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숲길걷기 오늘의 일정 | |
일시 | 17년 8월 20일(일요일), 2시 |
만남 | 충무로역 (4호선 1번출구 안) |
10분 전 도착요망 | |
거리,시간, | 10km, 4시간 예상 |
난이도(하) | |
진행자 | 도도 010-2208-1970(전화번호) |
진행자 전화번호는 꼭 저장 요망!! | |
걷기코스 | 충무로출발-류성룡집터-박수근집터-백남준기념관 |
준비물 | 간식, 물, 편안한복장 |
준비물은 필요시 재 공지 | |
공동경비 | 뒤풀이 없음 (필요시 1/N) |
필독 | 온누리 숲길 걷기는 비영리 카페로 걷기 진행중에 일어나는 모든 사고에 대해서 카페지기와 진행자는 어떠한 민. 형사상의 법적 책임이 없습니다. |
참가자 스스로 안전에 최대한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
걷기 리딩자 포함 3인 이하일 경우 자동 취소 됩니다. | |
참가예시 | 참가1/동심/하고 싶은말 |
[도보예정코스]
충무로역-서애 류성룡 집터-주자소터-이순신 생가터-성제묘-훈련원터-전태일 다리-박수근집터-동묘(공사중이라 내부관람은 안됨)-동망봉-청룡사-비우당과 자지동천-봉제거리와 박물관-안양암마애불-백남준기념관
1. 서애 류성룡(1542~1607) 집터
(1) 유성룡은 이황의 제자로 성리학의 대가였다. 탁월한 군사 지식으로 무관 이순신을 후원하여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하여 승리로 이끌었으며,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임진왜란 때 겪은 뼈저린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징비록》(국보 제132호)을 저술하였다.
(2)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중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전체에 널리 알려진 인물은 백전백승이라는 이순신 장군과 전시재상(戰時宰相)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이 유일하다.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懲毖錄)이 그의 사후 중국, 일본에서 모두 출간돼 18세기 베스트셀러로 유명세를 탔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징비록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함께 중요한 사료로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돼있으며 사료로도 많이 쓰인다. 일본에서는 전시재상의 표본으로 알려져있으며 전반적으로 전무후무한 국가 위기를 맞아 슬기로운 대처로 난국을 극복한 명재상으로 평가받는다.
전쟁 전 류성룡은 전시재상보다는 천재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의 아들로 경상북도 의성 태생이다. 어린시절에 서울로 올라와 지낸 적이 있으며 이때 이순신 장군과는 동네친구로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도 충무로에 가면 '서애길'이라는 길이 있고 그곳에 류성룡의 집터라는 표석이 있다.
이후 안동으로 옮겨 살면서 20대에 퇴계 이황 선생의 제자로 들어갔다. 책을 읽을 때 한 번 눈을 스치면 환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을 정도로 머리가 좋아 이황의 수제자로 명망이 높았다. 이황도 "이 사람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며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1566년 명종 때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 여러 내직을 거쳤으며 이후 선조가 즉위하자 중용돼 총애를 받으며 꽤나 순탄한 관직 코스를 밟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선조의 즉위와 함께 갓 집권한 사림파가 다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지는 시기였고, 류성룡도 여기에 휩쓸리게 되었는데 그는 상대적으로 이황과 조식의 제자가 많았던 동인에 속했다.
이후 정여립의 난과 관련한 기축옥사(己丑獄事)와 그와 관련한 당쟁의 소용돌이를 거치면서도 원만한 처신과 선조의 비호 속에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관직생활을 이어갔다. 임진왜란 직전에는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의 영수 정철이 실각하자 이후 서인에 대한 처우를 두고 동인이 이산해, 정인홍이 이끄는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 남인으로 갈라지면서 류성룡이 남인의 영수가 됐다.
한 당파의 영수로 불리긴 했으나 실제로 파벌싸움을 극심히 했던 인물로 분류되진 않는다. 실리적이고 온건한 일처리로 유명했으며 또한 업무 능력이 매우 훌륭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류성룡은 속이려고 해도 도저히 속일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명석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야사에 따르면 상주목사 시절, 한양에서 손님이 찾아와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때마침 고을에 복잡한 송사가 일어났고 조정에 보낼 공문을 급히 작성해야 할 일이 겹쳤다. 그러나 류성룡은 전혀 당황한 기색없이 송사의 판결문과 조정에 보낼 공문을 구두로 작성하면서 손님과의 바둑도 계속둬서 바둑을 이겼다. 또한 송사 판결문과 조정에 보낼 공문에는 한 치의 실수도 없었다고 한다. 일상업무를 제외하고도 거의 모든 분야에서 천재로 알려졌었는데 천문과 점술에도 능했고 의술에도 뛰어나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과 의술에 대해 논하고 조언을 해줄 정도로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특히 바둑은 중국에서도 소문날 정도로 고수였다고 한다. 조선에 원군 대장으로 파병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선조가 바둑을 둘 때 선조를 위해 양산을 받치고 거기에 구멍을 내어 구멍 틈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선조에게 훈수를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이 대국에서 류성룡은 선조와 이여송 장군의 체면을 둘다 살려주기 위해 일부러 비기게 훈수를 뒀다고 전해진다.
