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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죽산박씨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수필, 시 스크랩 크리스찬 정태기
sunny 추천 0 조회 50 11.11.10 06: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크리스찬 치유 상담 연구원 정태기

http://www.chci.or.kr/

 

  반갑습니다. 피곤하시죠? 제가 얘기할 때 졸아도 상관없습니다. 말씀 한군데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아멘. 오늘 제 주제가 치유설교입니다.

설교는 말입니다. 차원이 다른 말일 뿐입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설교 해가지고 밥벌어 먹고 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는 이 말이 얼마나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느냐를 우리가 일단은 이해를 해야 됩니다. 내가 하는 말이 얼마나 놀라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오늘 읽어드린 말씀 가운데 무슨 말이 있는가 하니,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냐? 말씀이 생명을 낳는다 그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우리 속담에도 있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 씨 속에는 생명이 있어, 말이 생명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말이 바로 생명 그 자체입니다. 사람을 연구해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을 누가 성장시켜가느냐? 놀랍게도 말이 인간을 성장시켜 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연구에서 요즘에 두드러진 한 연구가 있습니다. 좋은 말을 많이 들으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나쁜 말을 많이 들으면 나쁜 사람이 됩니다.

 

정신이, 영이 건강한 사람들을 조사해보면 전부다 좋은 말을 많이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을 보면 전부다 나쁜 말을 많이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차이가 뭡니까? 행복한 사람은 좋은 말을 많이 들은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말을 많이 들은 사람입니다. 성공적인 사람과 실패적인 사람의 차이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도 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성공적인 사람은 좋은 말을, 칭찬의 얘기를 많이 들었던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이고, 인생을 실패적으로 살아나가는 사람들은 나쁜 말을, 상처입은 말을 많이 들었던 사람입니다. 저는 20년 동안 주로 목회자들을 연구했는데, 왜 이 목회자는 성공했고, 왜 이 목회자는 조금 그렇게 사는가? 성공, 실패가 하나님 앞에 가면 전혀 다르게 보여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 눈으로 보면 왜 이 목회자는 이렇게 많은 열매를 맺고, 왜 이 목회자는 이렇게 열매가 없을까, 차이는 딱 하나뿐입니다.

아름다운 말을, 좋은 말을 많이 들은 목회자 가운데 생명의 열매가 없는 그런 목회자를 저는 찾아볼 길이 없었습니다. 말의 파워가 얼마나 우리에게 큰 힘으로 작용을 해오는가? 미국의 23대 대통령 에드먼트는 그렇게 자기 자서전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무디의 설교를 듣고 그렇게 감동을 받지 않았더라면 나는 대통령이 못된다”고. 무디의 설교 한마디가 그 청소년의 에드먼트 가슴에 그냥 그대로 꽂혀서 그 힘이 작용을 해가지고 결국은 자기가 대통령이 됐다는 겁니다. 저는 76사단 사단장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사단장은 중학교 1학년 때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그 좋은 말, “너는 가난해서 아무 것도 못해. 그러니까 너는 열심히 공부해서 육사 가서 장군이 돼.” 그 말 한마디에 의해서 이 아이는 그 가난한 속에서 결국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사 갔고, 그리고 장군이 되었습니다. 말이란 이렇게 놀랍게 반드시 씨를 맺고야 마는, 한 사람의 삶을 만들고야 마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어디가서나 자주 이런 질문을 합니다. 여기 서 있는 정태기 목사,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가고? 요즘 제가 꽤 많이 듣는 얘기가 “목사님, 참 훤하게 잘 생겼었습니다”입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그 사람을 업고 다니고 싶습니다. 왜요? 저는 너무나 못생겼다는 열등의식에 시달리고 살았기 때문에. 저는 나이 15살부터 30살까지 15년 동안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 앞에 설 수가 없는, 주로 여자들 앞에 가지를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나는 못생겼으니까. 사실 나는 못생겨서 결혼을 안할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사람이 나를 구해줘서 결혼을 하긴 했습니다만 여러분이 보기에 내가 그렇게 못생긴 얼굴입니까? 나는 요즘에 거울앞에서 내가 나를 자꾸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생긴 얼굴이 아닙니다. 그렇다고해서 그렇게 잘난 얼굴도 아니지만. 그런데 왜 내가 그렇게 15년을 시달렸던가? 말 한마디가 나에게 끼치는 영향입니다. 내가 15살 때 하숙집에서 토요일날 오후에 소설을 읽고 있는데 저쪽 방에 외사촌 누나의 친구들이 모여가지고 얘기를 나누는 겁니다. 나는 중학교 2학년이고, 그 여학생들은 고등학교 여학생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여학생이 무심코 내뱉는 얘기에 내 이름을 딱 부르면서 태기는 못생겨가지고 여학생이 아무도 안따를 거라고.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손에서 책이 뚝 떨어지는 거 있죠. 그 다음부터 신통해요. 어떤 여자를 봐도 여학생이 다 나를 손가락질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쪽에서 여학생이 오면 나는 아무리 멀어도 피해서 돌아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이 30이 되도록까지. 이게 말이 돼요? 말이 안돼죠?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15년을 내가 그렇게 살았습니다만 나만 그러는게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들었던 말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나는 내 나이 서른이 넘어서야 후회를 했습니다. 난 지금도 원통합니다. 그 15년이란 삶이. 그게 지옥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못생겼다고 흉보는 것 같으니까, 손가락질하는 것 같으니까 피해다니는 삶이었는데, 그게 사람이 사는 삶이 아닙니다. 난 지금도 그 여학생을 생각만 하면 화가 나는데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모르지만 알기만 하면 찾아가서 “내 인생 15년 잃어버린 인생 변상해내, 이년아!” 그렇게 얘기를 당연코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신통합니다. 어떤 말을 들으면 그 말에 사로잡혀서 자기의 삶을 아름답게도, 어둡게도 살아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측면에서 요즘에 상담을 하거나 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하는데 거의 모두다가 말에 걸려 있습니다. 나쁜 말을 들으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한신대학원이 화계사에서 70m밖에 떨어지지 않는 수유리 산속에 있습니다. 예비고사 마지막 치루던 어느 해, 화계사 스님이 나를 찾아와서 아이가 하나 자살할 것 같다고 같이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그때 나는 화계사를 안갈려고 했습니다. 그 아이가 자살을 할 것 같다고 그래서 “자살을 할 것 같으면 화계사에서 처리를 해야지 왜 나까지 찾아왔느냐”고 했더니 그 스님 얘기가 “중생이 죽어가는데 목사면 어떻고, 스님이면 어떻소, 살리고 봐야지.” 결국 그 스님이 나한테 이겼습니다. 그 스님을 따라가봤더니 머리를 빡빡 깎은 남자아이가 오돌오돌 떨면서 그 스님의 방구석에 있는데 스님도 삼일 동안이나 그 얘가 왜 그렇게 떨고 있는지 모르는 겁니다. 가서 얘기를 나누는데 보니까 예비고사를 친 애라, “너 예비고사 봤지?” 깜짝 놀라서 “네!” “너 몇 점 맞았어?” 170점 맞았대요. “그런데 왜 너 여기 왔어?” 서울대학교 못가면 죽어야 된대요. 그런데 서울대학은 300점 만점에 290점이 넘어야 295점 가깝게 되어야 들어가거든요. “그런데 너 170점 맞은 놈이 어떻게 서울대학을 들어가?” 여하튼 자기는 서울대학 못가면 죽어야 된대요. “누가 죽으라 그래?”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선생님들이 다 그런대요. 그러면서 뭐가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 수밖에 없느냐? 말장난입니다. 말 한마디가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중학교 1학년 1학기 말에, 아파서 시험을 제대로 못봤기 때문에 이 아이가 꼴등을 했는데, 담임선생님은 이 아이 공부 잘하게 해 볼려고 자기가 맡은 반 성적 올릴려고 하는 그 욕심에서 꼴등하는 아이를 불러다내서 전체 아이들에게 자극을 줄려고 이 아이를 불러다내놓고 주먹을 쥐고 이 아이 마빡을 찌르는데 뭐라고 그래요? “이 새끼야, 너는 시험가지고 네 인생 꽃피기는 틀렸어, 이 새끼야.” 하면서 쥐어박는 겁니다. 쥐어박는데 이 아이가 넘어지는 겁니다. 넘어지는 순간에 아이들이 다 웃는 겁니다. 그 때 이 아이는 기절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그 선생님한테 그 말을 듣는 그 다음부터 시험만 돌아오면 3일, 4일 전부터 잠을 못자는 겁니다.

