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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조앙사는 1562년 진묵조사가 탄생한 지역이어서 ‘진묵사’라 하여 조사전에 진묵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조앙사의 절은 1915년 진묵조사를 숭앙하기 위하여 절 이름을 조앙사라고 하면서 창건되었다. 당시는 대웅전만 있었으나 1925년에 요사를 짓고 1928년에는 칠층석탑을 세웠다. 1958년 종각을 짓고 이어서 1962년에 삼성전을 새로 지었는데, 삼성전을 허물어지고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1977년에는 그전의 대웅전을 헐고 새로 지었다. 한편 절 근처인 화포리 385번지에는 진묵조사의 영정을 모신 진묵사가 있다. 이 절은 실질적으로 조앙사의 조사전 역할을 하고 있으며, 현판도 ‘진묵조사전’으로 되어 있다. 진묵사는 처음 1928년에 창건되었고 그뒤 1930-1940년대에 만경현의 동헌 건물을 이곳으로 옮겨다가 지었다. 또한 화포리 388번지에도 조앙사와 관련 깊은 성모암(聖母庵)이 자리하고 있다 |
동진수리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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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시간 : 평일 09:00 ~ 18:00 까지 입 장 료 : 무료 소 유 자 : 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소 장 품 : 수리농경 생활용구 및 민속자료 위치 : 농협시지부 <-> 시립도서관
이 고장은 2천년전 벽골제를 축조했던 도작문화의 발상지로서, 수리사의 맥락과 농경의 숨결을 이어왔다. 시대의 변천과 문명의 이기에 밀려 차츰 기억속에서 사라져가는 수리, 농경, 생활 용구와 민속자료 등을 모아 이곳에 우리나라 최초로 수리민속박물관을 차리고 문을 열었다. 옛것과 새것이 교차되는 근대화의 길목에서 온고지신의 기풍을 진작하여 문화유산을 소중하게 가꾸어 농경의 발전과정을 한눈으로 볼 수 있도록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이곳을 활용하려 한다. 소장품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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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사
설명 |
귀신사는 금산사에서 모악산 서쪽 고개를 통하여 전주로 넘어가는 길 옆에 있는 청도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의 이 절은 대한 불교 조계종에 속해 있는데 처음 세워질 때에는 화엄종이었다고 한 다. 일반적으로 이 절은 의상대사(義相大師)가 문무왕(文武王) 16년(676년)에 세운 것으 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귀신사에서 이 절에 관하여 여러가지 조사를 하고 있는 박희선(朴熙善)씨는 백제 법왕(百濟 法王) 때 왕실의 내원사(內願寺)로서 처음 세워졌다고 주장 한다. 그 근거로써 귀신사 경내에 있는 석수(石獸)의 남근석(男根石)을 들고 있다. 이 절의 이름은 국신사(國信寺), 귀신사(鬼神寺), 구순사(狗脣寺) 또는 귀신사(歸信寺) 등으로 불렸는데, 각각의 이름이 어느 시기에 그렇게 불렸는지 알 수 없다. 현재 절에는 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인 3층석탑을 비롯하여 지방유형문화재 제64호인 석 수와 지방유형문화재 제63호인 부토(浮屠) 등의 석조물이 있으며, 건물로는 보물 제 826 호인 대적광전(大寂光殿), 명부전(冥府殿) 그리고 한 채의 공양 집이 있다. |
찾아오시는길 |
도로안내 : 1) 전주에서 - 금산사 방면 712번 지방도로 - 원청도 마을 2) 호남고속도로 금산사IC - (2.5km) - 원평지서 삼거리(좌회전) - 금산사 방면 712번 지방도로 - (4.2 km) - 금산사 입구 바로 못 미처 왼쪽으로 712번 지방도로 -(2.9km)-청도리 - 좌측으로 300m 거리(시멘트길) 3) 김제에서 전주방면 712번 지방도로로 22km가면 원청도 마을 4) 모악산도립공원(금산사 방면)입구에서 도보 5km 현지교통 : 1)전주에서 금산사행 버스 이용, 귀신사에서 하차/ 30분 간격 2)김제-청도리행 완행버스 이용/1일 6회 운행/ 50분 소요 |
금산교회
설명 |
금산교회는 1908년 4월에 건립된 ㄱ자형 교회건물로써 내부구조는 잘 보존되었으나 건물 외부는 기와 및 벽체가 변형된 듯하며 현재는 방치된 상태다. 금산교회는 미국 데이트 선교사가 이 지방의 조덕삼, 이자의 등과 함께 1908년에 세웠다. 내부구조는 초대교회의 ㄱ자 모양으로 남쪽에는 남자 석, 동쪽에는 여자 석으로 나누어져 예배를 보았으며 상량문 남자 석은 한문(漢文)으로, 여자 석에는 한글로 성경 구절이 씌어 있으며, 당시는 주변의 교회 중 교세가 가장 컸다고 전한다. 이 교회의 특징은 그 당시만 하더라도 남녀가 한 자리에서 서로 얼굴을 맞댈 수 없었던 까닭에 금산교회는 이 뿌리 깊은 남녀유별이란 과제를 ㄱ자형의 교회 평면을 차용하여 건축해법으로 해결했다는 점이다. |
금산사
