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제의 관계
동북군벌 장작림과 일제의 협정이 대한독립군*17의 러시아 행을 촉구했다
지금까지는 연해주 한인빨치산이 자유시로 모이게 되는 소비에트러시아와 일본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다음은 서북간도의 한인독립군부대가 자유시로 이동해갈 수밖에 없었던 중국의 상황과 일본의 관계를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도 아편전쟁을 겪으면서 열강의 침략에 시달렸다. 남경조약이후로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 다른 서양 열국들과 불평등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두만강과 압록강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만주 땅에 1860년대부터 조선인이 불법 이주를 시작하여 한인촌을 형성하였다. 1881년에는 간도지역의 봉금*18이 해제되었고 1885년부터는 조선인의 이주의 자유가 허용되어 많은 조선인들이 살 길을 찾아 만주로 대이동을 하였다.
1895년 4월 청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일본과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으며 그 대가로 자국 예산의 2년 반 분에 해당하는 거액을 전쟁비로 부담하게 되었고 요동반도와 타이완, 팽호섬을 양도해야 했다. 그러나 요동반도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으로 반환을 받았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은 동북아 종주국의 자리를 일본에게 내주었으며 조선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잃었다. 20기에 초반에 일본과 러시아는 4차례의 러일협약으로 만주를 양분해서 이권을 차지하기로 약속하였다.
일본은 1907년 여름에 만주 대륙에 침략의 발판을 만들기 위하여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설치하며 간도는 조선의 땅이므로 간도의 조선인 보호를 하기 위해서 설치한다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2년 후에는 영사관 설치와 길회선철도 부설권을 비롯하여 안봉철도 개설, 무순과 연대의 탄광 문제 등등으로 ⌜간도협약⌟을 맺어 각종 이권을 취하면서 자기들 멋대로 간도를 중국 땅으로 인정하였다.
1910년 ⌜한일늑탈⌟ 후로 독립운동에 뜻을 둔 많은 지사들이 대대적으로 이동하게 되어 만주는 본의 아니게 한인독립군으로 인하여 청나라와 일본의 충돌의 장이 되었다.
1911년 쓰촨폭동과 우창봉기로 중화민국 군정부가 설립되어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손문은 임시 대총통이 되어 남경정부를 수립하였다. 혁명군 토벌전권을 위임받았던 원세개는 청나라 황제를 퇴임시키는 조건으로 손문으로부터 대총통의 자리를 양보 받았다. 혁명파의 혁명동맹회 후신으로 국민당이 탄생하였고 1913년 총선에서 손문이 이끄는 국민당이 제 1당이 되었으나 원세개에 의하여 해산되었다. 원세개의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서 국민당 주도의 제 2혁명이 시작되었으나 진압되었다.
일본은 중화민국을 승인하였고 원세개는 대총통으로 취임하였고 이어서 국민당 해산령을 내렸다. 원세개는 중화민국 약법을 공포하였다.
일본은 1914년 8월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의 조차지였던 중국의 교주만을 점령하고 산동성의 독일 이권을 몰수하였다. 1915년 1월에 가토 다카아키 외무대신이 중심이 되어 중국 총통 원세개에게 “5호 21개조”에 달하는 이권을 요구하였다.
주 내용은 독일이 갖고 있는 산동반도 권리를 일본에게 이양, 관동주의 조차기간 연장과 남만주와 내몽고에서 일본의 특수 권익 승인, 일본인에 의한 철도와 광산 경영 인정. 다른 나라에 중국연안이나 도서를 할양하지 않을 것, 정치와 재정, 군사 부분에 일본의 고문을 초빙하고 다수의 일본인 경찰을 채용, 병기 구입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일본의 21개조가 중국에 전달되어 중국인들이 대대적으로 반발할 때 일본은 제 6사단, 제 10사단을 만주로 출병시켰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비난에 직면하여 21개조 교섭이 중단되었다. 일본은 21개조를 일부 수정하여 다시 중국에 제시하며 수락하도록 최후통첩을 하며 제 2함대를 출동시켰고 중국은 국회의 동의 없이 수락하여 5월 25일에 중국과 일본 신조약이 체결되었고 6월 8일에 양국 간에 비준서가 교환되었다.
1915년 12월 원세개가 황제에 추대되어 등극하자, 중국은 원세개의 황제 즉위에 저항하는 반원전쟁을 시작하여 1916년 7월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저항과 전쟁을 통하여 공화제를 사수하였다.
1917년 중국은 간도지역 한국인 경찰권을 일본에게 양도하였다. 손문은 광동군 정부를 수립하였고 1차 세계대전 동맹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918년 3월에 일본은 북경정부의 왕사진 내각을 붕괴시키고 단기서를 국무총리로 복직시켰으며 <중일공동방적군사협정>을 맺어 시베리아내전에 개인하기 위해 중국군 2천 명을 파병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중∙일신조약 21개조 폐기안이 거부되자 중국 대표단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철수하였고 5월 4일에 베이징 지역의 학생들이 시위인 5.4운동이 일어났다. 5.4 운동은 몇 달 동안 전 중국을 휩쓸었다.