 

그런데 신통한 건 이 아이가 보니까 삼수생인데 종로학원에서 1년에 스무 번 모의고사를 보는데 스무 번 모의고사를 보면 거의 다 300점 만점입니다. 모의고사는 전부 다 만점입니다. 그런데 본고사만 보면 170이 안넘습니다. 이 아이가 머리가 얼마나 좋은 애입니까? 그런데 이 머리가 좋은 아이가 한 번도 자기의 삶을 꽃피울 수가 없습니다. 왜? 그 선생님의 그 말이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겁니다. 그 말에 한 번 딱 사로잡히면 거기서 꼼짝을 못하는 게 인간입니다. 설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집어넣는 이 말을 얼마나 중요하게 활용을 하는가? 다른 말을 들어가지고 사람이 이렇게 변화될 수 있다면 우리들의 설교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사람은 그렇게 바꾸어질 수가 있는 겁니다.

 

아마 여러분들 제가 몇 년 동안 이렇게 강사로 나오다보니까 하는 얘기를 또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연구가 사람은 자동차라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농담을 하는데 관상을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얼굴에 거의다 쓰여져 있는 것을 제가 읽을 수 있습니다. 2층에 있는 분들까지 전부 다, 거의 모두 다 첫사랑에 실패 한 번 했지요? 두 번째로 거의 모든 목회자 여러분이 이런 생각을 많이 할 겁니다. ‘나는 이렇게 목회하고 싶지 않은데 지금 내가 원치않는 이 목회를 하고 있어. 나는 이렇게 목회하고 싶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좀 더 다른 목회야.’ 그런데 그것을 지금 못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 이런 고민 해본 적 없어요? ‘나는 이렇게 이런 결혼생활 하고 싶지 않아. 그런데 내가 전혀 원치않는 이런 차디찬 결혼생활을 하고 있어. 내가 원하는 목회는 이런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 삶은 이런게 아니야. 그런데 이런 삶을 살고 있어.’ 이런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거의다가 그 안에 본인이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실체가 있습니다. 그 실체를 나는 뭐라고 하느냐? 사람은 자동차와 똑같습니다. 자동차는 운동장에 놔두면 제 마음대로 못갑니다. 운전수 마음대로 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도 똑같습니다. 목회자도 똑같습니다. 어떤 목회자든 가만히 만나서 얘기를 해보면 어떤 목사님의 마음 속에는 운전수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 운전수가 어떤 운전수요? 어둠과 불행과 실패, 안되는 쪽으로만 방향을 잡는 운전수입니다.

 

그 운전수가 들어있는 한은 그 삶이 꽃피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어떤 목회자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그 운전수가 어떤 운전수요? 밝음과 빛과 소망과 성공과 행복, 이런 쪽으로만 몰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목회자가 살아나가는 데는 어디를 가나 한다는 얘기가 무슨 얘기예요?

 

“나는 기도만 하면 돼. 나는 뭔말을 하면 하나님께서 역사를 해.”

 

그 운전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그 운전수를 들어서 쓰는 겁니다. 내 안에 운전수, 이 운전수가 내 삶을 지배를 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말을 안듣는도다.” ‘내가 원치않는 방향으로 내가 살아져. 나는 이런 목회를 하고 싶지 않아. 나는 훨씬 더 생명의 열매를 맺는 큰 목회를 하고 싶어. 그런데 그게 안돼.’ 그건 여러분 안에 들어있는 그 운전수 문제입니다. 이 운전수를 뭐라고 그래요? 학문적인 용어로 ‘자아상’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self image, 자아상이라고 그러는데 이 자아상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느냐? 내 생각의 폭과 내 창의력, 내 능력, 내 대인관계, 내 행동, 태도, 전부다 지배합니다. 이 자아상이 지배를 하는 겁니다. 이 자아상을 한국사람들은 뭐라고 그래요? 팔자라고 그럽니다. 사주팔자를 그렇게 타고났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사주팔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주팔자 잘 타고나고, 어떤 사람은 사주팔자 못 타고나고, 하나님이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사람을 만들었다면 저는 그런 하나님은 안믿습니다. 하나님은 모두다 공평하게 똑같이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있는 운전수, 자아상이 다를 뿐입니다.

