의 소년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는 다윗을 사울 왕 대신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겠다는 표시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고 나자 하나님의 신이 다윗과 함께 하셨으므로 그는 전장에 나가 골리앗을 물리치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건져냈습니다. 사울 왕의 총애를 받아 공주인 미갈과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근 십년에 걸쳐서 다윗에게 혹독한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해서 황량한 광야의 동굴 속에 숨어 지내기도 하고, 이방나라인 모압에 가서 머물기도 하고, 심지어는 원수의 나라인 블레셋의 왕 라기스에게 몸을 의탁하기도 했습니다. 굶기도 하고, 배신도 당하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 같은 혹독한 시련을 통해서 연단을 잘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선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상(天上) 회의에서 천사들과 사단 앞에서 욥을 칭찬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욥기 1장 8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욥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같은 욥에게는 아무런 시련이 없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욥기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 후에 욥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리만치 엄청난 고난에 직면했습니다. 그 많던 가축과 종들을 강도떼에게 하루아침에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욥에게는 아들이 일곱이요 딸이 셋이 있었는데, 어느 날 열 자녀가 맏형 집에 모여 잔치하다가 갑자기 불어 닥친 태풍에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몰사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욥은 상피증(象皮症)이라는 고약한 병에 걸려서 온 몸의 피부가 마치 코끼리 피부처럼 딱딱하게 되고 물집이 생겼다가 터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어찌나 가렵던지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욥의 처지가 너무 비참하게 되자 “그래도 당신이 순전함을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멀리서 소문을 듣고 위문 차 찾아온 세 친구도 욥의 형편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생각을 바꾸어서 이는 필경 욥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면서 욥에게 죄를 자백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러한 욥의 심정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그러나 욥은 자기가 받는 고난의 원인은 모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으로서 그 고난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과연, 욥은 그 모든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냈으며,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고, 병이 물러가고 건강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의 인물들 뿐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도 연단을 위한 시련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때로 우리의 범죄로 인해 고난 받을 때도 있지만, 죄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다가오는가 하고 당황해 하지 마시고 욥과 같이 신앙의 연단을 위해 주신 기회로 알고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이 말씀과 같이, 시련이 다가올 때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여기지 마시고, 나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키기 위해서 연단하시는 줄 아시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요즘은 시련에 대하여 왜곡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유약해서 시련을 참아 내려는 의지를 발동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너무 쉽게 생을 포기하는 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시련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이치를 자연계를 통해서도 보여주십니다.
어제 낮에 쌍암 공원을 산책하러 갔는데 바람이 어찌나 차갑던지 겨울 맛이 물씬 났습니다. 그런데 호숫가에 서 있는 벚나무들을 보니까 가지마다 꽃눈이 달려 있었습니다. 아직 가장 추운 시기가 두 달이나 남아 있는데, 가지마다 꽃눈을 달고 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궁금해서 나무에 관한 책을 찾아보았더니, 봄철에 꽃을 피우는 나무들은 꽃눈의 분화를 마친 상태로 겨울을 난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겨울의 어려움을 겪어내야 새 봄에 꽃을 피울 것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나무가 ‘겨울은 너무 추우니까 꽃눈을 만들지 말고 따뜻한 봄이 오면 그 때가서 만들지’, 그러면 그 나무는 봄이 되어도 꽃을 피울 수 없을 것입니다. 나무들도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의 삶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다가올 때 나에게 왜 이런 일이 닥쳐오느냐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연단의 기회로 알고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내심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성도들의 인생은 이스라엘 자손의 광야생활과 같습니다.
성도들의 인생은 광야의 여정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도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한 후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방되었습니다. 모세의 인도 아래 출애굽 한 이스라엘 자손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나안 접경 지역인 가데스 바네아까지 가는 데는 열 하룻길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성막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느라 호헵산 아래에서 일 년 가까이 머물렀지만, 그 기간을 감안하더라도 광야생활은 일 년 남짓이면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무려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족속들을 겁내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자손은 아직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이 드러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자손을 연단시켜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것은
첫째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려면 그만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마음의 준비가 없이 큰 축복을 받으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오히려 그 축복 때문에 망하는 일이 생기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아무 준비도 갖추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을 40년 광야생활을 통해서 준비시키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생활 40년이 끝나갈 무렵에,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고별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이유를 이 같이 말씀했습니다.
“1)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생활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시험에 불합격했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지, 이스라엘 자손의 공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려 바로를 굴복시키셨고, 홍해를 갈라 그 사이에 난 길로 선민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들을 두려워해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의 불순종하는 마음과 불신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즐거이 준행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연단을 통과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을 하던 40년 동안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습니다. 만나는 밭에서 재배하는 곡식이 아닙니다. 밭에 곡식을 심어 거두려고 해도 광야에는 비가 오지 않으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몇 안 되는 오아시스에서 곡식을 재배할지라도 200만이 넘는 큰 백성에게 필요한 식량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웃 나라에 가서 곡식을 사올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시지 않으면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40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단 한 사람도 영양실조로 죽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마다 하늘에서 이슬을 내리듯 만나를 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안식일 예비일 아침에만 이틀 분을 거두는 것이 허락되었을 뿐, 평일에는 그 날의 만나만 거두어야 했습니다. 백성 중에 이 명령을 어기고 여러 날 분을 거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이튿날 보니까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매일 아침마다 그 날의 양식으로 내려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도록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먹고 사는 문제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해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것일까요? 그 마음이 교만한 것이 원인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생각에 맞으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여지없이 불순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미달하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고달픔과 결핍을 통해서 이 백성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드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광야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길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광야에서는 양식 뿐 아니라 마실 물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오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광야에는 낮에는 뜨거운 태양빛이 내리쬐고, 밤이 되면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춥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차일을 펴서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난방을 해 주셔서 추위를 면케 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자기들의 수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만나와 생수, 구름기둥 불기둥은 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겪는 시험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무엇이냐 하면 “떡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경제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경제 문제를 하나님 섬기는 것보다 더 중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경제 문제를 하나님 섬기는 것보다 앞에 두면, 그 사람의 신앙은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일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하나님을 섬기는 데 두면,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던 하나님께서 사람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의 경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성도들의 지상의 삶은 이스라엘 자손의 광야생활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생활을 은혜롭게 하려면 우리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십시오. 