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
1. 종로파 소개
2. 한국 조직폭력배의 역사
3. 종로파 계급도
4. IC,OOC 규칙
5. 팩션 합류 방법
< 종로파의 정보 >
1930~1960년대 서울 일대를 장악한 한국 조직 폭력배로,
1930년대에 창설되었으며, 서울 종로구를 시작으로 서울시 전역을 점령해 나아갔다.
종로파는 서울시를 노리는 타 조직간의 세력다툼이 종종 발생하였고, 이런 잦은 다툼속에서
조직의 세력을 키워 나갔다.
종로파는 이후 일본의 야쿠자, 중국의 삼합회와 친선관계를 맺는 등 다른나라 조직과의
협력관계를 쌓기도 하였다.
< 종로파의 성향 >
주로 살인,밀수,납치 등의 범죄를 벌이며,
흥신소,도박장,오락실 등의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다.
검은색 양복을 입고, 신체에 자신들의 소속을 상징하는 문신을 새긴다.
< 한국 주먹패의 효시 >
현대적 의미의 조직 폭력배의 시초는 과연 언제일까. 역사학자들중에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던 흥선대원군이 만든 사조직을 조직 폭력배의 효시로 보는 견해가 많다. 흥선대원군은 당시 불량배와 어울리며 안동김씨의 감시와 견제에서 벗어나는 연막전을 폈고,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고종의 兒名)을 보좌에 앉힌 뒤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흥선대원군은 이후 권력투쟁의 고비마다 이들을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는 전위부대로 적극 활용했다. 이전에도 객주나 나루 주변에 상인들을 갈취해 돈을 뜯는 무리가 없지는 않았지만 폭력행사를 주업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대적 의미의 조직 폭력배라고 단정하기는 무리다.
한국에서 조직적인 폭력배의 태동은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튼 구한말에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다. 그들이 기생한 사회환경과 이권 추구 방법, 그리고 조직을 유지한 나름대로의 철학 등을 종합해볼 때 한국 주먹의 역사는 크게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일제치하와 광복 공간의 ‘낭만파 주먹시대’이며, 제2기는 자유당 정권 시절 정치권과 공생관계를 유지한 ‘정치깡패의 시대’로 나뉜다. 5·16으로 된서리를 맞은 주먹세계는 한동안 숨을 고르다 70년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눈부신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먹을 ‘파이’가 한결 커지자 피비린내 나는 조직끼리의 전쟁을 통해 ‘전국구 주먹시대’로 접어든 게 바로 제3기다. 제4기로 불리는 현재의 주먹세계는 음습한 ‘검은 옷’을 벗어던지고 합법적인 공간에서 활동하는 ‘기업가형 폭력배 시대’로 변신했다.
◆ 제 1기 낭만파 주먹시대 : 3자 구도
폭력을 생업으로 삼는 한국 주먹의 본격적인 장은 1930년대에 열렸다. 30년대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공고해지는 시기로 토지수탈과 상업자본주의의 침투로 농업을 기반으로 한 봉건제 사회가 부분적으로 해체되는 변화를 겪는 시기다. 그 과정에서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농민들은 상대적으로 먹고 살 길이 나은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들 가운데 힘깨나 쓰는 젊은이들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암흑세계’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당시 경성은 조선인이 주도하던 종로상권과 일본인이 밀집한 명동상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주먹패들은 상권에 기생해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당시 주먹세계도 자연스레 양분돼 있었다. 명동의 지존은 하야시로 알려진 한국인 선우영빈.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거물정치인이자 최대 야쿠자 조직인 ‘현량사’의 보스 도오야마 마쓰루(頭山滿)의 휘하에서 성장한 만큼 조선 내 야쿠자의 우두머리로 막강한 조직 장악력을 과시했다.
