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진여의 용대
『대승기신론』 용대(用大)
진여의 작용이란 이른바 모든 부처와 여래가
본래 인지(因地)에 있을 때 대자비를 일으켜
모든 바라밀을 닦아서 중생을 섭수해 교화하며,
대 서원을 세워 끝까지 도탈시켜
중생계를 평등하게 하려고 하며,
또한 겁수를 한정하지 않고 미래에 다하는 것이다.
일체 중생을 취하여 자기 몸과 같이 하기 때문이며,
그러면서도 중생이라는 상을 취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슨 뜻에 의해서인가?
일체 중생과 더불어 자기의 몸이 진여로서 평등하여
별다름이 없는 줄을 여실히 앎을 일컫는 것이다.
이와 같은 대방편의 지혜가 있음으로
무명을 제멸하고 본래의 법신을 보아서
자연히 부사의업의 갖ㅈ가지 작용이 있는 것이니
곧 진여와 같이 평등하게 일체 처에 두루 하게 된다.
또 작용의 모습은 얻을 만한 것이 없으니 왜 그러한가?
말하자면 모든 부처와 여래는 오직 법신지상의 몸이며,
제일의제로서 세제(世諦)의 경계가 없으니
베풀고 지음을 떠났으나, 단지 중생의 견문을 따라서
이익 되게 하기 때문에 작용[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해설】 용대는 광명의 물결
진여인 체대는 자연히 상대를 나타내어 시방에서
무연자비(無緣慈悲)로 중생을 섭수하여 교화한다.
중생이 헤아릴 수 없는 갖가지 업으로 작용하여
시방에 두루 하며 일체 중생을 이익 되도록 한다.
진여의 작용은 일체 처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니 용대(用大)라고 이름한다.
용대는 광명의 바다[상대]에서 작용하는 광명의 물결이다.
광명의 물결은 여래의 분신인 십지보살이 보인다.
나와 남의 성품이 진여로서 평등함을 깨달았으니
나와 남을 분별하지 않고 작용하는 모습도 없다.
일체법이 공성이어서 경계도 없고 행함도 없으나
중생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들을 따라서
의혹을 해소하고 몸과 마음의 즐거움을 얻는다.
진여는 의도적 작용은 없지만 중생이 이익을 얻기 때문에
진여의 작용, 광명의 물결[아미타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찬탄】 용대(用大)
진여는 자연히 무량한 공덕을 나타내어 갖가지 부사의한 업을 짓지만
대상도 없고 작용도 없고 행함도 없다.
여래의 분신인 십지보살의 행을 따라
중생이 이익을 얻기 때문에
용대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광명의 물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4) 진여의 두 가지 작용
『대승기신론』 「1. 분별사식에 의해 본다」
이 [진여의] 작용[用]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분별사식(分別事識)에 의한 것이니,
범부와 이승(二乘)의 마음으로 보는 바를
응신(應身)이라고 이름한다.
이는 전식(轉識)의 나타남인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보고
색의 분제(分齊)를 취하여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설】 범부와 이승은 응신을 본다.
진여가 부사의한 업용[用大]으로 작용하여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데에 둘이 있다.
첫 번째는 현상을 분별하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부와 이승(二乘)은 응신(應身)을 본다.
응신이란 생명계를 육도이 차별상으로 보는 것이며,
부처도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갖춘 이로만 생각한다.
이들은 바깥의 경계가 자신의 마음[轉識]이
나타난 것인줄을 알지 못하고 마음 밖에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일체 법을 분별한다.
사물도 명색(名色)들을 나누어 구별하고 집착하니
보신은 나누어진 경계[분제]가 없는 줄을 알지 못한다.
그러하지만 범부와 이승도 선악을 분별하여
선업을 짓게 되면 이익이 없지도 않을 것이다.
『대승기신론』 「2. 업식의 뜻을 알아 불신을 본다」
두 번째는 업식(業識: 無明業相)에 의한다는 것이니,
모든 보살의 초발의[초발심]부터
보살의 구경지에 이르기까지의 마음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신(報身)이라고 이름한다.
몸에 무량한 색(色)이 있고, 색에 무량한 상(相)이 있고,
상에 무량한 호(好)가 있으며,
머무는바 의과[기세계]도 무량한 갖가지 장엄이 있다.
곳에 따라 나타내 보이면서 끝이 없고,
다함이 없어서 분제의 모습을 떠났지만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항상 머물러 지키고 있으며
훼손하지도 않고 잃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공덕은
모두 모든 바라밀 등 무루의 행훈(行薰) 및
[진여의] 부사의훈(不思議薰)에 의하여 성취된 바이며,
무량한 낙상(樂相)을 구족하기 때문에 보신이라고 설한다.
※ 모든 바라밀: 반야바라밀 ㆍ 육바라밀 ㆍ 십바라밀
【해설】 십해이상의 보살은 보신을 조금 본다.
"업식에 의한다"는 것은 경계상은 업식에 의하여 나타난다는
뜻을 알기 때문에 삼매 중에 불신(佛身)을 본다는 것이다.
논에서는 초발심보살부터 보신을 본다고 설하였으나
십해 이상의 보살이면 보신을 완전하게 본다는 뜻이 아니다.