설명 |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모두 소실되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을 인용하여 사적기(事蹟記)가 만들어졌는데, 금산사의 창건은 599년(백제 법왕 1)에 왕의 자복(自福)사찰로 세워진 것이라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지금까지 전하는 바는 진표(眞表)가 762년(신라 경덕왕 21)부터 766년(신라 혜공왕 2)까지 4년에 걸쳐 중건(重建)하였으며, 1069년(문종 23) 혜덕왕사(慧德王師)가 대가람(大伽藍)으로 재청하고, 그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이라는 대사구(大寺區)를 증설하여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대도량(大道場)이 되었다. 1598년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미륵전(彌勒殿)·대공전(大恭殿)·광교원(廣敎院) 등과 40여 개소에 달하는 산내 암자(庵子)가 소실되었다. 그러나 1601년(선조 34) 수문(守文)이 재건의 역사(役事)를 벌여 1635년(인조 13)에 낙성을 보았다. 고종(高宗) 때에 이르러 미륵전·대장전(大藏殿)·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보수하고, 1934년에 다시 대적광전·금강문(金剛門)·미륵전 등을 중수하였다. 금산사와 인연이 있는 고승(高僧)은 혜덕왕사(慧德王師) 이외에도 도생승통(道生僧統)·원명(圓明)·진묵(震默)·소요(逍遙)·남악(南嶽) 등 대사가 거쳐 갔거나 죽거나 하였다. 주요 건물로는 미륵전(국보 62)·대적광전(보물 476)·대장전(보물 827)·명부전(冥府殿)·나한전(羅漢殿)·일주문(一柱門)·금강문(金剛門)·보제루(普濟樓) 등과, 방등계단(方等戒壇)·5층석탑(보물 215)·6각다층석탑(보물 27)·석련대(石蓮臺:보물 23)·석종(石鐘:보물 26)·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28)·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보물 24) 등이 있다. |
단야각
설명 |
신라 제38대 원성왕 때, 김제 태수는 토목기술자인 원덕랑과 자신의 딸 단야를 맺어주기 위해 원덕랑의 약혼녀를 용의 제물로 바치려 한다. 그러나 이를 먼저 안 단야는 아버지의 살인을 막고 원덕랑이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용의 제물이 되었다. 이러한 단야의 효심과 희생정신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단야각과 단야루를 세웠으며 영정도 모시게 되었다. |
동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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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면 청도리 증산교 앞의 금평저수지를 옆에 끼고 제비산에 위치한 작은 공원으로 동심원은 1994년 음력으로 3월 3짓날 (당시 양력으로 4월 13일)에 개막식을 올렸는데 개막식 날짜는 1994년이 동학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이고, 4월 13일은 예전 일제치하에서 있었던 우리나라의 상해임시정부 수립일 기념일이라는 뜻깊은 의미를 가진다. 개막식 날짜 하나만으로도 가진 의미가 여럿인 것처럼 이곳은 각종 수석과 나무, 역사적 기념물과 조선영토회복기원비석을 두어 지난 역사의 의미를 되새기고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대한 도움이 되고자 하는 글들이 많은 곳이다.
동심원 중앙에는 충주댐 건설 당시 발견한 대형 수석 두개가 서있는데 마리아상과 부처님상을 꼭 빼닮아 이 곳이 편파적 종교 문화에 치우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제공하고 생각할 기회를 주고자 함을 드러낸다.
또한 한 쪽 귀퉁이에는 여러가지 무늬를 띠고 있는 투박한 옛날 항아리들이 모여있는 데 이것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김치 맛을 흉내내기 위해 김칫독을 수입해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약하나마 우리것의 유출을 막아보고자 모아두었던 것이라고 한다.
온고지신, 유비무환, 충효예 등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어떤 정신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를 돌에 새겨 둘러보면서 그것들을 읽어보고 지나온 자신의 나태한 삶을 반성하고 새로운 의욕을 다짐하도록 의도한 글들이 곳곳에 위치한다.
또한 약간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서 문관석 모양을 한 12상을 볼 수 있으며 마지막 계단은 미래의 주역이 되는 아이들의 교육을 생각하자는 뜻이 담긴 작은 맷돌들이 펼쳐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위엔 항상 정화수를 떠놓는 대형 비석이 있는데 이것은 옛날 만주지방까지 뻗어나갔던 조선의 영토 회복을 기원하는 대형 비석이었다.