이순신 장군과의 우정 또한 매우 각별했다 전해지는데 두 사람이 서신 교환을 자주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심지어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꿈에서 류성룡이 자주 나타났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아주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난중일기에서 하루는 충무공에게 류성룡이 사망했다는 오보가 전해진 일이 있었는데 이때 충무공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점까지 쳐보며 류성룡의 안위를 걱정했다고 나온다.
또한 이순신 장군에게 여러 병법서를 보내주고 작전 등에 대해 서로 토론을 나눴던 것으로 보인다. 주로 중국의 여러 병법서들을 류성룡이 정리해서 보내준 것으로 추정되며 이것으로 보아 군사적 지식에도 꽤 전문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남긴 징비록에서도 임진왜란 도중 각 전투와 장수들의 전략에 대한 평가, 군제 운영이나 향후 국방 방안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보면 상당한 군사지식을 갖췄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년 그 사람들] ⑩류성룡, 징비록을 남기고 간 풍운의 '전시재상'
최종수정 2016.12.21 14:27 기사입력 2016.12.11 08:12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2. 주자소터
조선시대 활자를 주조하여 책을 찍어내는 업무를 담당하는 관청으로 태종3년(1403년)부터 정조 24년(1800)까지 금속활자를 부어 만들었다. 지금도 충무로 일대에 인쇄소와 출판사가 많은 것은 오랜 전통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3. 이순신 생가터
......그가 뒤에 명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에 어머니 변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었다. 변씨는 현모로서 아들들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다.
그는 위로 희신(羲臣)·요신(堯臣)의 두 형과 아우 우신(禹臣)이 있어 모두 4형제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臣)자 위에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 복희씨(伏羲氏)·요(堯)·순(舜)·우(禹)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 것이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하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그의 문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發身)하려 하였다.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순신 [李舜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성제묘 : 사립 관우장군 사당.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호
성제묘는 관성제군(關聖帝君), 즉 관우의 혼을 모시는 신당이다.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것은 일종의 장군신앙이라 할 수 있는데, 장군신앙은 호국을 위해 충정을 다하다 억울하게 죽은 장군이나 큰 업적을 남긴 대장군을 섬기는 민간신앙이다.
우리나라에서 관우를 신으로 모신 것은 임진왜란 이후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관우 장군신의 도움으로 왜구를 물리쳤다고 믿는 명나라 장수가 관우의 신당을 세운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성제묘는 국가에서 세운 관우의 사당인 동묘나 남묘와는 달리 민간 차원에서 세워진 사당이다. 성제묘는 정면 1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한 건물이다. 건물 안의 정면에는 관우 부부상이 화려한 닫집 안에 걸려있다.
5. 훈련원터 : 이순신장군 무과 시험장
1392년(태조 원년)~1894년(고종31년)까지 군사의 무예훈련, 병법 교습과 무과 과거 시험을 맡아보던 관아자리.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곳에서 별과 시험을 볼 때 말을 달리다 낙마하여 왼쪽 다리의 골절상을 당하였으나 다시 일어나 나무껍질로 묶은 다음 말을 다시 타고 달려서 등과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6. 전태일 다리: 노동운동의 발화지
(1) 서울 청계천에 전태일 기념관 생긴다.
평화시장 인근 청계천변에 노동 관련 시설을 집약한 ‘전태일 노동복합시설‘이 생긴다.
17일 서울시는 청계천 수표교 인근에 있는 5층짜리 건물을 리모델링해 내년 중 ‘전태일 노동복합시설‘을 개관한다고 밝혔다. 전태일 동상이 있는 평화시장 앞 ‘전태일 다리‘와 걸어서 10분 거리다.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은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노동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1970년 스물세 살의 나이에 분신했다.
‘전태일 노동복합시설‘에는 열악했던 노동환경을 고스란히 기록한 전태일의 글과 유품을 전시하는 기념관이 들어선다. 전태일 기념관이 별도로 생긴 건 이번이 처음이다.
