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최초의 교회는 욕지도, 동항리교회(일명 '논골'교회, 1902년 설립, 참고자료 한산신문 서상록 선교사의 시리즈기사 참조)
두번째 설립된 교회는 충무교회(구. '대화정'교회, 1905년 설립, 참고자료. 통영문화원 자료 및 충무교회 100년사 기록 참조)
세번째 설립된 교회는 미수교회(초대 하강진 영수가 1907년 충무교회의 집회 참석하여 '마포원선교사(아담슨 선교사로 추정)'의 전도를 받고 감명을 받은 후 미우지(현 미수동)자택에 십자가 표식을 세워서 설립, 미수교회 당회록 참조) 입니다.
나의 외조모인 황재순 집사님의 여동생 되신 황또순 ('타스만의 파도' 저자인 김건일 목사의 모친) 이모 할머니는
통영시 동충(항남동)에서 최덕지 선생님과 함께 재건교회를 시작하고 마지막까지 그 터를 지키다가
노년에 통영시 북신동에서 소천하셨습니다.
재건교회를 마지막까지 지키다가 교회재산권을 유지못하셔서 이사를 해야만 했던 안타까운 이야기는 가슴에 묻고 있습니다.
이모할머니께서 먼저 통영에서 믿음을 받아들이고,
저의 외할머니께서도 사량도에서 읍덕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셨으며,
그 믿음이 저의 어머니 차정분 권사님(미수교회 은퇴)로 전해졌고, 어린 저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외할머니는 이후에 사량도를 벗어나서 통영으로 이사 온 후,
도천교회에 출석하시다가 소천하셨습니다.
어릴때, 어머니를 따라서 동충에 위치한 재건교회를 방문할때는 참 이상한 느낌이었습니다.
운동장이 있는 학교처럼 생긴 교회가 신기했었지요!
방문할때마다 교장선생님 같은역할을 했던
이모할머니의 설교같은 훈화를 한참이나 들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교회용도로도 사용되었던 이 건물의 이름이 '동부유치원'이었습니다.
이모할머니를 만날때마다 개인적인 일상사에 대해서는 처음에 조금 물어보시다가
결국에는 모든 대화에 예수님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대화라기 보다
설교에 더 까까왔습니다.
재건교회 답게 굉장히 율법적이셔서
주일에 버스를 타면 안되고,
무엇인가를 사 먹어도 안되는 엄한 분위기였고
저는 그 가르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미수교회 원로장로님들의 말씀을 옮겨 보자면,
최덕지 선생님은 그 당시에 목사로 호칭받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그냥 선생님으로 불렀답니다.
여자가 교회에서 그렇게 인정받지 못하던 시기였지요!
미수교회 원로장로이신 하창근 장로님의 모친과 고모께서도 최덕지 선생님과 같이
진명학당(충무교회가 자리한 곳에 세워졌던 근대학교: 한산신문 기사 및 통영문화원 자료, 충무교회 100년사 자료 참조)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40일 금식기도를 시작하면 출정식을 하고 삼계탕을 먹고 갔다고 합니다.
한국교회 대부분이 신사참배를 정당화 하는 발표를 하던 시대에
재건교회는 신사참배를 반대했었고,
재건교회에서는 신사참배에 참여 하는 교회들을 향해서 '마귀단'이라고 호칭하여
일제에 굴복한 교단들을 호되게 나무랐다고 합니다.
*(현재의 경남노회는 충무, 통영, 거제시찰만 남아 있는 초라한 규모이지만,
당시의 경남노회는 부산, 울산, 경남을 모두 관할 하는 이름 그대로의 큰 노회규모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신사참배에 대하여 결사저항하였고 지금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교단으로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020년 현재의 경남노회는 그 동안 여러 교단, 경상노회, 동노회, 경남노회...등으로 분리되어 규모가 통영, 거제, 충무 시찰 3곳 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후에 재건교회는 너무 율법적이라서 이후에 고신교단으로 분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최덕지목사님에 대한 좋은 자료가 있어서 아래에 첨부합니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9ePL&articleno=16848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