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문학관 아카데미 7기 – 9차시 습작품 첨삭자료(2017년 10월 23일 용)
1. 벤자민 /문영옥
주택이라 겨울이면 화분들을 거실에 다 들여 놓는다. 겨우내 집안에서 함께 숨쉬고 호흡하다 봄이 되면 화단에 내어 놓는다. 벤자민은 추위를 많이 싫어한다. 어느 해에는 좀 일찍 내어 놓다 보니 추위에 약한 벤자민은 추워서 못 살겠다고 잎을 바닥으로 와르르 다 쏟아 버렸다. 잎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떨구었다. 추위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른 봄에 내어 놓은 주인에 대한 반항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벤자민에게 나는 하루도 빠짐 없이 찾아갔다.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살아 달라고, 어루만지며 애원했다. 나의 마음이 벤자민에게 전해졌던 것일까?
한 달 반이 지나도록 벤자민은 속옷 조차도 걸치지 못하다가 애기가 입을 오물거리듯 잎을 쏘옥 내미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벤자민이 고마웠다. 벤자민도 나의 변함 없는 사랑을 배신하고 떠나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있는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어서 살짝이 고개를 내밀었을 것이다.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 준 벤자민이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겨울의 집안 거실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데, 화분들이 들어 옴으로써 생기가 돌고 활기가 넘쳤으며, 숲속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렇게 벤자민과 동고동락하면서 함께 살아 온 지 벌써 20년이란 세월이 훌쩍 넘었다. 그런 벤자민에게 상처를 남긴 자가 있으니……·.
옆집에서 물받이 공사를 한다고 사전에 일언반구도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들락날락했다. 우리 식구들은 각자 열쇠를 가지고 다녔지만 이층 식구들은 한 개로 세 가족이 함께 사용했기 때문에 바깥의 특정 장소에 보관을 했다. 그래서 이웃에서도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에 그냥 들어와서 공사를 했던 것이다. 마침 남편이 그 모습을 보고 왜 남의 집에 마음대로 들어 와서 공사를 하느냐고 했더니 그제서야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공사를 하고 난 뒤에도 어질러진 쓰레기도 깨끗하게 치우지 않았다. 인간의 기본적인 예의 따윈 없었다. 나는 아침에 나가면 저녁에야 집에 돌아오기 때문에 화단에 내어 놓은 나무를 자세히 살펴 볼 시간이 없었다.
그 날은 쉬는 날이라 집 대청소를 했다. 이불을 밖에서 털고 있는데 화단에 내어 놓은 나무를 보게 되었다. 벤자민의 굵은 가지 하나가 잘려져 있었다. 보는 순간 칼에 베인 듯한 가슴의 통증이 나를 옥죄어 왔다. 내 가슴은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벤자민 가지를 잘랐냐고 물었다. 남편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곤 옆집에서 공사를 하면서 잘랐을 거라고 말했다. 남편은 내가 나무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잘 알고 있다. 남편은 이미 잘려졌고 이웃 간에 소리 높이면 뭐 하겠느냐며 참으라고 했다. 하지만 남편 말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 집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옆집 남자는 본 적도 없다. 벨을 눌렀다. 남자가 나오길래 이 집 주인되시느냐고 물었다. 남자는 그렇다고 했다.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우리집 화분에 있는 나무를 잘랐냐고 물었다. 남자는 자기가 잘랐다고 했다. 마음 같아선 있는 욕 없는 욕 다 하고 자기가 아끼는 물건도 똑같이 만들어 주고 싶었다. 뼛 속 깊이 스민 화가 엉겨 들어 있지만 나는 왜 잘랐냐고 고래고래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화분을 던져 주면서 똑같이 해놓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옆집 남자는 우리집에 와서 보고는 미안하다고 죽을 죄를 지었다고 싹싹 빌었다. 남자가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데는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의 불꽃처럼 타던 화가 쉬이 사그라들지는 않았지만 알았다고 하고 옆집 남자를 보냈다. 옆집 남자는 가고 없었지만 나의 속상한 마음은 풀리지 않은 채 벤자민을 바라봤다. 마치 벤자민이 자기는 한 쪽 가지를 잘리면서도 아파도 아프다는 말도 못했는데, 내가 대신 실컷 소리라도 질러 주어서 고맙다고 하는 것 같았다.
화장로에서 뜨거운 불 길에 고단했던 이승에서의 번뇌를 미련 없이 사르듯 나 또한 빨리 잊을 것이다. 더 많이 벤자민을 사랑해 줄 것이다. 벤자민의 잘려나간 가지를 아픈 가슴과 함께 다시 매끈하게 잘라냈다. 벤자민은 칼로 베는 듯한 아픈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야들야들하고 기름을 바른 듯한 반질거리는 잎을 무성하게 쏟아내 주었다. 내 마음의 상처를 감싸 주려고 자기의 아픈 상처를 내색하지 않는 벤자민이 더욱 애잔하게 느껴졌다.
벤자민이 풍성한 잎으로 자신을 무장해 줌으로써 나 또한 그 아픔을 쉬이 잊을 수가 있었다. 말을 하지 못한다고, 나보다도 약하다고 해서 함부로 짓밟아서는 안 될 것이다. 더 많이 배려하고 베푸는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벤자민의 푸르름이 내 마음의 안식과 평온함을 주듯, 나 또한 자연에 순응하며 안식처가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 가길 소망해본다.
2. 얄미운 카톡/ 곽해숙
부산에서 대구로 결혼을 해 왔을 때나 지금이나 부산에서부터 알았던 친구들은 아직도 없다. 그렇게 대구란 곳은 나에게는 생판 낯선 곳이였다.
결혼식을 올리고 시댁으로 들어 왔으니 그야말로 시집을 온 것이였다. 긴장 된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 반찬도 입에 맞지 않고, 불편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였다. 친정 엄니 생각이 나고, 나날이 보고 싶음은 더해 갔다.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어느 일요일 남편이 영화구경을 가자고 했다. 집에서 나갈 때는 나도 영화구경이나 하고 온다 생각 했는데, 버스를 타고는 고속버스 터미날로 가서 부산가자고 했다. 부산이야 그날 갔다가 그날 올 수 있어 용기를 내었던 것이다. 가서 엄니가 해 주시는 밥 앉아서 받아 먹고, 올 때는 반찬거리 어물을 잔뜩 받아 왔다.