1층에는 퀵서비스·대리운전기사 등이 이용할 수 있는 이동노동자 쉼터가, 3층에는 교육장·시민 편의공간이 생긴다. 4층에는 노동단체가 공유하는 업무공간과 비정규직 근로자 건강증진센터가, 5층에는 노동권익센터·감정노동권리보호센터·청년아르바이트권리보호센터가 들어선다
<김제관 기자 입력 : 2017.07.17. ⓒ 매일경제 & mk.co.kr>
(2)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분신 35주년…우린 그의 ‘미싱소리’를 자꾸 잊는다
인간의 인간다운 세상을 위하여 산화한 아름답고 거룩한 영혼.’(전태일 다리위 동판에 새긴 소설가 조정래씨의 글 중에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분신 35주년을 이틀 앞둔 11일. 전태일기념사업회 황만호 사무국장과 함께 전태일의 삶이 묻어있는 평화시장과 청계천 일대를 찾아나섰다. 복원된 청계천과 산뜻하게 단장한 평화시장의 외관에선 암울했던 35년전 상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1970년 11월13일 오후1시30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했던 청계천 6가 평화시장. 35년의 세월속에 칙칙했던 외관은 온데간데없고, 패션의류상가라는 현수막과 함께 35년전과 똑같은 평화시장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현대적인 건물이 그 곳을 대신하고 있었다. 건물 가득히 들어차있던 봉제공장들은 소규모 패션 의류상가와 지퍼상가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근로기준법을 알리기 위해 전태일이 분주하게 지나다녔던 이른바 ‘구름다리(평화시장 2개동을 잇는 다리)’는 비를 막을 수 있는 현대적인 유리 덮개가 씌워져 ‘노동의 통로’가 아닌 ‘패션의 통로’로 변신해 있었다.
평화시장을 나와 전태일 다리(버들다리)위에서 또 다시 전태일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반신상속의 전태일은 아직도 그날의 눈빛으로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리 위 중간에 설치된 석판은 ‘전태일. 그의 죽음으로 가장 위대한 노동이 태어났다. 전태일, 그의 이름은 희망’이라고 전태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태일 다리와 좌우인도를 가득메운 4000개의 동판. 전태일을 기억하는 시민들이 관심과 애정이 새겨져 있었다. 소설가 황석영씨는 “그의 죽음은 문학의 출발점”이라고 평가했고,또 다른 이는 “함께 싸웁시다”며 전태일의 정신을 새겨넣었다.
전태일 다리를 빠져 나오면 한3층 건물의 2층에 있는 대명커피숖(옛 대명다방)을 발견하게 된다. 전태일의 또 다른 흔적이 묻어있는 장소다. 황 국장은 “전태일이 청계천 피복노동조합 동지들을 규합하던 장소”라며 “이곳에서 바로 이곳에서 전태일은 ‘동지’를 규합하고 투쟁의 의지를 다졌다”고 설명했다.
청계천 주변에는 전태일의 1970년대를 사는 소규모 봉제공장과 미싱노동자가 여전히 존재한다. 또 거리 곳곳에는 객공 및 하급을 구한다는 벽보가 어지럽게 붙 어있다. 35년이 지난 2005년. 미싱소리는 아직도 들린다. 그러나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노력하는 것이 인생’이라던 22살 전태일 흔적이 남아 있는 청계천 6가는 ‘패션’과 ‘창조’의 거리로 살아 숨쉬고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허윤 기자 yoon@kmib.co.kr 기사입력 2005-11-11 17:28 | 최종수정 2005-11-11 17:28>
(3) <비가 되어 청계천에 부활한 전태일>
[현장] 전태일 기념상 제막식... 이소선 여사 "태일이 내 품에 온 듯"
"오늘 청계천에 다시 태어나는 전태일이 불이 아닌 비로 와서 더 감격스럽다. 이제 전태일은 '분신 자살'의 이미지에서 우리의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오게 됐다."
시인 김정환씨의 말이다. 30일 오후 4시 '전태일거리ㆍ다리 조성 및 기념상 제막식'을 찾은 김씨는 기획단계부터 '전태일거리·다리만들기'에 참가해 왔다.
제막식은 '전태일 다리'로 명명된 청계천 버들다리 위에서 열렸다. 이 다리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전 열사가 몸을 불살랐던 평화시장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이날 제막식이 진행된 1시간 동안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30여명의 취재진을 포함한 100여명의 시민들은 모두 내리는 비를 불평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뜨거운 불로 태웠던 열사였기에 이날 내린 빗줄기는 오히려 뜨거움을 식힐 수 있는 반가운 손님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비를 맞으며 제막식은 시작됐다. 이날 제막식엔 전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김동완 전태일기념관건립추진위 상임대표, 전태일거리 동판 및 기념상을 제작한 임옥상 화백,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정태근 서울시 정무부시장, 사회운동가 장기표씨 등 30여명의 인사들이 참가했다.
김동완 상임대표는 "35년 전 11월 13일 이곳에서 분신한 전태일이 오늘 평화와 사랑의 진정한 매개로 부활했다"고 감격스러워 했다.
임옥상 화백은 전태일 기념상에 대해 "상은 해뜨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또 흐르는 청계천을 본다는 의미로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다"며 "오른손과 왼손이 각각 위와 아래를 향하고 있어 하늘 뜻과 땅의 의지를 연결한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했다. 기념상은 가로1450mm×두께720mm×높이2120mm 크기로 알루미늄 재질이다.
