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독립운동은 <대종교大倧敎>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발족할 때 일곱 총령 중 세 명의 총령(이동녕, 이시영, 신규식)이 대종교인이었다. 임시정부의 의정원 29인 중 대종교인이 21명이었다고 한다. 대종교인으로 우리 독립운동사에 남아 있는 인물을 얼핏 떠올려 보아도,
박은식, 신채호, 김좌진, 이범석, 김동삼, 이상룡, 이상설, 안재홍 등이 얼른 생각난다. 동아일보 창간에 깊숙히 개입한 유근도 대종교인이었고 그의 제자가 바로 인촌 김성수다. 후일 변절했으나 최남선도 대종교인이었고 북로군정서를 세운 서일, 한글학자인 주시경, 권덕규, 이극로, 김두봉도 대종교인이었다.
대종교를 세운 홍암 나철은 본명 나인영으로 1863년 태어나서 매천 황현, 해학 이기를 가르친 왕석보 밑에서 한학을 배웠다. 1882년 과거에 합격하고 1891년 승문원 권지부정자까지 승진한 뒤 1895년 징세서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관직을 그만두었다 한다.
나철은 22세가 된 1883년 형과 함께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가 운양 김윤식(1835-1922)이 연 시회에 참석했다. 이때 지은 시 한 수가 김윤식의 눈에 들어 그의 집에 묵게 되었다. 이후 나철은 자결의 순간까지 김윤식을 스승으로 깍듯이 모셨다. 그는 자결 전에도 김윤식을 만났었다. 김윤식은 친청파에서 친일파가 된 인물이지만 독립운동 때는 독립청원서를 내밀어 2년 형을 선고받고 2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이때 이미 85세의 고령이라 풀려났었다. 일제가 성균관을 없애고 만든 경학원의 대제학을 지냈다. 경학원은 해방 후에 심산 김창숙 선생이 바로 잡은 그 친일 유림의 본산이기도 했다. 이 시대를 가지고 자로 잰 듯이 친일을 가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1897년 김윤식은 을미사변의 책임을 지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는데, 이때 나철은 제주도로 따라가 5년간이나 스승을 모셨다고 한다.
1905년 다시 세상으로 나온 나철은 러일전쟁을 맞아 일본으로 밀항해서 건너간 뒤 흑룡회의 도야마 미치루(頭山滿),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등을 만나 조선의 독립을 역설했다. 그러나 성과는 없었고 1906년 1월 24일 귀국하여 서울에 도착했을 때, 백두산에서 왔다는 도인(백전도사)으로부터 <삼일신고>와 <신사기>를 전해받게 되었다고 한다.
나철은 자신회自新會라는 단체를 만들고 을사오적을 처단하겠다고 맹세했다. 암살은 여러번 시도되었으나 모두 실패했고 이들은 체포되거나 자수하고 말았다. 나철은 10년형을 받았지만 1907년에 특별사면되어 나올 수 있었다.
나철은 다시 한 번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를 펴기로 했다. 동경에 머물고 있던 1908년 12월 5일, 그의 방에 두일백이라는 도사가 나타나 <단군교 포명서>라는 문건을 넘겼다. 바로 "배달"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바로 그 문건이다.
이때 나철은 정훈모鄭薰模와 같이 있었는데, 이 둘은 두일백에게 함께 영계靈戒를 받는다. 정훈모는 후일 이것을 바탕으로 <단군교>를 건립하게 되는 것이다.
나철은 이때 대오각성하고 단군교를 창립하게 된다. 이 단군교는 1년 후 이름을 대종교로 바꾼다. 이때 정훈모와 몇몇 일당이 반발해서 독립해 나가서 원 이름인 단군교를 그대로 사용하게 된다. 이 때문에 후일 온갖 혼동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정훈모의 주변에는 이권에 눈이 먼 인간들과 친일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고, 후일 친일파 안순환을 받아들임으로써 단군교는 친일 종교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대종교와는 천양지차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1909년 1월 15일 단군교 중광(창교) 때 참여한 인물로는 자신회 시절부터 붙어다니던 오기호吳基鎬, 환단고기 조작에 애꿎게 끌려가는 이기李沂, 분파 단군교를 만들게 되는 정훈모, 나철의 스승인 김윤식, 후일 조선에 남은 대종교 남도본사를 이끄는 유근柳槿 등이 참여했다. 이 날을 대종교에서는 중광절이라고 부른다. 대종교 최대의 경사일이다.