또한 이 비석은 소유자가 의도하여 비석의 윗부분에 조선의 영토 모양을 새겼으나, 일부러 새겨놓은 지도모습과 흡사한 모양이 그 비석의 아랫부분에 똑같이 나와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경건함을 안겨주고 있다. |
망해사
설명 |
망해사는 김제에서 서북방 약27km 지점에 있으며 심포 어항에 이르기 1km 전방에서 오른쪽 언덕바지 진봉산 능선따라 올라가 고개 너머 왼쪽으로 즉 큰길에서 약500m지점 정도를 내려가면 깎은듯이 세워진 기암괴석 벼랑위에 망망대해 서해의 파도가 출렁이고 고군산열도가 내다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어 이름 그대로 망해사이다. 전하는 바로는 이곳은 본시 섬이었다 하여 642년(백제 의자왕 2년)에 부설거사가 까닭이 있어 이곳에 사찰을 개창하여 수도하다가 입적하신 곳이라 하며 그 후 754년(경덕왕 13년)에 당나라의 중 중도법사(일명 통장화상)가 중창하였으나 조선조에 들어 많은 수난을 당하였다. 그 뒤 인조대왕 때 만경 불거촌출신인 고명한 화상인 진묵대사가 재건복구하여 크게 번창하였는데 그 때가 망해사로서는 최강전성기였으며, 그 후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망해사 경내에는 보광명전 낙서전 칠성각 요사 그리고 4개의 부도가 있다 창건시기 : 642년 (백제 의자왕 2) 창 건 자 : 부설거사
낙서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8호 (지정연도 : 1986년 9월 8일)
망해사 편액은 낙서전에 걸쳐있어 그 역사의 일부를 엿볼 수 있으며, 낙서전은 비록 규모가 작으나 이익공집으로 초가지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고 구식 한와로 지붕을 덮고 있다. 이 낙서전은 1589년(조선 선조 22년)에 진묵대사가 처음으로 세웠고 그 후 1933년과 1977년에 중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불로 아미타불좌상(불신고58cm, 슬폭48cm, 좌대고18cm, 폭57cm) 우측 부처상으로는 관세음보살상(불신고58cm, 슬폭33cm, 좌고13cm, 폭40cm)을 모셔놓고 있는데 규모는 작지만 연화좌대위에 안치된 좌상으로서 조각의 수법이 기묘하다. 건물의 외형은 팔작지붕의 ㄱ자형으로써 앞으로 한 칸 나온 부분에는 마루가 놓여있고 그 위에 근래에 만든 종이 걸려있다. 또한 건물의 오른쪽에는 방과 부엌이 딸려 있어서 원래 이 낙서전은 법당 겸 요사로 사용되었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낙서전 맞은 쪽에는 노거수가 2그루 있어 망해사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봉수대 서해에 접하고 있는 봉화산 꼭대기에 봉화대가 설치되어 있다. 진봉반도 서남쪽 육지의 맨 끝부분에 있는 해발 50 - 60m 높이의 산인데 산아래 (서남쪽)는 황해이고 서북쪽은 만경강 입구, 동남쪽은 동진강 입구이다. 따라서 오직 동북쪽으로 만경강 연안에 봉화산 높이와 비슷한 산들이 줄지어 서 있을 뿐이고 동쪽으로는 진봉평야가 하나로 이어져 호남평야를 이루고 있다. 봉수대의 상단좌대는 가로 6m, 세로 10m의 직사각형이며 서북쪽과 동북쪽은 능선이 있고, 좌우는 절벽이다. 그리고 산꼭대기의 넓이가 100평 정도인데 세계단으로 단위 모형을 나타내어 특징이 있다. 확실한 축조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우리나라 봉수대를 설치한 것이 고려시대라고 할 때, 이 곳 봉수대의 축조도 고려시대로 보아야 될 것 같다. 봉수는 횃불과 연기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방법으로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에는 횃불을 올려 신호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이 방법을 사용한 것은 아주 오랜 옛날이었으나 법을 만들어 이 제도를 실시한 것은 고려 의종 3년(1149년) 서북면 병마사 조진약이 임금께 아뢰어 실시하였으며, 조선 세종 때 정식으로 봉수제도를 마련 하였다. 봉수제도에서는 평상시에 하나, 적이나타나면 둘, 적이 국경에 가까이 다가 오면 셋, 적이 국경을 넘으면 넷, 우리 군사와 적군이 싸우면 다섯 개의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한편 봉화산의 봉수대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일반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라고 말썽이 일어나자 이것을 계화도로 옮겼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
모악산도립공원
설명 |
금산사, 귀신사, 수왕사, 대원사 등을 품은 모악산은 높이 793.5m로 김제평야의 동쪽에 우뚝 솟아있어 호남평야를 한눈에 내려다 볼수 있다.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호남 4경 의 하나로 경관이 빼어 나고 국보와 보물 등 문화재가 많다. 특히 이곳에는 백제 법왕 원년 (599년) 에 세워지고 10여 점의 각종 주요문화재를 갖고 있는 금산사가 자리하고 있어, 찬란 한 불교예술을 살펴 볼 수 있으며 모악산을 넘으면 동남쪽 중턱에 대원사, 수왕사 등 사찰이 있고 서쪽으로 귀신사가 있으며, 금산사 입구 금평저수지는 낚시터로도 적당하다.
특히 모악 산은 예로부터 미륵신앙의 본거지로 여겨져, 증산교의 본부와 더불어 30~40년대 각종 신흥종교 집단지로도 관심을 끌어 기록에 의하면 모악산 기슭에는 대원사, 귀신사, 수왕사 등 사찰 을 비롯 무려 80여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등산을 하려면 금산사를 벗어나 심원암 뒤쪽의 능선을 따라 오른다. 봄철이면 정상까지 진달래가 만발해 꽃구경을 하면서 오를 수 있다. 정상에서는 김제평야와 만경강이 시야에 들어오고 전주시와 운장산도 보인다. 주차장에서 일 주문에 이르기까지 벚꽃터널도 장관이다. |
벽골제
설명 |
벽골제는 우리나라 최고최대의 저수지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 흘해왕 21년(330) 벽골제를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330년은 이 지역이 백제 영토로 추정되므로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오기(誤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벽골제 축조시기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통일신라 원성왕 6년(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 때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 15년(1415)에 다시 쌓았으나 세종 2년(1420)에 심한 폭우로 유실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진농지개량조합에서 이 제방을 관개용 수로로 개조함으로써 그 원형이 크게 훼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단지 내에 제2수문 장생거가 있으며 제방을 따라 남으로 약 2㎞ 내려가면 제4수문 경장거를 만날 수 있다. 벽골제는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로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 획기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벽골제 제방 및 조선시대에 건립한 벽골제 중수비(重修碑)가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어있다.