그리할 때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도들은 광야의 연단을 통해서 천국 백성의 자질을 갖추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곧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러기에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니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가서 살기에 합당한 자질을 갖추어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지상의 삶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기간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이 말씀을 한번 뒤집어서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자는 복이 없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 될 수 없음이요”라고 바꾸어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시민이 된 사람은 예수님의 겸손하심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겸손과 거리가 먼 삶을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면 저절로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겸손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광야의 연단을 거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최고의 지성이라고 말하는 이어령 교수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하와이에 살고 있는 그 분의 따님이 갑상선암 수술을 했는데 얼마 후에 재발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망막이 손상되어 앞을 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때 이어령 교수는 딸이 시력을 잃게 되어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지식과 돈이 딸을 구하지 못한 것은 곧 자기의 무력함이 증명된 것이라고 하면서 딸이 믿는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하와이의 한 작은 교회에 가서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의 사랑하는 딸 민아에게서 빛을 거두시지 않는다면, 남은 삶을 주님의 종으로 살겠나이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서 얼마 지나서부터 시력이 조금씩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딸을 데리고 한국에 와서 수술하려고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가 망막이 다 나았다고 진단했습니다. 그 후로, 이어령 교수는 국내외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간증하는데 힘쓰고 있습니다. 딸에게 닥친 비극적인 운명이 이어령 교수의 교만을 깨뜨려 주님 앞에 손들고 나오게 하였고, 그 일로 주님을 만나고 기적을 체험하였으며, 하나님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가 당면했던 시련이 오히려 새 생명을 얻게 했을 뿐 아니라 지적인 교만을 깨뜨려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는 귀한 기회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이 다가올 때 ‘아, 하나님께서 아직도 나에게 남아있는 세속적인 성품을 깨뜨리시고 천국 시민의 자질을 갖추게 하시려고 연단을 주시는구나’ 라고 생각하시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시련을 감당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목적은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천국 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 시민의 자질을 갖추게 하시기 위해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우리가 연단을 통해서 겸손을 배우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법을 배울 때 하나님의 복스러운 약속을 현실로 받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연단의 목적이 지극히 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시련이 다가올 때 겁내지 말고 우리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알고 기쁨으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라고 한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을 가는 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항상 순종함으로 매일 같이 구름기둥, 불기둥의 보호와 신령한 만나와 생수를 공급받는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소원의 항구를 바라보며(시107편23-32)
<송구영신예배설교>
성경본문:시편107:23-32
23. 선척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24.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보나니
25.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26.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27. 저희가 이리 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28.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29.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30.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3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 32. 백성의 회에서 저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할찌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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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낭만적인 항해?
여러분은 ‘항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드넓은 바다, 망망대해 위를 한 척의 배를 타고 항해하는 멋진 장면이 떠오르십니까?
돛을 올려 순풍을 맞으며 미끄러지듯 항해하는 장면이 떠오를지도 모르지요. 이처럼 ‘항해’는 낭만적이고 멋진 느낌을 주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멋지고 낭만적인 느낌은 폭풍을 안 만난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합니다. 아무리 멋진 항해, 낭만적인 여행도 망망대해 한 가운데서 폭풍을 만나는 순간 다 깨지고 맙니다. 그때부터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집채 만 한 파도가 배를 때리면 내가 탄 배는 마치 장난감처럼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곧바로 수직 낙하합니다.
배 안으로 물은 쏟아져 들어오고 돛대는 부러지고 노를 아무리 저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목숨 걸고 폭풍과 싸우다가 벗어나면 다행이지만 수많은 배는 그 폭풍을 견디지 못하고 뒤집어지거나 바닷속 깊이 영원히 침몰하고 맙니다. 그래서 뱃사람이나 어부들에게 ‘항해’라는 낱말은 결코 낭만적인 말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죽느냐 사느냐 생존의 문제입니다.
텔레비전도 없는 궁색한 시골에서 자란 뉴질랜드 처녀가 자전거를 타고 유럽을 돌아다니다가, 어느 항구에서 요트 선장의 모험담에 넋을 잃게 됩니다. 하룻밤 사이에 뱃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그녀는 그 요트에 조리사로 취업했다가 선장과 결혼했습니다. 나오미 제임스라는 이름을 가진 아가씨입니다.
1976년 어느 날, 이 젊은 아내가 느닷없이 남편에게 선언했습니다. 요트를 몰고 혼자 세계를 일주하는 단독 항해에 도전하겠노라고 말입니다. 남편은 이해하고 허락했지만, 사람들은 다 코웃음을 쳤습니다. “여자 혼자서? 말이나 되는 소리요?” 프랜시스 치체스터라는 이가 역사상 최초로 요트 단독 세계 일주에 성공한 때가 1968년입니다.
그 뒤로 고작 몇 사람, 그것도 남자들만 그 일을 해냈을 뿐인데 감히 ‘여자’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말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요트를 탄 지 겨우 1년 반밖에 안 되어서 아직 뱃멀미를 하는 데다, 혼자 요트를 몬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겁 없는 여인은 1977년 9월 9일, 길이 17m 짜리 ‘익스프레스 크루세이더’호를 몰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첫날부터 화물선과 부딪칠 뻔한 위기를 겪으면서 항해 기간 내내 숱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얼마 안지나 조타기와 무전기가 고장 났고, 여러 날 무풍지대에 갇혀 공포에 떨기도 했습니다. 남태평양에서는 파도에 휩쓸려 요트가 뒤집혔다가 한참 만에 바로 섰습니다. 바람이 변덕을 부리는 통에 남자도 힘들다는 ‘돛 바꿔 달기’를 하루에 열네 번이나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 제임스는 끝내 해냈습니다.
그녀는 1978년 6월 6일 272일 만에 드디어 영국에 귀환함으로써 치체스터가 세운 275일 기록을 깨뜨렸습니다. 그녀가 홀로 목숨을 걸고 요트로 세계 일주를 하며 파도와 싸우며 그 수많은 어려움과 싸울 때 그녀의 마음속에 늘 그리던 모습은 무엇일까요? 마지막에 세계 일주를 마치고 도달할 그 항구였을 것입니다.
그 항구에 도착해 이루게 될 일을 꿈꾸며 힘든 항해를 이겨냈을 것입니다. 마치 어느 등산가에게 “왜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오릅니다” 하고 대답한 것처럼 이 여인은 “항구가 거기 있기 때문에” 그 항해를 해낸 것입니다.
2. 성경에 나온 항해
성경에는 항해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항해를 거의 안 했기 때문입니다. 바다가 있어야 항해를 하지 않겠습니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나 특히 섬나라인 일본이나 영국은 항해를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사면이 다 바다인데 바다를 통하지 않고는 다른 나라에 갈 수도, 무역을 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해상무역이 발달하고 항해술이 발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물론 바다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요. 서쪽으로 지중해가 있습니다만 그 지중해 해변지역은 거의 다 블레셋이나 가나안 사람 같은 이방인들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거의 항해를 하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고작해야 항해에 대한 내용은 성경 몇 군데 나올 뿐인데 그나마 요나서에서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해” 배를 타고 달아나다가 여호와가 보내신 폭풍을 만난 이야기도 보면 그 배를 탄 곳도 욥바라는 이방 땅 항구이고 그 배를 몬 뱃사람들 모두가 이방 사람들입니다.