시어머니께서는 아들 내외가 나가서 영화를 서너편 보았다 해도 왔을 시간까지 오지 않아 걱정을 하고 계셨다. 그때 양손에 짐을 들고 아들 내외가 들어 와서는 부산을 갔다 왔다 하니 아연 실색을 하셨다.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이야기도 않하고 부산을 갔을것은 상상 밖이셨다. 아직 첫 친정을 보내지 않았던 때인데, 그 시절 법도를 찻던 시절이라 빈손으로 첫 친정을 간 것이 되었으니 사돈께 예의가 아니어서 난감 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묘한 것이 있었다. 저녁 해 질무렵이면 밥 짓다가도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밤에 잘려고 누으면 더 생각이 났는데, 그렇게 잠깐 보고 오고 나니 보고 싶은 것이 없어진 것이다. 친 사촌이 11명, 외사촌, 고종사촌, 이종사촌 다들 부산 울산에 살고들 있어서 결혼식 참석차 부산으로 가면 예식장에서 엄니를 만났다.
같은 자리에서 점심을 먹고는 친정에도 들리지 않고, 간다고 나서면 집에 가서 하룻밤만 자고 가라 하셨다. 한번도 엄니 말씀대로 한 적이 없이 그렇게 매정하게 왔다. 그래도 나는 친정엄니를 예식장에서 만나도 그간의 보고 싶었던 것이 해소 되었다. 그것이 친정엄니와 딸의 차이였던 갑다 싶은 것은 내가 내 딸들을 수도권으로 결혼 해 보내고 나서이다.
둘째는 시댁이 대구라 명절이면 오고, 가끔 평소에도 온다. 큰아이는 승용차로 20분거리에 시댁이 있으니 명절에 오지 말라 한다. 방학 때 휴가를 떠났다 들려서 손주를 두고 간다. 단지 명절에 오지 않는 것 뿐이고 일년에 두번은 온다.
요즘이사 택배로 생일에 케이크, 와인, 꽃까지 오는 세상이니 멀리 있어도 그 정도는 챙기면 된다. 이름 난 생일에야 아이들이 모이지만, 그래도 전화 통화는 가끔씩 했는데, 내가 스마트폰으로 바꾼 3년전부터 전화 통화도 더 뜸해졌다.
카톡으로 여러가지 연락을 할 수 있고, 바뻐서 못 보아도 시간 날 때 읽을 수도 있고, 연락, 동영상, 사진들도 올리면 볼 수도 있다. 주로 손주들 사진이 오간다.
세상이 복잡하게 변해서 부모 자식간에도 길게 오래 보면 자식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도 있다. 그 변해진 세상에 카톡이 딱이다. 무소식도 아니어도 되고, 자기들 생활 침해 당하지 않아도 된다.
하기사 카톡이 없어도 세상살이 바쁜데 뭐 그리 엄마 생각이 나서 아직도 전화를 하겠는가? 얄미운 카톡이라 하지만 그 카톡이라도 없었다면 무소식으로 지내다 명절에 생일에 전화를 했을 것이다. 방금도 오늘 택배 잘 받았다고 카톡을 보냈더니 전화기 옆에 있었던지 "녜"란 카톡이 바로 왔다.
나는 내 어머니께는 참 매정한 딸이었다. 가시고 나니 한달을 눈물을 흘렸다. 일년은 간절하게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이렇게 명절을 앞 두면 아문 상처처럼 엄니 생각이 난다.
3. 미소공부/ 변미순
단골로 가던 동네미장원은 손님이 많아 예약을 하여도 늘 기다려야했다. 약속시간에 도착하였으나 원장의 손은 바쁘고 나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펼쳐진 잡지책을 주어 들고 지금 원장의 손혜택을 보고 있는 중년 남자에게로 눈을 흘겼다. 빨리 마치기를 희망하면서.
옆 소파에서 그분의 아내로 보이는 분이 부드러운 눈으로 남편의 헤어컷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냥 후덕해 보이는 부부의 모습은 볼수록 다정함 그 자체였다. 둘은 말하지 않았으나 남편은 “괜찮아 내 머리?” 묻고 있었으며, 아내는 “멋져지고 있어요” 답하고 있는 듯 눈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눈과 입의 작은 움직임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미인, 미남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최고의 미남미녀 연애인을 순위를 메기곤 하지만 내가 여태 보아온 어떤 사람보다도 두 분이 미남미녀였다. 사랑이 가득한 얼굴에서는 인자함이 묻어 났고, 다정한 부부의 정은 정녕 예수님, 부처님의 후광보다 더 빛났다. 내가 넋이 나간 듯 바라보고 있으니 아내분이 조금 의야해 하였다. 난 얼른 사과하였고, 두 분의 다정하신 모습에 제가 넋이 나갔노라고 하였고 너무나 아름다우시다고 덧붙였다. 이 모습을 본 것은 약 15년 전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긴 머리를 올림머리하듯 묶고, 조이는 헤어스타일에 머리카락 한 올 내려오지 않도록 해서 출근하던 때였다. 일함에 있어서 자를 재듯 가로세로 다듬었고 숫자로 계산되어진 방법을 동원하여 딱 떨어지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곤하였다. 내 생각과 다른 이에게는 굳이 장황한 설명을 해가면서 나와 같아지기를 회유하거나 아니면 속으로 그가 틀렸다고 단정해버렸던 시절이었다. 딸아이가 엄마에 대한 불만이 꾸중을 해도 첫째, 둘째 하면서 선생님처럼 너무 딱딱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할만큼이었다. 일을 치루어 내는 것에도 시리도록 가속도가 붙어 있어 참 잘 나가는 나인줄만 알았다. 내가 모두 옳은 줄만 알았다.