반면 종로의 주먹패는 명목상 ‘구마적’ 고희경이 오야붕의 위치에 있었지만 조직력과 자금력이 취약해 하야시처럼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종로를 장악한 주먹이 조선 최고의 오야붕으로 인정받던 당시 주먹판의 권력판도는 구마적을 비롯해 학생패를 이끈 보성전문 출신의 ‘신마적’ 엄동욱, ‘쌍칼’ 김기환 등이 형성한 삼자구도이다. 엄동욱은 학생패라는 충성도 낮은 조직의 한계로 패거리의 전체적인 힘에서 다소 약했지만 뛰어난 싸움 실력으로 구마적의 반열에 올랐다. 김기환도 구마적의 하부조직에 편입돼 있었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조직력으로 구마적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세력으로 급성장했다. 왕십리의 김남산, 마포의 정춘식 등도 조직 편제상 ‘구마적’ 휘하에 있었지만 자신들의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주먹 계보로 활동했다. 보호비 명목으로 상인들에게 갈취한 일종의 세금이 이들의 주 수입원이었던 만큼 협객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 김두한의 천하통일
삼자구도를 형성하던 조선 주먹계가 1934년 김두한에게 평정됐다. 김두한의 당시 나이는 18세. 김기환이 구마적에게 패해 조직을 넘겨받은 김두한이 신마적과 구마적을 차례로 때려눕히고 주먹세계를 통일했다. 이후 조선의 주먹판도는 하야시와 김두한의 양자대결 구도로 전환하게 된다. 영화 ‘장군의 아들’이나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의 항일의식을 부각하기 위해 하야시와 극단적인 대립관계로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둘은 갈등보다 동반자적인 관계로 각자의 수익구조를 유지했다. 김두한 역시 생존 당시 동아방송 대담프로그램인 ‘노변야화’에 출연해 “하야시패와 장충단에서 일전을 벌인 뒤 하야시를 형님으로 모시며 형제관계를 맺었다”고 두 사람 간의 공생관계를 시인하기도 했다. 주먹패들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김두한이 창설한 ‘반도의용정신대’도 총독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하야시의 도움을 받았다.
● 광복 공간의 암흑세계
광복 후 좌우의 이념대립 바람은 주먹세계에도 몰아쳤다. 우익 주먹들은 김두한이 선봉에 서 ‘민주청년동맹’을 이끌었고 이북 출신이 주축이 된 ‘서북청년단’이 뒤를 이었다. 좌익 주먹패는 김두한의 친구인 정진용(야인시대에는 정진영으로 나오지만 문헌상으로는 정진용이 올바른 표기)이 이끈 ‘조선청년전위대’가 대표적이다. 좌익에 대한 김두한의 백색테러는 악명 높았다. 파업현장에서 무자비한 테러를 자행했고 정진용을 살해한 ‘시공관 사건’으로 김두한은 미군정청으로부터 사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주먹패들의 좌우대립은 권력과 손을 잡음으로써 활동 영역이 정치적 공간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된다. 주먹세계의 경쟁도 외부 유입 세력의 가세로 한층 치열해졌다. 6·25가 터지고 이북 출신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광복 후 하야시패가 떠난 명동을 장악한 이화룡, 명동 동부의 중앙극장을 차지한 정팔 등이 대표적인 이북 출신 주먹패. 일제시대 중원을 떠돌던 시라소니 이승순도 광복 후 동향인 신의주 출신 정팔의 요청으로 ‘중앙극장파’에 잠시 몸을 담았다. 낭만파 주먹들은 일제 식민지배와 광복 뒤 좌우이념대립, 그리고 전쟁이라는 혼란기를 겪었다. 생존을 위한 기생형 폭력 조직의 성격을 띤 제1기 주먹시대는 보호비 명목으로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뜯는 것을 주 수입원으로 삼아 폭력의 사회적 폐해는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조직 끼리의 대결도 흉기에 의존하기보다 맨손으로 치러 어떻게 보면 인간미마저 느껴진다. 매춘,아편 등 쉬운 수입이 보장된 반사회적인 행위를 자제하고 조직원 끼리의 의리를 중요시하는 등 주먹 철학도 엿보인 시기다. 이 시기를 낭만파 주먹시대라 부르는 이유다.