1910년 8월 5일 나철은 교명을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바꾼다. 이때 정훈모가 교명 변경에 의해서 반발, 그해 12월 따로 단군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종교 중광 육십년사>에 따르면 이유가 다르다.
북부지사교였던 정훈모는 교인과 소송 건으로 징계를 받자 교규에 따르지 않고 불만을 가지고 있던 중에 교단에 야심을 가지고 있던 이유형李裕馨, 유탁兪鐸, 서창보徐彰輔 등의 꼬임에 넘어가 단군교를 개창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삿사 미츠아키(佐佐充昭), 한말, 일제시대 단군신앙운동의 전개 : 대종교, 단군교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울大學校 大學院, 2003, pp 157-158)
곧이어 한일병합이 일어나자 대종교인들도 상당수가 만주로 이주했다. 3대교주 윤세복 등도 이때 이주하여 환인현에 동창학교를 설립하였다. 1914년 5월 나철도 조선을 떠나 만주 화룡현으로 총본사를 옮겼다.
북간도에는 동도본사(서일), 상해에는 서도본사(신규식), 노령에는 북도본사(이상설), 그리고 서울에는 남도본사(강우)를 두었다.
이중 서일은 1912년 입교하여 독립운동단체 중광단을 설립, 1919년에 정의단으로 개편, 군정회, 군정부, 대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부총재로 현천묵, 사령관으로 김좌진을 앉혀서 무장독립단체인 북로군정서를 만든다.
1915년 1얼 15일 국내에서는 이시영, 서상일 등 대종교인들이 조선국권회복단이라는 독립운동 비밀결사를 조직한다.
1916년 8월 15일 나철은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자결한다. 2대 교주는 김교헌金敎獻이었는데, 김교헌은 이력이 특이한 사람이다. 김교헌은 통감부에서 규장각 부제학으로 한일병합을 맞이했고 일제로부터 훈4등을 받고 1916년까지 일제의 관리로 일했다. 취조국위원, 토목국촉탁을 거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촉탁을 지냈다. 이때문에 대한매일신보에서 비난까지 했던 인물이다. 그는 나철 자결 후 만주로 망명했다. 그는 1919년에 서일에게 교주 자리를 물려주려고도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서일이 1921년 노령에서 토비의 습격으로 자살하게 되자 크게 낙담했다고 한다.
김교헌은 신단실기, 신단민사 등 대종교의 주요 경전이 되는 여러 글들을 썼다.
그는 1917년 대동단 선언에도 참여했는데, 해외에 나와 있는 독립지사의 단합을 촉구하고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된 선언으로 대종교인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는 선언이었다. 임시정부 수립에 대종교인들의 참여는 이미 말한 바 있다.
대종교가 단군의 탄신일로 기념한 개천절은 오늘날에도 국경일로 지정되어 있다.
1920년 일제는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 등으로 독립군의 기세가 드높자 만주 일대의 독립군 소탕을 위해서 훈춘 사건이라는 위장 사건을 일으키고 만주로 출병해서 간도참변을 일으킨다. 사실 나는 이 부분에 대한 공부가 부족해서 간도참변 중에 청산리 전투가 일어난 것으로 아는데, 어떤 곳에는 청산리 전투의 결과로 간도참변이 일어났다고 되어 있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제가 간도에서 민간인 학살을 햇다는 점과 만주 무장 독립단체에는 대종교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편 국내의 남도본사를 이끌던 유근은 동아일보의 창간에 개입했다.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사장 자리에 앉은 김성수가 유근의 제자이다. 이때문에 동아일보는 대종교에 호의적인 기사를 많이 싣게 된다.