먼저 긴 머리카락 끝만 손질하러 갔다가 난 머리카락 길이를 반 이상 잘라내고 약간 웨이브를 주었다. 내가 소중히 생각하였던 반듯하다는 관념과 그 도구였던 자와 칼을 버렸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먼저 웃어 행복해지자고 굳게 마음먹었다. 억지로라도 웃어보기로 하였다. 일도 바쁘게, 빨리가 아니라 한박자 쉬고, 한 발 물러나 생각을 더 많이 해보기로 하였다. 미장원에서 본 어느 중년부부의 평화로운, 행복 가득한 얼굴을 본 이후,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것이 재산, 명예, 성공이 아니라“일상의 평화와 행복”이란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바뀐 헤어스타일은 그냥 손가락을 빗삼아 다듬었고, 약간의 웨이브로 보송보송하게 다녔다. 얼굴에 미소라는 화장을 하였다. 오래 굳었던 얼굴에 미소라는 화장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억지로라도 먼저 웃자” 정말 지독하게 연습하였다.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내가 먼저 알았다. 가끔 가슴을 쥐어 짜듯 했던 통증이 사라졌다. 사실은 예전의 타이트한 일상에서 스스로가 제일 힘들었고, 몸 곳곳에 알 수 없는 통증들이 있었는데 하나 둘 없어졌다. 두 눈에 뜨거운 레이저 빛 발사 대신에 따뜻한 주름이 생겼다. <얼굴에 미소가 있는 사람은 아름답고, 일도 잘하며, 생산성도 높고, 아이디어도 많으며, 사람을 끌어당긴다>라는 수많은 명언들이 틀리지 않았다. 난 더 많은 사람과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일상에 허덕거리는 바쁨의 연속으로 출장이 아닌 여행은 갈 엄두도 못내었다. “달라지자”라고 마음먹고 실천하였고, 엄청 노력하였다. 먼저 여행상품을 하나 계약해두고, 일정을 조정해보았다. 그러니 여유라는 예쁜 시간이 만들어졌다. 하나뿐인 나의 분신(分身), 딸아이를 데리고 캄보디아 짧은 여행길에 올랐다. 몇일을 온통 같이 보낸 시절이 있기나 하였는지? 자식과의 대화가 길게 이어진 적이 언제였나? 좋은 기회였고, 너무도 큰 행복이었고, 여행이 주는 달콤한 맛에 빠졌고, 영혼의 독서라는 여행으로 평생의 추억을 만들었다. 딸아이가 결혼을 하고 나니 정말 둘이서 여행갈 일은 더 없어져버렸다. 그때 일단 가보자 한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책상 위에서 공부한 식물학 시험과 과제는 독서실에서 점수를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늘 현장실습은 뒷전으로 밀리곤 하였다. 이것도 밖에서 그들과 만나면서 제대로 해보자고 결심하였고 실행하였다. 가능하면 최소 2주에 한번은 산과 들에 가자.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피고, 그들과 소통해보자고 한지 벌써 10년 가까이 되었다. 식물생리학을 책상에서 배울 때보다 훨씬 이해의 폭이 넓어졌고, 새롭게 배우는 식물의 지혜는 매일이 새롭고 신비롭고 축복과도 같은 오아시스의 샘이었다.
<시간은 흘러 다시 돌아오지 않으나, 추억은 남아 절대 떠나가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무릎을 친다. 머뭇머뭇 하는 사이 화살같은 시간은 보이지도 않은 속도로 가버렸다. 그 때 할 걸, 너에게 줄 걸, 하라고 할 때 해볼 걸 등등 미루어 놓으면 시간이 늘 있을 것 같았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미룬 일들이 저절로 이루어 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추석이 다가오면 보름달처럼 나도 그렇게 밝은 빛이 될 수 있을까? 나로 인해 누군가가 웃고, 길을 찾고, 힘찬 인생을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지금에서야 이런 생각이 깊어지는 것이 후회막급이지만 15년전 미장원에서 만난 다정한 부부와의 만남 이후 난 강한, 무서운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부드러운, 다정한 사람으로 조금씩 조금씩 변하고 있다. 오랜전부터 알아온 모든 이들이 인정해 주신다.
칭찬에 인색하고,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더 부지런했던 지난날의 쓸데없는 습관들을 버린다. 완벽한 척, 있는 척, 잘난 척하는 못난 꼬라지 모두 버린다. 물론 버렸다고 생각했는데도 아직 가득하다. 혜민스님 글에 마음공부는 “안다”는 생각을 쉬고 또 쉬면서 텅 빈 채로 이미 충만한 마음자리를 밝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주 자주 멍~하니 있어도 본다.
미장원 어느 부부의 모습은 15년 전 그때부터 앞으로도 쭉 나의 롤모델이다. 그 모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하게 살아있다. 매일 거듭 기억하고 닮아가려 노력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준비하지 않은 채 사진을 찍히면(도촬이라고 하는) 나의 인상은 괴팍하고 굳어 있고 눈썹이 찌푸러져 있다. 약간의 난청이 있기도 하지만 내 눈썹은 늘 힘이 가득 들어 있다. 언제 어디서라도 내 사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을 때까지 난 미소공부를 놓지 않을 것이다. 미소가 가득한 얼굴이 되고 싶다. 이왕지사 허락된 인생이라면 행복하게 살아보자. 매일 조금씩 더 행복하다. 진심으로 그러하다.
4. 마침내 정화가 되었다 / 서인수
스마트 폰글상자에 문자가 떴다. 메모지는 버려둔 휴지조각 일 뿐이라 당신 골프 칠 동안 세상은 촛불로 싸웠다. 어찌 되었든지 비리를 막아보려 나설 참이다.
아버지가 암살된 건 밝혀야 했다. 무엇이든지 뉴스거리가 될 수 있었지. 한번 받은 상처는 어떤 식으로 든 남았다. 일단 방송을 타면 판단은 국민이 하는 거다.
강연을 할 건가 방송만 할 건가. 그 사람 덕분에 사랑을 지킨 거다. 사건을 모르면서 왜 이렇게 말하지요. 난 아무것도 몰라도 시간이 별로 없어요.
시대에 막대한 영향으로 미쳤는데 첫걸음은 진짜로 별난 일이 아니었다. 주어진 일하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깨우친 것을 알려주니 이제야 살맛이 낫소.
그자들이 통치술을 가만둘 것 같나. 날마다 스트레스 받아 대상포진이 왔다. 말소리 귀신이 붙었나! 염병할 말까지 적게 바른말 하라 해도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결사 투쟁했다. 깡그리 잊으라는 뜻으로 배웠는데 당신은 귀가 먹었나 의심을 하는 거죠. 진실은 기술하는 과정에 맥락이 나오지요.
법적인 문제에 말썽의 소지가 많아 법정에 제기하면 재 뿌리는 격이 되지요. 송사는 중추신경에 스트레스로 작용하니까 사실 여부 확인한 뒤 결정문을 보여줘야 된다.