그는 이어 "이제 전태일 열사 이름 뒤에 '열사나 동지'란 단어는 빼자. 이제 사랑과 평화, 믿음의 상징으로 '전태일'을 일반명사화 시켰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노동자의 권리를 스스로 찾으려 했던 전태일이 몸을 태웠던 불꽃을 식히기 위해 온종일 비가 오는 것 같다"며 "전태일의 정신이 오늘 노동자를 포함한 시민들과 함께 다시 태어나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결성 20주년을 맞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참석자들과 함께 '그날이 오면', '광야에서'를 부르는 시간을 가졌다. '그날이 오면'은 열사의 추모가로 만들어졌다고 작곡가 문승현씨가 <오마이뉴스> 기고를 통해 밝힌 바 있다.
마지막으로 이소선 여사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이 여사는 "함께 한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어머니들도 계신데 나 혼자만 행복한 것 같아 미안하다"며 "태일이가 35년만에 내 품으로 돌아온 것 같이 기쁘다"고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 이 여사는 "제발 양대 노총, 민주노동당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힘을 합쳐 비정규직 문제를 없애야 한다"며 "죽기 전에 모든 노동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보고 싶다"고 노동계에 당부했다.
한편 '전태일 거리와 다리'는 지난 7월 20일부터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준비됐다. 전태일기념관추진위원회와 <오마이뉴스>가 지난 22일까지 '전태일 거리, 시민의 힘으로 만들자' 캠페인을 공동으로 진행했다.
이를 통해 노무현, DJ·YS 등 현·전직 대통령을 포함해 1만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약 3억5천여만원이 모였다. 특히 시민들은 기금과 함께 전태일 거리에 깔릴 동판 글귀들을 보내왔다. 이 글귀들 중 일부는 전태일 다리에 이미 깔렸고, 나머지는 11월 13일 열사의 기일까지 전태일 거리에 부착될 예정이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05.09.30 19:42l최종 업데이트 05.09.30 23:26l>
7. 박수근 창신동집터와 백남준 기념관
(1) 서울 지하철 동묘앞역~동대문역 사이 한국 현대 대표 두 예술가 기념 거리로...
한국전쟁이 끝나자 화가 박수근은 흩어졌던 가족들을 모아 서울 종로구 창신동 작은 툇마루가 있는 집에서 살았다. 1952년부터 1963년까지 11년 동안 이곳에서 그는 ‘길가에서(1954)’, ‘절구질하는 여인(1954)’, ‘나무와 두 여인(1962)’, ‘유동(1963)’ 등 자신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박수근이 살았던 창신동 393-16번지 집은 지금은 가게들로 바뀌고 그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박수근 집터 앞에 유비호, 이수진 작가가 박수근 가족의 사진을 담아 만든 기념비가 섰다. 그보다 앞서 지난 3월10일엔 창신동 197-33번지에 백남준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이곳은 미디어 아트작가 백남준이 5살부터 18살(1937~1950년)까지 13년 동안 성장기를 보낸 곳이다. 요즘 창신동 거리는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박수근과 백남준의 흔적들로 다시 꾸며지고 있다. 서울디자인재단의 공공미술 프로젝트 ‘박수근과 백남준을 기억하는 창신동 길’ 조성 사업이다.
서울 동묘앞역에서 내리면 박수근 집터로 가는 안내판이 눈에 띈다. 이번 프로젝트는 계단 손잡이나 비상구 표지판 환풍구 등 원래 있던 설치물을 활용해 자연스레 미술가의 흔적을 찾아가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박수근길은 동묘앞역 6번출구에서 박수근 집터-박수근 광장 등을 지나도록 되어 있다. 광장 환풍구 외벽에는 박수근 작가가 바라보았을 1950, 60년대의 창신동 마을의 풍경을 담은 이문호, 이배경의 작품 ‘마을’이 설치됐다.