현존하는 두 수문, 장생거와 경장거 전장(全長) 약 3㎞에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 총 5개의 수문(신증동국여지승람 참조)이 있었으나 지금은 제방 및 제2수문 장생거와 제4수문 경장거가 남아있다. 벽골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농경사회에서 치수(治水)의 기능을 헤아려야한다. 전통농경사회에서 치수는 식량생산에 절대적 요소로 생존의 문제이자 국가존속의 문제였다. 대규모 수리시설은 국가기간시설이었으며, 왕의 권능은 치수자로서의 기능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벽골제는 제방을 쌓는데만 연인원 32만여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산되며 이밖에 수문 및 하천 공사인원은 훨씬 증가한다. 당시 사회규모와 인구수 등을 고려하여 생각한다면 벽골제의 축조·유지·수축공사가 얼마나 거대한 국가단위 사업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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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전시실 농경의 기원 농경의 기원은 인류 문명의 기원과 궤적을 같이 한다. 벼농사의 전래 및 선사시대의 농기구로부터, 각종 재래 농기구와 농점, 농서, 농가월령가 등의 전시를 통해 한반도에서의 농경문화의 일단을 보여주는 전시실이다.
제2전시실 수리의 역사 벼농사는 집약적 관개농업이므로 고도의 수리시설의 이용은 필수적이다. 본 전시실에서는 수리농기구의 종류 및 수리시설의 발달을 입체적 모형을 통해 전시하며,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수리시설의 변천과정을 통해 수전농경문화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제3전시실 수전농경의 요람 벽골제는 지금으로부터 약 1700여년전 축조된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대규모의 수리시설이다. 벽골제의 연혁과 규모, 축조과정과 함께 벽골제라는 대규모 수리시설의 축조가 가능했던 백제의 문화를 살펴보고, 벽골제 발굴조사의 현황을 자세하게 전시하고 있다.
제4전시실 황금들녘 김제 벽골제를 탄생시킨 농경문화의 산실로서 한반도 최대의 곡창인 김제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전시실이다. 긴 세월 동안 김제지역의 명칭 변화 및 국가체제의 변화를 살필 수 있다. 또한 영상실에서는 김제에 대한 시청각 자료를 살펴 볼 수 있다. |
벽천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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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 모 : 벽골제 부지내 1백48평의 건물
개 관 일 : 1999년11월13일 완공 개관 소장미술품 : 한국화 27점, 목물1점, 황해도장 1점,도자기 1점, 소장품화구, 제자 기증품 45점 벽천미술관은 한국적 서정과 미감을 자연과 인간의 만남으로 일치시켜 예술로 승화시키는 독창적 화격과 회화세계를 개척하여 한국실경산수화의 독보적 경지에 다다라 한국화단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벽천 나상목선생의 문화예술혼을 후세에 길이 남겨 문화유산으로 보존할 수 있고 애향의 고장으로서 자긍심 및 애향심 고취에 한 몫 할 것으로 기대된다. 벽천선생은 김제시 용동에서 태어나 1999년 1월 향년 76세로 타계했다. |
아리랑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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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전시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제 내촌.외리 사람들은 생존,독립운동,강제인력수탈,야합 등의 선택과 대응을 통해 하와이, 만주, 연해주, 아시아 및 중앙아시아로 고난의 대장정을 이어간다. 주인공들의 험난한 대장정이 각 부의 줄거리와 함께 시각자료로 제공되며, 영상자료인 <작가의 인사말>은 김제와 아리랑, 작가 조정래를 잇는 중요한 접점으로 관람시 빼놓아서는 안되는 부분이다.
제2전시실 작가연보와 작품연보, 사진으로 보는 작가의 인생 및 취재 시 일용품, 창작의 과정을 좇아 빼곡히 정리된 취재수첩 및 자료노트들이 전시되어있다. 원고 집필 계획표에 빨간펜으로 적어놓은 작가의 말(36년간 죽어간 민족의 수가 400만. 2백자 원고지 18,000매를 쓴다 해도 내가 쓸 수 있는 글자수는 고작 300여만자!)은, 전권 12권의 아리랑을 완성하며 작가가 일제강점기 식민지 민중들의 박탈된 삶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산 기록이다.
제3전시실 가족사진 및 애장품 등을 통해 작가와 주변을 살필 수 있다. 신문기사들, 앨범, 필기구, 안경, 펜, 문진용 자연석, 아버지 시조시인 조종현의 시비(詩碑) 기념사진, 작가 자신이 손수 그린 자화상 및 아내에게 선물했던 펜화, 그리고 작가의 다양한 캐리커처들을 볼 수 있다. |
증산교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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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법종교 본부는 1949년 증산도 교주 강일준(강증산)부부의 무덤을 봉안하면서 형성된 종교성지로써 묘각인 영대와 증산미륵불을 봉안한 삼청전을 비롯하여 1950년대 지어진 많은 건물들이 있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사회적 안식처를 구하던 구 한말 모악산 일대의 사회 종교운동을 보여주는 장소로 토착신앙 연구와 더불어 근대 민족종교의 흐름을 보여주는 유적지이다.