심각한 내용이라 피해도 크니까 파산 신청하면 면책을 시킬 수 있다. 이것이 도대체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우울증이 오면 그것이 병적인 짓이란 거다.
답답한 마음 기술해 위로받지만 법원에 이의 신청해 막아보려 해도 기각하니 사기꾼 장단에 휘말리기 싫다. 동물의 왕국이나 보며 편안하게 살아야 했다.
정의는 어디 가도 진실의 편이라 거짓말 하나로 뉴스거리 만들지 말자. 한 통속이라 신중히 검토한 뒤에 논해야 정보가 들어간 뇌물 사건도 샅샅이 밝혀본다.
양심과 직결되니 얼마나 통분해할까. 인터넷이 등장하여 마음이 편하게 됐다. 대통령이 통치하는 것 보통 일이 아니었다. 법정에 소환하면 모독죄로 감금될 수도 있다.
모두 공개할 수는 없는 입장이라고 이걸 근거로 기사를 쓰면 재미있겠다. 자네 같은 인간이야말로 망치고 있다고 그는 정치계에 유명한 인사로 수사 중이다.
말하지 못해 더 이상 참지 못하느냐. 인내심이 서기까지는 한참이나 걸렸다. 의사가 마음 편하게 신경 끊어라 말했다. 효과 상승 위해서 또 다른 작품을 쓰는 거죠.
선인은 모임 하는 동창생에게 말했다. 왜일까 양심을 수호하는 샘물이 있었다. 진실한 마음을 위해 선각자가 등장하였다. 시대는 마침내 스마트 폰으로 정화가 되었다.
5. 척후병 노릇/장은재
매년 명절이 다가오면 떠나가신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그립다. 장모님은 9년이 지났고, 장인어른은 36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지만 세월의 무게만큼 그리움은 짙어만 간다. 육 남매 모두 결혼시키고 행복해야 할 연세인 62세에 장인어른은 돌아가시고 58세인 장모님은 남편을 떠나보낸 후 28년을 홀로 사셨다. 처부모님은 막내딸인 아내의 권유로 가톨릭으로 전향하여 성당 주일 교리 반에 함께 다니셨다. 그러나 장인어른은 세례를 받기 직전 불행히도 큰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한지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치료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코가 아닌 목에 산소 호흡기를 달고 겨우 목숨을 연명했다. 폐에 고인 물을 빼내기 위해 배에 구멍을 내고, 가래를 제거하기 위해 목에도 구멍을 냈기 때문에 말을 못 하시고 달력 뒷면의 흰 여백에 글로써 의사소통했다.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 환자는 답답할 뿐만 아니라 굉장한 고통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편안해 하는 환자는 처음 봅니다.”라고 말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누구보다 신앙심이 깊었다. 계속 성호를 그리면서 고통을 기도로 극복하는 모습, 보지 않으면 믿기 어려운 기적을 우리들은 목격했다.
며칠 더 버틸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에 집에서 여생을 마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여 가족회의 끝에 집으로 모시기로 했다. 산소 호흡기를 빼면 곧 돌아가신다는 장인어른은 남산동 집에 도착하자 더 편한 모습을 보였다. 바로 숨이 끊어질 것이라는 판단은 우리 모두의 큰 실수였다. 당황스럽고 죄스러움에 모두 어쩔 줄 몰라 했다. 부랴부랴 의료기 상사로 달려가 산소 호흡기와 산소통을 사와서 응급조치를 취했다. 고통 한번 호소하지 않으시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행복하게 살라는 글씨를 남기고 며칠을 더 버티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편안히 잠드셨다. 우리는 이런 기적과 같은 일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였다.
장인어른이 계실 때는 처가에 가면 언제나 귀한 백년손님으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장인어른이 돌아가시자 언제부터인가는 모르지만, 상황은 급변했다. 찾아오는 자식은 뜸해지고 장모님 혼자 텅 빈 집을 지키는 시간은 늘어만 갔다. 주인을 기다리는 고양이 마냥 어두운 마루턱에 웅크리고 앉아 계시는 모습은 슬픈 침묵의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다. 꽃다운 18세 젊은 나이에 결혼하여 남편 따라 낯선 대구로 나와 해바라기처럼 남편만 바라보고 산 여인의 삶에 남편이 있고 없음이 부모를 잃은 고아의 심정과 그 무엇이 다를까 싶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억장의 그 빈 가슴을 누가 대신 채워줄 수 있을까?
혼자 된 장모님을 모시고자 하는 자식들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모셔야할 처남댁들은 손사래를 쳤다. 육남매 막내인 아내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 척후병 노릇 습관이 도져 내가 모시겠다고 나셨다. 사위에게 시어머니를 맡긴다는 알량한 자존심,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처남댁들은 악성 댓글처럼 스트레스를 주었고 이런저런 갈등과 보이지 않는 복병들이 도처에 뱀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답은 내 안에 있다’는 평소 지론을 굳건히 지켜나갔다.
학교 다닐 때 나는 성격이 내성적이고 나서기를 매우 꺼린다고 통지표에 적혀 있었다. 이를 극복하고자 나름대로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부모님께서 “누가 이웃 마을에 심부름 좀 갔다 올래?” 선생님께서 “누가 무단결석한 학생 집에 좀 갔다 올래?” 동네 형들이 “누가 산에 소들이 어디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는지 좀 살펴보고 올래?” 팀별 경쟁이나 경연 때 리더가 “누가 적진, 상대 진영의 전략과 동정을 살펴보고 올래?”라고 할 때는 서로 눈치 보면서 떠넘기려 했다. 그럴 때 나는 항상 먼저 자청했다. 특별한 일인 것처럼 ‘척후병 노릇’이라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행동으로 꾸준히 실천하여 나의 성격을 고쳐나갔다.
나중에는 솔선수범하는 행동으로 비쳐져 모두들 칭찬하는 양 하면서 척후병 노릇을 시켰다. 척후병은 적진에 들어가서 정찰하고 탐색하여 정보를 얻는 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내가 하는 척후병 노릇은 일상생활에서 남들이 귀찮고 하기 싫어하는 일을 먼저 자청하여 하는 일이다. 누군가는 하여야 하지만 모두가 꺼리는 일에 소위 총대를 메는 것이다.