◆ 제 2기 정치깡패의 시대
낭만파 주먹시대를 거친 한국 주먹들은 생활의 물적 토대를 확보한 뒤 본격적으로 몸집 불리기에 나선다. 시대적인 환경도 이들의 ‘몸집 불리기’에 튼실한 자양분을 공급했다. 6·25전쟁을 거치고 자유당 정권이 뿌리를 내리면서 정통성이 결여된 정치권이 주먹세계의 물리적 힘을 이용하기 위해 추파를 던졌다. 건달세계도 질적 변화를 겪으면서 이른바 주먹과 권력이 본격적으로 손을 잡는 ‘정치깡패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1954년 김두한의 정계입문으로 무주공산이 된 주먹계에 현대적 의미의 조직 개념을 도입한 이정재가 급부상했다. 동대문 상인조합 이사장이 된 이정재는 막강한 자금과 조직력을 앞세워 자유당 이기붕에게 접근해 정치권과 손을 잡는다. 57년 장충단 야당집회 방해사건 등을 주도하며 혁혁한 공을 세운 이정재는 자유당 이천 지구당위원장까지 역임하며 한국의 도야먀(頭山滿)를 꿈꿨지만 결국 5·16쿠데타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정재의 동대문사단 휘하에는 자유당의 사주로 4·18 고대학생 습격사건을 주도한 유지광을 비롯해 ‘연예계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임화수와 ‘시라소니’ 이성순에게 잔인한 린치를 가해 주먹생명을 끝낸 이석재 등이 포진해 있었다. 동대문사단은 본격적인 정치깡패의 시대를 열었지만 시라소니 린치 사건에서 보듯 ‘협객’이라고 자처하던 낭만파 주먹시대의 물을 흐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시기에 김두한으로부터 종로를 넘겨받은 심종현을 비롯해 광화문의 장영빈, 서대문의 최창수, 소공동의 홍영철 등이 나름의 주먹 계보를 이어왔지만 정치권과 결탁해 독주하던 동대문사단에는 견줄 수가 없었다. 정치권도 동대문사단의 바람막이 구실은 물론 적극적인 비호를 서슴지 않았다. 이정재가 가장 껄끄럽게 여기던 이화룡의 명동파를 ‘충정로 도끼사건’을 빌미로 제거해주기도 했다. 정치깡패의 시대를 이끈 이정재는 느슨하던 주먹 조직을 기업형으로 새롭게 재편하고, 활동공간 역시 광역화함으로써 현대적 의미의 조직폭력배의 발판을 다졌다. 특히 충성도 높은 조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고향인 이천 지역 출신을 대거 중앙으로 끌어들여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탄탄한 결속력을 과시했다.
◆ 제 3기 전국구 시대
5·16쿠데타 이후 깡패 소탕령으로 숨을 죽이던 주먹세계는 63년 민정 이양 이후 조심스럽게 기지개를 켰다. 지리멸렬하던 주먹계를 잠시나마 통일한 사람이 바로 ‘신상사’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신상현이다. 그는 이화룡이 이끌던 명동파의 행동대장 출신으로 과도기에 ‘밤의 황제’로 등극했다. ‘신상사파’의 시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눈부신 경제성장은 주먹세계의 변화를 요구했다. 경제개발로 인한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호남지역에서 무작정 서울로 온 청년들은 손쉽게 ‘검은 세계’에 편입돼 주먹계의 ‘태풍의 핵’으로 등장했다.
오종철과 박종석(일명 번개)이 양분하던 ‘범호남파’는 무교동 유흥가를 발판으로 세력을 키운 뒤 당시 패권세력이던 ‘신상사파’와 일촉즉발의 대결구도로 치닫는다. 범호남파는 경제성장에서 소외된 상대적인 박탈감에다 사회구조적 요인에 의해 갑작스레 주먹세계로 편입됨에 따라 이전과 달리 잔인한 폭력성을 드러냈다. 범호남파는 1975년 1월 2일 주류 공급권과 관내 유흥업소 상납금을 둘러싸고 명동의 사보이호텔에서 신년회를 열던 신상사파를 급습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사보이호텔 기습 사건을 통해 ‘오종철파’의 행동대장이었던 조양은이 급부상했고, 범호남파도 내부 분열을 겪는다. 내부적으로 수세에 몰린 ‘박종석파’의 행동대장 김태촌이 1976년 3월 무교동 엠파이어호텔 후문 주차장에서 범호남파의 실질적인 보스 오종철을 칼로 난자해 불구로 만들었다. 이후 조양은과 김태촌은 3년간 쫓고 쫓기는 혈투를 벌였다. 이 시기에 오기준, 김태촌이 중심이 된 ‘서방파’와 이동재를 두목으로 한 광주 ‘OB파’가 급속히 세력을 키워 당시 패권세력이던 ‘양은이파’와 함께 ‘3대 패밀리’를 형성했다. 전국적으로 통하는 주먹이라는 의미의 ‘전국구 주먹시대’는 이러한 ‘3대 패밀리’를 비롯해 부산의 칠성파(두목 이강환), 대전의 옥태파(두목 김옥태, 2001년 사망), 대구 동성로파(두목 오대원), 수원파(두목 최창조), 이리 배차장파(두목 김항락) 등이 이끌었다. 이즈음에 한국 주먹사는 잔인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전통 주먹의 시대’는 가고 ‘칼잡이의 시대’가 왔음을 알렸고, 선·후배간의 위계질서도 생명력을 잃었다. 주먹세계를 부르는 호칭이 ‘조폭(조직폭력배)’으로 바뀐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이권추구 방식과 활동공간도 엄청나게 바뀌었다. 활동공간은 상권 중심에서 대형 유흥업소 중심으로 바뀌어 주먹들의 ‘강남시대’가 열렸다. 또한 부를 축적하는 방식도 시대에 걸맞게 다양해졌다. 채권·채무관계 주주총회 등에도 조폭들이 개입해 ‘해결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주류 도매업은 물론 공사 입찰 건축자재 공급권에도 손을 뻗쳤다. 검찰도 80년대까지 진행된 이 시기를 폭력배들의 황금기로 보고 있다.