또 신약의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폭풍을 맞는 이야기가 몇 번 나오는데 그것도 갈릴리라는 커다란 호수에서 일어난 일이지 바다에서 일어난 일은 아닌 것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항해는 낯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시편 107편을 읽어보면 희한하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토록 낯선 항해 이야기를 너무도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읽어보면 이 이야기는 실제 배를 타고 항해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선 23절을 읽어 보십시다.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아, 그렇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배를’이 아니라 ‘배들’을 바다에 띄운다는 말을 보면 아, 이 사람이 꽤 많은 배들을 바다에 띄워서 큰물, 즉 넒은 바다에서 일을 하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여러 척의 배를 가지고 대해를 오가며 장사하는 해상 무역업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척의 배를 운영하며 해상무역을 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도 아니면 모’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요즈음처럼 철로 만든 거대한 배도 아니고 나무로 만들고 돛을 단 배기 때문에 폭풍이라도 만나면 십중팔구 침몰하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배를 노리는 해적들이 당시 지중해에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단 한 척이라도 폭풍을 만나거나 해적을 만나지 않고 무사히 상품들을 가득 싣고 돌아온다면 그 한 척 때문에 엄청난 이익을 얻게 됩니다. 다른 배를 다 잃어도 될 만한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니 이 해상 무역업은 당시로서는 일종의 도박이었던 셈입니다. 제가 왜 “도 아니면 모”라고 표현했는지 이해가 가시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이들이 가장 두려워 한 폭풍을 만났을 때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25절부터 볼까요?
25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26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27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이렇게 항해를 나갔다가 큰 폭풍을 만나면 엄청난 광풍이 불고 바다 물결이 일어서 배가 그 파도에 휩쓸려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그 다음 순간 저 바닷속 깊이 처박히게 됩니다. 27절에 나온 것처럼 그 솟구치고 떨어지는 배 안에서 선원들은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게 됩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 교역자들을 다 데리고 놀이동산에 갔습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데 무섭다고 안타는 사람들이 제법 있더군요. 담임목사인 저도 용감하게 타는데 말입니다. 누구라고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무섭기는 무서워요. 롤러코스터를 타면 갑자기 밑으로 쳐 박히듯 내려갈 때 완전히 숨이 멎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한 번 그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오히려 올라갈 때가 더 무섭습니다. 이렇게 솟구쳐 올라가면 언젠간 다시 밑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더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무사히 롤러코스트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니 놀이기구를 타도 이렇게 무서운데 바다에서 파도를 만났을 때 위로 솟구치고 다시 아래로 떨어질 때 느끼는 공포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26절에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라고까지 묘사한 것입니다. 정말 영혼이 다 녹아버릴 정도로 극도의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이젠 끝이구나, 나는 이제 끝났구나” 하고 완전히 절망하며 모든 희망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순간에 도대체 누가 나를 도울 수 있겠으며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3.인생과 항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왜 “인생은 항해와도 같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어느 해 어느 날인가 우리는 인생의 항구를 출발해서 항해를 시작합니다. 어느 때는 순풍에 돛단 듯 잔잔한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기도 하지만 우리 인생 항해가 그렇게 순탄하게만 끝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날 예기치 않게 폭풍이 찾아옵니다. 조금 파도가 높구나, 바람이 좀 세구나 싶을 정도로 끝나기도 합니다. 배 멀미 조금 하면 끝나지요. 하지만 인생의 어느 날 문득 찾아온 폭풍은 정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줍니다. 집채만 한 파도에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곧바로 바닥도 모를 저 아래로 곤두박질치듯 떨어집니다. 이럴 때면 정말 그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내 영혼이 다 녹아버리고 맙니다. “이젠 끝이구나, 끝장이구나” 완전히 절망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이런 순간에 도대체 누가 나를 도울 수 있겠으며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과거에 이런 인생의 폭풍을 만나본 분들이 있습니까? 폭풍의 세기만 좀 다를 뿐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경험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그 폭풍을 이겨내고 헤쳐 나왔기 때문에 이 자리에 계신 것이지요. 하지만 많은 분들은 그 폭풍을 만나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인생이 침몰하고 맙니다. 교회에서도 인생의 폭풍을 만나기 전에는 이 자리에 앉아계시더니 이제는 보이지 않는 분들이 계셔서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또 인생의 폭풍을 비록 헤쳐 나오기는 했지만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고 너무 상처와 타격이 커서 지금도 회복 중에 있는 분도 있습니다. 문제는 언제 또다시 그런 인생의 폭풍이 닥쳐올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언제 갑자기 닥쳐올지, 또 그 때는 과연 내가 그 폭풍을 이겨낼 수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인생은 참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항해입니다.
더 큰 문제는 지금 현재 그런 폭풍을 맞고 있는 분들입니다. 우리 교회 많은 환자들이 있습니다. 엊그제도 김순남 집사님을 심방하고 왔습니다. 대전에 있는 동생 분 집에 계십니다. 동생이 사모고 제부가 목사님입니다. 폐암 수술 후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으라고 해서 내일부터 항암주사를 맞게 됩니다. 무척이나 실망하고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많이 필요합니다. 김 집사님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암이나 여러 질병으로 인해 인생의 큰 폭풍과 싸우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경제적인 문제나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로 폭풍을 만나고 있습니다. 폭풍의 종류도 너무 많고 태풍 이름도 다 다른 것처럼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폭풍은 너무 많고 다양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너무 힘들고 무섭습니다. 이겨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이러다가 정말 내 인생이 침몰하고 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럴 때 도대체 누가 내게 희망을 줄 수 있겠습니까? 나를, 내 인생을 이 무서운 폭풍에서 건져낼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겠습니까? 이럴 때는 남편도 아내도 가족도, 심지어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목회자나 성도들조차도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완전 절망입니다.
4.소원의 항구로
그런데 그 해답이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옵니다. 완전히 절망하는 그 순간, 그 누구도 이 무서운 인생의 폭풍에서 나를 건질 수 없다고 포기하고 저 바닷속 깊이 가라앉아가는 그 순간 이 말씀이 우리에게 답을 줍니다. 누가, 오직 어떤 분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여호와’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는 것입니다. 24절에서도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본다”는 말이 나오고, 특히 25절에 보면 그들이 항해 중에 만나는 커다란 폭풍을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난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폭풍과 인생의 폭풍 모두가 하나님의 소관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그 어떤 폭풍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일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폭풍도, 바람과 파도도, 그 넓은 바다도 모두가 우주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5절에도 “여호와께서 명하신 즉 광풍이 일어난다”고 한 것이고 요나서 1장 4절에도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 무서운 폭풍을 다스릴 분, 그 거센 바람과 집채만 한 파도를 잠잠케 하실 분은 오직 그것을 만드시고 움직이시는 분, 여호와 하나님 한분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28~29절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28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29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전에 이런 인생의 폭풍을 경험했던 분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인생의 폭풍이 또 닥쳐올지 몰라 불안한 분들, 특별히 현재 인생의 무서운 폭풍에 휩쓸려 파도와 물결에 고통당하고 있는 분들 모두 기억하십시오. 폭풍과 바다와 우주만물이 다 창조주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듯이 우리 인생 전체도, 그리고 그 인생 중에 찾아오는 폭풍도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인생의 폭풍을 다스릴 분, 잠잠케 하실 분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마가복음 4장 35절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 갑자기 큰 광풍이 일어납니다. 물결이 배에 부딪쳐 배에 물이 가득 차고 곧 가라앉게 생겼습니다. 제자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물결과 싸우는데 배 안에 타고 계신 주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주무시고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참 야속한 일입니다.