영대 성령이 내왕하는 곳이라하여 영대(靈臺)라 칭하였으며, 1952년 10월 10일에 준공된 고전식 목조 2층 건물이다. 이곳은 산상제, 정씨성모의 유해를 봉안한 성묘원이다. 삼청전 1949년 증산도 교주 강일준(강승산) 부부의 무덤을 봉안하면서 형성된 종교성지로서 묘각인 영대와 증산미륵불을 봉안한 삼청전을 비롯하여 1950년대 지어진 많은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
천주교수류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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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의 호남에는 3개의 성당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천주교로 귀의시켰다. 되재(升峙완주군 화산면), 나바위(羅岩:익산군 망성면 화산리), 수류(김제시 金山面 禾栗里) 본당이 바로 그것이다. 노령산맥의 주봉인 모악산과 상두산 국사봉에 둘러싸인 수류본당은 라끄루신부가 확보한 대지위에 2대 페네 신부가 48간의 성당을 1907년에 건축하였다. 시골에서는 처음보는 웅대한 한국 전통의 건축양식이었다. 1908년에는 仁明學校를 세워 전북 최초의 신식학교로서 한문과 신학문을 가르쳤다. 수류본당의 관할은 김제, 부안, 정읍, 순창, 고창, 담양, 장성까지였다. 3대 투르테신부이후 뤼카, 이상화, 최민순, 석종관 신부를 거쳐 최재선 신부 때에는 원평에 공소를 세웠다. 10대 이약슬 신부 때 해방을 맞았고 김후성 신부 때 6·25를 맞아 유서깊은 구성당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때에 수류는 피난처로 소문이 나서 신부와 수도자들이 50여명이와서 은신하고 있었다. 공산당들은 이들을 잡기 위하여 수류성당의 신도 50여명을 붙잡아서 신부와 수도자들의 은신처를 물었다. 그러나 신도들은 결사의 각오로 성직자들의 숨어있는 곳을 토설하지 않았다. 결국 공산당들은 유서깊은 수류성당을 불질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50여명의 신도들은 공산당에 의해 학살 당했다. 성당이 소실된 까닭에 6.25 이후 10년간인 1960년까지 수류지역의 신자는 김제본당에 소속되었다. 1959년에는 현대식 성당을 재건하여 전주교구 관하의 수류본당을 재건하고 부흥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류는 한국뿐아니라 동양권에서 가장 많은 신부를 배출한 지역으로 이름이 나 있다. 11명의 신부(김영구, 정재석, 서정수, 김반석, 김영일, 범석규, 박영규, 안복진, 박문규 등)와 11명의 수도자를 배출하였다. |
청운사 하소백련
설명 |
먼저 이곳 김제 청하에 위치한 2만여평의 백련(白蓮) 재배지는 새우가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의 곳에 백련지(白蓮池)들이 위치 하였다하여 하소백련지(蝦沼白蓮池)라고 한다. 백련지 안에는 새우의 머리에 해당하는 위쪽으로는 조선말엽 고승 한분이 충청도 계룡산에서 바라보니 서광이 비치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김제 평야의 모서리에 있는 청하면 대청리에 있는 청하산이 있어 여기에 사찰을 짓고 불제자가 되어 중생들을 극락에 인도하기로 마음먹고 건립했다는 전통사찰인 청운사가 있다. 간단히 청운사에 대해 설명을 하면 청하산 자락에 있는 청운사는 1927년 4월 한주석 스님이 다시 창건하고 1931년에 인당(仁堂)스님이 중창하였으며 1938년에 백운(白雲)스님이 보살과 함께 관음보살을 완성하였으며, 조실 벽운스님의 부친 월인당 거사가 관리해 오다가 1948년 부임한 벽운화상이 중창했는데 1968년 연불전을 비롯하여 1970년에는 옛 만경 동헌을(400년건물) 매입.증축하여 대웅전(大雄殿)으로 쓰고 있는데 문화재급 유물로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머리 밑 모통이부분으로 백련지 2만여평과 야생화밭, 100여종에 각종연들을 전시해놓은 미니연지, 수련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경관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전국에 있는 사진 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또한 백련지안에는 백련을 이용한 백련음식전문점 “수자타”가 백련이 피는 6월이면 하소백련축제시작과 동시 가게문을 열어 백련이 지는 9월초순까지 운영이 되어서 이 기간에 이곳에 오시게 되면 여러 가지 백련음식을 이용한 다양한 먹거리(백련자반, 백련잣죽, 백련부침, 백련동동주, 백련칼국수, 백련국수, 백련순대, 백련무침, 백련수육, 백련두부등)들을 드실수가 있으며, 오랜시간과 노력끝에 백련을 이용한 차와 식품을 만드는 생산 시설이 설립이 되어 있다. 하소백련지 백련은 다른 곳에 있는 백련과는 달리 순수하게 청백색만을 나타내는 백련으로써 전국 최고의 백련재배단지로 손꼽히고 있다. 백련은 (동의보감이나 각종자료인용한것) 독성이 없으며 다른 연에 비할 수 없는 향과 맛을 자랑하고 있다. 이곳 하소백련지는 다랭이 논과 같이 위에서부터 계단식으로 펼쳐져 있으며, 작게 나누어져있어 주변뚝을 돌며 여유로이 백련의 향과 자태를 오감으로 직접느낄수 있는게 이곳만의 특징이다. 또한 모든 백련재배는 친환경 유기농법으로 재배가 이루어 지고 있다. (백련은 농약을 하면 말라 죽게 된다) 백련은 6월말부터 ~ 8월까지 늦게는 9월초까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가장 절정인 시기는 7월 10일경부터 ~ 8월초순까지이다. 잠시나마 매연과 메마름에 도심을 떠나 이곳 하소백련지에 오게 되면 기분좋은 백련의 향이 과도한 스트레스로 피로해진 우리들에 마음과 몸에 신선한 기운을 북돋아 줄 것이다. (실제로 대학 연구팀과 성분분석결과 백련의 향은 신경안정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가 나와 있다.) |