 

어떤 사람 마음 속에는 병든 자아상이, 상처입은 자아상이 들어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운전수, 이런 상처입은 자아상, 아니면 성공적인 자아상은 어떻게 우리 마음속에 자리를 잡느냐? 그건 철저하게 말에 의해서 자리를 잡습니다. 어떤 말을 듣느냐, 어떤 좋은 얘기를 많이 듣느냐에 의해서 자리를 잡습니다. 좋은 말을 많이 들으면 우리의 마음속에 행복한, 성공적인, 창의력 있는 자아상이 자리를 잡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 훌륭한 건강한 자아상이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에는 벌써 다릅니다. 그 사람 얼굴이 다르고, 그 사람 악수하는 게 다르고, 말하는 게 다릅니다. 사람들이 느끼는 게 다릅니다. 여러분, 오전에 강영우 박사님 만나봤지만 그 분의 자아상이 얼마나 엄청난 자아상입니까? 그 분의 말을 들을 때 다르고, 그 분의 표정을 볼 때 행동 태도가 다르죠?

 

그 사람은 철저하게 엄청난 어떤 놀라운 자아상을 마음속에 가지고 살아나가는 사람입니다. 자아상이 크면 큰 일 합니다. 자아상이 작으면 작은 일밖에 못합니다. 자아상의 크기 만큼 그 사람은 그대로 노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목사님의 자아상인 운전수가 70명 운전수면 그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100명의 자아상이라면 100명의 크기의 교회밖에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숫자가 넘어버립니다. 그 자아상은 100명인데 숫자가 넘어버립니다. 넘으면 그걸 감당을 못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 자아상에 맞으면 거기서 안심이 되는 겁니다. 이 사람을 변화시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자아상을 변화시키는 길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면, 설교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자아상을 만들어낸다, 말이 바로 생명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설교의 목적이 뭔가요? 설교의 목적은 사람을 구원시키는 겁니다. 사람을 구원시킨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냐? 그 사람을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얘기입니다. 새사람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새사람이 된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입니까? 병든 자아상, 어둠을 향해 가고 있는 자아상, 절망으로 향해 가고 있는 자아상을 소망의 자아상으로, 빛을 향해 가는 자아상으로 바꾸어준다는 얘기입니다.

가장 구체적인 얘기는 사상이 바꾸어지는 걸 우리는 사람이 달라졌다, 예수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시카고에서 공부할 때 하몬드에 있는 한 주일학교 총무를 잊을 수가 없는데, 제가 시카고 한인교회 교육을 담당했는데 교회에서 장학금을 받고 내가 그 한인교회 교육을 담당했을 때 주일학교 학생이 80명입니다. 4월달에 부임해 들어갔는데 5월달이 되니까 70명으로 줄어들고, 6월달이 되니까 60명으로 줄어들고, 7월달이 되니까 50명으로 줄어듭니다. 신통하게 한 달에 10명씩 줄어듭니다. 내가 교육을 맡았으면 학생이 더 늘어나야 할 텐데 더 줄어듭니다. 그래서 나중에 겁이 나서 안나오는 아이들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를 해서 물었더니 미국교회에 나간대요. 왜 미국교회에 나가냐고 그랬더니 미국 교회가 너무너무 좋대요. 그래서 이 아이들이 자기들만 나가는 게 아니라 우리 교회 다른 애들까지 끌고 나갑니다. 그 교회가 어떻게 주일학교를 하기에 이러는가? 저는 어느날 시카고를 돌아 다니는 그 교회 버스를 탔습니다. 그 교회 버스를 탔는데 시카고 시내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시카고 시내를 벗어나는데 서울에서 거의 평택 가기보다 더 먼거리로 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일리노이주를 벗어나서 인디아나로 들어서면서 하몬드라고 하는 조그만 도시가 있는데 그 도시로 들어가는 겁니다.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교회에 도착을 해놓고 봤더니 교인들은 1,500명인데 주일학교 학생이 그때만 1973년도에 몇 명이냐? 정확하게 33,700명입니다. 교회의 성인 어른들은 1,500명인데 주일학교 학생이 33,700명입니다. 지금 삼십 몇 년 동안을 하몬드 교회가 숫자로는 미국에서 제일 큰 교회로 매년 통계가 나옵니다. 무엇가지고? 주일학교 학생 가지고. 그때 예배를 끝나고 목사님한테 “저 한국에서 주일학교 배우러 왔습니다. 좀 시간있습니까?” 했더니 나한테 묻지를 말래요. “누구한테 물어야 됩니까?” 했더니 저 건너 빨간 고등학교 벽돌집에 가면 우리 주일학교 임시본부가 있는데 거기 가면 우리 주일학교를 480명에서 9년만에 33,700명으로 증가시킨 장본인이 있대요. 이름이 제니래요. “제니를 만나서 물어야 네가 원하는 대답을 얻을 거다.” 저는 그 고등학교 벽돌집으로 갔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까 하몬드 시의회에서 이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육을 얼마나 잘 하면 시의회가 결의를 했는데 주일날이면 하몬드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전부다 이 교회 주일학교로 쓸 수 있도록 오픈을 해주는 겁니다. 허가를 내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날 제니를 만나려고 했더니 다섯 시간 만에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주일날 제일 바쁜 날입니다. 다섯 시간만에 제니를 드디어 만났는데 제니를 만나면서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고등학교 복도를 향해서 나오는데 이게 사람이 걸어오는 건지 드럼통이 굴러오는 건지 분간이 안가는 겁니다. 점점 내 앞으로 가깝게 왔는데 두 번 놀라는 게 얼굴이 못생겼는데 보통 못생긴 게 아닙니다. 그 얼굴에 무슨 놈의 파리똥은 그렇게 많이 앉았는지 파리똥이 살결보다 훨씬 많습니다.