우리도 이런 일을 얼마나 많이 경험합니까? 나는 인생의 폭풍과 죽어라고 싸우고 있는데 예수님은 무슨 일 있냐는 듯 아무 반응도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알고나 계신지, 주무시고 계시는지 아무 반응도 없는 것입니다. 너무 섭섭하고 너무 답답합니다. 제가 힘들게 투병하고 있는 분들을 심방 가면 가끔 그런 말들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요. 왜 하필 납니까?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깁니까? 그리고 왜 아무리 몸부림쳐도 아무 응답도 없습니까? 너무 답답하고 너무 섭섭합니다.” 충분히 이런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보이지만 그분은 지금 다른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내가 타고 있는 배 안에 계십니다. 내 인생의 배에 함께 타고 계시며, 내가 지금 맞고 있는 이 인생의 폭풍도 함께 맞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분들이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혼자 폭풍과 싸웁니다. 자기 힘으로 이겨내 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이지요. 방법은 하나입니다. 제자들처럼 배 안에 계신 예수님을 깨우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외쳤습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으십니까?”(막 4:38)
우리도 내 인생의 배에 함께 타고 계신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지금 죽게 되었습니다. 주님밖에는 절 구해 주실 분이 없습니다. 살려주세요.” 하고 매달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은 바람을 향해 바다를 향해 꾸짖으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폭풍은 즉시 잠잠해 집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 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에게도 아버지의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꾸 내 배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분이 지금 내 인생의 배에 함께 타고 계시며 내가 맞는 폭풍도 함께 맞고 계신다는 것을 잊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지금 주무시고 계신다며, 내 아픔을 모르신다며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 맺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긴 항해를 하다보면 폭풍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미 만났던 분도, 현재 만나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국가적인 폭풍을 만나기도 합니다. 올해 세계적 경제위기 때문에 IMF 때보다 더 힘들었다고들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과 아픔을 겪고 그 중에는 이미 침몰한 분도 여럿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이렇게 위로합니다. 내년에는 좀 나아지겠지, 몇 년 만 잘 참으면 좋아질 거야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만에 말씀이라고, 내년에는 더 힘들어진다고, 이러다가 정말 끝장날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 큰 폭풍을 스스로 헤쳐 나갑니까? 그 큰 파도 앞에서 우리는 개미 한 마리만도 못한 존재인데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만 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인 시편 107편 30-31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30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31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여기서 ‘바라는 항구’라고 되어 있는데 전에 우리가 읽던 개역성경에는 ‘소원의 항구’라고 나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소원의 항구’라는 말이 훨씬 좋습니다. 왜요? 아무리 큰 폭풍을 만나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요 나아가 마지막에 우리가 다다르게 될 그 항구, 소원의 항구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절망 중에도 포기할 수 없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사다난하고 힘들었던 이 2008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우리는 눈앞에 닥쳐오는 큰 파도를 보며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라 그 파도 뒤에서 그 파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내 인생의 배에 함께 타고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큰 폭풍을 헤치고 끝내 도달하게 될 소원의 항구를 바라보며 폭풍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소망의 그리스도인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 아침이 오나니(사21장11-12)
<송구영신예배설교>
성경본문:이사야 21:11-12
○ 에돔의 패배와 이스라엘의 승리
11. 두마에 관한 경고라 사람이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파숫군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숫군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12. 파숫군이 가로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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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 지나면 2008년이 됩니다. 좋은가요, 싫은가요? 나이 많아진다고 싫어하는 이도 있어요. 어차피 와야 한다면 긍정적으로 맞아야 합니다. 좋은 쪽을 선택하면 새로운 해와 함께 분명히 새로운 삶이 열려집니다. 신자는 그렇게 바라보고 기대할 특권이 있습니다. 나쁜 쪽을 극복하고도 남는 유익입니다. 절대로 빼앗기지 않도록 확실히 훈련합시다.
이스라엘과 주위 나라들은 주위의 강한 나라들에 의해 전쟁을 많이 겪었습니다. 수십만 대군이 포위합니다. 성안은 공포와 궁핍이 지배합니다. 그러다가 성이 무너집니다. 적병은 밀물처럼 아무 집에나 다 몰려들어 하고 싶은 대로 유린합니다. 시체의 더미 그리고 전염병이 돕니다. 먹을 것도 물도 없어요. 전쟁을 마주하며 그들은 밤에 신음합니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두마의 한 사람이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사해 동쪽 에돔 지역입니다. 이 질문에 모든 사람들의 상황이 다 포함됩니다. 파수꾼은 예언자를 의미합니다. 앞으로 될 일을 묻습니다. “예언자여, 언제 이 고통의 밤이 끝날까요?” 대답합니다. “아침이 오고 있다. 그러나 밤이 다시 온다. 얼마든지 다시 와서 물어보아라.”
밤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앗수르의 무자비한 군대가 덮치면 아무도 못 피합니다. 전쟁이 국가 간에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마음에서 더 크고 아프게 벌어집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심지어 교회에서도 전쟁이 삶을 아프게 합니다. 2008년이 동터오지만 희망만 오는 게 아닙니다. 밤도 옵니다. 밤이 무서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1. 영원한 아침으로 도전하라
반복되는 아침이 아니라 소망과 가능성 속에 더 나은 아침을 찾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어둠을 벗어나려 노력합니다. 전쟁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시시때때로 덮치는 어둠을 벗어나려고 싸웁니다. 병이 어둠을 내리면 고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병이 또 옵니다. 그러면 다시 싸웁니다. 사업에 어둠이 덮칩니다. 힘 다해서 부도를 막으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직장에서 괴롭히는 상사가 있습니다. 인격 모독하고 말로 갖은 고통을 줍니다. 대항해서 싸우기도 하고 잘 해 주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성격상 어쩔 수 없습니다. 언제나 이 문제가 해결될까요? 그것이 아침을 기다리는 겁니다. 그 사람이 그만 두거나 내가 더 나은 곳으로 가면 아침이 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밤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첫째 인생법칙입니다.