1922년 남도본사에서는 내분이 일어났다. 일부 세력은 김윤식에게 회장 자리를 맡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김윤식은 대종교인 중에 공자를 욕보이는 사람이 있다고 거절했는데, 그가 바로 한글학자 권덕규이다. 이무렵 남도본사를 실질적으로 이끌던 유근도 사망했고, 심지어 다음 해에 만주에서 김교헌도 사망하여 대종교는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 내분은 어쩌면 대종교 내부에 친일파들이 들어서면서 발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무렵 윤덕영, 민병석 등이 대종교에 가입하여 매달 5백원의 기부금을 내었다고 한다. 조선 최대 갑부였던 민영휘의 아들 민형식도 오래 전부터 나철을 도왔다고 하니, 이 시기는 정말 아리송하게 보일 때가 많다. 민형식은 나철이 을사오적을 죽이겠다고 할 때 그 자금줄이었다고 한다.
이 분쟁은 1920년대 중반까지 갔다가 사라진 것 같다.
한편 3대 교주로 나철의 제자 윤세복이 취임한 만주에서는 또 다른 대종교 탄압이 진행되고 있었다. 1925년 대종교 해체를 위해서 일제는 만주군벌인 장작림張作霖과 협상을 했다. 이에 따라 대종교는 포교 금지령이 내려졌고 이 상황은 1929년까지 계속 되었다. 그리고 1932년 만주국이 건설되자 대종교는 당연히 불법시 되었고, 1934년 3대 교주 윤세복은 종교로서 일제에 굽히고 들어가 포교 허가를 받아냈다. 이후 만주에서는 1942년 임오교변이 발생할 때까지 포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일제에게 눈엣가시였던 대종교의 운명은 이미 풍전등화와 마찬가지였다. 1935년 재만주 일본대사관 조사에서 이미 대종교는 유명무실하다는 평을 받고 있을 정도.
국내에서도 지속적인 탄압으로 인해 남도본사는 1930년대에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떨어져나갔던 단군교는 어찌 되었을까? 원래 욕심에서 떨어져 나간 인간들이라 다시 그 안에서 권력투쟁이 벌어졌고 1915년이 되어서야 정훈모가 교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분은 끊이지 않고 계속 발생했다. 그러나 정훈모는 각종 도전과 내분을 진압하면서 꿋꿋하게 단군교를 지켜나갔다. 그러나 그 와중에 교세는 계속 약해져서 1925년에는 지방 지부가 여섯 개밖에 남지 않는 사태에 부딪쳤다.
단군교는 시작하면서부터 친일파들이 대거 가입한 상태였다. 민영휘, 한규설, 유길준 등도 단군교 신자였다. 단군교는 일본 천황의 기일, 일본 천황비의 서거일을 기념하기도 했다. 1910년대 후반 단군교의 간부들은 총독부의 관리들이기도 했다. 대성사였던 민병한은 신궁봉경회 찬성의장이었는데, 이 직책이란 게 단군과 일본의 아마테라스를 함께 봉안하여 일선융화를 이루는 친일종교단체 관리라는 사실을 알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초기에는 대종교나 단군교의 신도는 각 종교의 차이점을 잘 몰랐던 것 같다. 조선총독부가 1915년에 조사한 국경지방시찰복명서에 따르면 대종교와 단군교는 그 교인 수가 비슷하고 둘 다 반일적 경향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단군교의 경우는 본래 반일과 관련은 없으나 합병으로 인해 일시적인 배일 감정을 가졌을 뿐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1927년에 있었던 조선총독부 조사에서는 단군교가 나타나지 않는다. 모두 대종교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1935년 재만 일본대사관에서 분석한 <재만조선인개황>에서도 대종교는 단군교의 분파로 나타나고 있다. 일제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1917년 만주에서는 대동단 선언이 발표되던 때에, 단군교에서는 천부경을 날조하고 있었다. 계연수라는 정체불명의 도인이 단군교로 묘향산에서 발견했다는 천부경을 보내온 것이다. 천부경은 1920년 북경에 있던 전병훈이 낸 책 <정신철학통편>에 실린 것이 최초인데, 전병훈은 이것을 단군교 대성사인 윤효정으로부터 받았다고 말했다. 즉 단군교가 천부경을 뿌리고 다닌 것이다. 1921년 단군교 기관지인 <단탁>에도 천부경이 실렸다. 신채호가 천부경이 날조라고 말한 것도 이제 유명한 사실이다.