 

눈 작지, 그 미국 여자가 코도 작지, 별로 생긴게 없습니다. 어떻게 저 여자가 이런 일을! 나는 놀래가지고 쳐다보고 있는데 그 제니가 나를 보면서 빙그레 웃더니 하는 얘기가 “미스터 정, 나 찾고 있느냐?” 그때 내가 놀래가지고 그렇다고 그랬더니 테네시 식당에 둘이 가서 그 제니가 먼저 나한테 얘기합니다. “미스터 정, 나 먼저 보고 놀랬지? 너무 못생겨서.” 사실은 놀랬기 때문에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고 가만히 웃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나는 너무나 못생겨서 국민학교 다닐 때부터 남자애들이 나를 손가락질하고 흉보고 그래서 나는 죽어버릴려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던 여자야. 그래서 나는 대학을 갈 수가 없었어.” 이 어머니 아버지가 얼마나 이 제니 때문에 시달렸으면 자기가 잠든 줄 알고 한다는 얘기가 우리 제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더래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꼼짝을 하기가 싫은, 완전히 무능력한 병든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미국에는 그런 학교가 있지요? 공부를 하나도 못해도 들어가는 대학. 그걸 커뮤니티 칼리지라 그러는데 이건 시험보는 게 아니고 90먹은 영감도 우리돈 2만원만 내면 합격을 해줍니다. 그러면 마음대로 꽃꽂이도 배우고, 별 것 다 배워요. 노래도 배우고, 춤도 배웁니다. 그래서 거기에 야간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야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이 아이가 야간에 그 학교를 과목을 택해가지고 들어가긴 들어갔는데 뒤에서 잠만 자잖아요. 이 때 그 클라스에 누가 있는고 하니, 기도하는 네비게이토 여학생 다섯이 있었던 겁니다. 이 여학생 다섯이 뒤에 앉아있는 제니를 발견하고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그 제니를 위해서 기도하고, 제니의 장점을 찾아서 얘기를 해주기 시작하는 겁니다. 너한테 이런 점이 있다, 너한테 이런 점이 있다. 이게 말입니다, 제니는 일생을 살면서 한번도 칭찬의 얘기, 좋은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다섯 네비게이토 기도하는 그룹이 날마다 저녁마다 모아놓고 기도하고 난 다음에 제니의 좋은 점을 얘기해주는데 함께 끌어잡고 기도를 하는데 6개월을 듣습니다. 6개월만에 제니의 얼굴이 달라집니다. 눈빛이 달라지는 겁니다.

 

제니의 활발한 성격이 달라지다 보니까 그래서 그 여학생들이 제니를 데려다가 그 교회 주일학교 하나를 맡긴 것이 아닙니까? 유치부 아이들 여덟 명을 맡겼는데 제니가 그 아이들을 맡아가지고 가르키면서 3년 동안 기도를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 나에게 주신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훌륭한 아이들로 잘 키울 수 있겠는지 저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3년 동안 기도한 끝에 제니가 갑자기 눈이 띄어지는데 어떤 눈이 띄어져요? 길을 걸을 때, 화장실에 들어가 앉았을 때, 샤워를 할 때, 꿈에서 수없이 많은 아이디어가 쏟아지는데 이 아이디어가 너무 너무 많이 쏟아지다보니까 나중에는 도저히 감당을 할 수 없어서 제니가 나한테 보여주는 신구약 성경, 나는 신구약 성경인 줄 알았는데 그게 노트입니다. 너무나 많은 아이디어가 쏟아져서 그걸 받아적다보니까 이런 노트가 집에 몇 권 있대요. 그러면서 나한테 하는 얘기가 “미스타 정, 나도 모르겠어. 난 주일학교 잘 할려고 한번도 노력을 해본 적이 없어. 기도한 것밖에. 그런데 주일학교를 잘 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날마다 소나기처럼 쏟아져 들어오니 그대로 하다보니까 주일학교가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이건 뭘 얘기하는 겁니까? 제니의 완전히 사막을 향해서 가던 자아상이 완전히 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 여학생들 다섯 명으로부터 6개월 들은 그 말, 그 좋은 말들이 제니의 자아상을 뒤집어버린 겁니다. 자아상이 달라지면서 이 제니의 행동과 태도와 얼굴빛이, 사람들과 악수하는 태도, 말하는 게 다 달라진 겁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영적인 눈을 뜨게 됐고, 그리고 이렇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나라의 한 사람 이야기입니다. 이름은 얘기 않겠습니다. 유명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분입니다. 그 분이 아홉 살 때 동네 여자로부터 무슨 말을 들어요? “저 애는 왜 저렇게 빠짝 말라가지고 눈만 땡그레 보기 싫어.” 그 여인으로부터 그 얘기 듣는 순간부터 이 아이는 기가 죽어버립니다. 자기 아버지가 그렇게 훌륭한 목사였는데 이 아이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 기를 못피는 겁니다. 미국 유학을 보냈는데 스물 네살에 미국 유학간 이 아들이 서른 일곱이 되어도 거기서 기를 못피는 겁니다. 다른 한국 학생들은 4년, 5년이면 끝내는 공부를 미국 가서 13년을 발버둥치는데도 안되는 겁니다. 자아상이 병들어버리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될 수가 없죠. 운전수가 되는 쪽으로 끌고가는 게 아니니까, 이 자아상이 그 사람을 성공쪽으로 끌고가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서른 일곱이 되었을 때, 미국 유학간 지 13년이 되었을 때 미국 학생들이 이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하더라는 거죠. 그러면서 공약을 하는 겁니다. 무슨 공약? 칭찬의 공약을 하는 겁니다. 수 개월 동안 이 여학생, 저 여학생, 저 남학생으로부터 들었던 그 좋은 얘기들, 서른 일곱에 수 개월 동안 들은 그 말이 이 자아상을 바꿉니다. 서른 일곱에 자아상이 바꾸어지면서 이 남학생은 제대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마흔에 박사를 따서 한국에 나옵니다. 1961년 이 교수가 한국 나와서 제일 유명한 교수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설교는 하나님이 쓰시는 말입니다. 일반 사람들의 얘기도 우리들한테 이렇게 작용을 하지만 설교 역시 똑같이 우리 교인들에게 이런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작용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 말씀이 생명을 낳는 거니까. 말이 생명을 낳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거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을 가지고 사람들을 키우도록 그런 놀라운 능력을 우리들의 말에 허락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이 하는 설교를 듣고 교인들이 변화가 안일어나는 겁니까? 왜 우리들의 설교를 듣고 교인들의 놀라운 역사가, 치유의 역사가 안일어나는 겁니까?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하는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예를 얘기할까요? 저는 목사님들이 설교하는 그런 것을 비교 연구를 많이 합니다.