장모님은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나와 같아 매일 새벽에 자동차 드라이브 겸 약수를 뜨러 모시고 다녔다. 차를 타고 무작정 아무 데나 먼 곳으로 훌훌 떠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아파트단지 입주민을 모아 노인후원회를 조직하여 나는 회장직을 맡고 장모님은 노인회 회장을 맡았다. 매달 후원금을 모아 드리니 노인정 어르신들 모두가 좋아하셨다. 장모님은 연세가 드셔도 고운 얼굴과 타고난 흰 피부를 지니셨기 때문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모습은 매력적이고 아름다워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셨다.
그런데 마음고생은 엉뚱한 데서 일어났다. 장모님과 며느리와의 고부갈등은 가정불화로 번졌다. 어느 가정 없이 겪는 고부간의 갈등은 부모와 아들 간 거리를 멀게 만들고 형제간의 우애도 끊어놓는 경우가 많다. 어느 날 처남댁은 나를 보고 “평생 모시는지 두고 보겠다. 병들고 아프더라도 죽을 때까지 모셔라.”며 딴죽을 걸었다. 나는 엄청 화가 났다. 하지만 여태까지 참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했다. 당시 아내에게 말했다면 아마 큰 싸움이 있었을 것이다.
시골 계시는 어머니께 장모님을 모시겠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지만 아들집에 오실 때마다 사돈과 함께 사는 것이 조금은 섭섭하셨는지 어머니는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지어 너를 양자로 보낼 팔자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 또 사돈은 무슨 복이 많아 딸집에서 행복하게 사는지 부럽다.”라고 하시면서 시골로 돌아가셨다. 육남매 중 잘난 아들로 생각한 나를 일찍이 큰집으로 양자를 보낸 섭섭함과 나와 함께 사는 사돈의 모습을 늘 부러워하셨다. 친어머니를 함께 모실 생각도 해봤지만, 그 또한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접었다. 대신 아내는 매달 꼬박꼬박 용돈을 부쳐드렸다.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를 뵙고 돌아오는 길에는 주머니 속 지갑은 텅 비지만, 마음은 어머니의 따뜻한 체온으로 꽉 채워진다. 그것으로 죄송하고 불편한 내 마음을 대신했다.
장모님이 그립기만 하다. 젊은 시절 욱하는 성질머리 때문에 장모님 앞에서 큰소리 내어 부부싸움을 한 적도 있다. 정말 후회스럽고 자신이 원망스럽다.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까? 과음하고 늦게 귀가할 때는 얼마나 가슴 조렸을까? 잘 모시겠다고 스스로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해 놓고 지금 생각해 보니 후회막심하다. 알게 모르게 잘못한 일이 또 얼마나 많았을까? 요즘 말로 “있을 때 잘하지, 그래.” 이 말이 가슴을 때린다. 영원히 함께 살 것 같아 무심코 보낸 지난 세월이 원망스럽다.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려고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무엇이건 먼저 덤벼들어 해보자는 척후병 노릇을 시작했는데, 이제는 습관처럼 굳어지고 그로 인하여 성격도 바뀌었다. 성격이 바뀌면 운명도 변한다고 했는데 덕분에 장모님을 모시고 사는 영광을 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풀지 못한 처남댁에 쳐들어가는 척후병 노릇을 또 한번해 볼까.
6.계단을 오르며 /서기순
물 한통 손에 들고 네 살짜리 손녀와 함께 밖에 나갈 채비를 한다. 기분 좋게 불어오는 미풍이 겨드랑 사이로 스며든다. 온몸에 살짝 얹히는 바람을 품고 내딛는 발걸음은 솜사탕처럼 가볍다. 굳이 멀리 가지 않더라도 도처에 가을은 이미 다가 와 있다.
동네 부근에서 쉴 곳을 찾는데 아이가 팔을 잡아당긴다. 아파트 놀이터이다. 놀이기구들과 또래 친구들을 보더니 어서 가자고 발을 구른다. 그네, 시소를 한 바퀴 돌다가 미끄럼 층계를 오르기 시작한다.
아이는 계단을 유난히 좋아한다. 계단만 보면 겁도 없이 오르기 시작한다.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부터 계단을 탐내기 시작했다. 놀이터에서도 계단만 보면 신나게 올라갔다. 그러나 어쩌랴. 모든 계단은 오른 후에는 내려와야 하는 것을. 그제서야 아이는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목청껏 울며 할머니인 나를 찾았다. 나는 얼른 달려 가 아이를 안고 내려왔다.
계단 오르기는 수시로 반복되었다. 아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놀이기구 층계에서는 아예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근근히 달래서 업어 내려오면 죄 없는 나의 다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무릎이 아프고 장딴지가 무거워졌다. 퉁퉁 붓더니 하지 정맥류까지 생겼다. 나는 언젠가부터 계단이 싫어졌다. 아이 업고 내려오기는 더 힘들었다. 의사는 계단을 피하라고 말했다. 무책임한 충고다. 에미는 직장 가고 아이와 나 둘 뿐인데 누가 아이를 업고 내려오나.
아이는 왜 그렇게 계단을 좋아할까. 영국의 유명한 등산가인 조지 맬러리(George Mallory)가 “산은 왜 오르느냐?” 는 질문에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라고 대답했다는 것을 보면 ‘오르기’는 인간의 본능일는지도 모른다. 놀이계단에서부터 고층 아파트까지 날이 갈수록 계단을 늘여나가는 것 또한 인간의 욕망일 것이다.
구약성서에는 인간이 벽돌을 구워 하늘 꼭대기까지 바벨탑을 쌓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탑을 쌓는 인간의 교만함에 분노한 신이 인간에게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해 공사를 중단시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버즈 두바이의 800m가 넘는 첨탑은 어떻게 되는 걸까. 신이 양해하는 탑의 높이는 얼마나 되는 걸까.
오늘도 손녀는 미끄럼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아이를 보며 지난 주 마이산을 올랐던 기억을 떠올린다. 산은 중턱에서부터 까칠한 오르막 계단이 시작되었다. 작심하고 올라온 산이지만 그렇게 많은 계단은 처음 본 것 같았다.
한 때는 세상 모든 계단이 모험일 때가 있었다. 길이 험하면 험할수록 가슴이 뛰었던 시절이었다. 등산의 기쁨은 정상에 올랐을 때 가장 크다. 정상은 언제나 길고 힘든 산계단을 필요로 한다. 젊은 날에는 반갑고 신나던 계단이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겁도 나고 영악해져서 되도록 피하고 싶은 계단이 되었다. 나는 슬그머니 계단을 피해 옆길로 접어들었다.