도작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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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시 입석동에 있는 월촌동사무소 앞의(김제~부안간 지방도로) 길가에 커다란 입석(立石)이 하나 서 있다. 이 입석은 당산석으로서 지금도 행해지는 입석동 선돌 마을 당산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즉 이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이른바 입석 줄다리기를 하는데 이때에 사용된 동아줄을 이 입석에 감아 두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입석에 감아 둔 동아줄은 한 해 동안 그대로 놓아두며 이 줄에 손을 대면 동티가 난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이 입석은 4각 두리기둥이며 윗부분보다 아랫부분이 조금 굵다. 그 크기는 높이가 210㎝, 두께가 44㎝, 폭 62㎝이다. (폭과 두께는 1m 높이에서 잰 것임) 원 입석(立石) 앞에는 자동차의 왕래가 많은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줄다리기를 할수가 없어서 1991년 12월 이 선돌과 쌍을 이루어 마을의 번영을 기원하고 옛 민속을 오래도록 보존하려는 뜻에 원래의 선돌〔立石〕로부터 북으로 200m 거리에 또 하나의 선돌을 세웠다. 그리고 그 옆에 기념비를 세웠는데, 앞면에는 기념비문이, 뒷면에는 줄다리기 노래가 새겨져 있다. 또한 당산제를 지내는 제단도 하나 만들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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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金山寺)
금산사는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번지, 모악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전라북도 제일을 자랑하는 대가람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년)에 아주 작은 규모로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 경덕왕 21년(762년) 진표율사께서 크게 고쳐 짓고 쇠로 만든 33척의 미륵불상을 모시면서부터 미륵신앙의 근본도장, 그리고 법상종(法相宗)의 본산으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후백제 견훤 왕의 믿음으로 대가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그러다가 고려 문종 33년(1079년) 혜덕왕사(慧德王師)가 주지로 부임하면서 절을 세운 뜻과 전통을 발전시키고자 전체를 대사구(大寺區), 광교원구(廣敎院區), 봉천원구(奉天院區)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고 합리적인 체제를 확립하여 절은 전성기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그 뒤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많은 절들이 왜적들에 의해 불탔지만, 금산 사는 뇌묵, 처영스님을 중심으로 모인 1500여 승병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아무런 재난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6년 뒤인 선조 31년(1598년) 정유재란 당시에는 임진년의 승병활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왜적들에 의해 80여 동의 건물과 40여 암자가 전부 불타버리는 재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선조 34년(1601년)에 이르러 수문대사(守文大師)가 여러 큰 스님들과 함께 절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시작하여 33년만인 인조 13년(1635년)에 오여래(五如來), 육보살(六菩寢)을 모신 대적광전 등 대사구역만 옛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역사를 밑거름으로 금산사는 오늘에 이르렀는데, 최근 주지로 부임한 송월주(宋月珠) 스님도 앞서 말한 큰스님들의 뒤를 이어 절의 규모를 늘리거나 고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1986년 12월 대적광전에 원인 모를 불이 나 전부 타 버렸다. 그러나 1989년부터 다시 짓기 시작하여 1992년 12월 현재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 다시 세워졌으며,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국보 62호 미륵전도 1993년 봄에 보수공사가 완공되어 대가람 금산사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
김제 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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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목조와가(韓式木造瓦家)인 김제 동헌은 동남향으로 앞면 7칸(주간거리 : 각 칸 250㎝), 옆면 4칸(주간거리 : 가운데의 두 칸은 각각 250㎝, 좌·우의 칸은 각각 195㎝)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기둥은 두리기둥이다. 주춧돌은 두 가지 유형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자연석의 윗부분을 판판하게 다듬어 만든 것이며, 다른 하나는 윗부분 중 기둥이 닿는 부분만을 원형으로 조금 돌출시킨 것이다. 앞면과 옆면 둘레의 모든 칸에는 문이 있으며, 이 문의 문살은 띠살로 되어 있다. 축대(築台)는 반듯이 다듬은 화강암 돌을 이용하여 92㎝ 높이로 쌓여져 있다. 건물의 안을 보면 왼편에 앞면 두칸, 옆면 한 칸의 방이 있고 나머지 부분은 마루로 되어 있다. 그런데 방은 원래 그 자리에 온돌방이 있었던 것으로 고증됨에 따라 1984년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김제 동헌의 자세한 연혁(沿革)은 알 수 없지만 1978년에 발간된 한 고문서(古文書)(이것은 김제시 옥산동에 거주하다 몇 년 전에 작고하신 조순기(趙淳紀) 씨가 소장하고 있는 절첩 형태의 고문서로서 그 표지에 "邑例(읍례)" 라고 씌어 있다. 