 

어떤 한 여인이 춤바람이 나가지고 집을 나갔다가 남편의 용서에 의해서 다시 돌아옵니다. 돌아는 왔는데 가출하는 동안에 자기가 만났던 그런 남자들과 놀아났습니다. 그런데 이 남편은 그 아내를 다시 받아들이면서 교회를 데리고 간 겁니다. 그 교회가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독산동에 있었습니다. 수요일날 처음 그 교회를 데리고 나갔는데 목사님 설교의 요지가 뭐요?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 죄를 지으면 벌받는다. 그러니까 절대로 죄를 짓지 말아달라’고 교인들한테 부탁을 하는 겁니다. 목사님이 간절히 교인들을 사랑해서 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이 설교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이 여자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없는데 나는 무슨 벌을 받을까?’ 그 다음 주일날 이 남편과 함께 이 아내가 그 교회를 참석하는데 주일날 설교 가운데서도 그 얘기는 꼭 들어갑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도록 되어 있다. 죄 짓지 말라고.’ 그때 또 이 여인은 덜컹 가슴이 내려앉습니다. 두 달, 세 달을 이 교회를 다니는데 다닐 때마다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한 두마디는 죄를 지으면 벌받는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이 여인은 어느날 자기 집에서 자기 남편이 출근하고 난 다음에 “어쩌다가 내가 그렇게 큰 죄인이 되었을까? 어쩌다가 내가 그렇게 큰 죄를 저질렀을까?” 가만히 보니까 캬바레 가서 춤추는데 그 제비가 자기를 꼬시려고 “사모님 다리가 참 예쁘게 잘 빠졌다”고 그러더라네요. 그때 넘어가버렸어요. 그 제비의 말에 넘어간 것이 생각나 그때까지는 정신을 차렸는데, 그리고보니까 이 다리가 원수더라네요. 그때부터 이 여인은 다리를 주먹으로 치면서 “이 요사로운 놈의 다리, 뚝 짤라버릴 놈의 다리, 염병할 놈의 다리, 이 놈의 다리만 아니었으면 나는 죄를 안저질렀을 것인데” 그렇게 다리를 두 주일 동안 두드렸는데 이 여인이 얻은 것은 두 주일 새벽에 하반신이 말을 안듣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나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그 벌을 양심으로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목사님이 계속 독촉을 하는 겁니다. 두 주만에 반신불수가 되었는데 이 남편이 그 아내를 치료할려고 발버둥치고 다녀봤는데 안됩니다. 이 하반신마비를 가져온 것은 이 여인이 마음속으로 지은 죄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그러고 있는데 이 여인의 언니가 광명에 있는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광명에 있는 교회의 목사님은 교인들을 그렇게 위해서 기도를 하는데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언니가 이 동생을 데려다가 광명에 있는 목사님의 기도를 받습니다. 그런데 광명에 있는 목사님이 가만히 보니까 마음속에 죄를 지어가지고 결국 이게 왔다는 사실을 알고 광명에 있는 목사님은 설교 요지가 뭐요? 광명에 있는 목사님의 설교 요지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열 번 일곱 번 일흔 번까지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신다’고 그랬어요. 여기에 초점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신통하지요. 여기 두 주, 삼 주 다니는데 그 마비되었던 하반신이 돌아오는 겁니다. 광명에 있는 목사님이나 독산동에 있는 목사님, 양을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독산동에 있는 목사님은 하반신을 마비되게 만들었고, 광명에 있는 목사님은 마비된 하반신을 치료했습니다. 이게 다른 겁니다. 우리가 사명을 가지고 하는 말들 그런 말들이 있지만 어떤 말들은 내 교인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어떤 말들은 내 교인들에게 정말 치유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치유 설교는 어디에 포커스를 둬야 되겠느냐? 어디에다가 초점을 두는 것이 좋겠느냐?

 

첫째로, 용서와 사랑에 초점을 둬야 됩니다. 용서와 사랑에 초점을 둬야 되는데 사람은 어떤 심리를 가지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이런 치유 설교를 하시기 위해서는 인간심리에 대한 깊은 연구가 있어야 되는데 사람은 어떤 심리를 가졌는고 하니, 자기가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죄를 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자기의 죄를 묻지 않아, 자기의 죄 따지지 않아, 그리고는 송두리째 완전히 자기를 받아주어버려, 자기를 용납하고 수용해버려, 그러면 사람은 어떤 역사가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고 하니 내 안에 있는 죄가 완전히 상처가 치유되어버리도록 돼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 만나면 놀랍게도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둘째 아들 탕자가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돌아왔어요? 그런데 그 아버지가 일체 둘째 아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언급이 없습니다. 그리고 송두리째 받아버리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자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설교가 용서와 사랑에 포커스가 주어졌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나느냐? 이건 서울에 있는 어떤 박목사님의 딸 케이스를 보면 잘 알 겁니다. 박목사님의 딸이 중학교 3학년인데 가출을 한 겁니다. 가출을 했는데 2주일만에 그 박목사님의 교회에 서울시경에 근무하는 베테랑 형사가 있는데 그 형사가 수소문해서 이 딸을 지하실 방에서 남학생, 여학생 중학교 학생들이 열 몇 명이 혼숙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찾아서 형사 집사가 데리고 온 겁니다. 그 때 이 목사님이 이 딸을 끌어안고 일체 거기에 대해서 언급이 없이 “네가 돌아와서 너무 좋다. 네가 돌아와서 아빠는 너무 좋다.” 그 딸이 그 아빠 품에 안기더니 한두 달은 괜찮더래요. 두 달인가 지났는데 또 가출했습니다. 또 가출을 해서 그 베테랑 형사 집사를 통해서 그렇게 수소문해서 또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정릉에 어떤 집에. 요즘에 그런 아이들한테 방을 빌려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거기도 혼숙을 하고 있더래요. 거기서 또 찾아옵니다. 그 때도 이 목사님은 저와 함께 자기 딸 얘기를 하면서 절대로 딸한테 “너 왜 그랬냐? 얘야” 그런 말이 없이 끌어안고 이 아버지가 “진아 네가 돌아와서 너무 좋다. 아빠는 네가 돌아와서 너무 좋다.” 아빠가 그렇게 울먹거리며 서 있는데 이 딸이 중학교 3학년짜리가 아빠 품에 안겨서 같이 울더라잖아요.