백남준 길은 서울 동대문역 3번 출구에서 백남준 광장을 지나 백남준 기념관으로 가는 길이다. 이 길엔 ‘달과 토끼’(유비호, 이수진), ‘내일,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이문호, 이배경) 등 백남준 작가 미디어 아트를 연상케하는 작품들이나 그의 메시지를 담은 설치미술들이 있다. 어느 쪽이나 원래 거리 풍경을 크게 바꾸지 않는 소소하고 작게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기존 형태를 유지하면서 주변 환경과 시민 편의를 개선하도록 도시 구성 요소를 활용한 ‘비우기식 공공미술’을 적용한 것이다. 서울디자인재단 공공미술팀은 “단순히 박수근과 백남준에 대한 기념비적인 표식과 장소를 만드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박수근에서 백남준을 잇고, 다시 백남준에서 박수근으로 연결되는 흐름을 따라 한국 근현대 미술문화의 두 거장의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만날 수 있는 길을 조성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2) 박수근·백남준에게 창신동은 예술의 고향
http://news.joins.com/article/17817853
(3) 도시, 다시태어나다 도시의 기억 품은 거리, 창신동
골목길 곳곳에 서려 있는 박수근과 백남준
hhttp://travel.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03/2017050301223.html
8. 동관왕묘 : 성제묘와 비견되는 관립 관우묘
동관왕묘는 서울의 동쪽에 있는 관왕묘라는 뜻으로, 관왕묘는 중국의 장수 관우(162~219)의 조각상을 두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요청으로 1601년(선조 34년)에 지었다. 명나라에서는 공자의 제자를 지내는 사당인 문묘처럼 관주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무묘라 하여 크게 숭배하였는데, 조선시대 후기에 무묘를 많이 지었다. 동관왕묘의 중심건물은 두 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지붕은 높은 '정(丁)' 자 모양과 '일(一)'자 모양이 합쳐진 '공(工)'자 모양이다. 실내 공간도 앞뒤로 나뉘어 있는데, 앞은 제례를 위한 전실이고 뒤는 관우와 부하장군들의 조각상을 둔 본실이다. 전실과 본실을 감싼 벽돌의 바깥에는 다시 기둥을 두어 처마를 받치고 있다. 관왕묘는 서울의 동서남북에 모두 지어졌는데 그 중 동관왕묘가 제일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넓은 벽돌벽과 독특한 지붕모양, 조각상, 실내의 구성과 장식 등에서 중국풍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는 17세기 제사시설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
<위키백과 이 문서는 2017년 7월 22일 (토) 18:4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9. 동망봉: 청령포로 귀양간 단종을 그리는 정순왕후의 망부대(望夫臺)
성북구 보문동6가와 종로구 숭인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서, 청룡사 동쪽에 솟은 산봉우리이다. 단종왕비 정순왕후 송씨가 거처하며, 단종을 위하여 매일 조석으로 이곳에 올라 와서 동쪽으로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영조 47년(1771)에 정업원구기비를 세우고, 이 봉우리 바위에 ‘동망봉(東望峰)’ 석자를 친필로 새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망봉 [東望峰] (서울지명사전, 2009. 2. 13.,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0. 청룡사 : 정순왕후 거주지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하는 산등에 지었다고 하여 사호를 청룡사라 하였다. 922년(고려 태조 5) 태조 왕건(王建)의 명으로 창건하고 비구니 혜원(慧圓)을 주석하게 하였다. 도선(道詵)이 왕건의 아버지 왕륭(王隆)에게 고려 건국의 예언과 함께 이(李)씨 왕조가 일어날 한양의 지기(地氣)를 억누르기 위해 개성 주변에 10개의 절과 전국에 3,800개의 비보사찰을 짓도록 하였는데, 이 절도 그중 하나라고 전해진다. 1036년(정종 2) 만선(萬善)이, 1158년(의종 12) 회정(懷正)이, 1299년(충렬왕 25) 지환(知幻)이 각각 중건 또는 중수하였다.
1456년(조선 세조 2) 단종이 죽은 후,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宋)씨가 이 절에 머무르며 날마다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단종이 귀양가서 죽은 영월 쪽을 바라보며 울었다고 전해진다. 1771년(영조 47)에 영조가 절 내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을 세우고, 동망봉이라는 친필 표석을 세워 단종을 애도하였는데, 이때부터 절 이름을 정업원이라 불렀다. 1813년(순조 13)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묘담(妙湛)이 중수하였다. 1823년(순조 23)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병세가 깊어지자 부원군인 김조순(金祖淳)이 이 절에서 기도를 올렸는데, 왕후의 병이 나은 뒤 김조순이 절 이름을 청룡사로 바꾸었다. 1853년(철종 4)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金左根)이 중창하였다.
일제강점기에도 꾸준히 불사를 진행하였으며, 1954년 비구니 윤호(輪浩)가 대부분의 건물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는 비구니 수행 도량으로 알려졌다. 건물로 대웅전과 심검당·우화루·명부전·산신각·요사 등이 있다. 대웅전 내에 봉안되어 있는 삼존불은, 철원의 심원사(深源寺) 천불전에서 옮겨온 것이다. 정업원구기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룡사는 왕실의 여인과 관계가 많은 곳이다. 고려 말의 명신 익재 이제현(李齋賢)의 딸이자 공민왕비인 혜비(惠妃)가 이곳에 거주하였으며, 또 조선 초 태조의 딸 경순 공주가 이곳으로 와 머무는 등 왕실과의 관계가 많았던 것이다. 특히 세조에 의해 폐위되고 강원도 영월까지 유배가 결국 그곳에서 죽게 된 단종(端宗, 1441~1457)은 유배 갈 때 왕비 정순 왕후와 이곳 우화루(雨花樓)와 영리교(永離橋)에서 마지막 이별을 하고, 이어 왕비는 영월이 있는 동쪽이 가장 잘 보이는 이곳 청룡사에서 스님이 된 비극이 서려있기도 하다.
* 관람포인트
정순왕후의 비인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각의 편액은 영조의 친필이다.