아이가 미끄럼틀 계단 끝까지 올라갔다. 계단이 끝난 지점에서는 미끄럼을 타고 내려와야 한다. 네 살짜리에게는 무리이다. 아이는 저 스스로 올라간 까마득한 거리에 놀라서 “할머니이 ~”구원을 요청한다.
나는 놀라서 아이에게로 달려간다.
7. 그 시절 /김치주
내가 어릴 적 사람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배고파라, 배고파라” 길거리에서 아우성이었다. 쥐들은 보리쌀독 에 들어갈려다 덫에 갇혀 “찍찍” 소리가 들려오고, 거름 뱅 이들은 빈 강통만 “쩔렁 절렁” 울리고 다녔던 그 시절,
1995년 춘삼월에 나는 색동 치마저고리를 입고, 가슴에 이름표를 달고,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태어나 첫걸음을 딛는 학교는 풍월을 울려 어깨춤이 덩실 덩실 춤을 출 듯이 기뻤다.
그 시절에는 쓰 나미가 밀어 닥쳐 온 듯 전쟁의 후유증도 한몫했다. 집집마다 가난의 도가니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엄마는 저녁에 보리쌀을 삶아 소쿠리에 퍼 담아 높은 곳에 얹어두었다.
아침이 되어 보리쌀 소쿠리를 내려 엄마는 “아연질색” 하고 말았다. 밤사이 쥐들은 보리쌀 소쿠리를 이빨로 깔 가 구멍을 내었다. 쥐들은 횡제를 만난 듯 허기진 배를 채우고, 새까만 똥까지 싸놓고, 온통 지저분하게 사람이 먹을 수 없도록 해놓고 갔다.
2학년이 되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쥐꼬리를 가져오라는 숙제였다. 나는 엄청 걱정이 되어 조부님께 쥐를 잡아 꼬리를 끊어 줄 것을 부탁드렸다.
우리 집 들어오는 길목에 오두막집에 할머니와 손녀가 살고 있었다. 조부님을 따라 그 집에 갔다. 할머니께서는 쥐를 잡아 내장을 빼내고, 배를 갈라 적수에 굽고 있었다. 코에는 구수한 냄새가 났어도 쥐를 떠올리면 징그러워 소름이 끼쳤다. 조부님은 그 할머니가 쥐를 잡아먹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쥐는 사람과 더불어 가장가까이하며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고, 있는 포유동물이다. 쥐를 구워먹고,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와 손녀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쥐를 잡아먹었던 것 같았다. 조부님은 할머니께 쥐꼬리를 2개 얻어 손에 쥐고 가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 차라리 선생님께 손바닥을 맞을 것이라며 뛰쳐나갔다. 집으로 돌아오신 조부님은 종이에 돌돌 말아 주셨다.
짝궁이 쥐꼬리를 구하지 못하여 선생님께 손바닥을 맞게 생겼다. 나는 짝 궁에게 쥐꼬리 하나를 가져가라며 펼쳐주었다. 여자아이들은 부모님이도와주지 못하면 가져갈 수 없었다.
그때 당시에는 선생님의 회초리는 무서웠지만. 정직성을 가르쳐주는 사랑의 매라고 할 수 있다. 지금쯤은 선생님께서 타게 하셨는지! 짝 궁 이 무엇 을 하고, 지내는지 궁금하다.
그 당시 어려웠던 시절이라 굶기가 일수였고, 쥐들만 우굴 거리며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길고양이에게 잡혀 먹히어 “찍찍”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숙제할 것을 까먹어 해질 무렵 정희에게 달려갔다. 수제를 받아 적고, 정희 어머니께 인사를 하기위해 부엌으로 갔다. 정희어머니께선 솥뚜껑을 열고, 물을 부어 아궁이에 불을 지펴 꿀 뚝 에 연기만 모락모락 내는 것을 보았다.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무명치마 앞자락에는 가난의 한이 담겨있는 듯 보였다. 나는 집 앞까지 걸어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밤이 되면 천정 속에서 쥐들은 스르르 지나가는 소리는 밤이 새도록 들려와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하루는 다른 날 보다 달리 “짜 그랑 짜 그랑” 쥐들이 무엇을 굴리고, 갈 가 먹는지.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조부님은 밖에 나가 긴 막대를 들고 들어오셨다. 쥐들을 쫓아내기 위해 ‘툭툭’ 쳤다. 천정이 후두 둑 뚫어지면서 ‘툭’ 하고 종이부스러기 돈 조각 이 온 방에 뿌려졌고, 돈은 너들 너들 찢어진 것도 있었다. 조부님은 돈 뭉치를 들고 삼촌에게 달려갔다. 깜짝 놀라는 삼촌을 보며 나는 “제 스쳐 에 웃음보가 터졌다.” 천정 속에 숨겨둔 돈뭉치는 삼촌이 범인이다.
정부에서 쥐 잡는 날을 정해놓고, 집집마다 동장을 통해 쥐약을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저녁 먹은 후 일제히 쥐약을 놓고, 아침 일찍 치워 줄 것을 당부했다.
어느 날 낮 시간이었다. 옆집 영철이엄마가 통곡을 하며 울고 있었다. “이 일을 어찌 하노?” 하는 소리는 엄마 소리였다. 세 살 박이 영철이 가 살금살금 걸어 다니다 쥐약을 밥에 어깬 것을 주워 먹었던 것 같다. 영철이 엄마는 아침에 치워야 했지만. 깜박 잊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내 동무 동생도 쥐약에 으깬 감자를 주워 먹고 있는 것을 빨리 보고 동무엄마가 입을 씻어내어 다행이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말하는 언어에 문제가 생겼다.
그 시절에는 우리나라가 농업이 전부였고, 농촌이 복지와환경이 전부였다. 국민소득 100달러도 못 미치는 수준 이었고, 또한 농민들은 하늘 만 쳐다보며 비가 내려 줄 것을 빌며 농사를 짓고 있었다. 일 년 내 농사를 지었지만. 흉년이 들어 봄이 되면 식량이 떨어져 장래 쌀을 내어먹고, 가을이 되면 갚는 것이 “보릿고개라고” 불렀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이었다. 학교 가는 길목에 포장을 줄지어 쳐놓고,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이 살고 있는 집은 “열차동네”라고 불렀다. 아침마다 열차동네를 지나가는 중 “배고 파라 배고파라” 외마디소리가 들려왔지만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고, 지나갔다.