 

여러분! 그 딸이 지금 어디 있는 줄 아세요? 이대에 유명한 학과입니다. 이대에서 유명한 학생이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두 번째 자기를 받아서 자기가 그렇게 엄청난 짓을 하고 왔는데도 일언반구가 없습니다. “네가 돌아와서 너무 좋다”고 울먹거리는 아빠 밑에서 그 딸은 변화됐습니다. 그 딸을 내가 만나면 지금도 하는 얘기가 자기 아버지만 얘기할 때는 웁니다. 내가 그러고 돌아왔을 때 우리 아버지가 나를 받아줄 때 나는 그 아버지 말을 잊을 수가 없다고. 나는 그 아버지 말을 배반할 수가 없다고.

여러분! 우리의 설교가 이렇게 용서와 사랑에 포커스가 초점이 주어진다면 우리의 교인들은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탕자의 비유만 보면 우리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바로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그 아버지였고, 그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이요, 나는 우리 어머니로부터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저는 이 사랑을 못받았어요. 어머니가 들로 나가버리고 없기 때문에 사랑을 못받아서 그랬는지 어렸을 때부터 국민학교 졸업할 때까지 오줌을 쌌습니다. 그런데 그 오줌이 일주일에 몇 번 싸는게 아니라 날마다 쌉니다.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가 바지를 해 입히는데 나중에는 까만 물을 들여서 입혀버리대요. 오줌을 아무리 싸도 마르면 흔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매일 매일 오줌을 싸는데 나는 그 오줌 싸는 것이 으레껏 일입니다. 아침 이불속에서는 그 오줌에 젖은 바지를 이불속에서 딱 벗어가지고는 부엌으로 통하는 싸립문으로 이렇게 해서 어머니한테 줍니다. 어머니는 까만 가마솥에 밥을 하시느라 이렇게 불을 때고 있는데 내가 그것만 내주면 우리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 부지깽이로 내 젖은 바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솥뚜껑 위에다 딱 올려 놓습니다. 그런데 신통하게 밥이 다 될 즈음 되면 바지가 싹 마릅니다. 그러면 나는 그 바지를 입고 또 학교를 갔습니다. 그런데 그게 1년 365일 계속이 됐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니까 이천 번이 넘도록.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이 서른 여섯이 지나서 깨달은 겁니다.

 

하나님은 구분이 없구나. 한 번이라도 나에게 “이 새끼야, 왜 그렇게 오줌을 싸냐.” 이렇게 꾸짖을 만한데, 얼굴을 찌푸릴만도 한데, 한 번도 그런 예를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을 만난 것은 어머니의 그 미소, 부지깽이로 내 젖은 바지를 받는 모습 덕분입니다.

 

 

두 번째로 저는 집에서 도둑질을 잘 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면화를 했는데 면화를 하면 우리 집에 농사가 꽤 많기 때문에 창고에다 면화를 따서 많이 쌓아둡니다. 그 면화를 팔아서 돈을 만들기 때문에. 그런데 어느날은 내 나이 여덟 살 때던가 동네 어떤 남자가 면화를 가져오면 엿을 준다고 그래서 여덟 살 때 내 생각으로 한나절을 바구니로 면화를 퍼날랐습니다. 그러니까 창고에 면화가 많이 줄어든 겁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십만원어치, 이십만원어치도 넘는 면화를 갖다 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내가 받은 것은 엿 세 가락입니다. 그 엿 세 가락을 맛있게 먹고 집에 왔는데 저녁에 들에서 들어온 우리 어머니가 면화가 확 줄어든 것을 보고 우리 어머니는 곧 아셨습니다. 우리 형은 절대로 그런 짓 안합니다.

 

내가 그렇다는 걸 우리 어머니는 아시고 아무말없이 그날 저녁에 물레를 돌리시면서 방에 누워있는 물레를 돌리시다가 잠들려고 하는 나를 이렇게 흔들어 깨웁니다. “누구 갖다 줬냐? 말해. 엄마가 내일 쌀 갖다주고 바꿔 올께.” 그러면 내가 했다고 하겠어요? 완전히 큰소리 치면서 오리발을 딱 내밀죠. 그러면 어머니는 다시 물레를 돌립니다. 그러다가 잠들만 하면 또 나를 흔들어깨우시면서 “누구 갖다 줬냐? 말만 해. 엄마가 쌀 갖다주고 바꿔 올께.” 하여튼간 다섯 번, 여섯 번, 여덟 번을 잠들만 하면 흔들어 깨우시고, 잠들만 하면 흔들어 깨우시는데 그때마다 저는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하도 귀찮스러우니까 얘기를 한 겁니다. “윤상이 갖다 줬어.” 그리고 나는 잠속으로 빠져들었고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저는 내가 갖다 준 면화가 우리 마루에 소복이 쌓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나한테 한번도 거기에 대해서 말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를 두들겨패든가, 나를 나무라든가, 내 잘못, 그 엄청난 잘못을 전혀 상관하지 않으시고 넘어가시더니, 나를 품어안으시더니 그 사랑이 오늘날 나를 만든 겁니다. 우리의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로 치유 설교는 교인들의 희로애락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데 초점을 맞추면 틀림이 없습니다. 교인들의 마음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어떨 때 완전히 사랑하느냐? 어떨 때에 내 마음에 있는 자아상이, 병든 자아상이, 주눅든 자아상이, 어둠을 향해가고 있던 자아상이 확 돌아서느냐?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날 때, 내 기쁨을 함께 기뻐해주고, 내 슬픔을 함께 슬퍼해주고, 내 아픔을 함께 아파해주는 그런 말을 들을 때, 그런 사람을 만날 때입니다. 목사님이 만일 교인들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공감해주는 그런 설교를 할 수만 있으면 교인들은 틀림없이 살아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미국의 설교자, 치유 설교자 에머슨 포스틱 얘기입니다. 여러분! 에머슨 포스틱은 자유주의 신학자입니다. 어떻게 미국 2억 인구 중에 1억 천칠백만명이 주일마다 자유주의 신학자 에머슨 포스틱의 설교를 들을려고 라디오를 다 켜놓을까요? 믿는 사람이나 안믿는 사람이나 에머슨 포스틱의 설교만 들으면 놀라운 변화를 얻게 되니까, 치유가 일어나니까. 에머슨 포스틱은 그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어떤 아픔을 가지고 있는 어떤 한 사람을 상담했으면 그 사람을 어떻게 내가 그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을 해 줄 것이냐? 거기에다 맞춰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 한 사람의 아픔을 향해서 설교를 쓰다가 보면 그 설교가 미국 전 국민을 울렸다가 웃겼다가 하더라”고. 교인들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교인들이 기뻐하는 것 같으면 설교하는 가운데서 그 기쁨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여러분들이 그렇게 기뻐하니 목사인 나도 이렇게 춤을 출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아프다보니 내 마음이 이렇게 아픕니다.”