아침 와도 다시 밤이 옵니다. 예언자가 말합니다. “아침 맞으려 노력하느냐? 시간 알아보고 밝은 날을 당기려 하느냐? 그러나 다시 밤이 온다.” 그냥 포기하고 말까요? 적군이 가정을 유린하고 내 삶을 짓밟고 망쳐도 그냥 있을까요? 아침을 밝혀도 다시 또 다른 긴 밤 어두운 밤이 올테니까요? 그렇게 하라는 종교, 철학 있어요.
두 번째 인생법칙입니다.
극복 못하면 더 길고 고통스러운 어둠이 계속 됩니다. 세상에서는 참고 기다리면 마침내 아침이 옵니다. 그러나 그 아침은 밝지도 않고 급히 지나가고 더 길고 힘든 밤이 옵니다. 그러다가 어둠 속에 고통의 삶은 마쳐지고 영원한 지옥의 어둠이 내립니다. 착하게 살았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하나요? 온통 어둠에 잡혀 왔는데.
어둠은 내면의 죄입니다. 밖의 상황이 어둠을 준다고 믿나요? 전쟁 나고 처참한 일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몸이 망가지고 그래서 어둠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침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냥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달려갑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영원한 태양이십니다. 그분이 마음에 떠오른다면, 그분을 향해 얼굴을 돌린다면 아침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마음에 모셔 들인 사람들은 언제나 아침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즉각적으로 태양이 안 떠오른다고 느껴질 수 있어요. 그래도 예수께 마음을 집중시키세요. 그는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 평강 곧 샬롬이 어둠을 물리칩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낙심에 잡혀 있다면 미안하지만 믿음이 무언지 모르는 분입니다.
성경의 인물들도 우리처럼 밤을 맞습니다. 요셉 모세 다윗 다 그래요. 노예생활, 감옥생활, 목동생활, 도망자생활 합니다. 하루 이틀이나 일 년 이년이 아닙니다. 십여 년씩 하고 심지어는 40년을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보기에 긴 세월일 뿐 그들은 그 가운데서도 빛나는 아침 속에 삽니다. 노예지만 주인대접 받고요 죄수지만 높임을 받았어요.
다윗 보세요.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 불안해하느냐?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움으로 나는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5,11) 어두울 때 하나님 바라보며 하나님 도움 의지해 찬송하고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이상해요, 하나님 약속은 사실입니다. 어둠이 떠나고 밝아지면서 전쟁은 이깁니다. 계속 하면 어둠은 줄어들어요.
2. 밤을 아침처럼 통과하라
앞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밤은 밖의 어둠이 아닙니다. 아무리 밖에 어둡고 소란하고 두려운 일이 많아도 심지어 전쟁이 나도 하나님 모시고 그 힘으로 마음을 밝히는 사람에게는 밤이 없습니다. 그저 아침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도 홍수가 나고 산이 덮칠지라도 원수들이 일어나 잡아먹으려 할지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시편에 반복되는 고백입니다.
진짜 어둠은 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에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습니다.”(시28:1)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 .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시38:1,4) 이것이 진짜 암흑이요 영혼의 밤입니다.
마음이 어두우면 모든 게 어둡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의 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를 예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권세자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그 무엇이라도 우리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5-39)
그러므로 언제든지 마음이 캄캄하면 예수를 의지하지 않고 있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오래 믿어도 봉사를 많이 해도 실제로 마음에 어둠이 조금만 내려도 우리는 헤매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영원한 태양을 모셨습니다. 그분이 올라오게 하세요. 그분이 책임지고 내 삶을 비추고 있다고 주장하세요. 믿음이 약해도 포기하지 말고 그렇게 하면 됩니다.
노만 빈센트 필 목사님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고등학생시절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 다녔습니다. 거기 교인이 한 사람 있었는데 평상시에는 착했습니다. 일단 술만 먹으면 마귀가 됩니다. 사람들을 괴롭히고 아내를 때렸습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 술 취한 상태였답니다. 그런데도 예배마다 빠지지 않고 뒷자리에 앉아있었답니다.
어느날 목사님이 설교 후에 말합니다. 어둠의 삶 바꾸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앞에 나와 제단 앞에 무릎 꿇으라고요. 아무도 안 나와 어색한데 별안간 그 사람이 앞으로 나옵니다. “목사님, 저도 밝은 아침을 맞고 싶습니다. 예수님, 구해주십시오.” 목사님은 그의 머리에 손 얹어 축복했습니다. 그래도 그가 달라지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러나 그는 그 후에 성자처럼 살았답니다. 술을 완전히 끊었어요.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 천사의 모습을 상기시켰답니다. 태양을 모시고 그 태양이 마음을 비치게 한다면 어떠한 어둠도 물리칠 실제 힘이 주어집니다. 계속 그 태양을 유지하면 세상을 비춥니다. 자신의 삶이 바뀌는데 인격만 아니라 형편도 밝게 빛납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다 그래요.
3. 아침을 밤처럼 훈련하라
이제 가장 중요한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별로 문제가 없을 때 잘 나갈 때를 밤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그때가 나태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잘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교회 일에 별 관심이 없어요. 봉사 전도 안하고요, 못하면 헌금이라도 해야 하는 데 그것도 없어요. 잘나가는 낮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어두운 밤입니다.
증거가 얼마 안 가 나타납니다. 무언가 마음이 어둡고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낮에도 어두움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욥5:14) 밤이 오기 전에 조치를 해야 합니다. 어두워지면 시간이 걸려요. 일단 짜증을 내고 화를 내면 아드레날린이 사라질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흐릅니다. 그동안에 죄를 더 많이 짓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둠이 내리지 않게 태양을 늘 모셔야 합니다. 낮에도 밤에 있는 사람처럼 간절히 하나님을 원해야 합니다. 다윗도 일이 잘 나간다고 방심하다 간음죄 살인죄 범하면서 무서운 형벌의 밤이 옵니다. “내 하나님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합니다.”(시13:3) 그래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홈런왕 베이브 루스는 날아오는 야구공의 실밥까지 보았다고 합니다. 어느날 동료들이 그의 방에 들어갔습니다. 야구방방이를 들고 레코드 판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한참 이름을 부른 뒤에야 정신이 들어서 봅니다. 그것이 치는 연습이라는 겁니다. 당시에 빨리 돌아가는 SP판 위에 바늘이 떨리는 것을 보는 훈련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볼 수도 없었고 어지러웠습니다. 그러나 차츰 판이 돌아가는 게 보였고 바늘 움직임이 보이는 겁니다. 이미 홈런왕이 되어 모든 기록을 다 갈아치웠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초년병처럼 더 밝은 날 위해 훈련 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그랬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 힘으로 총리를 67년이나 하면서도 여전히 기도와 예배를 철저히 훈련했습니다.