필사년대(筆寫年代)는 1850년대로 추정된다)에 의하면 동헌 건물이 현종(顯宗) 때 세워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이 읍례의 끝부분에 동헌인건강희 6년 정미 4월 민등도호 근민헌 중수강희 38년 기묘 7월 이등세성호 사칠헌(東軒靭建康熙六年丁未四月閔等燾號近民軒重修康熙三十八年己卯七月李等世晟號事七軒)이라 하여 현종 8년(1667년)에 군수 민도(閔燾) (현종 7년 4월부터 동(同) 10년 10월까지 김제군의 군수를 역임하였음)가 동헌을 세우고 이를 "근민헌(近民軒)" 이라 칭하였으며, 그 후 숙종 25년(1699)에 이세성(李世晟)(숙종 24년 9월부터 동 26년 정월(正月)까지 김제군수를 역임하였음)이 이 동헌(東軒)을 중수(重修)함과 아울러 그 명칭을 "사칠헌(事七軒)" 으로 개명(改名)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1981년 김제 동헌을 보수할 당시에 이 건물에서 2개의 상량문이 발견됨으로써 이 동헌 건물의 연혁이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2개의 상량문 중 시대가 앞선 것은 숭정 후 55년 기묘 이등세성시인건 7월 27일 인시 입주 윤 7월 18일 수시상량(崇楨後五十五年己卯李等世晟時靭建七月二十七日寅時立柱閏七月十八日隋時上樑)이라고 쓰인 상량문이다. 이 상량문의 발견은 현존의 김제 동헌 건물이 조선 숙종 때의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또 다른 상량문에는 숭정기원 후 5신사 지군한산 이위재중 건찬 5월 29일 유시견주 6월 17일 인시 상량(崇楨紀元後五辛巳知郡韓山李渭在重建撰五月二十九日酉時堅柱六月十七日寅時上樑)이라고 씌어 있어 고종 18년(1881) 군수 이위재(李渭在) (고종 17년 6월부터 동19년 10월까지 김제 군수를 역임하였음)가 이 동헌을 중건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 동헌(東軒) 건물은 일제시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김제읍사무소로 사용되었으며, 읍사무소가 다른 곳으로 이전한 후부터는 한동안 방치되었다. 그런데 현존하는 동헌으로서 내아(內衙)와 인접해 있는 경우는 김제의 동헌(東軒)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주목의 대상이 되었으며, 근래에 이르러 몇 차례의 보수와 복원작업이 행하여졌다. 동헌(東軒) : 지방의 고을 원이나 감사(監司)·병사(兵使))·수사(水使) 그밖에 수령(守令)들의 공사(公事)로 처리하는 대청이나 집 한식목조와가(韓式木造瓦家) : 뼈대가 주로 목재로 되어 있는 기와집 팔작(짝) 집[八作家] :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달아서 지은 집 |
사적지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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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비는 벽골제방과 함께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는 원래 태종 15년(1415) 벽골제를 중수하고 이를 기념하기위하여 건립한 것인데, 그 비문이 마멸(닳아 없어져)되었기 때문에 숙종 10년(1684년) 8월에 중건되어 신털미산〔草鞋山〕정상에 세워졌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비신이 파손되고 비문이 마멸되자 1975년에 이 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장생거 옆의 제방 위로 옮기고 비각을 설치하였다. 그 후 1980년 벽골제지 정화공사로 인하여 이 비를 제방 아래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비의 크기는 높이 195㎝, 폭 105㎝, 두께 13㎝이다. 이 비는 현재 전면과 후면의 비문이 심히 마멸되어거의 판독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그러나 전면의 명문(銘文)은《동국여지승람》김제군편 고적조에 실려 있다. 거기에 있는 비문은 벽골제의 크기와 형태, 그리고 태종 15년 벽골제가 중수되기 전까지의 연혁과 중수 당시의 경위 등을 자세히 알려 주고 있다. 한편 이 비의 후면에는 태종조의 벽골제 중수 당시 이 공사에 관계한 사람들의 직책과 성명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전에 있던 비각은 3년전 농부의 벼를 운반하던 트럭에 의해 무너졌는데 금년 봄 새로 비각을 세웠다. |
사찰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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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金山寺)
금산사는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번지, 모악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전라북도 제일을 자랑하는 대가람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년)에 아주 작은 규모로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 경덕왕 21년(762년) 진표율사께서 크게 고쳐 짓고 쇠로 만든 33척의 미륵불상을 모시면서부터 미륵신앙의 근본도장, 그리고 법상종(法相宗)의 본산으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후백제 견훤 왕의 믿음으로 대가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그러다가 고려 문종 33년(1079년) 혜덕왕사(慧德王師)가 주지로 부임하면서 절을 세운 뜻과 전통을 발전시키고자 전체를 대사구(大寺區), 광교원구(廣敎院區), 봉천원구(奉天院區)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고 합리적인 체제를 확립하여 절은 전성기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그 뒤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많은 절들이 왜적들에 의해 불탔지만, 금산 사는 뇌묵, 처영스님을 중심으로 모인 1500여 승병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아무런 재난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6년 뒤인 선조 31년(1598년) 정유재란 당시에는 임진년의 승병활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왜적들에 의해 80여 동의 건물과 40여 암자가 전부 불타버리는 재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선조 34년(1601년)에 이르러 수문대사(守文大師)가 여러 큰 스님들과 함께 절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시작하여 33년만인 인조 13년(1635년)에 오여래(五如來), 육보살(六菩寢)을 모신 대적광전 등 대사구역만 옛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역사를 밑거름으로 금산사는 오늘에 이르렀는데, 최근 주지로 부임한 송월주(宋月珠) 스님도 앞서 말한 큰스님들의 뒤를 이어 절의 규모를 늘리거나 고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1986년 12월 대적광전에 원인 모를 불이 나 전부 타 버렸다. 그러나 1989년부터 다시 짓기 시작하여 1992년 12월 현재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 다시 세워졌으며,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국보 62호 미륵전도 1993년 봄에 보수공사가 완공되어 대가람 금산사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