 

저는 내 인생을 통해서 가장 큰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설교는 중학교 3학년, 내평생 소원인 사범학교, 그 당시는 중학교 3학년 졸업하면 고등학교 사범학교를 들어갈 수가 있었고 사범학교는 국비여서 돈을 안 내도 됐고 저는 고등학교를 들어갈 수 있는 형편이 못됐기 때문에 중학교 들어가면서 3년을 새벽기도를 다녔습니다. 하루도 안빠지고 새벽기도를 다녔는데 그 새벽기도 제목이 뭐냐? “하나님, 나 꼭 사범학교에 입학하게 해주시고 그리고 국민학교 선생님 되게 해주세요.” 그 교회에서 소문이 났습니다. 어린 것이 새벽기도를 한 번도 안빠진다고. 그런데 저는 교회에서 목사님 설교는 안듣고 앞에 딱 앉아서 이 기도만 하고는 그냥 집에 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건방지다고 그래요. “하나님 나 사범학교에 꼭 입학하게 해주시고 그리고 국민학교 선생님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는 옵니다. 이 기도를 삼 년을 계속하고 사범학교 시험을 봤는데 목포사범학교 시험이 14대 1이었습니다. 저는 사범학교를 떨어졌습니다. 사범학교 떨어지고 난 다음에 3년을 기도하던 그 목적이 무너졌으니 나는 죽을려고,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약한 내가, 빈혈이 있던 내가 죽을려고 그대로 누워서 3일동안을 안 먹고 안 마시는데 이 빈혈기까지 있던 내가 3일동안 안 먹고 안 마시니까 의식이 왔다 갔다 합니다. 의식이 왔다 갔다 하는데 한 번 가면 한 시간도 두 시간도 나는 모르는데 그렇게 되어요. 나는 그렇게 죽을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4일째 되는 날 오후에 의식을 잃었다가 눈을 떴습니다. 눈을 떴는데 어느틈에 연락을 받고 왔는지 그 먼 섬에서 우리 어머니가 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의식이 없는 나를 내려다보고 우는데 몇 시간을 울었는지. “이 새끼야, 이 새끼야, 죽지만 말아라. 살다가 보면 무슨 일 없겠냐? 죽지만 말아라.” 얼마나 울었으면 내 눈물은 없는데 어머니 눈물이 내 얼굴을 적시고 내 베개를 적실 정도였으니까. 그 어머니 모습을 보는데 수건 쓰고 바닷바람에 그을린 못생긴 얼굴, 갑자기 일어나서 어떤 힘이 나는지 그 어머니를 딱 끌어안고 “어머니 나 안죽어.” 그리고는 그냥 우시는 어머니를 방에 놔두고 맨발로 뛰어가서 그 교회에서 데굴데굴 마루를 구르면서 “하나님! 나 사범학교 떨어졌잖아요. 난 죽어야 돼요. 난 죽어야 돼요.”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가 그렇게 우시고, 나는 교회당에서 울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 죽을 줄 알고 외삼촌들한테 가서 사정해 가지고 내가 인문계고등학교를 들어간 겁니다. 그랬기 때문에 오늘 내가 여러분을 만난 겁니다. 내가 그 때 사범학교에 입학해서 국민학교 선생이 되었더라면 나는 그대로 살다가 말았을 겁니다.

 

지금 저는 여러분이야 인정을 하든 말든 대한민국 4천만 명의 선생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살아갑니다. 대한민국 4천만을 나에게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고 교육하라는 사명을 저는 받은 사람입니다. 오늘도 그 일 차원에서 여기에 온 겁니다. 사범학교 떨어져서 죽을려고 했던 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 “이 새끼야, 이 새끼야, 죽지만 말아라. 살다가보면 무슨 일 없겠냐?” 그 우리 어머니의 눈물, 그 표정, 나는 그것이 하나님이 나한테 준 가장 위대한 설교입니다. 내 아픔을 나보다 더 아파하시는 분이 우리 어머니입니다. 내가 기뻤을 때 나보다 더 기뻐하는 분이 우리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보니까, 자기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니까 목사님이 더 좋아합니다. 자기들이 아파하니까 목사님이 더 아파합니다. 그러면서 설교에서 그런 모습들이 나옵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틀림없이 병든 자아상이 건강한 자아상으로 바꿔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병든 자아상이 건강한 자아상으로 바꿔지면서 뭐가 달라지는 겁니까? 하나님은 내편이다. 저는 요즈음에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편이라고 하는 사실. 나는 내가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듣도록 되어 있다고 하는 확신이 있습니다. 어떤 생각만 해도 그 일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나는 그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위대한 설교자 우리 어머니로부터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세 번째로 치유 설교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스토리텔링이어야 합니다. 삶의 얘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됩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요, 우리는 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가장 밀접하게 가장 가깝게 접근시킬 수 있는 하나가 있습니다. 그건 절대로 지식이 아닙니다. 그건 바로 이야기입니다. 삶의 얘기입니다. 여러분들의 설교가 예수를 만나서 살아가는 그래서 변화가 일어나는 그래서 놀라운 삶을 꽃 피우고 있는 그런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가지고 삶의 얘기를 던져보세요. 삶의 얘기를 접할 때 사람들은 곧 달라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가슴에 불이 타도록 되어 있습니다. 강연이나 제 설교가 전부 다 삶의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래요. 저더러 들을 때는 재미있는 것 같은데 들으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학교에서 개학 강연을 할 때라던가 강연을 하면 일부러 저한테 부탁까지 합니다. 어려운 얘기 좀 쓰라고. 저는 하나님 앞에서 어려운 얘기를 절대로 안쓰기로 작정을 한 사람입니다. 왜? 지식의 얘기는 사람을 절대로 치유할 수 없으니까. 삶의 얘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설교가 나갈 수 있을 때 사람은 뒤집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변화가 일어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지식의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어떻게 살았는가? 삶의 얘기로 엮어진 책이 성경입니다.