<본 콘텐츠는 2016년 10월 기준으로 작성된 한국관광공사의 「대한민국구석구석」 여행지 소개 정보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룡사 [靑龍寺] (두산백과)>
11. 비우당(庇雨堂)과 자지동천(紫芝洞泉)[자주동샘] : 최초의 문화백과사전으로 여겨지는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1563~1628) 선생의 거처
이수광의 모친은 유씨부인으로 세종대 청백리 정승으로 유명한 유관(柳寬, 1346~1433)의 후손이다. 동대문 밖 지금의 창신동에 있던 유관의 집은 비가 오면 물이 새는 초가집이었다. 담장도 없었던 이 집은 비가 오면 유관이 우산을 들고 비를 막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유씨부인이 유관의 후손이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이희검은 이 집에서 살았다. 사실 유씨부인은 이희검이 두 번째로 맞은 부인이다. 일찍이 이희검은 강호덕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일찍 요절했다. 그 후 다시 유씨부인과 결혼하여 그 사이에 1남 4녀를 낳았다.
이수광은 부친의 임지였던 경기도 장단에서 태어났으나, 유년 시절은 유관이 살았던 ‘비우당(庇雨堂)’에서 살았다. 당호인 비우당은 ’겨우 비나 피할 수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수광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재건축한 뒤 지은 이름이었다. 이수광의 호인 ‘지봉(芝峯)’은 집 부근에 있는 상산(商山)의 한 봉우리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그가 자랐던 비우당은 바로 지봉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수광은 외가 5대조인 유관과 부친의 영향을 받아 청백리 정신을 늘 자랑으로 여기고 그 유지를 이었다.
바위에 '자지동천'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은 비우당 뒷마당에 있는 우물로, 정순왕후와 관련된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여기서 자지(紫芝)란 자주색을 띄는 풀이름을 말한다. 현재 비우당이 있는 이 일대는 조선 시대에는 ‘자줏골’이라는 동네였고 단종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정업원에 머물며 이곳에서 비단을 빨면 자주색 물감이 들었다는 슬픈 전설이 어려있는 샘이다.
비우당은 본래 터만 남아 있었지만, 낙산 공원을 조성하면서 현재 위치에 비우당을 복원해 놓아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다.
12. 봉제거리 및 박물관 : 옛 평화시장의 물품 공급처였던 배후생산기지
'40년 봉제골목' 거리예술 덧입고 재도약. 종로구 창신동 야외박물관에 봉제인 조형물
낙산·동대문디자인플라자 연계, 관광자원화
'봉제의 품격 라성사, 남성복 코트·재킷 재단·재봉' '최고의 품질 영진사. 숙녀복 바지 재단·재봉' '최상의 서비스 아트사, 바지 마무리(완성)' '창신동의 자존심 에이스, 숙녀복 바지 재단·재봉' ….
1000개 가까운 소규모 봉제업체가 몰려있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 의류업체들이 값싼 노동력을 찾아 중국으로 공장을 옮기고 2000년대 창신·숭인 뉴타운 지정이 맞물리면서 침체됐던 창신동 봉제골목이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거리점포와 오토바이가 점령한 도로 일부가 거리와 봉제인 역사를 담은 야외박물관으로 꾸며졌고 최근에는 골목을 지켜온 봉제인 조형물까지 들어섰다. 종로구는 서울시와 함께 진행 중인 도시재생사업과 연계해 기반시설을 갖추고 인근 한양도성이나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찾는 관광객들 발길을 끌어들인다는 구상이다.
창신동 봉제골목 하청공장은 국제적 의류도매시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동대문시장의 실질적 '뒷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로구는 산업구조 변화에 밀린 봉제골목을 산업문화유산으로 차별화하는 작업에 한창이다. 270여명의 공장주들이 모여 '647모임'을 꾸린 여성복 전문 골목 647번지가 우선 대상. 미로같은 골목과 원단·자재를 나르는 오토바이마저 살아있는 봉제산업 역사인 만큼 거리 자체를 박물관으로 꾸몄다. 2014년부터 시작해 올해 1월 마무리한 '봉제거리 박물관' 핵심은 봉제산업 가치 재조명과 봉제인 자긍심 고취. 거대한 시설물을 짓는 대신 혼잡한 도로를 정돈하고 창신동과 봉제산업을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하는 정도로만 손을 봤다.
1950년대 광장시장, 1960년대 평화시장, 1970년대 보조 자재 전문시장인 동대문전문시장이 개장하면서 하나둘씩 유입된 창신동 봉제업계 역사는 기본. 오전 9시 작업 주문과 원자재 공급으로 시작해 다림질 포장작업을 거쳐 최종 납품준비를 하는 새벽 5~6시까지 봉제공장 24시간을 한눈에 엿볼 수 있다. 객공(임시로 고용한 직공)이나 시다(보조원) 등 현장에서 쓰이는 용어는 친숙한 듯 낯설다.