김제 죽산면 구 일본인 농장사무소
설명 |
일제강점기 도내 일본인 대지주 중 하나인 하시모토〔橋本〕의 농장사무실 건물로써 근대 양식풍건축이다. 외벽 하부는 인조석 붙임을 하였고 상부는 줄눈을 살렸다. 지붕은 곡선진 멘사드형으로 정면과 배면에 각각 2개 씩 도머(Dormer)창을 냈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었다. 지붕은 함석으로 테두리를 둘렀으며 처마 끝에 물받이가 있다. 건물 정면 중앙에 포치(Porch)를 구성하였는데 입구에는 3단의 화강석 계단이 있다. 좌우로 2개씩 수직창이 있으며 창틀은 알루미늄새시로 교체되었다. 동측 면에는 부출입구가 있고 양측 모두 높게 굴뚝이 솟아 있다. 배면부에 실을 덧달아냈으나 외관은 전체적으로 처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06년 하시모토는 군산에 들어왔으며 1911년 동진강 일대의 개간지를 불하받아개간에 착수하여 이듬해 공사를 완공하였다. 이어서 죽산으로 거주지를 이전하였으며 1916년 5월부터 농장경영을 시작하였다. 1931년 3월 김제군 죽산면 죽산리 농장을 변경하여 자본금 50만 원의 법인의 주식회사 교본농장으로 개칭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개간지 120정보를 포함하여 所有地 沓 350정보(町步), 市有地 田 90정보(町步)였으며 소작인은 550명에 달하였다. 1926년 전라북도 내 1,000정보 이상의 대농장은 동양척식주식회사, 교본(하시모토) 농장, 웅본, 아부, 다목, 우근, 석천, 승부, 정목농장 등 9개가 있었다. |
월드컵 답사 코스
설명 |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모두 소실되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을 인용하여 사적기(事蹟記)가 만들어졌는데, 금산사의 창건은 599년(백제 법왕 1)에 왕의 자복(自福)사찰로 세워진 것이라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지금까지 전하는 바는 진표(眞表)가 762년(신라 경덕왕 21)부터 766년(신라 혜공왕 2)까지 4년에 걸쳐 중건(重建)하였으며, 1069년(문종 23) 혜덕왕사(慧德王師)가 대가람(大伽藍)으로 재청하고, 그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이라는 대사구(大寺區)를 증설하여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대도량(大道場)이 되었다. 1598년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미륵전(彌勒殿)·대공전(大恭殿)·광교원(廣敎院) 등과 40여 개소에 달하는 산내 암자(庵子)가 소실되었다. 그러나 1601년(선조 34) 수문(守文)이 재건의 역사(役事)를 벌여 1635년(인조 13)에 낙성을 보았다. 고종(高宗) 때에 이르러 미륵전·대장전(大藏殿)·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보수하고, 1934년에 다시 대적광전·금강문(金剛門)·미륵전 등을 중수하였다. 금산사와 인연이 있는 고승(高僧)은 혜덕왕사(慧德王師) 이외에도 도생승통(道生僧統)·원명(圓明)·진묵(震默)·소요(逍遙)·남악(南嶽) 등 대사가 거쳐 갔거나 죽거나 하였다. 주요 건물로는 미륵전(국보 62)·대적광전(보물 476)·대장전(보물 827)·명부전(冥府殿)·나한전(羅漢殿)·일주문(一柱門)·금강문(金剛門)·보제루(普濟樓) 등과, 방등계단(方等戒壇)·5층석탑(보물 215)·6각다층석탑(보물 27)·석련대(石蓮臺:보물 23)·석종(石鐘:보물 26)·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28)·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보물 24) 등이 있다. |
천연기념물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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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령 마을의 북쪽 끝에 서 있는 느티나무는 수령이 약 540년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는 노거수(老巨樹)로써 1982년 11월 3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거목은 수령 못지않게 그 크기도 웅대하여 높이는 20m, 둘레는 지면으로부터 1m 높이에서 10m, 그리고 나무가 차지하는 면적은 425㎡이다. 이 나무는 지면으로부터 4m 높이에서 4갈래로 가지가 나누어져 있다. 그 중 북서쪽의 가지는 몇 년 전에 어린이들의 불장난으로 불타 없어졌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이 나무와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이 나무의 잎이 푸르고 넓게 피면 그 해에 풍년이 들고 반대로 잎의 모양이 좋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는 이 나무 바로 옆에 속칭 칠성바위로 불리우는 여러 개의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의 높이가 조금만 더 높았더라면 이 마을에서 역적이 날 뻔 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느티나무가 마을을 수호해 주는 당산나무라 하여 정성껏 아끼고 있으며, 매년 음력 정월 초 3일 오시(午時)에 이 나무에 동아줄을 감아 놓고 그해의 평안과 소원 성취를 비는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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