어느 날 아침에 그곳을 지나는 중 아이들은 돌아가신 엄마시신을 흔들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가슴이 메어 지듯 아파 가방에 들어있는 점심도시락을 꺼내어 아이들에게 먹어 라고주고, 학교로 갔다. 점심시간이 되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도시락을 꺼내어 밥 한 숟갈 떠다가 “너는 왜 점심을 먹지 않니?" 라고 물었다. 선생님께서 점심을 나에게 줄까봐 밖으로 나가버렸다. 수업이 끝나자 배가고파 빠른 걸음으로 재촉하였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허기가 져 눈에는 개똥벌레가 보이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대문 앞에 들어서자 마침 보리쌀 삶아 소쿠리에 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릇을 가져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삶은 보리를 담아 물을 부어 된장과 함께 정신없이 먹고 났더니 살 것만 같았다.
내가 어릴 적 아침마다 찌그러진 깡통을 들고, 동량하러오는 거지는 평균 세 사람 네 사람이 “밥 좀 주소” 하며 들어왔다. 할머니께서는 수저를 밥그릇에 얹어놓고, 거지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한 숟갈 두 숟갈 깡통에 넣어 주다가보면. 할머니 조반은 없었다. 일하는 사람에게 누렁 지 끓여오라고 하셨던 말씀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때 그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고, 지금은 배불러 못 먹겠다. 요즈음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
8. 도로를 새로/이원희
내 고향에 숙원 사업이 하나 있다. 그리 크지 않은 사업이지만 햇수로는 오래 되었다. 그것은 찻길을 새로 만들어 내는 일이다. 찻길의 목적지는 금촌 제2교에서 출발하여 금호서원까지 가는데 있다. 이 길 내는 일을 가끔 내 큰집과 작은집 그리고 이웃에 이야기해도 반대하는 이가 없다. 이 지역의 재령이씨 크고 작은 종친모임이나 인근의 여러 다른 큰모임에 참석하여 여러 사람에게 이 취지를 설명해도 모두가 찬성이다. 반대도 없고 모두가 좋다하지만 이 일에 선뜻 앞서 추진하는 사람이 이제껏 없었다.
금호서원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우고 경상우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른 동계 이운용 장군과 어모장군 이백신의 영정을 받들어 모시고 임금의 사령장인 교지와 임금이 공경하여 신하에게 내리는 격려 편지인 상장 등을 보존하는 곳이다.
이 서원은 현재 재령이씨 지암종중 소유로 천구백구십오 년 유월 십구 일 경상북도 문화재 재료 삼백팔 호로 지정되고 관리되고 있다. 이 서원 아래에 오래된 용호사가 있고 청도군 안에서 저수지로 제일 크고 아름답다는 풍양지도 있다. 저수지의 맑은 물은 주변 야산이며 크고 작은 소나무들과 어울려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 볼수록 마음이 편해진다. 이곳을 찾는 연간 방문객이 수천 명에 이르고 인근지역 논밭 경작자가 수십 명에 이르나 여기에 안전한 도로가 없어 불편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불편을 안타깝게 여겨오던 불초 소인이 조금 용기를 내어 길 내는 일에 한번 부딪쳐 보기로 마음을 다졌다. 내가 어릴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길을 가끔 걸어보면서 느낀 점과 족친들에게 들은 것을 바탕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계획을 세웠다. 크게 세 가지 방법이다. 첫 번째는 금촌 제1교에서 작은 대월산 동편으로 길을 내는 방법이고 두 번째는 금촌 제1교에서 작은 대월산 서편으로 길을 내는 방법이며 세 번째는 금촌 제2교에서 풍양지 제방 아래로 길을 내는 방법이다. 그 중 거리가 가장 짧고 직선에 가까운 세 번째 방법을 정하고 도로의 너비는 팔 미터 정도가 돼야 한다는 내용이다.
현재 금호서원으로 가는 길 가운데 좁은 농로와 험한 산길을 합하면 삼백 미터 정도이고 그 나머지 삼백오십 미터 정도는 풍양 지 둑길이다.
농로와 작은 대월 산 아래 산길은 험하고 좁아도 아쉬운 데로 쓸 수는 있지만 못 제방 상판 길은 매우 위험하다. 이 좁고 위험한 길을 조심하면서 다녀도 크고 작은 사고가 심심찮게 났다.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길바닥으로 넘어져 몸을 다쳐 불구가 된 사람도 있다. 몇 년 전에는 농사밖에 모르는 내 일족이 못 둑 경사 길에 경운기를 몰고 가다 제방 아래로 굴러 떨어져 세상을 버리고 일찍이 저세상으로 간 안타까운 일도 있다.
이에 좁은 길은 넓히고 험한 길은 다시 고치고 위험한 둑길은 둑 아래 농지를 이용하여 새롭고 안전한 도로를 만들어 달라는 정책제안서를 이천십육 년에 청도군에 내어 놓았다. 제안을 내고 몇 개월이 지난 그 다음 청도군 정책자문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여 정책제안에 대한 모음집을 받아 봤다. 도로 개설비가 십이억, 보강 토 옹벽 조성비가 일억 오천만 원 정도 든다한다. 사업 시행 시 문제점으로는 풍양 지 둑 하단 부분에 도로신설은 성토고가 구 미터 가량으로 다짐 등 구조상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사업비 증가와 주위 경관 훼손이 우려되며 사업효과를 감안할 경우 투자사업비 대비 경제성이 부족한 것으로 사료된다는 답변이다. 이러한 답변결과를 지역의 여러 사람들에게 가끔 설명하고 그에 대한 의견을 듣는 기회도 가졌다. 내가 하는 일에 격려도 있었고 그에 덧붙여 혼자 추진하기 힘든 사업이니 다시 힘을 모아 추진하자고 입을 모았다. 적극적인 의견에 맞추어 조금 더 큰 도로 사업계획을 세우고 이번에는 국정을 다루고 유능한 지역 국회의원에게 이 일을 부탁하기로 했다. 길을 내는 세 가지 방법 가운데 사업 시행기관이 그 중 가장 좋은 방법을 선정하는 조건에 금호서원까지 길은 팔 미터로 확장하고 그와 아울러 풍양 못 수변 약 삼천 미터는 삼 미터 너비로 둘레 길을 만들어 달라는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계획에 따라 제안서를 작성하고 지역 지구당 사무소에 연락을 취했다. 먼저 국회의원을 만날 날을 잡고 그에 맞추어 제안서를 가지고 같이 갈 사람을 선정했다. 고향의 전현 동이장과 나의 집안 동생이며 나는 금년 시월 일일 사무소에서 국회의원을 만나 제안서를 내어 놓았다. 국회의원은 제안서를 소상히 읽고 난 후 그동안 서원경과에 대해 몇 가지를 묻고는 이것을 경상북도 문화 관광 업무분야에 전하겠다고 밝혔다.