근육은 훈련해야 생깁니다. 영혼도 훈련해야 커집니다. 예배로 기도로 헌신으로 영적으로 큰 나를 만들어야 합니다. 삶은 더 밝아지고 새 세상이 열립니다. 어려움이 와도 잘 극복합니다. 지금까지 몰랐던 크고 아름다운 삶으로 들어갑니다. 2008년을 특별히 성장하는 해로 삼읍시다. 다니엘처럼 예배와 기도 훈련으로 지금부터 10배는 삶을 밝히세요.
아직 영원한 아침은 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22:4) 앞으로의 우리 모습입니다. 영원한 천국에서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마음속에 계속 되는 작은 어둠들을 없애도록 항상 깨어 하나님이 비추시게 해야만 합니다.
4. 감사로 맺는 매듭 (송구영신)
성경본문| 시편 116편 12절 ~19절
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15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16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17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8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19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곧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지키리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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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 >년이 오늘로 끝입니다. 상투적인 말 같지만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만 같습니다. 그야말로 < >년 신년주일 지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역사의 뒤안길로 배웅해 보내야 하니 말입니다.
현대 지성들이 참여해서 [시간의 박물관]이란 책을 펴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장을 현대 지성을 대표하는 움베르토 에코라는 분이 썼는데 제목이 “시간의 창조”입니다.
이 분은 이 장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바로 시간의 발견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가장 독특한 문화적 특징이다.” 실제로 인간만이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을 잴 수 있는 도구를 발명했습니다. 바로 시계입니다. 나아가 그 시간의 흐름의 매듭을 만들어냈습니다. 바로 달력입니다. 하루, 한 주, 한 달, 1년 등. 그러면서 그 시간의 흐름의 매듭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1 주년, 한 시대, 세기, 밀레니엄, 회갑, 희년 등. 이 시간 흐름의 매듭의 의미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어려서 사랑방에서 볏짚으로 새끼 꼬는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각자 집에서 가져온 볏짚으로 새끼를 꼽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새끼를 꼽니다. 배고프면 감자 고구마를 삶거나 구어 먹으면서 새끼를 꼽니다. 볏 집을 부드럽게 하려고 계속 손에 침을 뱉으면서 새끼를 꼽니다. 다 꼰 새끼는 깔고 앉기도 하고 등 뒤에 차곡차곡 쌓아가며 새끼를 꼽니다. 새끼를 다 꼬고 나면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반드시 매듭을 짓는 일입니다. 만일 매듭을 짓지 않으면 밤새 꼰 새끼가 다 풀어지게 되고 긴 밤 헛수고를 하고 말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듭을 잘 짓고 마무리를 잘 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시간 매듭의 의미가 우리의 소중한 역사로 아름답게 간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 삶의 더욱 풍성해 지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 >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매듭을 잘 지어야 하겠습니다. < >년 한 해의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우리의 소중한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장식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 >년을 어떻게 매듭지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이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한 마디로 “감사”입니다. 감사라는 관점에서 < >년이라는 역사를 매듭지어 우리 인생의 역사 한 페이지로 장식해 보자는 것입니다.
감사로 매듭짓는다는 것은
감사로 매듭짓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한 해를 매듭짓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믿음으로 살게 된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가족들, 이웃들, 교우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된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의, 식, 주 부족함이 없이 생활하게 된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매듭을 짓는 것입니다.
또한 한 해를 돌아보면서 서로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한 해를 매듭짓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다 서로 도와야 할 수 있습니다. 아내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족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주의 종들과 교우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신앙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고객과 이웃과 동료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먹고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매듭을 짓는 것입니다.
식당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식당 주인은 새벽부터 일어나서 신선하고 제일 좋은 식재료를 준비하느라고 정말 큰 수고를 합니다. 밑반찬을 만드느라 여러 날 고생을 합니다. 당일 주 메뉴를 만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식당 주인은 찾아오는 손님에게 “내가 이렇게 큰 수고로 음식을 만들었으니 당신들이 내게 감사해야 하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큰 수고를 했지만 “그렇게 많고 많은 식당 중에 우리 식당을 찾아주었으니 감사합니다. 내가 정성껏 만든 음식을 그렇게 맛있게 먹어주니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찾아온 손님들은 “당신 식당을 찾아주었느니 감사해야 하오, 비싼 돈을 내고 당신 음식 사 먹어주었으니 감사해야 하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식당을 찾아왔고 돈 내고 음식을 사 먹지만 “여기 이런 가게를 열어주어 감사합니다. 그렇게 큰 수고로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주어서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감사란 이렇게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감사란 이렇게 상대방의 수고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다 당신 덕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두가 다 당신 덕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인정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원망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다 당신 탓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마누라 탓이고, 남편 탓이고, 부모 탓이고, 자식 탓이고, 네 탓이고 당신들 탓이요”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며 한 해를 마감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볼 때 아무리 둘러 봐도 감사할 조건이 찾아지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라고 소망하던 것이 하나도 된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생각지 않았던 큰 불행이 닥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 한숨과 절망뿐인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창 37장에서 50장까지는 요셉이라는 사람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도표로 그려본다면 영어 알파벳 V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인생의 전반기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여러 충격적인 사건으로 졸지에 바닥까지 떨어지는 이야기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생의 후반기는 또한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상치 못했던 사건으로 졸지에 저 하늘 가까이 올라가는 이야기로 되어있습니다.
그의 인생의 전반기 대표적인 사건 몇 가지만 꼽아보면 이런 것들입니다. 요셉은 야곱이라는 당대 부잣집 아들로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며 남부러울 것이 없는 상태로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됐습니다. 부잣집 아들에서 예고 없이 또 준비 없이 타국에 팔려온 노예 신세가 된 것입니다. 또한 요셉은 가정 총무로 있던 중에 모함에 걸려서 죄인이 되어 감옥에 수감되게 됩니다. 이제 졸지에 죄수가 되어 언제 어떻게 처벌 받게 될지 모를 처지가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은 이런 설상가상의 불행이 겹쳐 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내 던져진 상황에서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견디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비록 노예로 끌려왔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비록 죄수로 옥에 갇혀있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결국은 자기의 앞길을 선하게 여실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그 믿음이 그토록 불행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감사를 지켜줍니다. 믿음이 차원 높은 감사를 이끌어냅니다. 믿음이 선취적 감사를 만들어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상황과 여건이 좋지 않으십니까?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까? 너무 힘이 드십니까? 상황과 여건을 보지 마십시오. 지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앞길을 복되게 펼쳐주실 하나님을 믿음의 눈을 열고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앞 당겨서 감사를 드리십시오.