십해 이상[地前菩薩]은 오직 일심뿐이며 바깥 경계가 없으나
업식에 의해 나타나는 줄을 알지만 지상보살이 아니기 때문에
경계상에 그친[止] 삼매 중에 보신(報身)을 조금 본다.
"보신을 조금 본다"는 것은 상사각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보신을 조금 본다는 것은 십지보살의 행을 보는 것이며,
이를 광명의 바다가 아닌 광명의 물결이라고 말하였다.
십지보살은 여래의 분신이기 때문에 그 보살행을
광명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물결에 비유한 것이다.
"보신"이란 몸에 무량한 색(色)이 있고,
색에 무량한 상(相)이 있고, 상에 무량한 호(好)가 있으며,
머무는 바의 세계도 무량한 장엄이 있으나
서로 훼손하지도 않고 잃지도 않는다.
모든 사물은 연결되어 광명의 바다룰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공덕은 갖가지 수행의 과보로 성취된 것이며
무량한 낙상(樂相)을 구족하기 때문에 보신이라고 한다.
무량한 낙상을 보인 것이 여래의 보신을 보는 것이요
보신을 보는 것은 광명의 바다인 여래를 보는 것이다.
낙상(樂相)은 '즐거운 모습' 또는 '경계가 즐거움'이다.
안락(安樂)은 안심락상(安心樂相)의 준말이니,
'마음이 편안하고 경계가 즐겁다'는 뜻이다.
『아미타경』에서 "중생들은 갖가지 괴로움이 없고
단지 모든 즐거움만을 받는다"라고 설하신 것과 같다.
『대승기신론』 「범부의 경계」
또 범부가 보는 바의 추색[거친모습]이니
육도를 따라서 각기 보는 것이 같지 않아서
[육도의 중생이 實在로서] 갖가지 다른 종류이며,
낙상을 느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응신이라고 설한다.
【해설】 범부는 경계가 즐겁지 않다.
범부는 이름지어진 사물들을 분별하고 집착한다.
범부의 의식에는 육도의 차별상이 있어서
업식에 따라 악도와 선도를 보니 경계가 즐겁지 않다.
이를 '거친 모습'이라고 부르고 '응신'을 본다고 말한다.
범부는 낙상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경계가 즐겁지 않다.
『대승기신론』 「초발의보살의 경계」
또 초발의보살[초발심보살] 등이 보는 바는
진여의 법을 깊이 믿기 때문에 [非有非無를 깊이 믿기 떄문에]
조금이나마 보신을 보아서 저 색상과 장엄 등의 현상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어서 분제를 떠났으며,
오직 마음에 의해 나타날 뿐
진여를 떠나지 않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살은 지금도 역시 스스로 분별하니
아직 법신의 지위에 들어가지 못한 때문이다.
만약 청정한 마음을 얻는다면 보는 바가 미묘하고
그 작용이 점점 수승하며 내지 보살지가 다하면
[보신을] 보는 것이 끝나게 된다.
만약 업식을 떠나면 보는 상이 없어지는 것이니
모든 부처의 법신은
피차의 색상을 서로 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해설】 초발심보살은 즐겁다.
초발심 정도의 보살들은 일체의 경계는 본성이
지녀로서 평등함을 깊이 믿기 때문에 정토의 색상과
장엄한 모습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안다.
그러므로 보신을 적은 부분이나마 보게 되며
보신을 보는 것은 여래의 몸을 보는 것이다.
즐거운 모습인 낙상(樂相)을 보게 되니 즐거움을 얻는다.
보신을 온전히 보지 못하는 것은 경계를 분별하기 때문이다.
법신에 들어가면 경계가 없으니 낙상도 없지만
중생에게 난상을 보이는 것은 부사의(不思議)한 업용이다.
법신에 들어가면 경계가 없으니 대상도 없지만
중생을 끝없이 교화하는 것은 여래의 부사의한 업용이다.
【해설 보충】 허무론자와 염불의 관찰문
진여는 만물에 가득한 진실한 성품이니 원성실상(圓成實相[또는 性])이다.
만물은 진여가 인연으로 화합한 현상이니 의타기상(依他起[緣起]相)이다.
범부는 공성의 경계에 이름을 지어 분별하고 집착하는 모습인 변계소집상
(遍計所執相)을 보고 실상이 있다고 인식한다. 이것만 버려야 하는데, 공 ㆍ
무의 뜻을 잘못 알아 연기의 현상과 실상까지 버리고 "일체가 허망하다"라고
말하면, 공을 나쁘게 취하는[惡取空] 허무론자다. 염불의 관찰문은 진여가
자연히 연기한 현상계를 광명의 바다, 광명의 물결, 은혜의 물결로 관한다.
그러므로 일체의 존재는 즐거운 모습[樂相]이요, 존귀한 모습들이다.
-188쪽-
첫댓글 감사합니다
일체경계 본래일심
일체가 아미타불의 화신이다
모든 인연의 은혜에 감사하고 회향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지용보살마하살()()()
보신이란 몸에 무량한 색이 있고
색에 무량한 상이 있고 상에 무량한 호가 있으며
머무는 바의 세계도 무량한 장엄이 있으나
서로 훼손되지 않고 잃지도 않는다
일심 광명 화신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관찰문 해설]
3) 진여의 용대
4) 진여의 두 가지 작용
甘露華n님 감사합니다.^ㅡ^
일심 광명 화신 아미타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