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에 이르는 신앙(10월 8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빌립보서 3:1-16(신약 321)
무더운 날씨가 안 물러갈 것 같은 여름이 물러가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함을 느끼는 진짜 가을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하나님이 정하신 규칙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계획하신대로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복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면 성경에 기록된 은혜와 복을 누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을 이 세상에서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따르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방법으로 살아가고 내가 세운 계획대로 살아갈 때 실패를 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을 통해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서 세우신 놀라운 구원 계획 중에서 부활의 은총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고 생각하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영원히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는 것 즉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세우신 부활에 이르는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에 이르는 신앙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어떤 신앙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울 사도가 전하는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부활에 이르는 신앙” 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1.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부활에 이르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과거 지향적으로 살지 않고 미래 지향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 즉 미래의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살아있는 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으로 과거가 아닌 미래를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과거는 흘려보내고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는 믿음 즉 비전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날 성령 강림 사건을 설명하면서 요엘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행 2:17-18절을 보면
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2: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은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증거 하는데 예언과 환상과 꿈은 미래를 향한 비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뒤를 돌아보며 과거에 매여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부활신앙은 과거를 뒤로 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백을 하면서 자신의 과거 즉 뒤에 있던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미래를 향해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뒤에 있던 것 즉 과거의 일에 대해서
과거에 나는 육체를 신뢰할 만하다고 고백했습니다. 4-5절을 보면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이 어떤 배경이었는지를 말했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나는 육체를 신뢰할 만하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육체를 신뢰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한다면 나는 금수저로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족속이고, 베냐민 지파이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으로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다고 말한 것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금수저에 해당하는 신분이라는 것입니다.
정통 히브리인이고 또한 당시 율법을 잘 알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자부하는 종교 집단인 바리새인이었다고 말하면서 나의 과거는 유대인 사회에서 보면 자랑할 만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과거의 자신은 자랑할만한 신분에 속한 사람이었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6절을 보면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바울은 유대인이면서 바리새인으로서 예루살렘성 밖에까지 그의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과거에 자신은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선 것은 바리새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종교적 열정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율법의 의’는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명령들과 기준들을 지킴으로 얻어지는 ‘의’를 의미하는데 바울은 이런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다른 사람이 볼 때 흠이 없다고 평가받을 만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은 그 시대 유대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하는데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율법주의자 였다는 것입니다.
뒤에 있던 일 즉 과거의 자신은 이런 사람이었는데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자신의 모든 과거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겨서 다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7-8절을 보면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신의 과거의 모든 것이 자랑스러웠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까 자신의 과거의 모든 것들이 해로운 것들 뿐이고 아무 가치 없는 배설물 같은 것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던져버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랑스러운 것들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알고 나서 보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고상한 것인 반면에 자신의 모든 것들은 배설물과 같기 때문에 다 던져버리고 그리스도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얻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는 내 모든 과거를 버리고 뒤에 있는 일들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뒤에 있는 일들 즉 자신의 과거는 배설물로 여긴 것은
2.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누구보다 유대주의에 열심을 가지고 살았던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자신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렸다고 말했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그 안에서 즉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 안에 발견되려 한다고 고백하면서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9절을 보면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과거에 자신이 생각한 의는 율법을 지킴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의롭게 된다는 것은 율법을 잘 지킴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나름대로 율법을 철저히 지켜왔다고 자부했는데 돌아보면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내가 지금 얻은 의는 율법으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그 안에서 즉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면 의로운 성도가 되어야 하는데 과거에는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까 율법으로 내가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9절을 다시 보면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 진정한 의를 이루어야 하는데 우리의 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므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 사는 거룩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의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입니다. 9절을 다시 보면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의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입니다. 우리는 의롭지 않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국경일이 되면 정부에서 사면을 발표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데 사면은 죄가 있는 사람의 죄를 면해주는 것이고 복권은 죄를 지어서 제한되는 권리들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면과 복권은 죄가 있지만 용서하고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듯 우리가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권리를 회복시켜주시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의로운 자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하나님에 의해서 인정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의를 힘입어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리스도의 사람이자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3. 부활에 이르는 신앙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의를 힘입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안에서 즉 그리스도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신앙은 부활에 이르는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부활에 이르는 신앙이 되기 위해서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10-11절을 보면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3: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부활은 죽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죽지 않았다면 부활도 없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부활하신 것이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 고난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고난에 참여함으로 부활의 은총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고난과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르는 신앙으로 살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참여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부활의 권능을 경험하고 그 은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고 고백했습니다. 나에게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흔적이 내 몸에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내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닐 정도의 고난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교회를 위해 믿음을 위해 고난받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고난이 있으면 부활의 권능과 부활의 은총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즉 과거의 나는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르는 신앙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고난을 기쁘게 받았을 뿐만아니라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12절을 보면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부활에 이르는 신앙으로 살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고 말한 바울은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야 하는데 잡힌바 된 그것은 바울에게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심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우리 개인에게는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감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눈물 흘리며 감사했던 그 순간과 성령충만을 받고 감격했던 그 순간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하고, 나를 불러주시고 소명을 주신 그것을 붙잡고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서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고백했습니다. 13-14절을 보면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따라 살아가야 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소명을 잘 감당하면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상을 받게 되는데 바울은 이것을 부름의 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아시안 게임이 끝났습니다.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메달이란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훈련을 해서 목표한 메달을 받은 선수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선수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는 선수들처럼 우리 신앙의 푯대를 정하고 그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이번 아시안 게임에서 가장 황당한 장면을 연출한 경기는 롤러스케이트 남자 단체적이었습니다.
마지막 주자로 달리던 선수가 결승선 앞에서 이제 금메달이다. 하는 생각에 세레머니를 하면서 여유있게 들어오는데 대만 선수가 전력질주하고 발을 먼저 내밀어서 우리팀은 금메달인 줄 알고 좋아하다가 은메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승전을 통과한 다음에 세레머니를 해도 되는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고 여유를 부리다가 금메달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언론에는 이런 보도가 나왔습니다. 방심하고 멋부리다 군 면제를 놓치다. 금메달을 따면 군 면제인데 은메달이라 면제는 안 되는가 봅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부름의 상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완수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에 이르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 것은 다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부활의 은총을 입고 주어진 소명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므로 부름의 상을 받는 참빛교회 모든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