또 하나는 용서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볼 때 그 누군가와 맺힌 감정 때문에 감사할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큰 상처 때문에 감사가 자리 잡을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분노 때문에 감사가 그 마음에 깃들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프랑스 파리 외곽에 있는 한 공동묘지는 특별한 묘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군과 적군이 함께 묻혀 있는 묘지입니다. 독불 전쟁 때 피차간에 많은 희생자가 났는데 전쟁은 계속됐습니다. 할 수 없이 시체들을 있는 그 자리에 그대로 묻었습니다. 그리고 무덤 위에 십자가를 세워 두었고 그 십자가 위에 전사자들의 군번을 걸어놓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프랑스군의 어머니가 군번을 보고 자기 아들의 묘를 찾았습니다. 가져간 꽃을 꼽고 한 없이 그리움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다 문득 옆에 있는 묘를 보는 순간 독일군 묘인 것을 알게 됐습니다. 분명히 자기 아들이 이 독일 군 병사와 싸우다 여기 이렇게 무덤에 누어있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처음에 분노를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욕을 퍼 붓고 침을 뱉고 무덤을 짓밟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순간 자기 아들 무덤에 세워진 같은 십자가가 이 독일 군 무덤에도 세워진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단 사람들을 용서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그 십자가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독일군 병사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다시 무덤을 추스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 무덤에 꼽았던 꽃을 반 나누어 이 병사의 무덤에 꼽아주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강물처럼 평안이 밀려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음에 감사가 그 마음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입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 십자가의 사랑으로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며 용서의 능력을 덧입을 때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치명적인 손해를 입혔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가 우리의 마음에 가득 넘치게 될 것입니다.
감사로 매듭지으면
우리가 이 한 해를 감사로 매듭지으면 우리 삶에 놀라운 변화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특히 내년 < >년의 삶이 더욱 풍성해 질 것입니다. 우리 삶에 여러 가지 긍정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선 주께로 더 가까이 가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시 65:4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다윗은 어떻게 하든지 주님께 가까이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무엇보다 더 큰 복인 줄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 17-18을 보면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시인은 감사하는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을 깨닫고 새롭게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단축시킵니다. 감사는 우리 마음을 주님 곁에 가 있게 해 줍니다. 감사는 우리를 주님의 뜰에 거하게 해 줍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 감사 고백을 드리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 앞 가까이에 와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몇 해 됐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특강을 청해서 정말 시간 내기 힘들었는데 선약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녀오게 됐습니다. 지방이어서 오후에 KTX를 타고 갔다가 강의 후 바로 기차를 타고 올라와야 했습니다. 다음날 스케줄도 꽉차있고 해서 몸도 마음도 무척 무거웠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기차에 올라 피곤에 지쳐 눈을 감고 있는데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가 날라왔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오실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와 주신 것 감사하고, 귀한 강의로 먼저 제가 큰 도전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 잊지 않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모든 피로다 다 사라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 이름이 제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분을 좋은 이미지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그분과의 관계는 훨씬 좋은 관계로 발전됐음은 물론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작지만 깊은 마음의 감사는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어줍니다. 그리고 마음과 마음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줍니다.
그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과거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로잡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특히 실패했던 과거는 우리를 덫처럼 옥조이게 만들고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듭니다.
요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과거의 덫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성 도덕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섯 남자와 살다가 헤어지고 이제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여자는 지탄의 대상이 될 텐데 2000년 전에는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몰래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물을 뜨러 나올 때도 아무도 없는 정오 즈음에 나와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 때문에 죄사함을 받게 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속에 주님께서 대한 감사가 솟구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사람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인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가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과거를 딛고 일어설 힘을 줍니다. 감사가 과거의 덫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주고 새해를 새롭게 시작하게 해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 >년을 보내야 할 시점입니다. 감사로 잘 매듭을 지어서 보내시기 바랍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모두가 당신 덕입니다.” 인정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미움과 분노의 대상일지라도 용서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새해에 더욱 복된 삶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출 처| 박봉수목사
5. 넉넉한 잔고를 이월하라(수1장1-9)
<송구영신예배설교>
성경본문:여호수아서 1:1-9
○ 하나님의 명령
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신11:24
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창15:18
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신31:6-7
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신5:32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시1:2
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신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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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그 동안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고 다시 새해를 희망 가운데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세계를 움직이는 중심에 미국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미국의 중심에 유태인이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에서 유태인의 영향은 경제, 방위, 문화면에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미국의 유태인은 인구의 약 2%미만인 600만 명 정도인데, 그들의 영향력은 그 10배 이상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50대 기업 가운데 17개 기업을 유태계가 세웠거나 지금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록펠러, 모건, 듀폰, 로열터치, GE, GM, IBM, 보잉, 등입니다.
“유태인들은 어떻게 부자가 되었을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습니다.
“유태인들은 보험을 무척 좋아한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나라인 미국의 경우 보험금 수령기준으로 10만 달러 정도의 보험에 가입하고 있는 데 반해, 이재에 밝은 유태인들은 1백만 달러 이상의 보험을 들고 있다. 한마디로 유태인들의 자손들은 인생의 출발점에서부터 다른 나라 사람들과는 차이가 나는 샘이다.
유태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서 자신의 능력범위 내에서 최대한 보험에 가입하고 있다. 언젠가 할아버지가 사망하게 되면, 그 보험금은 그대로 아버지에게 상속되고, 아버지는 그 재산을 바탕으로 보다 더 큰 보험을 가입하여 자녀에게 물려주는, 이른바 조상 대물림 방식의 부 축적 수단으로 보험을 활용하고 있다.
이렇게 몇 대가 지나게 되면 유태인들의 근면성과 단결성을 배제하더라도 보험 상속만으로도 부를 축적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한 해를 마무리 하고 새 해를 시작하려고 하는 이 시간, 여호수아 1장의 말씀을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화적인지도자 모세의 뒤를 이어 민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탁월한 지도자였습니다.
읽은 본문 가운데 우리가 관심을 모아야 할 몇 구절 말씀이 있습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새로운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모세를 계속 들먹이고 있습니다.
신화적인 지도자 모세의 삶을 자세히 살펴서 받아야할 유산을 챙기라는 하십니다.
여호수아는 40년간 모세의 곁에서 모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아온 사람입니다.
신명기34:7에는 모세의 최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죽을 때에 120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아직도 더 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세우셨습니다. 여기에모세가 보여주는 소중한 삶의 자산이 있습니다.
1.감사하며 찬양하는 넉넉한 마음입니다.
모세는 지난 40년 동안 오직 가나안 땅을 희망하며, 그 숫한 광야의 어려움을 다 무릅쓰고 이곳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가 아직도 건강하고 일을 더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명을 끝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신명기31장에서 여호수아를 세우셨습니다. 바로 이 때 모세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노래하였습니다.