1922년에는 흑룡회의 우치다 료헤이가 조종하는 동광회의 조선내정독립청원서에 정훈모가 단군교 교주 이름으로 서명한다. 이름이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조선의 독립운동 열기를 꺾기 위해 내정을 조선인이 맡아서 천황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거짓 놀음의 서명서였다. 우치다는 양기탁을 포섭하려 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자 단군교라는 이름에 매력을 느껴서 정훈모를 끼워준 것이었다.
1929년에 정훈모는 안순환을 만나게 된다. 부자였던 안순환의 지원으로 정훈모는1930년에 시흥 녹동서원 안에 단성전을 건립하게 된다. 그리고 1931년에는 단성전을 지원하는 봉찬회를 구성하는데, 여기에는 기존 대종교인들도 참여한다. 1930년대에 대종교 남도본사가 무너짐과 동시에 단군교가 벌인 약진이 대종교인들을 단군교로 넘어가게 한 것 같다.
안순환은 본래 이왕직사무관으로 근무하다가 사퇴한 뒤 대령숙수들을 데리고 명월관(지금 동아일보 일민 미술관 자리)을 운영했다. 그는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태화관도 운영했다. 3.1운동의 민족대표와 그가 관련이 있다는 말도 있긴 한데, 사실 관계는 확인하지 못했다. 1920년에 식도원이라는 음식점을 내서 또 크게 성공했다.
안순환은 또한 1932년에 친일유림들을 모아서 조선유교회를 건립하고 1935년에는 기관지 일월시보를 펴낸다. 이 일월시보의 주간이 <환단고기>를 쓴 이유립이라는 사실도 이제는 유명하다.
1932년 만주국 건립 이후 파시즘 체제에 들어간 일제는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 없게 되었다. 1936년 7월 단군교 해산 명령이 떨어지고 단군교는 그 명령에 따랐다. 정훈모는 그 후 얼마 안 되어 죽은 모양이다. 그의 사후 단군교의 명맥은 끊어졌다.
이미 말했지만 만주의 대종교도 1935년에는 유명무실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1934년 간신히 포교를 허락받은 상태. 일제에 충성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포교 허락을 맡아야 할 정도로 위기에 놓였었던 것이다. 하지만 희망은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다. 백산 안희제가 1933년 만든 발해농장을 기반으로 대종교는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점차 교세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제가 포교를 허락한 것은 이런 대종교를 양지에 꺼내놓고 감시하겠다는 수작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1942년 11월 이극로가 3대 교주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가 빌미가 되어 대종교에 대한 대탄압이 시작되었다. 조선어학회 사건과도 궤를 같이하는(이극로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도 조사받았다. 이극로의 편지를 독립선언서로 본 일제는 내사를 시작했고 조선어학회 사건과 대종교 탄압 사건을 동시에 만들어냈다.) 이 참변을 대종교에서는 임오교변이라고 부른다. 25명의 대종교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백산 안희제를 비롯한 열 명의 대종교인이 고문 끝에 죽임을 당했다. 대종교에서는 이들을 순교십현殉敎十賢이라 부른다. 교주 윤세복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고 해방 때까지 옥살이를 했다.
오늘날에 와서 단군교가 대종교가 흘린 피에 묻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참 서글픈 이야기다. 옥과 돌을 구분해야지, 한꺼번에 태워서는 안 되는 법. 그를 위해서 짤막하게 기록해둔다.
첫댓글 민족종교 대종교 우리의 오늘을 있게 했지요. 우리 모두 대종교의 사상 널리 펼쳐나가야지요.
따뜻한 햇볕 무료, 시원한 바람 무료, 아침 일출 무료, 저녁 노을 무료, 붉은 장미 무료, 흰 눈 무료, 어머니 사랑 무료, 아이들 웃음 무료, 무얼 더 바래 욕심 없는 삶 무료, 한 번은 처럼 살아야 한다. 무료로 행복한 4월 되세요.()()()
웃음이 늘 함께하는 멋진 하루 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