조폭과 정치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인지라 정치와의 연계는 이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87년 호헌철폐, 직선개헌을 내세운 김대중, 김영삼씨가 통일민주당 창당을 시작하는데 지구당 창당때 주먹패들이 방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일명‘용팔이 사건’으로, 이 사건은 후에 5공 핵심인사 장세동(당시 안기부장)씨가 계획해 일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밖에 94년 슬롯머신사건, 98년 한나라당 서울역집회 방해사건도 조직폭력배가 일으킨 사건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 제4기 소규모 벤처창업형태의‘조폭’
이제 새로운 시기에 맞춰 젊은 세대들이 조직폭력배로 탄생하고 있다.
소규모로 구성된 군소 조폭들이 대도시 유흥가를 중심으로 기지개를 펴고 있다. 과거 거대‘패밀리’형태로 운영되던 폭력조직이 벤처기업 창업형태와 같이 소규모 조직으로 분화되고 있는 형태이다.
이는 계보를 거느린 대조직은 사법기관에 노출되기가 쉽고 조직을 이끌 자금력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또 범죄단체를 구성한 두목급에 대해서는 최고 사형까지 처벌할 수 있는 중형이 선고되기 때문에 이 같은 경향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최근에는 몇 명만 모이면 조직을 만들고 있다. 특히 10대들이 활개를 치면서 점차 흉폭해지고 있으며,
최근 조폭은 주먹 계보 대신 돈에 따라 이합집산하고 있다. 한때 유행하는 조폭영화에 등장하는 '조폭 의리'는 거의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2011년 말까지 경찰이 감시하는 조직폭력배는 전국적으로 220개 조직, 5451명에 이르고 있다. 경찰 관리 대상 조폭은 조직 체계와 강령이 있고 자금 능력이 있어 활동이 왕성하다고 판단된 조폭으로, 매년 초 경찰이 선정해 감시하고 있다.
이들은 상하 관계보다는 돈과 이득에 따라 소규모로 움직여 단속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이러한 소규모 조폭은 이권에 따라 수시로 뭉쳤다 흩어졌다 해 관리가 어렵다. 예전처럼 수백명씩 싸운다거나 하지 않고, 지능적이고 불법적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있기 때문이다.
조폭 조직의 양상은 1990년 노태우 정부의 '범죄와 전쟁' 때 크게 바뀌었다. 이전에는 피 튀기는 '주먹 전쟁'을 통해 세력을 넓혀야 했고, 그러기 위해 대규모 조직이 필요했다. 그러나 '범죄와 전쟁'으로 대부분 조직이 와해되면서 합법을 위장한 돈벌이에 눈을 돌렸다.
조폭들은 성인오락실, 건설업, 사채, 심지어 벤처기업 등 돈이 몰리는 곳으로 진출했다. 코스닥 상장 기업을 인수해 회사 자금을 빼돌리거나 주가조작에 관여하기도 하는등 무조건 돈만 쫓는 현재 조폭은 진화하고 있다.
ㅇ출처 : 다음 - 한국 주먹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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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식 승인되었습니다. 더 많은 활동 보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GOOD // 당파원들 RP력이 뛰어나고 재미나게하네요
ㅋㅋㅋㅋㅋㅋ고맙소
물론 '당파원들' 리더는 제외 ^^
너무해;
ㅎ
?
뭐라구요?
응~ 니신고 ㅅㄱ
반대 // 리더자질 X
^^
재밌게 사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