신명기32:1-52까지가 모세의 긴 노래의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찬양(1-4),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5-14), 이스라엘의 배교(15-18), 하나님의 진노(19-25),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26-38), 대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39-47), 모세의 죽음의 예고(48-52) 등입니다.
이 노래가사 가운데 신32:7, 10-12의 내용을 봅시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7)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부르시고,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도다.”(10-12)
하나님께서 광야40년 동안 그 백성을 사랑으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옛날,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며 아비에게, 어른에게, 물어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라 하십니다.
과거는 마치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밭과 같습니다.
잘 찾으면 엄청난 보화가 숨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과거는 무조건 덮고 잊고 앞만 바라보고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과거지향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과거에는 현재와 미래에서 결코 찾을 수 없는 소중한 보화들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역사적인 종교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생명의 말씀으로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죄가 있다면 십자가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씻으십시오.
받은 사랑에 대한 못 다한 감사가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과거를 들추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과거 속에서 자산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내십시오.
그 소중한 가르침을 간직하십시오.
지난 27일 태안에서 봉사하고 돌아오면서 그 곳에서 돌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거칠은 돌에는 굴과 굴껍질들과 조개들이 잔뜩 붙어 있습니다. 이 돌에는 아직 기름 냄새로 쪄들어 있습니다. 이 돌은 내 서재에 오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마다 나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소망을 되새길 것입니다.
2007년 12월 엄청난 기름유출현장에서 보인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에서 대한민국의 위대한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2.축복하며 격려하는 넉넉한 마음입니다.
모세의 노래가 끝나는 신명기32장 다음 장이 시작되는 신명기33장 29절 전체가 모세의 축복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민족의 열 두 지파하나하나에게 일일이 축복합니다. 특별히 신명기33:26-29을 봅시다.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도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받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너의 영광의 칼이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여수룬이여!” - 이 말은 이스라엘을 부르는 애칭입니다. 마음에 사랑이 북받쳐 부르는 말입니다. 축복, 또 축복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이 아름다운 축복의 말씀을 가지고 E.A. Hoffman(1839-1929)은 찬송가458장을 지어 불렀습니다.
1.“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 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후렴>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2.“날이 갈수록 주의 사랑이 두루 광명하게 비치고,
천성 가는 길 편히 가리니,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3.“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기뻐 찬미소리 외치고,
겁과 두려움 없어지리니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어찌 사랑스럽고 예쁘기만 하였겠습니까?
생각해보면 못난 짓만 골라서 한 것같이 생각됩니다. 가나안 정탐군들의 보고를 듣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고 아우성을 치며 하나님을 불신하며 그 명령을 거역한 민족입니다. 그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 섬기는 목이 곧은 백성들이었습니다. 광야로 이끌어 내어 죽이려고 한다며 불평하며 원망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순간에 그 모든 악한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뜨거운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축복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이 마땅히 물려받아야 할 위대한 유산입니다.
사랑입니다.
허다한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입니다.
못나고 잘못된 것만 들추어 괘심하게 생각하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향한 사랑에 스스로 감동하여 축복하고 격려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 스스로 인간의 한계를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우리가 져야할 죄의 값을 친히 치르시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위대한 유산을 상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축복하신 것입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세기12:3)
“복의 근원”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당신이 복을 빌면 그 복이 그에게 이를 것입니다. 만약에 그 복을 받을만하지 않으면 당신이 그에게 빈복이 다 당신에게로 돌아올 것입니다.
3.거룩한 비전입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이미 모세에게 말씀으로 주신 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수아에게 모세에게 주신 비전의 내용보다 더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은 이전 것과 전혀 다른 새것이 아닙니다.
전도서 기자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대통령 당선자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워크샵에서 말하였습니다.
“(참여정부가) 지난 5년 동안 한 업무를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볼 필요는 없다.”
“인수위원들이 각 부처에서 나오신 분들에게 충분한 예우를 갖추고 긍정적으로 대해 줬으면 좋겠다.”
그렇습니다. 현 대통령과 새 대통령 사이에는 정책노선에서나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서 서로 다른 많은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나라를 보다 평안하게 백성들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하는 정치이념은 조금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비전의 실현 단계에서 빗나간 것이 있다면 바로 잡을 것이고, 불확실한 것은 더욱 분명하게 나아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알아야 합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느냐?”
성령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비전을 주십니다.
사도행전2:17이다.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분명히 알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교인들은 영혼구원의 사명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전도해야하고, 왜 선교해야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전을 상실하면 교회는 표류하는 배와 같이 됩니다.
4.스스로 마음을 추스르는 지혜입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6)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라.”(7)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라.”(9)
우리의 마음은 성령이 충만하면 저절로 기뻐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기도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기뻐해야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번사에 감사해야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의 의지의 산물입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합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마음을 스스로 추스르고 강하게 하셔야 합니다.
특히 여호수아가 그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정복과 분배의 과정에서 많은 실망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나를 넘어뜨리려는 악한 사단의 궤계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면 어느 순간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계속 깨어 기도해야할 이유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 시위에 동참했다가 경찰에 붙잡혀간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 때 한 간부로부터 들은 말이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쌍스런 욕을 하면서 말했습니다.
“이 기생충 같은 XX들!”
그 말에 한 친구는 울면서 반문했습니다.
“왜 내가 기생충인가?”
서울대학을 갈수도 있었는데, 굳이 신학대학에 온 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인데 왜 내가 기생충인가? 라고 하는 항의였습니다.
그 이후 나는 가끔 그 사람의 악의에 찬 말을 떠 올려봅니다.
그리고 내 스스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민족과 역사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내 스스로 내 마음을 추스릅니다.
여호수아1장5절, 6절 말씀입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열왕기상 2:1-3에는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아버지 다윗이 말합니다.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강하셔야합니다.
우리의 생명 사람이 좌지우지 하지 못합니다.
공중의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천수만만 마리의 참새보다 더 귀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앉고 서는 것까지 다 아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은혜로 주관하십니다.
로마서8:28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창세기50:20입니다.
“하나님은 해를 변하여 선으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이래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좋은 것을 준비하십니다. 내가 내 미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은 더 잘 아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십니다. 지금 잘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결국은 다 좋아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닛시 입니다. 우리를 앞서 가시며 우리의 승리의 삶을 미리 예비하십니다.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들을 미리 만나주십니다. 미리 조정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스스로 담대하게 다스리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시는 삶의 소중한 유산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하고 새해를 준비하시는 여러분,
지난날의 삶을 통하여 반드시 챙겨야할 삶의 유산을 챙겨서 넉넉한 이월을 하십시오. 그 넉넉한 이월로 당당히 새해를 승리하십시오.
첫댓글 감사 " 감사로 맺는 매듭 (송구영신)"---아름다운 매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