중국은 연합국이 일본에게 빼앗긴 청도를 반환해줄 것으로 믿었으나 일본은 중국정부와 청도권리에 대하여 비밀협상을 마쳤고 연합국 역시 독일의 점령지였던 청도에 대한 권리가 일본에게 있다고 보았으며 결국 파리강화회의는 <언젠가는 중국에게 청도를 반환한다>는 문구를 삽입한 채 독일의 권리를 고스란히 일본에게 넘겨주었다. 게다가 중국대표로 파리 강화회의에 파송된 베이징정부와 광동정부 연합팀이 사사건건 다른 입장에 서서 갈등하며 싸웠다. 이에 중국인들의 분노가 폭발하였고 북경지역 학생 2만5천명이 항의 시위를 벌이기로 한 것이다. 전북경학생선언문이 배포되었고 다음날 학생들은 시위에서 돌아오지 못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북양정부는 강경진압으로 일관하였다.
5.4운동의 영향으로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 창설되었으며 중국은 파리강화회의 조인을 거부하였다. 손문은 중화혁명당을 중국 국민당으로 개조하고 진형명과 협력하여 2차 호법운동을 일으켜 북벌을 감행하여 2년에 걸쳐서 전개했으나 진형명의 철회로 실패하였다. 이에 비로소 손문은 국공합작을 구상하게 되었다. 손문의 광동정부는 상해임시정부를 인정하였다.
3.1독립만세운동의 영향으로 간도에 30개가 넘는 무장독립단체가 만들어졌고 그들은 상해임시정부 이동휘 국무총리의 무장투쟁론 지지를 힘입어 왕성하게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1월 간도용정에서 <15만원탈취사건>*19일어나자 일본정부는 북경주재 일본공사를 통하여 동북한인들의 항일투쟁을 엄격히 단속할 것을 베이징정부에 강요하였고 <봉오동전투>가 있은 후, 다시 북경주재 일본공사 오하다는 북경정부 외교총장대리를 회견하고 <봉천, 길림 지방장관으로 하여금 현지 일본영사와 시급히 협력하도록> 압력을 가하라고 요청하였다.
7월 16일 조선주재 일본군 참모장 오노, 관동군 참모장 대리 기시, 군사고문 사이또 등등은 봉천영사관에서 아까쯔까 총영사와 회의를 열고 아까쯔까 총영사가 장작림과 교섭하여 <중국군대 토벌의 길림독군 고문으로 사이또대좌가 동행하며 만약 중국군대가 토벌 시에 원조를 요구하면 일본군대도 참가할 수 있게 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들은 토벌 기한을 2개월로 하고 출동병력을 1개연대로 하면 토벌지역은 간도와 훈춘, 동녕 일대로 할 것을 요구하였다.
길림성 당국은 중국군대를 출동시켜 한인독립군부대를 토벌하기로 하고 일본군의 출병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중국군경들은 토벌에 앞서서 사전에 계획을 미리 누설하여 한인독립군부대들이 사전에 이동하게 하였으며 독립군의 철수를 도와주었다. 이런 정황을 파악한 일제는 중국군대의 토벌이 불령선인*20들을 쫒아내기만 할 뿐이므로 근본적인 토벌을 기대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한인독립군부대의 토벌에 일본이 직접 나서기에 이르렀다.
일제는 간도 출병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왕사해, 만순, 진동 등의 마적을 이용하여 일본 영사관과 상가. 주민들을 살인, 방화케 하는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여론을 몰아서 한인 무장세력에 대한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간도지방불령선인토벌계획서>를 작성하고 10월부터 <경신년대토벌>를 시작하였다.
토벌에 동원된 일본의 병력은 조선주둔군 제19사단의 37,38여단을 주력으로 하여 제 20사단과 시베리아의 블라디보스토크간섭군 제11,13,14 사단 그리고 동북에 있는 관동군 일부가 포함된 2만여 명이었다. 그밖에도 일제는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에 주둔하고 있는 헌병대, 수비대와 경찰들을 출동시켜 두만강 북안 지역을 비롯한 왕청, 훈춘지역의 한인마을들을 초토화하였다.
일제는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설욕을 하기 위해서 민간인들을 대학살하였으며 가옥, 학교, 교회, 곡물들에 불을 질렀다.
상해임정이 발표한 북간도지역 한인참변 조사통계표에 의하면 피살된 사람은 3,664명, 체포는 155명이고 불탄 가옥은 3,520동, 불탄 학교는 59개교, 불탄 교회당은 19개소, 불탄 곡물은 59,970섬에 달했다.
일제는 강력한 세계 여론과 시민들의 항의에 직면한 가운데 중국 정부와 반복적인 교섭을 한 후, 1921년 5월에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연변에 일부 군대를 주둔시키고 일본 경찰을 증가하였다.
청산리전투 또는 동부전선에서 일군과 격전을 치룬 한인무장부대들은 총알이 다 사진되어서 전투를 치룰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21식량과 피복의 문제에 일제의 추격이 겹쳐서 중국 땅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들은 모든 정황을 숙고하여 소비에트러시아의 지원으로 독립전쟁에 참여할 것이라는 일루의 희망을 가지고 러시아행을 택하였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러시아 한인 무장세력 간의 주도권 싸움의 들러리가 되어 자유시참변의 수난과 모멸을 겪어야 했다.
4부로 이어집니다.
3.상해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 그리고 한인사회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