 

네 번째로 치유 설교는 웃음과 울음이 가미가 될 수 있으면 아주 좋습니다. 웃음과 울음.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치유하기 위해서 가장 특효약을 우리에게 모두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웃음과 눈물입니다. 여러분들 경험하셨지요? 가장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한 번 실컷 울고나면 아니면 실컷 웃고나면 이상한 힘이 생깁니다. 저는 미국에서 이런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사람을 계속 웃깁니다. 이상하대요. 웃기면 나중에 가서는 울어버리대요. 웃음과 울음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그런데 많이 웃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끄떡없이 그 어려움을 극복해나갈 수 있는 힘을 갖습니다. 어떻게 재미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데 웃으란 말이냐? 안웃으면 손해입니다. 웃음을 만들어서라도 웃으세요. 그런 측면에서 나는 우리 목사님들에게 작년에도 부탁했지만 금년에도 똑같은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치유 설교를 하실려면 유머를 많이 알고 있어야 됩니다. 성경도 많이 읽어야 되지만 재미있는 유머책도 많이 읽어서 수첩에다 꼭 적으세요. 그리고 설교에다 활용을 한 번 해보세요. 저처럼 꿔다놓은 보릿자루도, 말을 못하는 사람도 요즘은 웃길 자신이 있습니다. 왜? 내 실수, 내 약점, 내 잘못된 얘기를 하면 웃대요. 설교를 하면서 거기에 적합한 얘기를 섞어가면서 얘기를 하는 겁니다.

 

미국에서 조사한 겁니다. 한 달에 두 번만 교인들을 웃기면 설교에서 두 번만 웃기면 그 교인들은 절대로 분열을 않습니다. 싸움을 않습니다. 우리 속담에 무슨 말이 있어요?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 이 얘기는 무슨 얘기인고 하니 상대방이 나를 향해서 웃는 순간에 상대방의 웃음이 내 마음에 독기를 빼버립니다. 이상은 하나님이 우리들의 웃음을 통해서 상대방의 독기를 제거시켜버리는 겁니다. 이건 뭐예요? 치유해버리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면서 교인들을 웃길 수만 있다면 그건 우리가 철저하게 훈련을 받아야 됩니다. 아니면 교인들을 울릴 수만 있다면 그건 엄청난 치유의 효과가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치유 설교, 내 마음을 알아주고 목사님의 설교에서 내가 울고 목사님의 설교가 사랑과 용서에 포커스가 주어져 있을 때 교인들 안에서 어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느냐? 미국에서의 조사입니다. 여러분, 보통사람이 완전히 절망적인 사람, 맥이 풀려버린 사람, 그런 사람은 저항력도 떨어집니다. 저항력도 떨어지는데 병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조금만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그냥 죽습니다. 저항력이 완전히 다운됐을 때 그 사람들 안에 원자가 있고 원자 가운데 핵이 들어 있고 가에 전자세포가 돌아가는데 이 돌아가는 회전 수가 50사이클로 떨어집니다. 완전히 50사이클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아무리 젊은이건 나이가 많건 상관없이 그걸 뭐라 그러느냐? 걸어 다니는 시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 어떤 자극을 받아서 죽어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이런 50사이클 밖에 안되는 걸어 다니는 시체가 신통하네요. 예배에 참석을 시켜가지고 목사님의 설교가 은혜가 있네요. 용서와 사랑이 강조가 되네요. 그리고 자기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공감을 해주네요. 그러면 입에서 무슨 얘기가 나와요? 좀 더 있으면 ‘아멘’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아멘’이라는 얘기가 겉으로 못나오면 ‘아! 저거야.’ 그리고 가슴이 찡합니다. 그러는 순간에 50사이클이 어떻게 올라가요? 100사이클로 딱 올라섭니다. 두 번만 “아멘!” 그러면 150, 세 번만 “주여!” 그러면 200. 한 번 설교가 지속되는 동안에 계속 가슴으로 뜨거움을 느낍니다. 자기가 가슴이 찡하는 저 목사님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어떤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때 이게 몇 번을 계속해서 300사이클, 400사이클로 올라갑니다. 그렇게 되면 300사이클, 400사이클만 되면 그 사람은 어떤 충격이 와도 안죽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예배에 들어와서 목사님의 설교를 한 번 듣는 동안에 은혜만 받으면 그 사람은 벌써 300사이클, 400사이클이 되어 가지고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좋은 설교는 죽음을 삶으로 바꾸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교회에서 주일마다 그런 역사가 일어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좋은 예가 있습니다. 대학총장과 교무처장이 둘이 여름에 회를 먹고 총장이 죽었잖아요. 총장이 죽었는데 왜 죽었는가? 총장 위속을 해부해 보니까 비브리오균이 너무 센 균이 들어와가지고 네 시간만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회를 먹었는데 교무처장은 안죽었습니다. 교무처장 위속에서 이걸 빼봤더니 비브리오균이 교무처장 위속에서는 다 죽어 있습니다. 총장은 총장이 죽고 비브리오균이 완전히 살아서 난리인데 교무처장 위속에서는 비브리오균이 죽어 있습니다. 그래서 왜 이러느냐? 똑같은 비브리오균인데, 사람을 죽이는 균인데, 둘이 다 한 교회에 다닙니다. 둘이 다 한 교회에 다니는데 총장은 나이롱 집사입니다. 자기 마누라 손에 이끌려서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때 겨우 연말연시나 한 두어번 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무처장은 너무 너무 독실한 신자입니다. 새벽마다 봉고 몰고 노인들 태워나르는, 그렇게 바쁜 사람이 그 가정에 가보면 찬양과 감사가 끊이질 않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교무처장 위속에서는 이 세포회전수가 언제나 700, 800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병균이 들어와도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병균이 들어와서 죽어버립니다. 그런데 총장 위속에서는 언제나 50사이클입니다. 왜? 밤낮 미움과 시기와 질투 속에서 사니까.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목사님의 은혜스러운 설교를 들을 때 벌써 그 순간에 사이클이 올라가는 겁니다. 그 순간에 죽음이 삶으로 바꿔지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죽음의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입니까? 나는 여러분들의 교회에서 이런 놀라운 치유 설교가 계속 지속될 수만 있다면 아마 점점 뭐가 장사가 안되느냐? 병원과 약국이 장사가 안될 겁니다. 온 교회들이 다 이렇게 치유해버리니까. 가장 큰 치유는 바로 우리들의 자아상을 회전수를 바꿔주는 그런 치유니까. 나는 여러분들의 교회에서 그런 역사가 꼭 일어날 것을 믿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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