조금 시간이 걸려도 이 도로가 완성되면 먼저 인사사고를 예방하고 인근농민들이 좋아할 것 같다. 이와 아울러 날로 늘어날 관광객과 둘레길 걷기 하러 오는 사람들이 지역경제를 어느 정도 살릴 것이다.
9. 항일열사 정학이 탄신 백 주년 행사 /정치돈
녹음이 우거진 오월의 어느 날, 문중 족질(族姪)이 오랜만에 찾아왔다. 거실에 안내하여 수인사가 끝나고 커피 한잔을 접대하는데 “금년 9월 2일이면 정학이 어른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기념식을 거행했으면 해서 할아버님께 의논 차 들렀다고” 했다.
“그러면 행사 크기와 규모에 소요되는 경비, 인력 동원 등의 문제가 있는데 어디 소신껏 말해 봐라.”
정학이 어른의 유일한 유족은 외손자 라종수(라주인:50세)씨다. 중국 심양에 거주하며 중국 교민의 친목단체의 위원장직으로 있다. 그리고 동국산업의 경영주이기도 하다. 동국산업은 한국, 일본, 아시아 여러 나라에 주방기구를 판매하는 중견기업가이다.
외손자 라종수 씨가 얼마 전에 족질을 찾아왔다고 했다. 정학이 외할아버지가 올해로 탄신 100주년이 되니 모교인 화원 초등학교에서 행사를 거행했으면 하더라고 했다. 족질은 행사를 주관할 만한 인물이 없어 생각해 보니 아저씨께서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어 왔으니 하락해 달라고 했다. “외손자 라종수 씨가 행사비로 3000만원을 내어 놓겠다 하니 아저씨가 행사추진위원장이 되어 문중 행사로 거행하면 아니 되겠습니까” 했다.
나는 “ 그렇다먄 내일 당당 문중 임시 회의를 소집해서 가부를 결정하자.”고 했다. 마침 라종수 씨가 대구에 와 있으니 한번 불러서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다. 그러면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되었는지 30분 후에 알리앙스 예식장 앞에서 만나서 데리고 오겠다고 하고는하고는 나가버렸다.
서가에서 보첩을 내어 정학이를 찾아보니 동래 29세손으로 나보다 한 항렬 낮고 후손이 절손되어 있길래 페이지를 접어놓고 손님 맞으러 나갔다.
잠시 뒤에 중년 한 분이 족질이 함께 집으로 왔다. 처음 그를 대하니 건강한 체구에 날카로운 눈빛이 보지도 못한 ‘학이 열사’를 연상케 했다. 그간의 상항을 물으니 “어머니 권 여사는 일찍 작고하시고 일남 이녀의 남매가 무척 고생하여 자라 오늘에야 훌륭한 정가의 외손이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돈 있으면 무엇 합니까? 사람답게 살아야지요. 오늘 귀국한 이유도 행사 문제로 귀국했습니다. 아무쪼록 할아버지께서 행사를 주관하세요.” 하면서 1000만 원 짜리 수 표 한 장을 꺼내어 놓고 일어나 큰 절로 넙죽 절을 하면서 명함 한 장을 꺼내어 나를 당황하게 했다. 이 친구 기개가 대단하구나 싶었다.
“좋다. 우리 정문의 행사로 끝나지 말고 사회 기념장으로 하자!”
그렇게 약속하고 추후 귀국할 때마다 인사차 방문하겠다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이튿날 원호정에 찾아가서 정학이 열사의 문건을 찾아보니 1991년에 건국훈장 제2769호에 추서(追敍)되었고, 현재 대전현충원 애지묘역(愛志墓域) 제405호에 안장(安葬)되신 국가가 인정하는 독립투사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독립투사를 배출하고도 문중에서도 모르고 있다니 이건 말이 아니었다. 보배 같은 보첩도 아무소용 없다. 나는 남은 생을 모두 문중에 바치겠다는 의지가 타올랐다.
다음날 달성군의 김문호 군수를 찾아가서 그간의 사연을 말하고 행사에 지원해 줄 것을 부탁했다. 군청에서 2,000만원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그 자리에서 받고, 추모집을 만들어서 1,000권을 군에다 보내주면 각 면에다 배부하기로 했다. 당일 인력동원까지 약속을 했다.
다음으로 대구시교육청에 우동기 교육감을 찾아갔다. 향교에 자주 들리는 구면이라 수인사를 끝내고 그간의 전말을 이야기 하면서 지원을 요청하니 “참 잘하시는 일이다!” 하면서 학교시설 사용과 행사에 필요한 모든 기구들을 사용토록 할 테니 걱정 말고 화원초등학교 교장을 만나보라고 했다.
그 후 여러 날 동안 노구를 이끌고 경찰서, 농협, 재향군인회, 총동창회장, 전후장병유족회, 군에 출장 나와 있는 각 신문기자단을 만나 행사의 취지를 알렸다. 6~7월의 더위에 지칠 대로 지쳐 녹초가 되어 귀가해보니 중국에서 보약 한 첩이 배달되어 있었다. 난생처음 행사추진위원장이 되어 큰 행사를 주관하는 거라서 혹시 미진한 데가 없나 살피고 살펴 무사히 행사를 마무리 하였다. 몇 년 전 회사를 경영해 본 경험이 오늘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옛 고언에 늙어죽을 때까지 배워도 끝이 없다는 말이 새삼 생각나서 하늘을 향해 긴 호흡을 하고 큰 웃음으로 모든 일을 종결하였다.(2017.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