백지 위에 손글씨로 대체했던 간판은 봉제업을 상징하는 재봉틀 그림 위에 봉제인들이 선호하는 문구를 담은 '창신동형'으로 탈바꿈했다. 이은지 관광체육과 주무관은 "대부분 세입자라 공장을 이전하면 옮겨가기로 집주인 동의를 받고 19개 공장에 맞춤형 간판을 부착했다"며 "건물주와 세입자 동네공동체까지 머리를 맞댄 결과물이라 여느 거리미술품과는 의미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647모임 회합공간은 '기억의 벽과 벤치'로 다시 태어났다. 일대 봉제인 이력이 연도별로 적혀있어 골목이 봉제산업 중심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성화 에이스 대표는 "거리박물관을 계기로 봉제인들도 스스로 가치를 깨닫고 자존감을 회복하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5월부터는 창신동 봉제산업 변화를 이끄는 주역들을 조형물로 만들어 골목에 배치했다. '동대문 그 여자'로 통하는 김종임 봉제사, 봉제와 재단의 달인으로 불리는 김태형 재단사, 공동체와 디자인 결합을 추구하는 홍성재 사회적기업가 등이 작업하는 모습을 표정까지 생생하게 담았다.
봉제골목 위 낙산공원에는 창신소통공작소를 마련, 봉제를 포함해 목공예 가죽공예 등 주민과 방문객을 위한 체험공간으로 꾸몄다. 골목길 해설사가 낙산공원에서 시작해 소통공작소를 거쳐 봉제골목까지 숨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서울시가 일반주택 두채를 매입해 준비 중인 이른바 봉제박물관이 내년에 문을 열면 봉제인들이 직접 참여하는 체험도 가능해진다.
종로구는 남성복 봉제공장이 밀집한 42번지 일대까지 거리박물관을 확대하는 한편 봉제인 시각 조형물을 계속 추가할 계획이다. 한양도성과 낙산공원, 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동대문시장, 동대문문구완구시장과 청계천 등 일대를 찾는 관광객들 발걸음을 창신동으로 돌려 지역 활성화를 꾀한다는 구상이다. 김영종 구청장은 "창신동은 다양한 역사문화유산이 산재돼 있어 문화관광 측면에서도 잠재력이 크다"며 "봉제산업 가치와 역사를 담은 공간을 넘어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을 지역관광 거점으로 조성해나가겠다"고 말했다.
<2016-10-18 10:13:15 게재 내일신문>
12. 안양암과 마애불 :서울시 유형문화재 122호
안양암(安養庵)은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에 자리한 사찰로 한국미술박물관의 별관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에는 오랜 역사와 함께 전래되어온 문화재들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사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몇 건에 지나지 않고, 그나마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곳에 비장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중요한 유물을 보기 위해 사찰을 찾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편이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자리한 안양암(安養庵)은 1889년 성월대사(性月大師)가 창건한 정토도량(淨土道場)이다. 또한 이곳에는 조선 말기부터 조성된 전각, 불화, 불상, 공예품 등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사찰 전체가 문화재인 것이다. 작은 대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눈에 보이는 하나하나가 조심스럽다.
안양암 경내에는 커다란 화강암 바위의 동쪽 면을 파서 만든 마애불이 1909년에 조성하였는데 안양암 마애관음보살좌상이라고도 한다. 돌로 불상이 들어앉을 반원형의 공간인 석감을 만들고 그 안에 보살상을 얕게 조각한 것으로 전체 높이 3.53m, 감실 너비 275cm, 무릎 너비 210cm 규모이다. 보살상 앞 좌우로는 연꽃을 조각한 팔각형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고 기둥을 잇는 돌에 '觀音殿(관음전)' 이라고 새겨져 있다.
마애보살상은 전각 전체를 꽉 채우는 크기로 묵중하고 풍만한 느낌을 준다. 머리에 쓴 원통 모양의 보관(寶冠)에는 화불(化佛)을 묘사하였으며, 관대(冠帶) 양쪽에는 수술 장식을 달았다. 얼굴은 넓적한 편이고 눈은 반쯤 뜨고 있으며 코는 뭉툭하다. 백호와 눈, 입은 채색되어 있다. 어깨는 각이 져 있고 대의(大衣)는 양어깨를 모두 감싸는 통견(通肩) 형식이다. 오른손은 손가락을 모두 펴서 배에 대었으며,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대어 가슴 앞에 두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이은 키 모양이며 4줄의 선을 둘러 표현하였다. 두광 바깥에는 산스크리트어로 '옴'자를 양각해 놓았다. 전각의 왼쪽 편에는 마애불과 관련된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보살상은 고려 말 조선 초 양식을 계승하여 입체감이 적어 밋밋한 편이나, 당대의 서울 지역 마애불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999년 11월 15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었으며 안양암에서 소유, 관리한다.
<한국관광공사의 「대한민국구석구석」 여행지 소개 정보.
[네이버 지식백과] 안양암 석감 마애관음보살상 [安養庵石龕磨崖觀音菩薩像] (두산백과)>
첫댓글 참가1/도도님
참가2/아수라/즐거운 시간여행 함께 나서봅니다.
즐거운시간여행에 첫번째로 탑승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기도보 다음날이라 걷기에 큰 부담안가게 서울도심을 걸을 수 있는 길을 선정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장소들이거나 또는 알았거나 보았어도 대충 넘어갔던 장소들을 이전보다 조금 더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살펴보는 시간이 되지 않을 까 합니다. 기존에 방문하거나 걸었던 장소들과 길이 A급이라고 하면 이번길은 B급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2년전에 걸었던 길로서 좋은기회에 걷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코스인데 화려하거나 볼거리가 많거나 잘 정돈되어 걷기 편안한 것과는 거리가 있기에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도보를 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앞만보고 걷는것이 아니라
옆이나 뒤에 있는 조금은 관심밖의 길이나 유적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때 지금까지 걸어왔고 또 걸어갈 좋은 길들에 대한 가치와 소중함을 더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지만 이번 코스를 선정하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같이하는 길 함께 해줘서 감사합니다. 단하님께도 보석같은 느낌으로 다가갔으면 좋겠네요ㅎ~^^
참가3/단하님
참가4/동심/도도님의 길
감사하게 따라 가겠습니다
참가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참가5/지아/국사 시간 제일 싫어했었는데‥‥
든든한 도도님 따라 가볼랍니다~
이크..큰일이네요ㅎ. 그래도 책속이 아니라 현장을 보고 걷고 재래시장과 골목들을 걷는거라 괜찮을거에요ㅎ ~^^
와우 사진 찍을때 천지다 ....
구미 땡기내요 ^*^
대기자 ...입니다.
구미도 땡기는데 대기 말고 구냥 참가댓글 달아요ㅎ
참가6/하모니/역사공부하고,
반가운님 뵈러갑니다.^^
어서오세요 하모니님..즐겁고 유익한 시간 함께 보내요~^^
참가7/릴리/도심 걷기도 참가해봅니다
정기걷기 다음날 쉴까 했는데
역사공부하러 갑니다
방가와요 릴리님~~쉬엄쉬엄 걸으면서 도심속 역사의 숨결을 함께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구요ㅎ
참가8/넬리/도심걷기 좋은분들과 함께합니다~^^
환영합니다. 넬리님 포함해서 좋은 분들과 도심걷기 함께해서 좋네요~^^
도도님 미안합니다. 전라도 행 확정입니다.다음엔 똑 갈께요 ㅎㅎ
네..잘 다녀오시고 다음엔 도도행으로 방향 정해서 같이걷고 사진 폭탄도 남겨주세요~^^
참가9/수피아/역사탐방하러 갑니다
역사에 대해서 잘 몰라 누락하면 어쩌죠?
어서 오셔요
즐겁게 걸어 볼까요 ?
반가와요 수피아님..같이 걸으면서 편안하게 보고 느낄 마음만 있으면 충분해요. 이따 뵈어요~^^
같이하고픈데 낼 모임이있어서요~
온숲님들 오늘 피곤하셨을텐데 내일은 가벼운 콧바람 쐬세요~^^
네..우산들고 가벼운 콧바람 꼭 쐴께요ㅎ. 감사합니다~^^
비오는날의 수채화~~~
그림같은길이 되겠네요~^^
서울 중심부의 번잡하지 않은 재래시장의 골목골목 모습들과 개발을 피한 오래된 건물들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될것같아요~^^
비오는 일요일 오후 되면 비가 걷히길 바라면서 즐거운 산책이 되시길 바래요 ^^
넵 감사합니다~^^
참가 10/ 다온/ 도도님 수고에 감사합니다
와우~~어서오세요 다온님ㅎ. 우산쓰고 빗소리 들으면서 한적한 서울 도심의 이곳저곳 함께 걸어요~^^
체력짱 입니다요 ~ㅎ
참석인원
아수라님/단하님/동심님/지아님/하모니님/릴리님/렐리님/수피아님/다온님/도도(이상10명)
참가11/고운/도도님 덕분에 서울구경도하고 역사공부도 하러갑니다
감사합니다^^
역사 공부 같이 해요 ~^&^
어서오세요 고운님~ 같이 배우면서 걸어요. 이따 뵈어요~^^
어제의 피로가 발목을 붙잡네요
죄송합니다
모두 해피한 시간 보내세요
다음에 고운길에서 뵙겠습니다
도도님 꾸준히 운동해서 좋은소식도 전해 주세요
아쉽지만 다음에 뵈어요. 저도 관리 잘해서 건강한모습으로 뵐께요~^^
짐쌌다가 결국은 내려놓았습니다.
우중도보 함께하고 싶었는데 몸이 말을 안듣네요ㅠ 도도님포함 오늘 우중도보 함께하시는
온숲님들께 가시는 걸음걸음마다 행복과 행운을 빌어드립니다. 좋은시간 되셔요~~♡
네. 아쉽지만 다음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